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니까야모임

밀린다팡하 출간회

담마다사 이병욱 2024. 7. 13. 10:38

밀린다팡하 출간회
 
 
기회는 자주 오는 것이 아니다. 있을 때 잡아야 한다. 어제 열린 밀린다팡하와 수능엄경 출간회가 그랬다.
 
금요니까야모임이 2024년 7월 12일 금요일에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 열렸다. 참석자들은 밀린다팡하 한권씩을 갖게 되었다. 기회를 놓치지 않은 것이다.
 
밀린다팡하 출간회를 앞두고 마음이 바빠졌다. 2024년 1학기 마지막 모임이기도 한 이 날에 출간회가 열리기로 한 것이다. 무엇보다 사람이다. 홍보를 잘 해야 한다.
 
현재 카톡방에는 60여명 있다. 한번이라도 모임에 참석한 사람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도중에 나간 사람도 많다.
 
역할을 분담하기로 했다. 장계영 선생은 저녁에 먹을 것을 준비하기로 했다. 나는 홍보를 하기로 했다.
 
홍보문을 작성하고
 
어떻게 해야 홍보를 잘 할 수 있을까? 그것은 문장을 잘 쓰는 수밖에 없다. 글을 읽고 공감 했을 때 효과가 있을 것이다. 다음과 같이 홍보문을 작성했다.
 
 
(밀린다팡하 출간회)
 
밀린다팡하가 완역되었습니다. 한국불교 1700년 역사에서 쾌거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빠알리 원문이 번역되기는 처음 있는 일입니다.
 
밀린다팡하 출간회가 2024년 7월 12일(금) 저녁 7시에 한국빠알리성전협회 사무실에서 열립니다. 이에 전재성 박사님과 인연 있는 법우님들과 함께 하고자 합니다.
 
올해는 금요니까야모임이 열린지 8년째 되는 날입니다. 이번 학기는 15학기가 됩니다. 7월 12일은 이번학기 마지막 모임날이기도 합니다.
 
이번학기 마지막 모임날에 밀린다팡하 출간회가 열립니다. 그동안 바빠서 참석 못하신 분들 께서는 이번에 시간을 내면 큰 공덕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모임은 오후 6시 30분부터 시작됩니다. 도시락을 준비했습니다. 오후 7시부터는 밀린다팡하와 관련된 전재성 박사님의 설명이 있을 것입니다.
 
밀린다팡하는 밀린다 왕의 질문과 나가쎄나 존자의 답변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특히 왕의 질문은 ‘양도논법(兩刀論法)’이라 하여 삼키지도 못하고 뱉지도 못하는 딜레마에 대한 문제입니다.
 
왕은 “모르고 지은 죄가 더 무거운가 알면서 지은 죄가 더 무거운가?”라든가, “악업이 더 무거운가 선업이 더 무거운가?”와 같은 질문을 합니다. 또한 왕은  “모든 존재들은 죽음이 두렵다.”라는 경전의 가르침과 함께 “거룩한 님(阿羅漢)은 모든 두려움을 초월해 있다.”라는 경전의 가르침이 서로 충돌 되는 모순을 지적하기도 합니다.
 
나가쎄나 존자는 여러 가지 비유를 들어 왕의 양도논법을 무너뜨립니다. 이때 반드시 경전전 근거를 제시합니다.
 
밀린다팡하는 이백 가지가 넘는 질문과 답변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경전에서 서로 모순 되어 보이는 듯한 가르침과 관련해서도 명쾌하게 해명합니다.
 
밀린다팡하를 읽다 보면 가르침이 정리되는 것 같습니다. 이제까지 알고 있었던 교리가 서로 일관성 있게 됨을 알게 되는 것 같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습니다. 팔만사천 법문은 마치 잘 짜여진 옷감처럼 서로 직교합니다. 여기에 밀린다팡하와 같은 경전이 있어서 이제까지 모르고 있었던 것, 이제까지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 한번에 정리되는 것 같습니다.
 
수많은 행사가 있습니다. 그 중에는 가치 있는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을 것입니다. 이번 밀린다팡하 출간회는 가치 있는 모임이 될 것임에 틀림 없습니다. 원하시는 분들은 감사의 마음을 내면 될 것 같습니다.
 
2024-07-09
이병욱 배상
 
 
홍보문에서 강조한 것은 공덕이다. 이는 회향공덕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번역자가 출간회를 통해서 그 동안 지은 공덕을 회향하는 것이다.
 
공덕은 아무리 나누어 가져도
 
공덕은 아무리 나누어 가져도 줄지 않는다. 물질은 나누면 나눌수록 작아지지만 공덕은 나누면 나눌수록 커진다. 왜 그런가? 정신적 공덕이기 때문이다.
 
정신적 공덕은 줄어 들지 않는다. 아무리 나누어도 줄어들기는커녕 늘어나기만 한다. 무엇보다 타인에게 도움이 된다. 자신이 지은 공덕을 남김 없이 되돌려 주었을 때 받는 사람은 모두 자신의 것이 된다.
 
수희찬탄(隨喜讚嘆)이라는 말이 있다. 함께 기뻐하며 축하는 것이다. 사무량심에서 무디따 (muditā)와 같은 것이다.
 
수희찬탄하면 공덕이 된다. 상대방의 성공과 번영에 대하여 “축하합니다.”라며 거들기만 해도 모두 자신의 것이 된다. 이렇게 쉽게 공덕 짓는 것이 어디 있을까?
 
출간회에 참석하는 것에 대하여 공덕 짓는 것이라고 했다. 이는 수희찬탄하는 것과 같다. 함께 모여 밥도 먹고 법문도 들었을 때 애써 번역한 공덕이 모두 자신의 것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언제나 이익을 추구한다. 장사하는 사람은 밑지고 팔지 않는다. 공덕회와 같은 모임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복 받는 행위에 해당된다. 더구나 부처님 가르침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소개하는 출간회에 참석 했다면 공덕이 되는 행위에 틀림 없다.
 
은밀하게 표현한 것이 있는데
 
출간회 홍보글에서 은밀하게 표현한 것이 있다. 그것은 가장 마지막에 있는 “원하시는 분들은 감사의 마음을 내면 될 것 같습니다.”라는 문구이다. 티 나지 않고, 표 나지 않게 드러내고자 했다. 보시에 대한 것이다.
 
작년 백권당에서 북콘서트가 있었다. 관련 모임에 대한 글을 모아서 하나의 책으로 만들어 소개한 행사를 말한다. 능인선원37기, 정의평화불교연대, 담마와나선원, 이렇게 세 번의 북토크가 있었다.
 
북콘서트라 하여 거창한 것은 아니다. 책을 소량 제작하여 참석자에게만 나누어 주는 것이다. 그런데 부작용이 생겼다. 참석자들이 봉투를 가져 온 것이다. 마치 결혼식장에서 축의금을 내는 것 같았다.
 
출간회라고 하면 책을 소개하는 행사가 된다. 밀린다팡하와 수능엄경 출간회 역시 책 소개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미 불교계 신문사들에게 출간회는 마친 상태였다. 다만 금요니까야모임 멤버들에게 책을 한권씩 나누어 주는 행사 형식으로 된 것이다.
 
어떤 것이든지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면 거룩한 것이 된다. 책 나온 것에 대하여 한권씩 나누어 주는 행사 성격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 했다. 사람을 더 많이 오게 하기 위해서 홍보문을 작성하고 저녁에 먹거리를 준비 했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보시를 유도할 수 있을까에 대하여 고민했다.
 
금요니까야모임은 모든 것이 자율적이다. 회비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누구든지 시간 나면 와서 들으면 된다. 그리고 토론하면 된다. 나오다 나오지 않아도 말하지 않는다. 시간 되면 나오리라고 본다.
 
한번 인연 맺은 것을 소중하게
 
한번 인연 맺은 것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모임 마지막날이자 출간회 날에는 많은 사람을 초대하고 싶었다. 인연 있는 사람들에게 인연의 끈이 끊어지지 않게 하고자 홍보문을 작성했다.
 
홍보문 효과는 컸다. 이런저런 일로 바빠서 모임에 참석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개인 카톡을 보냈다. 오랜만에 자발적으로 온 사람들도 있었다. 이날 모임에 참석한 사람은 홍광순, 안진현, 김우헌, 방기연, 보경스님, 이태형, 김영인, 김희숙, 김종선, 김기현, 정보영,  유경민, 방명숙, 다보라, 홍승봉, 장계영, 도현스님이 참석했다. 전재성 선생과 본인을 합하여 모두 19명이다.
 
보경스님이 참석했다. 이삼년 된 것 같다. 전에는 제주도 있어서 참석이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이번에는 참석가능하다고 했다. 어디에 있는지 문의해 보니 수원 근처 화성에 있다고 했다.
 
출가자로서 살기가 쉽지 않은 것 같다. 특히 비구니 스님으로 살기가 쉽지 않는 것 같다. 자신의 절이 없으면 늘 옮겨 다녀야 하는 것 같다.
 
보경스님은 어렵게 자리를 내었다. 일요일 행사가 있어서 장도 보고 법회 준비도 해야 함에도 참석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무엇보다 어른 스님과 함께 있어서 망설였다고 한다.
 
방명숙 선생은 오고 싶어도 못 왔다. 금요니까야모임과 겹치는 모임이 있어서 참석을 못한 것이다. 이번에는 마지막 날이고 출간회이어서 특별하게 마음 낸 것이다.
 
방명숙 선생은 혼자 오는 법이 별로 없다. 거의 대부분 한사람을 데리고 온다. 이번에 다보라 보살과 함께 왔다.
 
방명숙 선생은 보시공덕을 알고 있는 것 같다. 어느 모임이나 어느 법회에 참석하든지 지나치지 않는다. 스님들을 모시고 식당에서 공양청을 하기도 한다.
 
봉사자가 저녁을 준비하기로
 
금요니까야 모임에서는 식사시가간이 없다. 저녁 7시에 시작해서 9시에 끝난다. 저녁은 각자 해결해야 한다. 그러나 어제는 특별한 날이었다. 봉사자가 저녁을 준비하기로 한 것이다.
 
저녁 식사는 도시락으로 하기로 했다. 근처 스타필드에서 가져 올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늦게 도착했다.
 
도시락 먹는 시간은 저녁 6시 반에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도시락 준비가 늦어 졌던 것 같다. 저녁 7시가 넘어서야 도착했다.
 
도시락은 누구나 상상 가능한 것이다. 일인일도시락을 말한다. 그러나 이번 것은 달랐다. 반찬이 따로 있었던 것이다. 둘이서 또는 셋이서 나누어 먹는 식이 되었다.
 
행사 준비하는 것이 쉽지 않다. 이는 모임에서 총무 또는 총장을 두 번 해본 것으로 알 수 있다.
 
모임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먹는 것이다. 저녁 모임에서 저녁을 준비하는 것이 쉽지 않다.
 
능인선원37기 모임에서 총무를 3년 본 바 있다. 그때 저녁 모임 때 도시락을 준비했다. 도시락 전문업체를 소개 받아 준비 한 것이다. 매우 깔끔하게 처리 되었다.
 
저녁식사는 7시 40분이 되어서야 끝났다. 이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책상 정리가 끝나고 7시 45분이 되었을 때 출간회가 시작되었다.
 
능엄신주와 능엄경 소개
 
전재성 선생은 두 권의 책을 소개 했다. 하나는 능엄경이고 또하나는 밀린다팡하이다. 이날 두 권 책 소개로 시간을 다 보냈다.
 
능엄경은 밀린다팡하 앞서 번역된 것이다. 처음에는 정목스님이 능엄신주를 번역해 달라고 해서 시작되었다. 그런데 다라니를 번역하다 보니 능엄경의 번역 필요성을 느꼈다고 한다.
 
전재성 선생에 따르면 능엄경은 산스크리트 원본이 없다. 원본이 없어서 한역을 번역한 것이다. 반면 능엄신주는 산스크리트 원본이 있다.
 

 
새로 번역된 능엄경을 열어 보았다. 경전의 제목은 ‘슈랑가마다라니와 수능엄경’으로 되어 있다. 능엄신주와 능엄경이 함께 있는 경전이다. 모두 784페이지에 달한다.
 
능엄신주를 산스크리트어로 ‘슈량가마다라니’라고 한다. 전재성 선생에 따르면 고려시대부터 전승되어 내려왔다고 한다.
 
능엄신주는 귀신에 대한 것이다. 능엄신주에는 수많은 귀신이 등장하는데 갖가지 이름의 귀신이 있다고 한다. 이런 귀신의 이름을 외우면 귀신이 퇴치 되는 것으로 본다고 한다.
 

 
선종사찰에서는 능엄주를 외운다고 한다. 참선하다 보면 마구니가 나타나는데 이때 능엄신주를 외우면 효과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성철스님도 능엄주 외우는 것을 강조했다고 한다.
 
전재성 선생이 말하는 것을 받아 적었다. 아직 능엄경은 읽어 보지 않았다. 번역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어느 정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능엄경은 어떤 경일까? 산스크리트 원문이 없어서 중국 위경으로 의심된다고 한다. 그러나 원전은 있었을 것으로 본다.
 
능엄경은 이미 번역 되어 있다. 가장 잘 번역된 것은 운허스님이 번역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국한문 혼용으로 되어 있어서 읽어 내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전재성 선생에 따르면 능엄경은 매우 치밀한 구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마치 금강경처럼 바늘 구멍 하나 허용하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다는 것이다. 또한 압축되어 있어서 읽기 어려운 경전 중의 하나라고 한다.
 
밀린다팡하 소개
 
밀린다팡하 설명이 있었다. 금요니까야모임 시간에 듣던 것이다. 그러나 이날 모임에 오랜만에 나온 사람들은 새로웠을 것이다.
 

 
밀린다팡하에서 밀린다는 그리스어로 메난드로스이고 팡하는 질문의 뜻이다. 그래서 ‘메난드로스 왕의 질문’이 된다.
 
밀린다왕은 그리스 철학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왕의 불교에 대하여 ‘그레코부디즘’이라고 한다.
 
밀린다왕은 궁금한 것이 많았던 것 같다. 그 중에 하나는 출가자와 재가자의 삶에 대한 것이다.
 
그레코부디즘에서는 출가자와 재가자가 조화롭게 사는 것으로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이렇게 본다면 구태여 출가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와 관련된 것이 ‘재가자와 출가자의 올바른 실천에 대한 질문’(Mil.242)이다.
 
전재성 선생은 해제에 쓰여 있는 내용 위주로 설명했다. 그러나 ‘재가자와 출가자의 올바른 실천에 대한 질문’(Mil.242)에 대한 것은 해제에 없는 것이다.
 
밀린다왕은 그레코부디즘 입장에서 질문했다. 왕은 “그렇다면, 존자 나가세나여, 재가자와 출가자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고행은 과보가 없게 되고, 출가는 이익이 없게 되고, 학습계율에 대한 수호는 불모가 되고, 두타행을 지키는 것은 헛된 일이 됩니다. 그러한 경우에 고통을 쌓을 필요가 있습니까, 안락에 의해서도 안락에 도달하는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Mil243)라고 묻는다.
 
부처님 가르침에 차별이 있을 수 없다. 누구나 가르침을 실천하면 궁극적 목적을 성취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니까야를 보면 흰옷 입은 재자자도 성자의 흐름에 들 수 있다고 되어 있다. 이렇게 되었을 때 그 누가 출가해서 수백가지 계율을 지키며 두타행을 하며 살겠는가?
 
밀린다팡하는 왕의 질문에 명쾌하게 답한다. 왕이 삼키지도 못하고 뱉지도 못하는 양도논법으로 딜레마에 빠뜨렸을 때 여러 가지 비유로 부수는 것이다. 나가쎄나 존자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대왕이여,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수행승들이여, 나는 재가자이건 출가자이건 올바른 실천에 들어서면, 그들을 칭찬합니다. 수행승들이여, 재가자이건 출가자이건 올바른 실천에 들어서면, 그 올바른 실천을 원인으로 바른 방도, 착하고 건전한 원리를 성취합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대왕이여, 그것은 이렇습니다. 올바로 실천 하는 자가 최상입니다. 대왕이여, 출가자라도 ‘나는 출가했다.’라고 생 각하고 올바로 실천하지 않으면 그는 수행자의 삶에서 멀어지고 성직자의 삶에서 멀어집니다. 하물며 흰옷을 입은 재가자가 말해서 무엇하겠습니까? 대왕이여, 재가자라도 올바른 실천에 들어서면, 바른 방도, 착하고 건전한 원리를 성취합니다. 출가자라도 올바른 실천에 들어서면, 바른 방도, 작하고 건전한 원리를 성취합니다. 대왕이여, 출가자야 말로 수행자의 주인이고 우두머리입니다. 대왕이여, 출가는 많은 공덕, 무수한 공덕, 셀 수 없는 공덕을 지녔으므로 출가의 공덕을 헤아릴 수는 없습니다. 대왕이여, 소원을 들어주는 마니보주를 ‘마니보주의 값이 이만하다.’라고 돈으로 가치를 평가할 수 없습니다. 대왕 이여, 이와 마찬가지로 출가는 많은 공덕, 무수한 공덕, 셀 수 없는 공덕을 지녔으므로 출가의 공덕을 헤아릴 수는 없습니다.”(Mil.244-245)
 

 

 
출가의 공덕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는 빠름으로 나타난다. 재가자는 생업이 있기 때문에 수행에 전념할 수 없다. 그러나 출가자는 오로지 수행에만 전념할 수 있다. 그래서 수타니파타에서는 “하늘을 나는 목이 푸른 공작새가 백조의 빠름을 따라잡을 수 없는 것처럼, 재가자는 멀리 떠나 숲속에서 명상하는 수행승, 그 성자에 미치지 못한다.” (Stn.221)라고 했다.
 
빠름에 있어서 재가자는 출가자를 따라잡을 수 없음을 말한다. 이를 공작과 백조의 비유로 설명했다. 재가자는 공작새와 같다. 재가자는 공작처럼 화려해 보이지만 멀리 날지 못한다. 출가자는 백조와도 같다. 백조는 깨끗한 이미지와 함께 멀리 높이 날아 간다. 나이 어린 사미라고 해서 무시해서는 안된다.
 
부처님 당시 그리스와의 교류가
 
전재성 선생은 밀린다팡하를 번역하면서 서양철학에 대하여 다시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특히 부처님 당시 서양 그리스와의 교류가 있었다는 것에 대하여 놀라웠다고 한다.
 
부처님 당시에 어떻게 그리스와 교류가 있었을까? 이는 페르시아 제국으로 알 수 있다. 그때 당시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 당시에는 그리스 북부 트라키아에서 인도 서북부 간다라 지방까지 페르시아 영역이었다고 한다. 참고로 에케메네스 왕조는 B.C 559년부터 B.C330년 까지 229년동안 통치한 왕조를 말한다.
 
부처님 당시에 이미 그리스와 교류가 있었다. 그 이전에도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이후에는 더 많은 교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전재성 선생에 따르면 부처님 당시에 그리스에서는 피타고라스가 있었다는 것이다.
 
피타고라스는 부처님과 거의 동시대 사람으로 알고 있다. 페르시아 에케메네스 왕조로 인하여 문화적 교류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으로 파악된다.
 
불교의 합리와 서양의 합리가 딱 맞아 떨어져서
 
문화는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고대 인도문화는 그리스철학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인도의 고행주의가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불교는 합리적 종교이다. 이런 합리성은 서양철학과 딱 맞아 떨어진다. 이와 같은 불교의 합리성이 그리스철학에 영향을 주고 서양철학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인도는 동경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그리스에 없는 고행이라든가 명상 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도의 고행문화는 그리스철학에 영향을 주었고 스콜라철학에도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그리스의 ‘피론’이라는 철학자가 있었다.
 
피론은 알렉산더 원정에도 참여했다. 피론은 인도의 고행주의와 같은 철학을 접했는데 불교도 접했을 것이다. 이는 이후 서양철학에 영향을 주었는데 이는 회의주의로 나타난다.
 
회의주의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초기경전에서 보는 사구부정의 회의주의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철학 영향을 받은 서양철학에서는 ‘판단중지’로 나타난다.
 
왜 판단을 중지해야 하는가?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무상, 고, 무아의 삼법인으로 설명한다. 무상, 고, 무아인 상태에서는 그 어떤 선과 악도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 두고 피론이 불교를 정확하게 이해한 것으로 보고 있다.
 
소크라테스의 말을 법구경에서
 
그리스철학과 불교의 유사성은 많다. 그래서일까 밀린다왕이 믿는 불교를 그레코부디즘이라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 철학자들 가운데서도 불교를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 중에 하나가 소크라테스이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명언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이 말은 본래 “너 자신의 무지를 알라!”라는 말이라고 한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법구경에 있는 내용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법구경에 이런 게송이 있다.
 
 
어리석은 자가 어리석음을 알면
그로써 현명한 자가 된다.
어리석은 자가 현명하다고 생각하면
참으로 어리석은 자라고 불리운다.”(Dhp.63)
 

 
이 게송은 법구경 어리석은 자의 품에 실려 있다. 게송에서 어리석은 자가 현명하다고 생각하면 참으로 어리석은 자라고 불리운다.”(Dhp.63)라고 했다. 이 말은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의 무지를 알라!”라는 말과 같은 의미라고 한다.
 
어리석은 자는 자신이 어리석은 줄 모른다. 그런데 어리석은 자가 어느 순간 자신이 어리석다는 알았을 때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법구경에서는 현명한 자라고 했다.
 
여기 어리석은 자와 무지한 자가 있다. 누가 더 악업을 지을까?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어리석은 자가 ‘나는 어리석은 자이다.’라고 아는 것은 무지한 자가 자신이 무지한 것을 알지 못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아주 무지한 자는 자신이 무지한 것조차 알지 못한다.”(DhpA.II.30)라고 했다.
 
어리석은 것과 무지한 것은 다르다. 어리석은 자는 자신이 어리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무지한 자는 자신이 무지한 것을 알기 어렵다. 그래서 "아주 무지한 자는 자신이 무지한 것조차 알지 못한다.”(DhpA.II.30)라고 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의 무지를 알라!”라고 말한 것은 주석의 내용과 같다. 더 나아가 불교의 영향을 받았다고도 보는 것이다.
 
단체사진을 찍고
 
수능엄경과 밀린다팡하 출간회가 끝났다. 저녁식사를 함께 하고 설명을 듣는 것으로 시간을 다 보낸 것이다. 그냥 헤어질 수 없다. 기록을 하나 남기기로 했다. 단체사진을 찍는 것이다.
 

 
남는 것은 기록 밖에 없다. 또한 남는 것은 사진 밖에 없다. 귀중한 시간을 내서 온 사람들에게 영원히 기억될 일이다.
 
어떤 것이든지 한번 지나가면 다시 오지 않는다. 모임도 그렇다. 이러저라한 모임이 있는데 유익하면 나간다.
 
모임은 시간이 지나면 다시 돌이킬 수 없다. 부지런한 사람은 애써 시간을 내서 참석한다. 여기에는 시간뿐만 아니라 돈과 정력도 소모된다.
 
무엇이든지 지나고 나면 아름답다. 죽을 것 같은 고통스러운 사건도 지나고 나면 추억이 되어 버린다. 하물며 공덕 짓는 일에 참여한다면 어떠할까?
 
어제 두 경전 출간회는 전재성 선생의 공덕회향의 자리였다. 자리에 참석한 것만으로도 큰 공덕을 지은 것이다. 마치 수희찬탄하며 거들기만 해도 쉽게 공덕 짓는 것과 같다. 더구나 책도 생겼다.
 
공덕이 되는 삶을 살고자 한다.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도 공덕이 된다. 게으른 자는 공덕의 삶을 살기 어렵다.
 
오개 중에 해태와 혼침이 있다. 이를 빠알리어로 티나밋다(thinamiddha)라고 한다. 이 용어에 대하여 마하시시야도는 아리야와사법문에서 게으른 것과 같다고 했다.
 
해태와 혼침에 빠지면 법문을 놓칠 수 있다. 이는 이익되는 것을 하지 않는 것과 같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을 놓쳐 버리는 것이다. 출간회와 같은 모임도 해당될 것이다.
 

 
출간회 때 단체사진 촬영을 했다. 내가 전체 사진을 한번 찍었다. 나도 나와야 하기에 방기연 선생이 한번 찍어 주었다. 방기연 선생은 불교레크레이션 지도강사이다. 웃음을 나오게 만들었다.
 
도움을 준 사람들
 
편집자끼리 찍는 시간도 마련되었다. 장계영 선생과 전재성 선생과 함께 찍은 것이다. 밀린다팡하 교열에 장계영과 이병욱이라는 이름이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다. 도현스님이 제안을 해서 셋이서 찍은 것이다.
 

 
역자 머리말에는 도움을 준 사람들의 이름이 실려 있다. 이번에는 누가 도움을 주었을까? 이는 “이 책이 나오기까지 물심양면으로 후원하신 이중원 교수님과 이근우 변호사님, 도현 스님, 김현수 부사장님, 이준용 선생님, 이진홍 선생님, 유필화 교수님과 독자 여러분, 그리고 무더운 여름에 교열과 교정에 수고를 아끼지 않은 ≪니까야≫ 읽기 명상법회의 장계영, 이병욱, 김명옥, 김은영, 문정원, 김세하, 이현주, 하혜현 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머리말, 12쪽)라는 말로 알 수 있다.
 
이제 금요니까야모임은 긴 방학에 들어간다. 다음 학기는 9월 둘째 주 금요일에 시작된다.
 
 
2024-07-13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