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판단중지해야 하는가?
매일 아침 글쓰기는 일상이다. 그런데 글 쓰기 전에 긴장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오늘 잘 쓸 수 있을까?”에 대한 것이다.
글쓰기 18년 째이다. 거의 매일 아침 글을 쓴다. 이제 글은 일상이 되었고 생활이 되었다. 밥 먹는 것과 똑 같은 것이다. 그런데 하얀 여백을 대할 때마다 늘 긴장된다는 것이다.
가수가 무대에 오를 때
가수는 무대에 오를 때 긴장된다고 말한다. 같은 노래를 수천번 불렀어도 무대에 오르면 여전히 떨린다는 것이다. 아마 관객을 대하는 모든 사람들의 공통적인 현상인 것 같다. 그것은 잘 하려고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글은 하나도 같은 것이 없다. 매일 주제가 다르다. 글의 소재도 다르다. 똑 같은 글을 올려 놓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글은 창작이기 때문에 늘 새롭다.
금요니까야모임 글을 써야 한다. 그것도 두 개 이상 써야 한다. 한번 모임에 참석하면 두 개 이상 경을 합송하는데 글도 두 개 이상 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한 개 이상 쓰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두 개 이상을 생각하는 것은 책 만드는 것을 염두에 두기 때문이다.
금요니까야모임과 관련하여 이제까지 책을 다섯 권 만들었다. 책을 ‘원음향기 가득한 서고의 저녁’이라는 타이틀로 만든 것이다. 앞으로 일년에 한권씩 만들려고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모임이 한번 열릴 때마다 두 개 정도의 글은 써야 한다.
오월 첫 번째 금요니까야모임
오월 첫 번째 금요니까야모임이 5월 10일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 열렸다. 이날 참석자는 도현스님을 비롯하여 장계영, 홍광순, 방기연, 김종선, 김영인, 김기순, 이경수, 유경민, 정진영 선생이 참석했다. 정진영 선생은 8시가 넘어서 참석했다. 이렇게 늦게라도 참석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대견하다. 정진영 선생은 이십대이다.
모임에서 경을 읽고 토론하는 것만은 아니다. 모임이 시작되기 전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다. 밀린다팡하에 대해서 이야기가 있었다.
밀린다팡하 교정작업을 하고 있다. 교정본을 받은지 이주 지났다. 그런데 장계영 선생은 벌써 교정을 다 마쳤다는 것이다. 참으로 속도가 빠르다. 아마 하루종일 교정작업만 한 것 같다.
밀린다팡하 교정작업은 현재 삼분의 일 정도 진행되었다. 이렇게 느리게 진행되는 것은 새기면서 보기 때문이다. 생전 들어 보지 못한 내용도 있고 상상을 초월한 이야기도 있어서 이를 글로 옮기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을 정도이다. 또한 생업이 있기 때문에 교정작업에 전념할 수 없는 것도 이유가 된다.
인도와 그리스의 교류에 대해서
전재성 선생은 밀린다팡하와 관련하여 인도와 그리스의 교류에 대해서 설명했다. 놀랍게도 부처님 탄생 이전에도 교류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하게 된 것은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 때문이라고 했다.
아케메네스 왕조는 페르시아 고대왕조이다. 그런데 페르시아뿐만 아니라 중동을 정복한 대제국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로 인하여 인도와 그리스간의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고 한다. 마치 몽골이 초원을 통일했을 때 동서교류가 활발하게 일어난 것과 같다.
그리스의 철학자 디오게네스가 있다. 개처럼 사는 철학자를 말한다. 그런데 개처럼 사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인도에도 있었다는 것이다. 맛지마니까야에서도 발견된다. 이는 ‘개의 행실을 닦는 자에 대한 경’(M57)을 말한다.
개처럼 사는 자는 고행자를 뜻한다. 그래서 경을 보면 “개의 행실을 닦는 쎄니야는 세존께 인사를 드리고 안부를 주고받은 뒤에 개처럼 몸을 구부리고 한 쪽으로 물러앉았다.”(M57)라고 묘사 되어 있다.
고행자는 왜 개처럼 살고자 했을까? 아마 그것은 개에게는 번뇌가 없을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는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개에게는 사유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언어적으로 사유능력이 없어서 나라는 관념이 없기 때문에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이치라고 볼 수 있다.
판단을 하면
전재성 선생에 따르면 디오게네스의 고행은 인도의 고행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그리스에서 고행의 전통은 피론으로까지 내려간다. 이는 알렉산더 대왕이 동방원정을 떠났을 때 다섯 명의 철학자를 데려 갔는데 그 중에 한명이 피론이었던 것이다.
피론은 서양에서 피로니즘으로 알려져 있다. 인도 고행주의에 영향 받은 것으로 마음의 평정과 이욕에 대한 것이다. 또한 피로니즘은 회의론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는 인도의 회의론자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고 있다.
피로니즘에 따르면 진리는 판단할 수 없다고 한다. 이를 에포케라고 한다. 판단중지를 말하며 현상학의 원류라고 말한다. 그런데 근원은 불교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이다.
판단중지를 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판단을 하면 감각을 속이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진리는 섣불리 알 수 없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감각이 우리를 속인다
감각이 우리를 속인다고 말한다. 이는 시각으로도 확인된다. 지금 눈이 있어서 형상을 보고 있는데 그 형상은 항상 그대로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시각은 매순간 생멸한다. 대상도 매순간 생멸한다.
대상이 계속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눈이 우리를 속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각으로 설명하는 것인지 모른다.
청각은 시각보다 우리를 덜 속인다. 소리가 계속 나는 것이 아니라 한번 났다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를 속인다. ‘내가 듣는다’라고 여겼을 때 속이는 것이다. 이럴 때는 판단중지를 해야 한다.
판단중지를 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 알고 보기 위한 것이다. 여기에 나라는 관념이 들어가면 내가 보고 내가 듣는 것이 된다. 이렇게 되면 현상을 제대로 볼 수 없다.
감각을 묘사하려 한다면
부처님 가르침은 어쩌면 판단중지 가르침인지 모른다. 첫 번째로 합송한 경을 보면 알 수 있다.
팍구나 존자가 부처님에 물었다. 팍구나는 “세존이시여, 희론을 버리고 행로를 끊고 윤회를 끝내고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난 과거세의 열반에 드신 부처님들을 알아 보고 묘사할 수 있는 시각이 있습니까?”(S35.83)라고 물어 보았다.
언어로 표현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지금 보고 있는 것에 대하여 어떻게 잘 표현할 수 있을까? 듣고 있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잘 표현할 수 있을까? 하물며 과거 출현했던 부처님에 대하여 마치 보는 것처럼 듣는 것처럼 표현할 수 있을까?
부처님은 팍구나에게 답했다. 부처님은 “팍구나여, 회론을 버리고 행로를 끊고 윤회를 끝내고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난 과거세의 열반에 드신 부처님들을 알아보고 묘사 할 수 있는 시각은 없다.” (S35.83)라고 말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어쩌면 ‘판단중지’에 대한 것인지 모른다.
완전한 열반에 든 부처님은 감각이 있을 수 없다. 시각도 없고 청각도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마치 눈으로 보는 것처럼 귀로 듣는 것처럼 묘사하려 한다면 ‘희론(papañca)’이 될 것이다.
희론은 어떻게 발생되는가?
빠알리어 빠빤짜가 있다. 이를 희론 또는 망상으로 번역한다. 이는 언어적 사유가 개입된 것이다.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마치 생각으로 집을 짓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이런 희론은 어떻게 생겨나는가?
맛지마니까야에 ‘꿀과자의 경’이 있다. 경에서는 마하 깟짜나가 수행승들에게 “벗들이여,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해서 시각의식이 생겨나고, 그 세 가지를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고, 느낀 것을 지각하고, 지각한 것을 사유하고, 사유한 것을 희론하고, 희론한 것을 토대로 과거, 미래, 현재에 걸쳐 시각에 의해서 인식될 수 있는 형상에서 희론에 오염된 지각과 관념이 일어납니다.”(M18)라고 설명하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여기 어떤 형상이 있다. 한번도 보지 않았던 것이라면 지나칠 것이다. 그러나 한번이라도 보았다면 그 기억이 남아 있을 것이다. 더 자주 보았다면 어떤 인식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왜곡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형상에서 희론에 오염된 지각과 관념이 일어납니다.”라고 한 것이다.
희론은 시각뿐만 아니라 청각, 미각, 후각, 촉각, 정신에서도 일어난다. 과거 기억이 영향을 준다. 좋은 기억이라면 좋게 생각할 것이고, 좋지 않은 기억이라면 좋지 않게 생각할 것이다.
여기 나에게 모욕을 준 자가 있다. 그 사람 이름만 보아도 좋지 않은 감정이 지배한다. 그를 접하면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난다. 이는 현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 선입견으로 보고 편견으로 보는 것이다. 이럴 때는 판단중지를 해야 한다.
어떻게 해야 제대로 보는 것일까?
어떻게 해야 제대로 보는 것일까? 그것은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판단중지를 해야 한다.
서양에서 현상학은 판단중지를 기반한 것이라고 한다. 흐름을 거슬러 가면 알렉산더 대왕 당시 피론에까지 이른다. 피론은 인도불교를 접했던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고대 그리스나 고대 인도에서 동서양간의 교류가 있었음을 말한다.
진리는 오염된 지각과 관념으로 보면 알 수 없다. 눈이 있어서 형상을 볼 때 속이기 때문이다. 열반에 든 부처님에 대하여 시각과 청각 등 감각으로 묘사할 수 없는 것은 진리를 묘사할 수 없다는 말과 같다. 왜 그런가? 부처님은 진리의 몸이기 때문이다.
전재성 선생에 따르면 피로니즘의 핵심은 판단중지라고 했다. 감각으로 판단하려 한다면 속게 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속지 않게 될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계속 탐구하는 것이라고 했다.
칠각지에서 택법각지가 중요한 이유
전재성 선생은 탐구에 대하여 칠각지의 택법각지를 들었다. 그리고 택법각지가 칠각지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는 밀린다팡하 교정본에서 본 사항이기도 하다.
밀린다팡하에서 칠각지에 대한 질문이 있다. 밀린다왕이 “존자여, 몇 개의 깨달음 고리로 깨닫습니까?”라고 질문한 것을 말한다.
칠각지는 일곱 가지 깨달음의 고리에 대한 것이다. 참고로 칠각지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1) 새김(念 sati)의 깨달 음 고리:
신체적·언어적·정신적인 모든 행위와 움직임을 세밀히 기억하고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2) 탐구(dhammavicaya:擇法)의 깨달음 고리:
교리의 여러 가지 문제에 관해 조사하고 연구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는 종교적 윤리적, 철학적 연구, 독서, 탐구, 논의, 대화를 비롯해서 교리문제에 관한 강연에 참가 하는 것까지 포함한다.
3) 정진(viriya: 精進)의 깨달음 고리:
끝까지 결의를 다 지고 밀고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4) 희열(pīti: 喜)의 깨달음 고리:
마음이 염세적이고 우울한 것과는 정반대로 경이와 희열에 넘친 상태를 지향한다.
5) 안온 (passaddhi:輕安)의 깨달음 고리:
신체와 정신이 휴식을 취하는 상태로 신체 적 정신적인 괴로움의 소멸을 지향한다.
6) 집중(samādhi: 定)의 깨달음 고 리:
정신집중이 되어 삼매에 든 상태를 지향한다.
7) 평정(upekkha: 捨)의 깨달음 고리:
인생의 파란곡절에서 침착한 마음을 유지하는 것으로 근심이 없고 평온한 마음상태를 말한다.”(한국빠알리성전협회본 밀린다팡하, 299번 각주)
위 설명은 한국빠알리성전협회본 밀린다팡하 299번 각주에서 가져 온 것이다. 이중에서 탐구에 대한 것을 보면 “교리의 여러 가지 문제에 관해 조사하고 연구하는 것을 말한다.”라고 했다. 또한 “종교적 윤리적, 철학적 연구, 독서, 탐구, 논의, 대화를 비롯해서 교리문제에 관한 강연에 참가 하는 것까지 포함한다.”라고 했다.
칼의 비유
칠각지에서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다. 당연히 모두 중요하다고 대답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가쎄나 존자는 먼저 “대왕이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칼이 칼집에 꽂혀있거나 손에 놓여있지 않다면, 베어야 할 것을 벨 수 있습니까?”(Mil.83)라는 비유를 들었다.
칼은 베기 위해서 있는 것이다. 베지 않고 차고만 있다면 폼만 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나가쎄나 존자는 택법각지에 대하여 칼로 베는 것과 같다고 했다. 그래서 “대왕이여, 이와 마찬가지로 탐구의 깨달음 고리가 없이는 여섯 깨달음 고리로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Mil.83)라고 말했다.
밀린다팡하 교정본을 읽으면서 이제까지 알았던 것이나 읽었던 것이 정리가 되는 것 같다. 이런 사실을 전재성 선생에게 이야기했더니 동의해 주었다. 칠각지에 대한 것도 그렇다.
칠각지에 대하여 막연하게 알고 있었다. 모두 중요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나가쎄나 존자에 따르면 택법각지가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이는 칼집에서 칼을 빼서 베는 것과 같다고 했다.
택법각지를 수행의 관점에서 보면
택법에 대하여 탐구 또는 조사라고 말한다. 각주에서 택법(dhammavicaya)에 대한 설명을 보면 교리에 대한 것이다. 교리를 모르고서 깨달음에 이를 수 없음을 말하는 것 같다.
칠각지에 대하여 두 가지 관점으로 볼 수 있다. 하나는 교학의 관점이고 또 하나는 수행의 관점이다. 교학의 관점에서 본다면 택법각지가 탁월하다. 그러나 수행의 관점에서 본다면 평온각지가 된다. 이는 위빠사나 16단계 지혜에서 ‘현상의 평등에 대한 지혜(saṅkhārupekkhā ñāna)’로 설명된다.
택법각지에 대하여 교학의 관점과 수행의 관점은 다르다. 마하시 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 따르면 택법각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새길 때마다 새겨야 하는 대상에 포함된, 특별히 분명한 어떤 물질과 정신의 바른 성품도 안다. 새기는 마음속으로 머리를 내밀고 들어오는 것처럼 그 물질과 정신이 처음 생겨나는 것도 구별하여 안다. 탁하며 끊어져 가듯이 사라지는 것, 소멸하는 것도 구별하여 안다. 항상하지 않은 성품이라고 하는 무상의 특성(aniccālakkhanā), 고통스럽고 좋지 않은 성품 = 좋아할 만한 것이 아닌 성품이라고 하는 괴로움의 특성(dukkhālakkhaņā), 원하는 대로 성취되지 않는 것, 나가 아닌 것, 나라고 하는 것이 없다는 성품인 무아의 특성(anattālakkhana), 이러한 세 가지 특성도 분명하게 안다. 이러한 지혜가 법 간택 깨달음 구성요소(dhammavicaya sambo- jjhanga)이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권, 520쪽)
마하시 사야도는 택법각지에 대하여 무상, 고, 무아로 아는 것이라고 했다.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대하여 무상의 특성(aniccālakkhanā), 괴로움의 특성(dukkhālakkhaņā), 무아의 특성(anattālakkhana)으로 아는 것이다.
택법각지에 대하여 교학의 관점과 수행의 관점은 다르다. 교학에 관점에서 보았을 때는 교리의 여러 가지 문제에 관해 조사하고 연구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수행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는 물질과 정신에 대하여 무상의 특성, 괴로움의 특성, 무아의 특성으로 아는 것을 말한다. 어느 것이 더 맞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부처님 가르침을 제대로 아는 것이 택법각지라는 사실이다. 가르침을 제대로 알면 무상, 고, 무아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칠각지 중에서 택법각지가 최상이다. 이는 새김, 희열, 삼매, 평온 보다 앞선다. 왜 그럴까?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무상, 고, 무아의 특성을 아는 것이 최상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나가쎄나 존자는 칼의 비유를 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지혜로서 절단해야
칼은 모든 것을 자를 수 있다. 얽히고 설킨 것을 단칼에 베어 버릴 수 있다. 지혜의 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한다면 지혜의 칼을 가지고 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 지혜의 칼을 갈고 닦으면 모든 번뇌를 베어 버릴 수 있다. 이는 청정도론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예를 들어 남자가 땅 위에 서서 잘 드는 칼을 들어서 커다란 대나무 덤불을 잘라내는 것처럼, 이와 같이 계행의 땅에 입각해서 선정의 돌로 연마된 통찰의 지혜라는 칼을 정진력으로 책려된 예지적 지혜의 손으로 움켜잡고 일제의 자신의 상속 중에 생겨난 갈애의 결박을 풀고 절단하고 파괴해 야 한다. 길의 찰나에 그는 결박을 벗어나고, 경지의 찰나에 그는 결박을 벗어난 자가 되어 신들을 포함한 세상에서 최상의 공양받을 만한 넘이 된다.”(Vism.1.7)
참으로 박력 넘치는 문장이다. 여기서 수행자는 마치 무사처럼 비유 되었다. 그것은 지혜의 검이다.
무사는 검으로 단칼에 베어버린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노력해야 한다. 어느 정도일까?
2000년대 후반에 일본 NHK대하드라마에 심취한 적이 있다. 인터넷 시대가 되어서 무료로 제공되는 드라마를 보게 된 것이다. 자막이 있어서 가능했다. 그때 ‘아츠히메’(2007년)라는 대하드라마를 보았는데 사츠마 무사들의 수련 장면을 보았다.
도쿠가와 막부 말기 사츠마번은 조슈번과 연합하여 막부를 무너뜨렸다. 여기에는 무사들의 힘이 작용했다. 특히 사츠마 무사들은 ‘지겐류(示現流)’라는 검법을 수련해서 최강의 무사집단이 되었다. 지겐류는 어떻게 수련하는 것일까?
지겐류의 특징은 내려베기이다. 오로지 내려베기 기술 하나로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수련과정을 보면 혹독했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인가? 무사는 원숭이 소리를 내며 목검으로 통나무치기를 하는데 하루에 만번 했다고 한다. 연기가 날 정도로 집중했다고 한다.
수행자는 무사와도 같다. 무사와는 달리 지혜의 칼로 수련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계행의 땅에 입각해서 선정의 돌로 연마된 통찰의 지혜라는 칼을 정진력으로 책려된 예지적 지혜의 손으로 움켜잡는다.”라고 했다.
지혜의 칼은 계, 정, 혜에 삼학에 대한 것이다. 이런 지혜의 칼에 대하여 나가쎄나 존자는 “무엇인가 절단해야 한다면, 모두 지혜로서 절단해야 합니다.”(Mil.86)라고 말했다.
지혜의 칼은 매우 미세한 것도 절단할 수 있다. 이는 오하분결과 같은 거친 번뇌뿐만 아니라 오상분결과 같은 미세한 번뇌도 지혜의 칼로 베어 낼 수 있는 것이다.
칠각지에서 택법각지는 어쩌면 지혜의 칼과 같은 것인지 모른다. 택법을 뜻하는 담마위짜야(dhammavicaya)가 법의 조사에 대한 것이기는 하지만 이는 교리를 아는 것이고 교리를 실천하는 것이 되기도 한다. 깨달음의 길에 있어서 지혜의 칼과 같은 것이다.
밀린다팡하에서 택법이 가장 수승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교리에 대하여 알지 못하면 실천도 없게 될 것이다. 그래서 “교리의 여러 가지 문제에 관해 조사하고 연구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는 종교적 윤리적, 철학적 연구, 독서, 탐구, 논의, 대화를 비롯해서 교리문제에 관한 강연에 참가 하는 것까지 포함한다.”라고 했다.
왜 판단중지해야 하는가?
금요니까야모임에서는 경전을 읽고 토론한다. 전재성 선생의 설명을 듣는 것이 가장 크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기 위한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먼저 알아야 한다. 부처님 그분은 어떤 분이고, 부처님 그분은 어떤 말을 했는지 알아야 한다. 그리고 난 다음 가르침을 실천해야 한다.
가르침을 알고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먼저 판단중지를 해야 한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내려 놓아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법을 전하기로 마음 먹었을 때 “그들에게 불사의 문은 열렸다. 듣는 자들은 자신의 신앙을 버려라.”(S6.1)라고 했다. 마치 절의 일주문에 “입차문래(入此門來) 막존지해(莫存知解)”라고 써 놓은 것과 같다.
서양철학의 현상학에서 말하는 판단중지는 불교에서 유래되었다. 부처님 당시부터 그리스와 교류가 있었던 것이다. 인도의 고행주의도 그리스로 유입되어 디오게네스와 같은 철학자도 나오게 되었다. 피론은 불교의 회의주의를 받아 들였다.
판단을 중지하면 진리를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오직 모를 뿐!”이라는 말이 나왔는지 모른다. 이 말 또한 초기경전에 근거한다. 이는 “보인 것 안에는 보인 것만이 있을 뿐이고, 들린 것 안에는 들린 것만 있을 뿐이고, 감각된 것 안에는 감각된 것만이 있을 뿐이고, 인식된 것 안에는 인식된 것만이 있을 뿐이다.”(S35.95)라는 가르침에 따른다.
진리에 대하여 판단하려 한다면 어긋난다. 진리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다만 비유로서는 가능하다. 볼 때는 볼 뿐이고 들을 때는 들을 뿐이다.
2024-05-13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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