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니까야모임

감각의 제국에서 무감각의 피안으로

담마다사 이병욱 2024. 7. 7. 12:53

감각의 제국에서 무감각의 피안으로


 
 
감기에 걸렸다. 처음에는 목이 컬컬하더니 이제 콧물이 줄줄 나온다.
 
감기에 대하여 두려워하지 않는다. 언제든지 걸릴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조심해도 피해갈 수 없다. 이제까지 걸리지 않고 살았다는 것이 행운이다.
 
행운과 불운에 대하여
 
요즘 행운과 불운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사람이 아무리 실력이 있어도 불운하면 성공할 수 없다. 실력은 백지 한장 차이인데 누가 행운을 거머쥐느냐에 따라 인생은 달라진다.
 
성공한 사람이 자만하면 망한다. 마치 자신이 다한 것처럼, 자신의 실력으로 이루어낸 것처럼 여길 때 망하는 길로 간다.
 
한사람의 성공은 주변사람들 영향이 크다. 서로 얽히고 설켜 있는 관계 속에서 자신만 홀로 독립해서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자신이 다한 것처럼 누리려 한다면 몰락하게 되어 있다.
 
성공한 사람 중에는 겸손한 사람도 있다. 자신의 성공을 주변 환경으로 돌리는 것이다. 그래서 “저는 단지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라고 겸손하게 말한다. 자신에게 행운이 따른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감기는 언제든지 걸릴 수 있다. 지난 일년여 기간동안 용케 걸리지 않았지만 그것은 행운에 따른 것이다.
 
진짜 괴로움은 시간 지나도 낫지 않는 것
 
나름대로 건강관리를 해왔다. 그러나 감기에 걸렸다. 감기 바이러스 침입을 받은 것일까? 아니면 내부에 있던 것이 세력을 키운 것일까?
 
대체로 건강하지 못한 편이다. 태어나면서 약골이라 늘 골골해 하며 살아 왔다. 그런데 병은 면역력이 약화되면 찾아 온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요며칠 열대야에 잠을 잘 이루지 못한 것이 원인이 된 것 같다.
 
감기에 걸리면 몸이 괴롭다. 그러나 이런 괴로움은 괴로움도 아니다. 왜 그런가? 시간 지나면 낫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짜 괴로움은 시간 지나도 낫지 않는 것이다. 인생이 풀리지 않는 문제도 이에 해당된다.
 
축생의 태에 드는 것은 불운
 
나는 왜 사는 것일까? 이렇게 의문하면 답이 없다. 그냥 사니까 사는 것이다. 목적도 방향도 없는 삶이다. 축생의 삶이나 다름 없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것이 축생이다. 유튜브 ‘Green Forest Life Channel’을 보면 돼지 치는 베트남 청년이 나온다.
 
청년은 숲속에서 야생돼지를 비롯하여 야생닭을 기른다. 사료는 백프로 현지 조달이다. 바나나, 카사바, 옥수수 등 숲에서 나는 것들을 갈아서 죽으로 만들어 준다.
 
돼지의 일생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어미 돼지가 새끼 낳을 때가 되면 마치 대포 쏘는 것 같다. 하얀 막을 뒤집어 쓴 채 하나, 둘 튀어 나온다.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다.
 
축생의 태어남은 불행한 것이다. 축생의 태에 드는 것 자체가 불행한 운명을 타고 나는 것이 된다. 왜 그런가? 축생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남의 먹이가 되는 운명이 되었음을 말한다.
                   
새끼 돼지들은 어미 젖을 힘차게 빨아 제낀다. 주인 입장에서 본다면 이세상에서 가장 흐뭇한 광경이라 볼 수 있다.
 
돼지는 주인이 준 죽을 먹고 자란다. 죽을 먹을 때 “척, 척”하는 소리가 나는데 주인은 이 소리가 가장 아름답다고 한다. 돼지가 살찌면 돈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생명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축생도 다름이 아니다. 돼지가 팔려 나갈 때 움추리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축생이지만 죽음을 예감하는 것이다.
 
축생으로 태어나는 것은 불행이다. 왜 축생의 태에 들었을까? 이는 축생으로 태어날만한 행위를 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 우치(愚癡)와 탐욕(貪慾)으로 본다
 
잡아 먹고 잡아 먹히는 세계가 축생의 세계이다. 강한 것은 잡아 먹고 약한 것은 잡아 먹히는 약육강식의 세계이다. 이런 세계에 지혜라든가 자비는 없다. 오로지 존재하고 번식하려는 본능만 있다.
 
축생의 형성조건은 우치(愚癡)와 탐욕(貪慾)이다. 누구든지 어리석음과 탐욕으로 살면 축생의 태에 들 수 있다. 그런데 한번 축생으로 태어나면 우치와 탐욕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지난 시절을 되돌아 보니
 
지난 시절을 되돌아 본다. 부끄럽고 창피한 일이 많다. 부끄러움은 내적인 부끄러움이다.  창피한 것은 외적인 것이다. 타인으로부터 비난이나 비방을 받을 만한 행위를 했을 때 창피한 일이 된다.
 
대부분 사람들은 이미지 관리를 한다. 특히 정치인과 연예인이 심하다. 일반사람들도 이와 다르지 않다.
 
어떤 이는 페이스북의 효용 가치에 대하여 극찬한다. 산 속에서 살면서도 세상을 휜히 내다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과연 정말 속속들이 볼 수 있는 것일까?
 
페이스북은 여러 장점이 있다. 아마 그것은 블로그와 카톡을 합해 놓은 것 같은 기능일 것이다. 글을 길게 쓸 수 있는가 하면 실시간 소통도 가능하다.
 
페이스북에 있는 콘텐츠로 세상을 들여다 볼 수 있을까? 아마 반 이하라고 본다 왜 그런가? 자신을 숨기기 때문이다. 얼굴을 숨기고 이름도 숨긴다.
 
페이스북하는 사람과 하지 않는 사람 가운데 어느 사람이 더 많을까? 아마 압도적으로 페이스북하지 않은 사람이 많을 것이다. 왜 그런가? 자신을 노출시키지 않고자 하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 부자가 있다. 큰 부자를 말한다. 이런 부자가 페이스북에 자신의 실명과 얼굴을 걸고 시시콜콜한 것까지 밝힐 수 있을까? 자신을 성찰하는 글을 올릴 수 있을까?
 
흔히 세 가지 행운을 말한다. 부와 명예와 권력을 말한다. 이 세 가지를 거머쥔 행운아는 페이스븍에 자신의 모든 것에 대한 정보를 올려 놓을까? 아마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왜 그런가? 이익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 잃을 것이 많은 사람이 있다. 부자의 자만으로 살아가는 사람, 지위의 자만으로 살아가는 사람, 학식의 자만으로 살아 가는 사람, 태생의 자만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말한다. 이런 사람들은 많이 가진 자들이다. 많이 가졌기 때문에 잃을 것도 많다.
 
페이스북에 글을 올리는 사람들은 두 가지 부류로 본다. 한부류는 이미지 관리하는 부류이고, 또 한부류는 잃을 것이 없는 부류이다. 전자는 솔직한 글쓰기를 할 수 없을 것이다. 가능하면 단점은 숨기고 장점은 드러내려 할 것이다. 후자는 가진 것이 별로 없어서 있는 그대로 쓰고자 할 것이다. 부와 명예, 권력, 태생에서 멀리 떠나 있기 때문에 자신의 단점이나 고쳐야 할 것, 성찰의 글도 올릴 것이다.
 
독자를 고려하지 않는 글쓰기
 
페이스북에서 진실한 글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대부분 포장된 것이다. 사진이나 동영상 등 감각적인 것 위주로 올리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자신의 내면은 숨기면서 이미지 관리 했을 때 그다지 배울 것은 없다.
 
페이스북에서 이상적인 사람이 있다. 내면에 있는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쓰는 것이다. 자신의 얼굴을 내세우는 등 이미지 관리 하지 않고 불리한 것도 쓰는 사람이다. 더 좋은 것은 성찰의 글을 쓰는 사람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글은 성찰하는 글이다. 그러나 명사들의 글에서 성찰의 글은 보기 힘들다. 사진이나 동영상과 함께 자랑하는 글이 대부분이다.
 
가능하면 있는 그대로 쓰고자 한다. 이는 독자를 고려하지 않는 글이 될 수 있다. 자신의 내면 이야기를 쓸 때 자신과의 대화가 된다.
 
독자를 고려한다면 인정욕구가 발동된다. 자신이 올린 사진이나 영상을 많이 봐주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특히 자신의 얼굴을 연속해서 올렸을 때 인정욕구의 끝판을 보는 것 같다.
 
매일 긴 글을 쓴다. 이런 글에 대하여 어떤 이는 비판한다. 제발 짧게 쓰라고 한다. 독자를 생각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독자의 입장을 고려 하지 않는다. 독자의 입장에서 쓰다 보면 제대로 쓸 수 없다. 이미지 관리하기 쉽다,
 
오늘 쓰고자 하는 것은 감각에 대한 것이다. 사람이 감각을 즐기면 동물과 다름 없음을 말한다. 이는 초기경전에서 수 없이 강조된 사항이다. 축생과 다른 삶을 살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2024년 6월 두 번째 금요니까야모임
 
2024년 6월 두 번째 금요니까야모임이 6월 26일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 열렸다. 이날 참석자는 도현스님을 비롯하여 장계영, 홍광순, 유경민, 방기연, 안진현, 김기현, 이경수 선생이다.
 
안진현 선생이 오랜만에 나오셨다. 이번학기 시작될 때 처음 나왔는데 그후 소식이 없었다. 그동안 수술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몹시 초췌해 보였다. 사부니까야를 다 읽었는데 또 다시 읽는다고 한다.
 
이번 모임에서는 세 개의 경을 합송했다. 첫번째로 합송한 경은 ‘감각능력을 성취한 님의 경’(S35.154)이다.
 
감각영역은 독립적인 세계
 
범부나 성자는 밥을 먹고 산다. 범부나 성자나 음식을 먹을 때 맛으로 먹는다. 그런데 하나 차이가 있다. 범부는 탐욕으로 먹지만 성자는 무탐으로 먹는다는 것이다.
 
음식을 먹을 때 탐욕으로 먹고, 분노로 먹고, 어리석음으로 먹는다면 범부이다. 동물도 이렇게 먹는다. 그러나 성자는 맛으로 먹되 무탐, 무진, 무치로 먹는다. 이런 행위에 대하여 아마 ‘감각능력을 성취한 님(indriyasampanna)’이라고 했을 것이다.
 
니까야에서는 감각이라는 말은 인드리야를 번역한 말이다. 여기서 인드리야는 전재성 선생에 따르면 ‘번개의 능력과 같다’라고 했다.
 
인드리야라는 말은 제석천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는 신들의 제왕이라는 권능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감각기관에 대하여 인드리야라고 칭하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여섯 가지 감역이 있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정신의 감역을 말한다. 이와 같은 여섯 감역은 서로 침범할 수 없는 영역과 같다. 그래서 각 감역에서 지배자가 된다. 마치 권능을 가진 신들의 제왕과도 같고 벼락을 때릴 수 있는 힘을 지닌 것과도 같은 것이다.
 
시각영역에서는 오로지 시각영역에 관계된 것만 처리 된다. 동시에 두 가지 일을 할 수 없다. 눈으로 보면서 귀로 들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가능하려면 시차를 두어야 한다.
 
무언가에 집중하면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가 있다. 이는 감각영역이 다르기 때문이다. 대상에 집중했을 때 다른 것은 영역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그래서 시각영역, 청각영역 등 독립적인 세계가 있다.
 
감각의 바다에 악어와 나찰이 있는데
 
여섯 가지 감각영역이 있다. 이 감각영역에서 발생되는 현상에 대하여 알고 있다면 ‘감각능력을 성취한 님’이라고 했다. 이는 각 영역에서 발생과 소멸에 대하여 아는 것을 말한다.
 
대부분 사람들은 감각을 즐기며 살아간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등으로 즐기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 제자들은 이를 생멸로 본다.
 
생멸을 보는 자는 괴멸도 본다. 생겨난 것은 사라지기 마련이므로 멸하는 것을 보게 되는데 결국 사라지는 것만 보게 된다.
 
생성과 소멸을 관찰하면 어느 것 하나 집착할 것이 없다. 싫어하여 떠나는 마음이 생겨난다. 오온에 대하여 염오하고 이욕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감각의 바다에서 노닌다. 유튜브로 보고 듣는 것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감각의 바다에는 무서운 것도 있다는 것이다. 어떤 것인가? 경에 따르면 파도, 소용돌이, 상어, 나찰”(S35.228)이 있다고 했다.
 
부처님은 비유로서 진리를 설명했다. 파도는 분노의 파도를 말한다. 소용돌이는 오욕락을 말한다. 그렇다면 상어와 나찰은 무엇을 말하는가?
 
니까야는 서로 연결 되어 있다. 이 니까야에서 간략하게 설명된 것이 저 니까야에서는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상어와 나찰에 대한 것도 그렇다. 이띠붓따까에 따르면 “수행승들이여, 악어와 나찰이라는 것은 곧 여인을 지칭하는 것이다.”(Iti.114) )라고 했다.
 
도와 과로 가는 길에 장애가 없지 않을 수 없다. 그 중에 하나가 이성이다. 경에서는 여인이라고 했다. 여인이 왜 장애인가? 이에 대한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다.
 
 
“악어나 나찰은 보호가 없이 자신의 영역에 들어온 사람을 정복하고 붙잡고 영역 밖에 있더라도, 나찰의 환력(幻力)으로 영역 안으로 끌어 들여 그에게 바이라바 형상 (시바 신의 두려운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무력하여 자신을 돕는 것이 불가능하게 만들어, 손에 넣은 뒤에 용모, 힘, 재산, 명성, 행복을 빼앗음으로써, 그들에게 커다란 불행과 재난을 야기시킨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인도, 이치에 맞는 정신활동이 없는 용기 없는 남자를, 여인의 교태를 구성하는 미소와 매력으로 정복하고 붙잡고, 영웅의 태생이라도 여인의 아름다움 등으로 유혹하여, 여자의 환력으로 손아귀에 넣은 뒤에, 자신을 돕는 계행 등을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게 만들어, 덕성과 용모 등을 빼앗음으로써, 그들에게 커다란 불행과 재난을 야기시킨다.”(ItA.II.170)
 
 
경전을 볼 때 원문 번역만 읽어서는 안된다. 각주에 있는 주석도 살펴 보아야 한다. 또한 각주에는 참고가 될만한 경을 소개하고 있다. 이렇게 찾아 가다 보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부처님은 여인에 대하여 나찰과 같은 것으로 보았다. 도와 과의 길을 가는데 있어서 방해하는 요인으로 보는 것이다. 이는 수행자가 감각적 욕망에 빠지는 것을 말한다.
 
수행자가 감각적 욕망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는 감각능력의 발생과 소멸을 보는 것이다. 감각이 영원하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고 자신의 것이 아님을 보는 것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시각의 바다를 뛰어넘어 피안에 도달하여 대지 위에 선 고귀한 님”이라고 했다.
 
희희낙낙하면서 감각을 즐기는 사람들
 
대부분 사람들은 저 언덕으로 건너가지 못한다. 대부분 거센 물살에 휩쓸려 버리고 만다. 그래서 눈 있는 자는 “이보게, 어째서 그대는 희희낙낙하면서 강의 흐름을 따라 옮겨가는가?”라며 묻는다.  
 
감각을 즐기는 것은 희희낙낙하는 것이다. 이곳저곳에서 즐길거리를 찾는 것이다.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쾌락과 탐욕을 갖추고 여기저기에 환희하며 미래의 존재를 일으키는 갈애”(S56.11)를 일으키는 것이다.
 
사람들은 감각의 바다에서 헤어 나올 줄 모른다. 그런데 점점 휩쓸려 가다 보면 파국에 이른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하구에는 파도가 있고 소용돌이가 있고 악어가 살고 나찰이 출몰하는 호수가 있다. 여보게, 그대가 그곳에 도착하면 죽음이나 죽음에 이를 정도의 고통을 겪는다.”(It.114)라고 했다.
 
부처님은 감각을 즐기지 말라고 했다. 감각을 즐기는 삶을 살면 악마의 낚시바늘에 걸린 것과 같다고 했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이는 다음과 같은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수행승들이여, 시각으로 인식되는 형상들은 훌륭하고 아름답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자극하고 애착의 대상이다. 수행승들이여, 만약 그것에 즐거워하고 찬미하고 애착 하면, 수행승들이여, 그 수행승은 악마의 낚싯바늘에 걸려 불행에 빠지고 재난에 빠져 악마 빠삐만이 하자는 대로 할 것이다.”(S35.203)
 
 


이 경은 금요니까야모임에서 세 번째로 합송한 경이다. 경에서는 감각에 탐닉하면 악마의 낚시바늘을 문 것과 같다고 했다.
 
대부분 사람들은 감각적으로 살아 간다. 눈은 보라고 있는 것이어서 눈으로 즐기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한다. 이런 논리라면 몸은 감촉하라고 있는 것이어서 즐기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할 것이다.
 
감각적 욕망의 끝은 어디일까? 이에 대해서 경에서는 "죽음이나 죽음에 이를 정도의 고통을 겪는다.”(It.114)라고 했다. 그래서 “이치에 맞는 정신활동이 없는 용기 없는 남자를, 여인의 교태를 구성하는 미소와 매력으로 정복하고 붙잡고, 영웅의 태생이라도 여인의 아름다움 등으로 유혹하여, 여자의 환력으로 손아귀에 넣은 뒤에, 자신을 돕는 계행 등을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게 만들어, 덕성과 용모 등을 빼앗음으로써, 그들에게 커다란 불행과 재난을 야기시킨다.”(ItA.II.170)라고 했다.
 
팔정도의 뗏목으로
 
저 언덕으로 건너 간 자가 있다. 어떻게 건너갔을까? 혼자 힘으로는 힘들었을 것이다. 이럴 경우 뗏목으로 건너야 한다. 이는 “수행승들이여, 그래서 그 사람은 풀과 나무와 가지와 잎사귀를 모아서 뗏목을 엮어서 그 뗏목에 의지하여 두 손과 두 발로 노력해서 안전하게 저 언덕으로 건너갔다면, 건너서 저 언덕으로 가서 거룩한 이로서 땅 위에 섰을 것이다.”(S35.238)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알 수 있다.
 
저 언덕에 가려면 헤엄쳐서 갈 수 없다. 뗏목을 엮어서 가야 한다. 이는 가르침의 뗏목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뗏목이라는 것은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이다.”(S35.238)라고 했다.
 
수행자는 팔정도의 뗏목으로 거센 물살을 건넜다. 이에 대하여 “두 손과 두 발로 노력해서 안전하게 저 언덕으로 건넜다.”라고 했다. 여기서 두 손과 두 발은 정진과 노력을 말한다. 마침내 저 언덕에 우뚝 선 자가 되었다. 아라한이 된 것이다.
 
반야심경은 아라한찬가
 
경에서 감각능력을 성취한 님에 대하여 아라한이라고 했다. 이는 감각능력에 대하여 아는 사람을 말한다. 감각능력의 발생과 소멸을 관찰 했을 때 감각능력의 강을 건넌 것이다.
 
감각능력의 강을 건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주석에 따르면 “감각능력이 원만한 자”라는 뜻이다. 이는 오근에 따른다.
 
여섯 감각능력이 원만해지면 오근도 갖추게 된다. 공통적으로 권능을 뜻하는 ‘인드리야(indriya)’라는 말이 들어간다. 이에 대하여 초기불전연구원 각주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 ‘감각기능의 구족(indriya-sampanna)’이란 감각기능의 완성(paripuṇṇa indriya)을 뜻한다. 여섯 가지 감각기능들을 명상한 뒤(sammasitva) 아라한됨을 얻은 자는 길들여진(nibbisevana) 감각기능들을 구축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눈 등의 여섯 가지 감각기능들을 명상하여 얻어진 믿음 등의 [다섯 가지] 기능들[五根]을 구족하였기 때문에 감각기능을 완성한 자라 부른다.”(SA..ii.403~404)
 
 
감각기능의 완성은 오근의 완성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각주에 대하여 빅쿠보디의 각주와 비교해 보니 거의 같다. 빅쿠보디는 주석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각주 했다.
 
 
“Complete in faculties (pari-puṇṇindriyo). One who has attained arahantship by exploring with insight the six (sense) faculties is said to be “com- plete in faculties”because he possesses tamed faculties, or because he possesses the (spiritual) faculties of faith, etc., arisen by exploring with insight the six (sense) faculties the eye, etc.”(cdb, 152번 각주, S35.154)
 
 
빅쿠보디의 영역 각주를 보면 초기불전연구원 각주와 매우 유사하다. 무엇보다 관련 경에 대한 소개이다. 초불연 각주에서는 “감각기능의 구족에 대한 다른 설명은 본서 제5권 구족 경 (S48:19) §3 참조할 것”(248번 각주)이라고 했다. 이는 CDB에서 “the eye, etc. For another interpretation of "equipped with faculties," see 48:19”(CDB, 152번 각주)각주와 일치한다.
 
반야심경을 보면 주문이 있다. “가떼 가떼 빠라가떼 빠라상가떼 보디 스와하(gate gate pāragate pārasagate bodhi svāhā)”라는 주문이다. 이 주문을 보면 아라한 찬가처럼 보인다. 갖은 노력을 해서 저 언덕 편에 우뚝 서 있는 아라한이 연상된다. 이는 경에서 “수행승들이여, ‘건너서 피안으로 가서 땅 위에 서 있는 거룩한 님’이라는 것은 아라한을 말한다.”(S35.238)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글 쓸 때는 아픈 줄도 몰라
 
들어가고 또 들어간다. 관련된 경을 찾다 보면 경전이 책상에 가득하다. 그러다 보니 글도 길어진다.
 
부처님 가르침은 종으로 횡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 경에서는 간략하게 설명되어 있는 것이 저 경에서는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일관성이 있다는 것이다. 용어도 같고 구절도 같다. 니까야가 후대에 편집되었다거나 추가 되었다는 말은 신빙성을 잃는다.
 
부처님 가르침을 알면 알수록 점차 믿게 된다. 경전을 보지 않은 자들은 경전만 본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경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면 일관성이 있음을 알게 된다.
 
매달 두 번 금요니까야모임이 열린다. 한번 합송하는 것으로 그치고, 설명으로 그쳐서는 안된다. 이렇게 후기를 쓰다 보면 연결연결 되어서 알게 된다. 마치 고구마 줄기를 잡아당기면 우루루 쏟아져 나오는 것과 같다.
 
감기에 걸렸다. 그러나 글을 쓸 때는 아픈 줄 모른다. 아마 약기운도 있을 것이다. 일요일 글 쓰느라 무려 다섯 시간 집중했다.
 
 
2024-07-07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