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린다팡하 교정 대장정을 마치고
밀린다팡하 교정 대장정을 마쳤다. 지난 4월 26일 금요니까야 모임에서 전재성 선생으로부터 교정본을 받은 이래 한달 보름 만에 완주한 것이다.
마치 신대륙을 발견한 것 같다. 새로운 경전을 교정 볼 때 그런 느낌이 들었다. 2017년 테라가타 교정작업 할 때도 그랬고 2018년 테리가타 교정할 때도 그랬다. 이후 청정도론, 자타카 교정작업 참여할 때도 신대륙을 탐험하는 것 같았다.
매일 경전을 읽는다. 초기경전을 말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니까야를 읽는 것이다. 니까야는 부처님의 원음이라 불리운다.
사부니까야를 모두 읽어 보기로 마음 먹었다. 맛지마니까야부터 읽었다. 일년이 넘게 걸렸다. 머리맡에 두고 읽은 것이다. 이후 디가니까야를 거의 일년 걸려서 읽었다.
경전을 읽을 때는 새기며 읽는다. 그러다 보니 소설 읽듯이 읽을 수 없다. 하루에 고작 서너페이지에 지나지 않는다. 하루에 한 개 내지 두 개 경 읽는 것이 고작이다. 새기며 읽기 때문에 진도를 빨리 나갈 수 없다.
사부니까야는 거의 읽은 것이나 다름 없다. 맛지마와 디가를 읽은 다음에 쌍윳따에 도전했다. 육개월 이상 읽었다. 제1권에 해당되는 사가타 쌍윳따를 읽고 있다. 이전에 읽었는데 한번 더 읽고 있다. 앙굿따라니까야는 통합본 출간할 때 교정본을 읽었다.
밀린다팡하 교정본은 새기며 읽었다. 이는 공부하며 읽은 것이나 다름 없다. 오자나 탈자, 이상한 표현 등을 잡아내기도 하지만 주옥 같은 가르침을 놓칠 수 없다. 도중에 글도 쓰며 읽었다. 그러다 보니 두 달 이상 걸린 것이다.
262가지 질문으로 구성된 밀린다팡하
밀린다팡하는 262가지 질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불교인이라면 한번쯤 들어 봄직한 질문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 처음 접하는 질문이다. 이런 질문에 대하여 ‘양도논법’ 질문이라고 했다.
양도논법은 무엇인가? 양쪽에 칼을 들고 있는 질문을 말한다. 상대방을 꼼짝 못하게 하는 질문을 말한다. 그래서 뱉지도 못하고 삼키지도 못하는 질문이라고 말한다. 영어로 딜레마이다.
밀린다왕은 나가쎄나 존자에게 양도논법 질문을 던졌다. 교학에 대하여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뱉지도 못하고 삼키지도 못하는 딜레마에 빠질 것이다. 그러나 나가쎄나 존자는 비유를 들어 명쾌하게 답변한다. 그러면 왕은 “존자 나가쎄나여, 의문은 잘 해명 되었습니다. 삿된 견해의 그물은 완전히 찢어졌고 이론은 산산히 분쇄 되었습니다.”라는 식으로 추켜 세운다.
밀린다왕의 262가지 질문은 이교도와의 논쟁에서 매우 유효한 것이다. 이 질의응답을 익혀 놓으면 어떤 이교도의 질문에도 대응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본다면 밀린다팡하는 불교인들의 필독서가 될 수밖에 없다.
한세계에서는 오로지 한부처님만
아는 것이 힘이다. 모르면 당한다. 과연 불자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있을까? 외도가 양도논법의 질문을 던졌을 때 명쾌하게 해명하려면 밀린다팡하를 읽어야 할 것이다.
밀린다팡하에 한 부처님 이야기가 있다. 정법시대에는 두 부처가 있을 수 없음을 말한다. 이는 “수행승들이여, 하나의 세계에서 두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이 동시에 출현한다면, 그것은 있을 수 없고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A1.285)라는 경전적 근거를 갖는다.
한세계에서는 오로지 한부처님만 있게 된다. 한세계에서 두 명의 부처님이 있다면 어떻게 될까? 니까야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분명히 언급되어 있다. 그럼에도 대승경전을 보면 한세계에서는 수많은 부처님들이 있다. 이른바 다불다보살 사상이다.
이 세상에 태양은 하나밖에 없다. 태양이 두 개 있다면 어떻게 될까? 세상은 이글이글 타 버릴 것이다. 이 세상에 일곱 개의 태양이 있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숯검댕이가 되어서 사라져 버리고 말 것이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 ‘일곱 개의 태양의 출현에 대한 경’(A7.66)에 실려 있는 가르침에서 알 수 있다.
우주가 괴겁기에 접어 들 때 태양이 하나 둘 나타난다. 마침내 일곱 개의 태양이 출현 했을 때 우주의 종말이 온다. 이에 대하여 “수행승들이여, 일곱 번째의 태양이 나타나면, 이 대지는 산의 제왕 수미산과 더불어 불이 붙고, 불타오르고, 온통 불꽃에 휩싸인다.”(A7.66)라고 했다.
우주는 지옥부터 파괴된다. 위로 차례로 파괴되어 색계 초선천까지 파괴된다. 그렇다면 우주의 최후는 어떤 것인가? 이는 “수행승들이여, 이 산의 제왕인 수미산이 불타서 연소되면, 결코 재나 검댕이를 남기지 않는다.”(A7.66)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아무 것도 남지 않는 것이다. 공겁기가 된다.
테라와다불교에서는 오로지 한분의 부처님만 모신다. 역사적으로 실존하였던 석가모니 부처님을 말한다. 만약에 또 한분의 부처님을 모신다면 테라와다불교라고 할 수 없다. 당연히 보살도 모시지 않는다. 법당에 가면 오로지 한분의 부처님만 있다.
배의 비유
한세계에 두 명의 부처님이 있을 수 없다. 한 세상에 두 개의 태양이 없는 것과 같다. 나가쎄나 존자는 다음과 같이 ‘배의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대왕이여, 이 일만 세계는 한 분의 부처님을 담지자로 서. 한분의 여래의 덕성을 담지합니다. 만약에 두 부처님이 출현하면, 이 일만 세계가 그들을 담지하지 못하고, 흔들리고, 동요하고, 기울어지고, 굽어지고, 휘어지고, 흩어지고, 괴멸하고, 붕괴되어 버릴 것이고, 그 상태를 유지할 수 없을 것입니다. 대왕이여, 배가 일인승이라면, 한 사람이 타면 그 배는 물위에 뜰 것입니다. 그런데 수명, 용모, 나이, 크기, 체격, 모든 사지가 동일한 두 번째 사람이 와서 그가 그 배위에 오른다고 합시다. 대왕이여, 그 배가 두 사람을 담지할 수가 있습니까?”(Mil.237)
이 세계에 대하여 일만의 세계라고 했다. 이는 인간만이 사는 세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수미산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는 삼계가 이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일만 세계, 하나의 세계에서 두 분의 부처가 출현하면 일인승 배에 두 명의 사람이 타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배가 뒤집힐 지도 모른다.
음식의 비유
한세계에 두 명의 부처가 출현할 수 없는 두 번째 비유가 있다. 이는 ‘음식의 비유’로 설명된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대왕이여, 그리고 한 사람이 원하는 대로 그가 즐겨하는 음식을 목에 차오를 때까지 먹었다면, 그는 잔뜩 먹고 만족하고 포만하여 여지가 없고 식곤증을 느끼고 튀지 않는 경직된 막대처럼 되는데, 다시 그 위에 음식을 먹는다면, 대왕이여 그 사람은 편안하겠습니까?”(Mil.237)
밥을 두 번 먹을 수 없다. 포만감을 느낄 때 진수성찬이 있어도 먹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또 한명의 부처가 출현 했을 때 똑 같은 음식을 먹는 것과 같다.
어느 부처가 출현해도 가르침은 동일하다. 이는 ‘인연쌍윳따’(S12)에서 과거칠불에 대한 가르침을 보면 알 수 있다.
어느 부처가 출현해도 발견하는 것은 연기법이다. 그래서 어느 부처이든지 “태어남이 있으면 늙음과 죽음이 있고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이 생겨난다.”(S12.4)라는 것을 알게 된다. 원인과 조건과 결과로 이루어지는 연기법을 발견하면 부처가 되는 것이다.
분열의 비유
이 세상에 두 분의 부처가 출현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이에 대하여 나가쎄나 존자는 “만약에 두 분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이 동시에 출현한다면, 대중에게는 ‘당신들의 부처님 이다. 우리의 부처님이다.’라고 논쟁이 일어날 것이고 두 파벌이 생겨 날 것입니다.”(Mil.238)라고 말했다.
여기 두 분의 부처님이 있다. 어느 부처님이 진짜일까? 부처님이 깨달은 법은 모두 동일한데 서로 자기가 진짜 부처라고 주장했을 때 불자들은 혼란이 일어날 것이다. 그래서 나가쎄나는 존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왕이여, 두 막강한 대신을 따르는 무리에게는 ‘당신들의 대신이다. 우리들의 대신이다.’라고 논쟁이 생겨나고 두 파벌이 생겨납니다. 대왕이여, 이와 마찬가지로 만약에 두 분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이 동시에 출현한다면, 대중에게는 ‘당신들의 부처님이다. 우리의 부처님이다.’라고 논쟁이 일어날 것이고 두 파벌이 생겨 날 것입니다. 대왕이여, 이것이 두 분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이 동시에 출현하지 않는 이유입니다.”(Mil.238-239)
한 나라에 두 명의 왕이 있을 수 없다. 한 나라에 두 명의 대통령이 있을 수 없다. 어느 시대에서나 어느 나라에서나 왕은 한명이다. 마찬가지로 정법이 살아 있는 시대에 두 명의 부처가 있을 수 없다.
이 세상에 두 명의 부처가 있다면 두 부처를 따르는 무리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서로 “우리 부처님이 진짜 부처님이다.”라고 말할 것이다. 이는 분열이 일어나고 파벌이 발생되는 요인이 된다.
일체지자로서 부처님
한국에는 수많은 종단이 있다. 어떤 이는 스스로 깨달은 자라고 칭하면서 자신이 부처라고 말한다. 이렇게 되면 한세계에 두 명의 부처가 있는 것이 된다. 분열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일까 나가쎄나 존자는 또 하나의 이유를 들었다.
“대왕이여, 또한 한분의 부처님만이 세상에 출현한다는 것은 모든 세존이신 부처님의 본래의 본성에 속한 것입니다. 그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일체지자인 부처님의 덕성은 광대하기 때문입니다. 대왕이여, 세상에 다른 광대한 것도 하나밖에 없습니다. 대왕이여, 대지도 광대한데, 하나밖에 없습니다. 바다도 광대한데, 하나밖에 없습니다. 수메루산도 광대한데, 하나밖에 없습니다. 허공도 광대한데, 하나밖에 없습니다. 제석천도 광대한데, 하나밖에 없습니다. 악마도 광대한데, 하나 밖에 없습니다. 위대한 하느님도 광대한데, 하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오신 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도 광대한데, 세상에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들이 출현하는 곳에는 다른 자들의 여지가 없습니다. 대왕이여, 그러므로 이렇게 오신 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 한 분만이 세상에 출현하는 것입니다.”(Mil.239)
이 세상에 한분의 부처님이 출현하는 것은 부처님의 본래 본성이리고 한다. 이에 대하여 일체지자로서 부처님의 덕성을 들고 있다.
부처님은 유일무이한 존재
부처님은 일체지자이다. 이 세상에 부처님 보다 더 많은 지혜를 가진 자가 없다. 그래서 초기경전에서는 “수행승들이여, 유일무이한 사람이 있다. 그 유일한 사람은 누구인가? 이렇게 오신 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이다.”(A1.174)라고 했다.
부처님은 유일무이한 사람이다. 부처님은 유일한 존재임을 말한다. 이는 두 번째 부처님이 존재하지 않음을 말한다. 그런데 세 상에는 네 가지 부처님도 있다는 것이다. 어떤 것인가? 이는 성문 부처님, 사제 부처님, 연각 부처님, 그리고 일체지 부처님을 말한다. 주석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많이 배운 수행승은 성문 부처님이 되고, 번뇌를 부순 수행승은 사제 부처님이 되고 이십만 아승지겁이 넘는 동안 바라밀을 닦아 스스로 연각의 지혜를 꿰뚫으면, 연각 부처님이 된다. 사십만, 팔십만, 백육십만 아승지겁이 넘는 동안 바라밀을 닦아 세 악마의 머리를 부수고 일체지의 지혜를 꿰뚫으면, 일체지 부처님이 된다. 이 네 부처님 가운에 일체지 부처님을 두고 무이(無二)라고 한다.”(Mrp.I.115)
성문불은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부처가 된 사람이다. 사제승 역시 부처님 가르침에 따라 부처가 된 사람이다. 그런데 연각승은 부처가 출현하지 않았을 때 스스로 연기법을 깨달아 부처가 된 사람을 말한다. 그러나 연각승은 설법을 하지 못한다. 일체지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부처 중에 부처는 일체지부처님이다. 이는 한량 없는 세월 동안 바라밀을 닦은 공덕으로 부처가 된 것을 말한다. 설법을 할 수 있는 부처님이다. 일체에 대하여 알기 때문에 설법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정법시대 조건은
일체지자가 출현하면 정법시대가 열린다. 그렇다면 정법시대의 조건은 무엇인가? 율장의 주석에 따르면 “교법상의 정법(pariyattisaddhamma), 행도상의 정법(paṭipattisaddhamma), 증득상의 정법(adhigamanasaddhamma)” (Smp.225)을 말한다.
정법시대는 교법, 행도, 증득 세 가지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 여기서 교법은 삼장의 모든 부처님의 말씀이 해당된다. 행도는 열세 가지 두타행, 열네 가지 의무, 여든 두 가지 대의무, 계행-삼매-통찰을 말한다. 증득은 네 가지 고귀한 길(四向)과 네 가지 경지(四果)와 열반을 뜻한다.
한 세계에 두 명의 부처님이 있을 수 없다. 이 세상에 부처님은 오로지 한분 뿐이다. 정법이 살아 있는 시대에도 한분의 부처님만이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실려 있는 빠알리삼장이 전승되어 오고, 팔정도의 수행이 있고, 팔정도 수행으로 열반을 증득하여 사향사과의 성자가 출현한다면 정법시대라고 볼 수 있다.
테라와다 수행승의 태도
어떤 이는 경전공부하는 것을 폄하한다. 경전에 대하여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수행을 강조한다.
불교공부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어떤 이는 오로지 수행만을 말한다. 경전 보는 것에 대하여 열등한 것으로 취급한다. 달을 보아야지 손가락만 본다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여기 테라와다 수행승의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들은 소승이라든지 은둔불교라든지 아공법유라든지 부처님 가르침을 편협하게 이해하고 있다든지 하는 그들을 향한 어떠한 비난이나 도전에도 별 관심이 없었다. 그들의 관심은 부처님이 직접 설하신 법을 올바르게 이해(빠리얏띠)하고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시켜 잘못된 견해를 극복하고 바른 도를 실천하여(빠띠빳띠) 괴로움에서 벗어나(빠띠웨다) 부처님이 보이신 해탈열반을 직접 실현하는 것이었으며 이런 출가 생활이 이웃이나 불교도 들에게 가장 큰 공덕을 가져다준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이렇게 함으로 해서 세상의 위없는 복전(福田, punnakkhetta)이 된다고 부처님께서 설하셨기 때문이다.”(초기불전, 청정도론 해제, 1권 26-27쪽)
정법을 규정하는 세 가지 조건이 있다. 이는 빠리얏띠(pariyatti), 빠띠빳띠 (patipatti), 빠띠웨다(pativedha)를 말한다. 여기서 빠리얏띠는 교학, 빠띠빳띠는 수행, 빠띠웨다는 통찰을 뜻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마치 새가 양날개로 하늘을 날아 가듯이, 교학과 수행을 양날개로 하여 통찰하는 것을 말한다.
한국불교에는 부처도 많고 보살도 많다. 한국불교에서 어떤 이는 교학을 공부하는 것에 대하여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정도로 본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교학과 수행이 있어야 통찰이 있을 수 있다. 통찰이 있어야 열반이라는 증득이 있게 된다. 열반의 증득이 있어야 사향사과의 성자가 될 수 있다.
교정작업 하면서 기쁨이
밀린다팡하 교정을 마쳤다. 열 명 가량 되는 교정자 가운데 한사람이다. 이런 노력도 한국불교 발전에 작은 밑거름이 될 것이다.
이번에 밀린다팡하 교정을 보면서 이제까지 단편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 정리된 것 같았다. 그 동안 의문했던 것이 한꺼번에 해소되는 것 같았다. 무려 262개의 질문이다.
질문을 잘하는 사람이 공부도 잘 하는 법이다. 밀린다왕은 어떤 수행승도 꼼짝 못하게 양도논법으로 질문했다. 그런데 이런 질문은 외도들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경전을 보면 때로 모순되는 것 같은 가르침을 볼 수 있다. 또한 반대 되는 가르침도 볼 수 있다. 이 경에서 말한 것과 저 경에서 말한 것이 서로 반대 되어 보이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나가쎄나 존자는 비유를 들어 명쾌하게 설명했다. 이런 것을 접했을 때 기쁨이 일어났다.
교학과 수행을 양날개로 하여
하루하루 경전 읽는 재미로 살아간다. 이에 대하여 어떤 이는 남의 소나 세는 것이라고 말하는가 하면 달을 보아야지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만 본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경전을 읽어 보지 않았음에 틀림 없다.
경전을 읽으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아무리 여러 번 읽어도 질리지 않는다. 이는 진리의 말씀이기 때문일 것이다. 경전을 읽는 것은 교학을 공부하는 것과 같다.
불교인이라면 교학과 수행을 동시에 행해야 한다. 그래야 증득이 있다. 교학 없는 수행은 반쪽 날개를 가진 것과 같다. 또한 수행 없는 교학 역시 반쪽 날개를 가진 것과 같다. 이렇게 해서는 날 수가 없다.
새는 양 날개로 날아간다. 높이 나는 새가 더 멀리 날아간다. 교학과 수행은 수행자에게 양 날개와 같은 것이다.
교학과 수행이 있어야 통찰이 있게 된다. 통찰이 있으면 증득이 있게 된다. 부처님의 제자라면 부처님이 직접 설하신 법을 올바르게 이해(pariyatti)하고,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시켜 잘못된 견해를 극복하여 바른 도를 실천하고(patipatti), 괴로움에서 벗어나 부처님이 보이신 해탈열반을 직접 실현(pativedha) 해야 한다.
2024-06-06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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