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니까야모임

세속적 지식이 진리가 될 수 없는 이유

담마다사 이병욱 2024. 6. 28. 12:45

세속적 지식이 진리가 될 수 없는 이유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글 쓸 시간이 없는 것이다. 일감이 있어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때 글 쓸 시간이 없다. 최근 며칠간의 상황이 그렇다.

 

밭을 갈 때 호미를 든다. 너른 밭을 한땀한땀 매야 한다. 요령이 있을 수 없다. 시간과의 싸움이다. 일을 마치는데 있어서 절대적인 시간을 필요로 한다. 인쇄회로기판(PCB) 설계작업 하는 것도 다름이 아니다.

 

무려 이십모델을 라우팅해야 한다. 이미 일주일전부터 일은 진행되어 왔다. 이제는 파이널 작업이다. 마라톤선수가 막판에 스퍼트하듯이 임해야 한다. 백권당에 오자마자 내달렸다.

 

밭을 맬 때 쉬는 시간도 있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오십분 일하고 십분 쉬는 것이다. 설계작업 할 때도 휴식을 가져야 한다. 무리하게 사용하면 몸이 고장 날 수 있다.

 

어느 정도 한숨 돌렸다. 마무리 작업만 하면 된다. 이럴 때 잠시 시간이 난다. 이 시간에 무엇을 해야 할까? 당연히 글을 쓰는 것이다.

 

어제 글을 올리지 못했다. 일하느라 너무 바빴다. 지치기도 했다. 주로 글은 아침에 쓰는데 아침부터 일을 한 것이다. 마치 밭 매는 자가 뙤약볕 나는 낮을 피해 선선한 새벽이나 이른 아침에 일을 하는 것과 같다.

 

글을 쓸 때는 미리 주제를 생각해 둔다. 주제가 정해지면 씨나리오도 따라 온다. 주로 경전을 근거로 하는 글쓰기를 말한다.

 

의무적으로 써야 하는 것이 있다. 금요니까야모임에 대한 글은 의무적이다. 왜 그런가? 일년이 지나면 책을 내야 하기 때문이다. 책이 되려면 최소한 서른 개 가량의 글이 있어야 한다.

 

이곳저곳에 경전공부모임이 있는데

 

유월 첫 번째 니까야모임이 614일 금요일에 열렸다. 여러 개의 경을 합송했다. 그 중에 학문적 지식과 종교적 지혜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제목의 경이다. 지식과 지혜가 어떻게 다른지에 대한 가르침이다.

 

경의 제목은 이치는 있는가의 경(Atthinukhopariyāya Sutta)’(S35.153)이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방법이 있는가 경이라고 제목을 달았다. 빅쿠보디의 영역에서는 ‘Is There a Method?’라고 제목을 붙였다. 어떤 내용일까?

 

요즘 이곳저곳에서 경전공부 모임을 본다. 특히 니까야경전읽기 모임이다. 뜻이 맞는 사람들이 서로 모여서 경전을 읽고 토론하는 방식이다. 가장 많이 채택 되는 경전은 아마도 맛지마니까야가 아닐까 생각한다.

 

밴드에서 어떤 경전모임에 대한 글을 접했다. 맛지마니까야 독송모임이다. 두 번 읽었다고 한다. 1회독에 2년 걸렸고, 2회독에 1년 반 결려서 3년에 걸쳐서 읽었다고 말한다.

 

경전을 읽을 때 스승이 있으면 좋을 것이다. 경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있는 자가 이끌어 준다면 여러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곳이다. 그러나 단지 읽는 것으로 그친다면 수박 겉핥기식이 될 수 있다.

 

전재성 선생의 니까야모임은 저자직강과 같은 것

 

금요니까야모임에서는 한달에 두 번 니까야모임을 갖는다. 경을 읽고 설명을 듣고 토론하는 방식이다. 단지 독송하며 진도나가는 방식이 아니다. 먼저 경험한 자의 말을 들어 보는 것이 가장 크다.

 

금요니까야모임은 전재성 선생이 이끈다. 니까야번역자이기 때문에 경전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다. 경에 대한 해설과 설명을 듣는 것만으로도 모임에 참여하는 가치를 느낀다.

 

고교시절 학원에 다녔다. 여유 있는 학생들은 과외를 했는데 그럴 형편이 되지 못했다. 종로2가에 있는 학원에서 영어, 수학, 물리, 화학 등 부족한 과목을 들었다. 그런데 학원에는 저자직강도 있다는 것이다. 물리과목이 그랬다.

 

저자가 직강하면 신뢰가 있다. 책을 지은 저자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다 알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때 고교 2학년 겨울 방학 때 물리과목에 대한 저자직강을 들었다. 그 결과 물리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졌다.

 

학원 다닐 때 명강사들이 있었다. 관철동 시사영어학원에서 수학의 정석II’을 가르쳤던 그 선생도 명강사였다. 키가 크고 깡마른 선생의 교실에는 백명이상이 들었다.

 

고교시절 공부를 잘 하지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미션스쿨에서 적응이 되지 않은 것이다. 일학년 때 하위권을 맴돌았다. 반에 육십명 있었는데 오십등 대에 해당된 것이다.

 

이학년 올라 갔을 때 열반에 떨어졌다. 두 달 후에 우열반은 없어졌다. 입시가 코 앞으로 다가왔다. 공부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학년 겨울방학 때 독한 마음을 먹었다. 과외는 꿈도 꾸지 못했으므로 종로에 있는 학원으로 향했다.

 

공부도 전환점이 있다. 2 겨울방학 두 달 동안 키다리선생으로부터 수학의 정석II’를 들은 것이 결정적이다. 낮에는 강의를 듣고 저녁에는 동네 독서실에서 복습했다. 자정 가까이 귀가 하는 나날이 되었다.

 

무엇이든지 정신을 집중하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다. 마치 운동선수가 동계훈련에서 부쩍 성장하듯이, 2 겨울방학 두 달 죽기살기로 공부한 것이 효과가 있었다.

 

3이 되었을 때 반에서 4등한 적이 있다. 그때 담임이 따로 불로 물었다. 혹시 과외 한 것이 아닌지 물은 것이다. 담임은 생물선생으로서 과외를 지도하고 있었다.

 

일학년 때 50등대의 학생이 3학년 때 10등 때가 되었다. 일학년 때 종교가 맞지 않아서 방황 했었다. 불교중학교에서 기독교고등학교 다닌 것이 문제가 되었다. 그때 어떻게 하면 학교를 탈출할 수 있을까?’라고 고민 했었다. 전학을 생각했었으나 마음속으로만 그쳤다.

 

공부를 잘 하려면 선생을 잘 만나야 한다. 고교시절 학원 다녔기 때문에 선생을 찾아 다녔다. 물리는 저자직강을 들어 기반을 다졌다. 수학은 가장 잘 가르친다는 선생을 찾아서 들었다. 수학과 물리 문제가 해결되니 다른 것은 자동적으로 따라 오는 것 같았다.

 

여러 경전공부모임이 있다. 삼삼오오 모여서 경전을 독송하고 토론하는 모습은 좋은 것이다. 더 좋은 것은 경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있는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이다. 저자와 함께 하면 금상첨화인 것이다.

 

전재성 선생의 니까야모임에 참여한지 만 칠 년 되었다. 저자로부터 직접 듣는 저저자직강과 같은 것이다. 더구나 전재성 선생은 또 다른 그룹의 모임에 참여 하기도 한다. 정신과 전문의 모임이 이에 해당된다. 그곳에서 토론 된 것을 들려 주기도 한다.

 

아라한선언하는 것은

 

사람들은 주로 들어서 알고 있다. 남들에게 들은 지식이나 정보는 얼마나 믿을 수 있을까? 또한 나에게 얼마나 이익이 될 수 있을까? 그래서일까 경에서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다.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이 믿음이나 취향이나 전승이나 상태에 대한 분석이나 견해에 대한 이해와 별도로태어남은 부서졌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고, 해야 할 일은 다 마쳤으니, 더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는 궁극적인 앎을 설명할 수 있는 이치가 있는가?”(S35.153)

 

 

경에 아라한선언이 있다. 이는 태어남은 부서졌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고, 해야 할 일은 다 마쳤으니, 더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고 스스로 선언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스스로 선언하는 것은 공부가 다되었음을 말한다. 더 이상 배울 것도 없고 더 이상 닦을 것도 없는 상태이다.

 

아라한이 되려면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해야 한다.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여 청정한 삶을 살아야 아라한선언을 할 수 있다.

 

아라한선언은 깨달음선언과 같다. 깨달음에 대하여 누군가가 인가해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아는 것이다. 마치 자신에게 남아 있는 번뇌가 얼마나 되는지 스스로 아는 것과 같다.

 

세상의 지식 다섯 가지

 

아라한선언은 세상의 지식이나 상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경에서는 믿음이나 취향이나 전승이나 상태에 대한 분석이나 견해에 대한 이해와 별도로아라한 선언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여기서 믿음, 취향, 전승, 상태에 대한 분석, 견해에 대한 이해는 어떤 것일까?

 

전재성 선생은 믿음, 취향, 전승, 상태에 대한 분석, 견해에 대한 이해에 대하여 세상의 지식이라고 말했다.

 

오늘날 유튜브에는 없는 것이 없을 정도이다. 검색창에 키워드만 넣으면 원하는 지식을 얻을 수 있다. 그렇다면 세상의 지식은 깨달음에 도움이 될까?

 

지식을 접하면 믿음이 생긴다. 그런데 전재성 선생은 믿음에 대하여 타자의 믿음에서 지식을 받아 들인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또한 지식을 접하면 만족하게 된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만족은 개인적인 선호에 대한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매일 유튜브를 본다. 그런데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는 사실이다. 이는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보고 좋아하는 것만 보는 것과 같다. 그런데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것에 대하여 진리라고 우기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경전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앙굿따라니까야에 깔라마의 경’(A3.65)이 있다. 경에서는 소문이나 전승이나 여론에 끄달리지 말고, 성전의 권위나 논리나 추론에도 끄달리지 말고, 상태에 대한 분석이나 견해에 대한 이해에도 끄달리지 말라.”(A3.65)라고 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말은 성전이다. 이를 불교경전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때 성전은 바라문교 성전이나 외도의 성전을 말한다.

 

깔라마경에서 성전의 권위에 끄달리지 말라고 했다. 이를 확대해석해서 부처님 가르침이 실려 있는 니까야를 부정하는 사람이 있다. 빈데 잡자고 초가삼간 태우는 격이다.

 

깔라마경을 보면 “ ‘이 수행자가 나의 스승이다.’라는 생각에 끄달리지 마십시오.”라는 가르침이 있다. 어떤 이는 이 구절을 확대해서 부처님 말씀이라도 믿지 말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마치 부처님은 한말씀도 하지 않았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깨달은 자가 말하면 진리가 된다. 깨달은 자는 진리만 설한다. 깨닫지 못한 범부의 말은 진리가 될 수 없다. 세상의 지식은 진리가 될 수 없다. 외도의 성전 역시 진리의 말씀이 될 수 없다.

 

부처님은 깨달은 그날부터 열반에 이르기 까지 팔만사천법문을 설했다. 이런 법문은 경, 응송, 게송 등 구분교로 오늘날까지 전승되어 오고 있다.

 

구분교의 가르침은 진리이다. 왜 그런가? 깨달은 자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깨달은 자가 말한 것은 진리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성전의 권위에 끄달리지 말라는 말을 니까야에도 적용하여 니까야에 대하여 단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정도로 본다면 경솔한 것이다. 또한 부처님의 진실한 가르침은 오로지 스승에서 제자에게 마음과 뜻으로만 전달되는 것이라 하여 부처님은 한말씀도 하지 않았다.”라고 말하는 것도 경솔한 것이다.

 

경에서는 믿음, 취향, 전승, 상태에 대한 분석, 견해에 대한 이해”(S35.153)에 대한 말이 나온다. 이런 말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조목조목 설명했다.

 

부처님 당시에도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이

 

전재성 선생은 상태에 대한 분석(ākāraparivitakkā)에 대해서는 오늘날 자연과학과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견해에 대한 이해(diṭṭhinijjhānakkhanti)에 대해서는 오늘날 사회과학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참으로 탁월한 분석이다.

 

오늘날 물질문명은 고도로 발달했다. 스마트폰 시대에 경전을 보고 있다. 그것도 수천년된 것이다. 이런 것에 대하여 어떤 이는 낡고 오래되고 케케묵은 것을 보고 있다고 말할지 모른다.

 

한때 경전에 대한 오해가 있었다. 물질문명시대에 경전은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사십대 중반에 불교에 입문하고 나서 생각이 바뀌었다. 특히 초기불교를 접하고 결정적으로 바뀌었다. 빠알리삼장에 진리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불변의 진리이다.

 

물질문명을 살고 있는 사람들은 옛날에 살았던 사람들을 원시인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이는 단순히 물질문명의 기준으로 비교한 것이다. 그러나 정신문명은 다르다. 정신문명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하여 무상정등각이라고 한다. 위없는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이라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 깨달음을 말한다. 정신문명의 절정이자 최고봉을 말한다. 오늘날 물질문명 기준으로 본다면 컴퓨터시대 이상인 것이다.

 

니까야에는 부처님 가르침이 실려 있다. 이는 정신문명의 진수에 대한 것이다. 정신문명의 극한에 대한 것이다. 물질문명이 아무리 발달해도 부처님의 깨달음 이상의 정신문명은 없다. 부처님 당시에 이미 정신문명은 절정에 이르렀다.

 

부처님은 오늘날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에 대한 세상의 지식을 말했다. 이에 대하여 상태에 대한 분석(ākāraparivitakkā)견해에 대한 이해(diṭṭhinijjhānakkhanti)으로 설명했다.

 

경에서상태에 대한 분석(ākāraparivitakkā)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전재성선생은 자연과학적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했다. 마치 현미경으로 들여다 보는 것처럼 물질을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오늘날 물리학, 화학, 생물학 등 자연과학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 상태를 고찰하여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면 진리로 받아 들인다.

 

경에서 견해에 대한 이해(diṭṭhinijjhānakkhanti)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전재성 선생은 이에 대하여 오늘날 사회과학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이는 아마도 견해를 뜻하는 딧티(diṭṭhi)라는 말이 들어갔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주의 등 온갖 견해가 이에 해당된다. 그래서 갖가지 견해에 대하여 시유하고 이해하고 난 다음에 진리로 받아 들인다.

 

과학적 사고방식에 지배당한 현대인

 

오늘날 사람들은 자신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믿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어떤 이는 나는 내 눈에 보이는 것만 믿습니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과학적 사고방식에 지배 당했기 때문이다.

 

자연과학은 물질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물질을 쪼개고 또 쪼개서 궁극을 보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물질에 한정된다. 그럼에도 이를 확대 해석하여 과학적으로 검증된 것만 진리라고 여긴다면 낭패 보기 쉽다. 왜 그런가? 새로운 과학적 사실이 나올 때마다 이전의 이론은 깨지기 때문이다.

 

인문과학은 정말 진리일까? 마르크스의 이론은 오늘날에도 통용될까? 자본주의는 영원히 지속될까?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그럴싸한 이론을 만들어 놓아도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이것만이 진리이다. 다른 것은 모두 거짓이다.”라는 견해가 있다면 이는 진실된 것은 아니다.

 

다섯 가지 세속적 지식도 출세간의 도에 도움이 된다면

 

부처님은 다섯 가지 세속적 지식에 대하여 말했다. 그것은 “1)믿음(saddhā), 2)취향(ruci), 3)전승(anussavā), 4)상태에 대한 분석(ākāraparivitakkā), 5)견해에 대한 이해(diṭṭhinijjhānakkhanti)”(S35.153)를 말한다. 전재성 선생은 이 다섯 가지에 대하여 세상의 진리는 이 다섯 가지 외에 다른 것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세속적 진리는 이 다섯 가지 범주 안에 모두 들어가는 것임을 말한다.

 

진리에는 세간의 진리도 있고 출세간의 진리도 있다. 세상사람들에게 통용되는 진리는 1)믿음), 2)취향, 3)전승, 4)상태에 대한 분석(자연과학), 5)견해에 대한 이해(사회과학)가 된다. 왜 이런 것이 세속의 진리가 될까? 이는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1) 믿음(saddhā: )은 타자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 어떤 것이 진리라 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2) 취향(ruci: ) 개인적인 선호에 의해서 진리라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3) 전승(anussavā: )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들은 것을 진리라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4) 상태에 대한 분석(ākāraparivitakkā: 行覺想)은 고찰하여 합리적이라고 생각하여 진리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5) 견해에 대한 이해(diṭṭhinijjhānakkhanti: 見審諦忍)는 사유하여 이해한 뒤에 진리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다섯 가지 세속적 진리는 불필요한 것일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진리의 길을 가는데 있어서 필요한 것이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 밧디야의 경’(A4.193)에서 부처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으로 확인 된다.

 

 

밧디아여, 그래서 소문을 들었다든가, 전승되어 왔다든가. 여론이 그렇다든가, 성전의 권위라든가, 추론에 의한 근거가 있다든가 논리적인 귀결이라든가 형상에 대한 분석이라든가 견해에 대한 이해라든가 유력한 사람의 말이라든가 이 수행자가 우리의 스승이라는 것 때문에 그것을 따르지 마십시오. 그러나 밧디야여 그대가 스스로 이와 같이이것들은 착하고 건전한 것이고, 이것들은 비난 받을 수 없는 것이고, 이것들은 식자에게 책망 받을 만한 것이 없고, 이것들은 착수되고 실천되면 이익과 행복으로 이끈다.’라고 알게 되면, 밧디야여, 그것을 성취해야 합니다.”(A4.193)

 

 

참으로 놀라운 가르침이다. 부처님은 세속적 진리도 인정한 것이다. 출세간을 추구한다고 하여 세간적 지식이나 진리를 모두 멀리 하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다만 조건이 있다. 그것은 꾸살라담마(善法), 즉 착하고 건전한 것이야 한다.

 

세상에는 갖가지 믿음이 있고, 갖가지 취향이 있고, 갖가지 전승이 있다. 또한 세상에는 갖가지 자연과학의 성과물이 있고, 갖가지 인문과학적 견해가 있다. 이들 모두가 선법은 아니다. 불선한 것도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출세간의 진리를 추구하는데 있어서 도움이 되는 선법이라면 받아 들여야 한다.

 

다섯 가지 세속적 진리를 받아 들이는 데는 조건이 있다. 이는 부처님이 이것들은 착하고 건전한 것이고, 이것들은 비난 받을 수 없는 것이고, 이것들은 식자에게 책망 받을 만한 것이 없고, 이것들은 착수되고 실천되면 이익과 행복으로 이끈다.”라고 알게 되면 성취해야 된다고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부처님 가르침의 유연성

 

오늘날 물질문명은 극도로 발달되어 있다. 부처님 당시와 비할 바가 아니다. 그런데 어디까지 발전할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물질문명이 발달하면 할수록 정신문명도 따라서 발달하는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물질과 정신은 다른 것이다. 아무리 물질문명이 발달해도 물질에 대한 것을 탐구 하는데 그친다. 정신영역은 다른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이미 정신영역에서 최고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이는 최상의 깨달음으로 설명된다. 무상정등각이다.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이미 부처님 당시에 정신문명은 최고조에 달한 것이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물질문명의 발달과 무관한 것이다. 아무리 물질문명이 발달해도 무상, , 무아의 원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는 연기법 내에 있음을 말한다. 그럼에도 세속의 진리는 배워야 한다. 그것이 착하고 건전한 것이고, 비난 받을 수 없는 것이고, 실천하면 이익과 행복이 되는 것이라면 세속적 진리로서 받아 들여야 한다. 부처님의 유연성을 보게 된다.

 

세속적 진리의 한계

 

세속적 진리는 한계가 있다. 어느 것도 연기법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어떤 것도 무상, , 무아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바라드와자여, 이와 같은 다섯 가지의 현상은 지금 여기에서 두 종류의 과보를 갖습니다. 바라드와자여, 잘 믿어지더라도 그것이 공허한 것, 거짓된 것, 허망한 것이 되기도 하고, 잘 믿어지지 않더라도 그것이 실재하는 것, 사실인 것, 진실한 것이 되기도 합니다. 바라드와자여, 아주 만족스럽더라도 그것이 공허한 것, 거짓된 것, 허망한 것이 되기도 하고, 아주 만족스럽지 않더라도 그것이 실재하는 것, 사실인 것, 진실한 것이 되기도 합니다. 바라드와자여, 잘 전승되더라도 그것이 공허한 것, 거짓된 것, 허망한 것이 되기도 하고, 잘 전승되지 않더라도 그것이 실재하는 것, 사실인 것, 진실한 것이 되기도 합니다. 바라드와자여, 잘 형상이 분별되더라도 그것이 공허한 것, 거짓된 것, 허망한 것이 되기도 하고, 잘 형상이 분별되지 않더라도 그것이 실재하는 것, 사실인 것, 진실한 것이 되기도 합니다. 바라드와자여, 견해가 잘 이해되더라도 그것이 공허한 것, 거짓된 것, 허망한 것이 되기도 하고, 견해가 잘 이해되지 않더라도 그것이 실재하는 것, 사실인 것, 진실한 것이 되기도 합니다. 바라드와자여, 진리를 수호하는 현자라면, ‘이것은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M95)

 

 

세속적 지식에는 1)믿음), 2)취향, 3)전승, 4)상태에 대한 분석(자연과학), 5)견해에 대한 이해(사회과학)가 있다. 이런 세속적 지식은 세속적 진리가 되기 쉽다. 그런데 어떤 때는 진리가 되기도 하지만 또 어떤 때는 진리가 되지 않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런 것을 진리라고 할 수 있을까?

 

진리는 어떤 경우에도 변함 없어야 한다. 전자공학에 디지털논리가 있다. 투르스테이블이라 불리우는 진리표를 보면 인풋(입력)에 둘 다 일(1)이 되어야 한다. 하나라도 제로(0)가 되면 출력은 제로가 된다. 진리가 아닌 것이다.

 

 

세속적 진리는 때에 따라 진리이기도 하고 때에 따라 진리가 아니기도 하다. 이를 트루스테이블에 넣으면 아웃풋(출력)이 제로가 되기 때문에 진리가 아닌 것이 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자신의 성과물에 대하여 이것만이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말한다. 부처님 당시 외도의 견해도 그랬다.

 

오늘날 사람들은 과학을 믿는다. 과학이 종교가 되는 세상이 된 듯 하다. 과학자들이 말하면 믿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과학이 발달하면 뒤집히는 경우는 많다. 빅뱅이론도 어떻게 될지 모른다.

 

부처님은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한계를 이미 이천오백년 전에 꿰뚫어 보았다. 그래서 자연과학에 해당되는 상태에 대한 분석 (ākāraparivitakkā)’에 대하여 바라드와자여, 잘 형상이 분별되더라도 그것이 공허한 것, 거짓된 것, 허망한 것이 되기도 하고, 잘 형상이 분별되지 않더라도 그것이 실재하는 것, 사실인 것, 진실한 것이 되기도 합니다.”(M95)라고 말했다.

 

때에 따라 진리가 되기도 하고, 때에 따라 진리가 되지 않는다면 이것은 진리가 아니다. 인문과학에 해당되는 견해에 대한 이해(diṭṭhinijjhānakkhanti)’도 예외가 아니다. 예를 들어, 경제학 이론이 어느 경우에는 적용 되고 어느 경우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면 진리로 볼 수 없다.

 

세속적 지식이 진리가 될 수 없는 이유

 

여기 어떤 믿음이 있다. 많이 믿는 다고 하여 진리라고 볼 수 있을까? 많이 믿는 종교가 진리의 종교라고 할 수 있을까? 어떤 경우에는 들어 맞고 어떤 경우에는 들어 맞지 않는 다면 진리라고 볼 수 없다.

 

여기 전승된 성전이 있다. 어떤 경우에는 들어 맞는다. 그러나 현재의 과학의 시대에는 들어 맞지 않는다. 이런 것도 진리의 말씀이라 할 수 있을까? 투르스테이블에 넣으면 제로가 되어 진리가 아닌 것이 된다.

 

세속적 지식은 진리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진실된 것인가?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수행승이여, 시각으로 형상을 보고, 안으로 탐욕과 성 냄과 어리석음이 있으면, ‘내 안에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있다.’ 고 분명히 알고, 안으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없으면, ‘내 안에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없다.’라고 분명히 안다.”(S35.153)라고 했다. 이것이 출세간의 진리이다. 이렇게 분명하게 알았을 때 청정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출세간의 진리는 있는 그대로 알고 보는 것이다. 여섯 감역도 있는 그대로 알고 보면 개념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는 세속적 지식, 세속적 진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과 같다. 여기에 연기법이 있다.

 

세속적 진리 중에 견해가 있다. 영원주의나 허무주의 같은 것이다. 이런 견해는 일부는 맞고 일부는 맞지 않다. 그래서 진리가 아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설한 연기법은 항상 맞다. 어느 경우에도 맞지 않는 경우는 없다. 그래서 진리가 된다. 이는 부처님의 제자 싸빗타가와 무씰라가 문답하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싸빗타가 무씰라에게 물었다. 싸빗타는 벗이여 무씰라여, 믿음이나 취향이나 전승이나 상태에 대한 분석이나 견해에 대한 이해와는 별도로, 이와 같이 존자 무씰라는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난다.’는 체험적인 지혜를 갖고 있습니까?”(S12.68)라고 물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이 있다. 이는 체험적 지혜이다.

 

부처님 가르침은 이론이 아니다. 체험해서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론적으로 알고 있으면 지식이 되지만 체험해서 알고 있으면 지혜가 된다. 그렇다면 믿음이나 취향이나 전승이나 상태에 대한 분석이나 견해에 대한 이해와 같은 세속적 지식은 체험으로 알 수 있는 것일까?

 

과학자는 빅뱅을 주장한다. 그러나 들어서 알고 있는 것이다. 체험 한 것은 아니다. 체험하지 못한 것은 진리가 될 수 없다.

 

연기법은 체험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체험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실재하기 때문이다. 어떤 실재인가? 생멸하는 실재를 말한다, 생멸하기 때문에 무상, , 무아의 특성이 있다.

 

세속적 지식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왜 그런가? 언어적 형성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언어적 개념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생멸할 수가 없다, 생멸이 없어서 실재하지 않는 것이다. 세속적 지식이 진리가 될 수 없는 이유에 해당된다.

 

 

오늘도 장문의 글을

 

오늘도 장문의 글을 썼다. 금요니까야모임에 참여하여 후기를 남기는 것도 보람이다. 이런 글이 차곡차곡 모이면 책이 된다. 연말에 책을 만들어 전재성 선생과 도현스님에게 드리려고 한다. 오늘 유월 두 번째 금요니까야모임 있는 날이다.

 

 

2024-06-28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