금요니까야모임

열한 가지 청법(聽法)에 대한 규칙

담마다사 이병욱 2024. 6. 15. 13:05

열한 가지 청법(聽法)에 대한 규칙
 
 
이 공부의 끝은 어디인가? 불교는 평생 공부해도 끝이 없는 것 같다. 방대한 팔만사천법문을 보면 알 수 있다.
 
오늘 오랜만에 도올 김용옥 선생의 강연을 들었다. 유튜브로 보았다. 만해 한용운 선생 서거 80주년을 맞이하여 선학원에서 강연한 것이다.
 
도올 선생으로부터 인상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만해스님은 한학의 대가였다는 것이다. 출가하기 전에 한학을 완성한 것이다. 어느 정도인가? 퇴계나 율곡보다 더 깊게 한학을 공부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퇴계나 율곡에 대하여 위대한 한학자로 알고 있다. 그런데 도올 선생에 따르면 퇴계나 율곡 시대에 한학은 오늘날과 달랐다는 것이다. 이를 책의 양으로 설명한다.
 
만해스님은 한학의 대가였다. 이는 책을 많이 읽은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런데 퇴계나 이황 시대의 한학 서적보다 더 많이 읽었다는 것이다. 후대로 가면 갈수록 지식의 양이 늘어남을 알 수 있다.
 
도올 선생은 또 하나 재미 있는 이야기를 했다. 현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지식의 양은 만해 스님이 살던 때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만해스님이 한학의 대가였는데 도올 선생은 만해스님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책을 많이 읽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불교경전은 어떠할까?
 
해인사에 가면 팔만대장경이 있다. 한문으로 되어 있다. 오늘날 번역본도 볼 수 있다. 과연 팔면대장경을 다 읽은 사람은 얼마나 될까?
 
만해스님은 ‘조선불교유신론’을 썼다. 불교에 입문한지 5년만에 쓴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만해 스님은 그 후 4년만에 팔만대장경을 읽고서 요약한 것을 썼는데 그것이 ‘불교대전’이라고 한다. 이렇게 본다면 만해스님은 팔만대장경을 다 읽은 것이 된다.
 
팔만대장경을 다 읽은 스님이 또 있다. 운허스님과 월운스님이라고 한다. 두 스님은 대표적인 학승이다. 이 밖에도 팔만대장경을 읽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니까야를 다 읽은 사람은 얼마나 될까?
 
법은 준비된 자에게 설해야
 
금요니까야모임이 6월 14일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 열렸다. 이날 참석자는 도현스님을 비롯하여 장계영, 방기연, 김기현, 홍광순, 정진영, 정보영, 김희숙 선생이다. 특히 정진영, 정보영, 김희숙 선생은 가족이다. 김희숙 선생이 정진영 선생의 어머니이고, 정보영 선생은 정진영 선생의 누나이다. 늦게 왔지만 이처럼 가족이 함께 오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유월 첫 번째 모임에서는 세 개의 경을 합송했다. 첫 번째 경은 법을 듣는 자의 태도에 대한 것이다. 쌍윳따니까야 ‘베라핫짜니의 경’(S35.133)을 말한다.
 
법은 준비된 자에게 설해야 한다.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 자에게 법을 설하면 효과가 없다. 마치 길거리전도사가 아무나 붙잡고 말하는 것과 같다.
 
지체 높은 바라문여인이 있었다. 바라문녀는 바라문청년을 시켜서 우다인 존자를 보고자 했다. 아마 우다인 존자의 명성을 들어서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바라문녀는 우다인 존자를 공양하고자 했다. 궁금한 것을 묻는 형식으로 가르침을 듣고자 한 것이다.
 
우다인 존자는 바라문녀 집에 도착했다. 바라문녀는 준비한 공양을 손수 올렸다. 공양이 끝나자 바라문녀는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바라문녀는 우다인 존자보다 높은 자리에 앉았다는 것이다. 그것도 머리에 쓸 것을 쓰고 앉았다. 그러면서 “수행자여, 가르침을 설해 주십시오.”(S35.133)라며 청법했다.
 
바라문녀는 상석에 앉고 우다인 존자는 하석에 앉았다. 더구나 머리에는 신분을 나타내는 것을 쓰고 있었다. 우다인 존자는 이런 사태를 파악하자 “자매여, 때가 올 것입니다.”(S35.133)라고 말했다. 그리고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버렸다.
 
우다인 존자는 바라문녀의 청법을 정중하게 거절했다. 바라문녀는 영문을 잘 몰랐던 것 같다.
 
바라문녀는 바라문 청년을 통해서 사태를 파악했다. 청법자의 태도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신발을 신고 높은 자리에 앉아 법을 설해 주기를 요청한 것이다. 그것도 머리에 장식한 것을 쓰고 있었다.
 
바라문녀는 두 번째로 우다인 존자를 공양에 초대했다. 바라문녀는 이번에는 “신발을 벗고 낮은 자리에 앉아 머리를 우러러”(S35.133) 우다인 존자에게 질문했다. 이번에는 태도를 바꾼 것이다.
 
법은 청해야 설하는 것이다. 청하지도 않았는데 법을 설할 수 없다. 청법할 때는 태도를 갖추어야 한다. 법을 들을 수 있는 태도가 되어 있지 않은 자에게는 법을 설할 수 없다. 바라문녀처럼 신발을 신은 상태에서 높은 자리에 앉아 내려다 보며 질문하는 식으로 법을 청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열한 가지 청법(聽法)에 대한 규칙
 
율장에 청법(聽法)에 대한 규칙이 있다. 율장 부기에 ‘설법에 대한 학습계율 (dhammadesanāsamuṭṭhāna)’ 열한 가지 사항이 이에 해당된다.
 
 
“1)손에 일산을 든 자에게(Sekh. 57),
마찬가지로
2)손에 지팡이를 든 자에게(Sekh. 58),
3)칼을 든 자에게(Sekh. 59),
4)무기를 든 자에게(Sekh. 60),
여래는 가르침을 설하지 않는다.
5)신발을 신은 자에게(Sekh. 61),
6)샌들을 신은 자에게(Sekh. 62),
7)탈 것을 탄 자에게(Sekh. 63),
8)침상 위에 있는 자에게(Sekh. 64),
9)빈둥거리는 자세를 한 자에게(Sekh. 65),
10)터번을 두른 자에게(Sekh. 66),
11)복면을 한 자에게(Sekh. 67),
열한 가지 경우 빠짐이 없이 가르침을 설하지 않는다.”(율장 부기, 3장)
 

 

 
바라문녀는 세 가지를 어겼다. 신발을 신은 것, 높은 의지에 앉은 것, 머리에 무엇인가 쓴 것을 말한다. 이는 율장에서 “5)신발을 신은 자에게(Sekh. 61)”, 8)”침상 위에 있는 자에게(Sekh. 64)”, 그리고 “10)터번을 두른 자에게(Sekh. 66)”가 이에 해당된다.
 
조건발생하는 것은 모두 괴로운 것
 
바라문녀는 평소 궁금한 것이 많았던 것 같다. 바라문녀는 “존자여, 거룩한 님들은 무엇이 있을 때에 즐거움과 괴로움이 있다고 말씀하시며, 거룩한 님들은 무엇이 없을 때에 즐거움과 괴로움이 없다고 말씀하십니까?”(S35.133)라며 물어 보았다.
 
바라문녀는 지체 높은 신분이었다. 더구나 식견이 높았다. 바라문 청년을 제자로 둘 정도였다. 그런데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은 삶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즐거움과 괴로움에 대한 것이다. 이에 우다인 존자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자매여, 거룩한 님들은 시각이 있을 때에 즐거움과 괴로움이 있다고 말하며, 거룩한 님들은 시각이 없을 때에 즐거움과 괴로움이 없다고 말합니다.” (S35.133)
 
 
우다인 존자는 여섯 감역 중에서 시각에 대해서 말했다. 나머지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정신에 대한 것도 똑같다.
 
 
시각이 있을 때 고락이 있고 시각이 없을 때 고락은 없다고 했다. 이 말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러나 이 경만 보아서는 알 수 없다. 관련 경을 읽어 보아야 한다.
 
부처님은 팔만사천법문을 설했다. 정확하게는 팔만이천법문이다. 나머지 이천법문은 제자들이 설했다. 그런데 팔만사천법문을 다 읽어 본다면 우다인 존자가 말하는 것이 이해 될 것이다. 아니 육처에 대한 것만 읽어도 알게 될 것이다. 금요니까야 모임에서 두 번째로 합송한 경에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있다.
 
 
"시각은 괴로운 것이다. 세존 아래서 청정한 삶을 사는 것은 그것을 완전히 알기 위한 것이다. 형상은 괴로운 것이다. 세존 아래서 청정한 삶을 사는 것은 그것을 완전히 알기 위한 것이다. 시각의식은 괴로운 것이다. 세존 아래서 청정한 삶을 사는 것은 그것을 완전히 알기 위한 것이다. 시각접촉은 괴로운 것이다. 세존 아래서 청정한 삶을 사는 것은 그것을 완전히 알기 위한 것이다. 시각 접촉을 조건으로 생겨나는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은 괴로운 것이다. 세존 아래서 청정한 삶을 사는 것은 그것을 완전히 알기 위한 것이다.”(S35.152)
 
 
부처님은 어떤 느낌이든지 괴로운 것이라고 했다. 이는 일체개고를 말한다. 일체개고라면 당연히 즐거운 느낌도 괴로운 것이 되어야 한다.
 
세상사람들은 대부분 감각을 즐긴다. 눈과 귀 등으로 오욕락을 즐기는 것이 이에 해당된다. 그런데 감각을 즐기는 것을 행복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감각을 즐기는 것이 괴로움이라고 했다. 왜 그런가? 오래 지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변화함을 말한다.
 
어느 것도 가만 있지 않는다. 저 바위산은 늘 그대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영원한 것은 아니다. 여섯 감역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시시각각 변하기 마련이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시각 접촉을 조건으로 생겨나는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S35.152)이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것은 다름아닌 조건발생이다.
 
눈으로 형상을 본다. 형상을 보는 순간 눈의 감성물질도 변하고 대상도 변한다. 또한 의식도 변한다. 이는 조건에 따라 발생하는 것이다.
 
조건에 따라 발생하는 것은 조건이 다하면 사라진다. 즐거운 느낌 역시 조건발생한 것이다. 즐거운 느낌이 사라졌을 때 불만족이 일어난다. 이런 불만족도 괴로움의 범주에 들어간다. “모든 느낌은 괴로움이다.”라고 하는 것이 맞는 것이다. 일체개고인 것이다. 조건발생하는 것은 모두 괴로운 것이다.
 
삶이 괴로울 수밖에 없는 것은
 
바라문녀는 우다인 존자의 설법을 듣고 크게 깨달은 것 같다. 이는 바라문녀가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듯,…”으로 시작되는 귀의문을 말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바라문녀는 고락에 대한 문제가 해결되었다. 설법 한마디에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일체의 느낌이 괴로운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전재성 선생은 “일체개고를 알면 윤회를 끊어 버리게 됩니다.”라고 말했다.
 
일체개고를 알면 윤회가 끊어진 자가 된다. 이는 모든 것이 괴롭다는 사실을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조금이라도 즐거움을 추구한다면 윤회를 끊을 수 없음을 말한다.
 
모든 것이 괴로운 것이라면 존재 자체도 괴로운 것이 된다. 이는 괴로움이 구족되었음을 말한다.
 
괴로움은 태어날 때부터 갖추어진 것이다. 왜 그런가? 나는 오취온적 존재, 즉 오온에 집착된 존재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존재자체는 괴로운 것이고, 삶은 괴로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아니라
 
금요니까야모임 시간에는 여러 가지 의견이 오간다. 전재성 선생은 사부니까야를 번역했고 수많은 율서와 논서를 번역했다. 아마 한국에서 빠알리삼장을 가장 많이 아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전재성 선생은 금요니까야모임 시간에 경전읽기의 중요성에 대하여 말했다. 전재성 선생은 “경전을 보지 않으면 미세한 번뇌를 없앨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한 예로서 보림하는 것을 들었다.
 
선사가 깨달음을 이루면 보림에 들어간다. 경허선사도 깨닫고 난 다음에 천장사에서 보림기간을 가졌다. 이때 책을 본다고 했다. 그것은 선사의 어록일 수도 있고 경전일 수도 있다.
 
경전을 읽으면 앎이 풍부해진다. 경전을 읽으면 부처님이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알 수 있다. 경전을 보지 않고 수행만 한다면 잘못된 길로 갈 수 있다.
 
어떤 이는 경전 보는 것에 대하여 비판한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정도로 보는 것이다. 이런 마음을 가졌을 때 많은 것을 놓치게 된다. 경전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아니라 달 그 자체가 될 수 있음을 말한다.
 
경전 읽은 자에게 자만이 생겨날 때
 
수많은 경전을 읽었다. 시중에 번역되어 나온 빠알리 경전은 거의 다 읽었다. 경전 읽기로 말한다면 옛날 수행자들보다 더 많이 읽었을지 모른다.
 
빠알리경전은 번역된지 오래 되지 않았다. 1999년부터 번역본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25년이 지난 현재 사부니까야는 다 번역되었다. 쿳다까니까야 계열도 대부분 번역되었다. 이를 모두 다 읽어 보았다.
 
도올 선생에 따르면 오늘날 사람들은 옛날 사람들 보다 책을 더 많이 읽는다고 한다. 옛날 조선시대 때는 책이 그다지 많지 않았지만 요즘에는 읽어야 할 책이 많아서 조선시대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퇴계나 율곡 보다는 만해스님이 더 많이 읽었고, 만해스님보다는 도올선생이 더 많이 읽었다고 말한다.
 
책을 많이 읽었다고 해서 지혜가 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읽지 않은 것보다는 휠씬 나은 것이다. 경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경전을 접하면 접할수록 인식의 지평이 넓어진다. 팔만사천이나 되는 부처님 가르침을 접하면 부처님 그분이 어떤 분인지 알 수 있을 것 같고, 부처님 그분이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것도 자만일 것이다.
 
하루도 경전을 읽지 않으면 마음이 더러워지는 것 같다. 하루 이틀, 한해 두 해 읽다 보니 십년 이상 읽었다. 요즘에는 머리맡에 두고 매일 읽는다. 그러다 보니 팔만사천법문을 거의 다 읽은 것 같다. 이에 따라 경전 읽은 자에게 자만도 생겨나는 것 같다. 이런 것도 죄가 되는 것일까?
 
 
2024-06-15
담다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