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이비설신의와 색성향미촉법은 서로 묶여 있을까?
몇 초간 황홀했다. 이 맛에 좌선하는 것인지 모른다. 차 소리가 나지 않은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된다. 이어서 배의 움직임도 사라졌다. 고요함만 있었다. 또 다른 경지이다.
재가우안거 72일째이다. 일요일 아침 백권당 가는 길에 안양천은 운동하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일단의 무리가 오와 대를 형성하여 달리기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신발을 벗고서 맨발로 걷는다.
평화로운 백권당의 아침이다. 일인사업자는 일요일이라 해서 별다른 것은 없다. 평일의 연속이다. 늘 이른 아침에 나와서 하루일과를 시작한다. 요즘에는 재가안거를 우선순위로 행하고 있다.
나는 삼매에 능숙할까?
우안거 2년째이다. 2년 연속 안거하면서 안거기간 중에는 매일 의무적으로 30분 앉아 있는다. 그러다 보니 이제 익숙해졌다. 매일 밥 먹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었다. 그렇다면 나는 삼매에 능숙해졌을까?
자리에 앉으면 어느 시점에서 마음에 변화가 일어난다. 어느 정도 집중이 되었을 때 삼매가 형성 되는 것이다. 이런 것은 이전에는 볼 수 없었다. 최근 일이주 이내에 있게 된 것이다. 나도 삼매에 능숙한 것일까?
좌선이 고행이 되면 앉아 있기 힘들다. 번뇌망상에 시달리면 5분 앉아 있는 것도 고행이다. 그러나 삼매가 형성되면 시간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한시간, 두 시간도 앉아 있을 것 같다.
어느 시점에 이르렀을 때 고요해질 때가 있다. 이는 창 밖에 차 소리가 나지 않는 것과도 관계가 있다. 특히 토요일과 일요일 이른 오전에는 차 소리가 현저하게 줄어 드는데 붉은 신호등에 걸렸을 때 그 몇 초간이 황금시간인 것이다.
엑스터시는 오래가지 않는다. 몇 초간 황홀한 느낌이 있었으나 차 지나가는 소리와 함께 깨졌다. 이럴 때 사방이 밀폐된 진공처리된 공간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본다.
사마타와 위빠사나는 어떻게 다른가?
빤냐와로 스님이 늘 하는 말이 있다. 고요와 평온을 즐기지 말라는 것이다.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서 수행하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본래 목적인 해탈과 열반을 향해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위빠사나수행은 해탈과 열반에 이르는 가장 빠른 길이다. 이 하나의 길 밖에 없다고도 말한다. 왜 그런가? 명색이 끊어지기 때문이다.
사마타수행은 대상과 하나가 되는 수행이다. 사마타에서는 개념을 대상으로 한다. 실재하지 않는 언어적 개념이나 하나의 이미지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하나됨을 경험한다고 말한다.
사마타와 위빠사나는 다르다. 사마타는 개념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고, 위빠사나는 오온에 일어나는 현상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이는 끊어짐과 끊어지지 않음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다.
끊어지지 않으면 사마타라고 볼 수 있다. 끊어지면 위빠사나라고 볼 수 있다. 개념을 대상으로 하는 사마타에는 끊어짐이 없다. 일체가 되는 것이다. 선사들의 오도송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실재를 대상으로 하는 위빠사나에는 끊어짐이 있다. 생멸을 대상으로 하는 위빠사나에서는 끊어짐이 있는 것이다. 끊어짐이 있기 때문에 열반에 이를 수 있다. 명색이 끊어지는 것이다.
개념을 대상으로 하면 사마타가 되고 실재를 대상으로 하면 위빠사나가 된다. 마음의 평화와 안정을 바란다면 사마타를 하면 될 것이다. 해탈과 열반을 추구한다면 위빠사나를 하면 될 것이다.
좌선할 때 배의 부품과 꺼짐을 본다. 이는 호흡을 보는 것과 다르다. 호흡을 보면 사마타가 되어 버린다. 들숨과 날숨 그 자체에 집중하는 것은 개념을 대상으로 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일까 청정도론에서는 40가지 명상주제 가운데 아나빠나사띠(호흡관)가 포함되어 있다.
배의 움직임을 관찰할 때 이는 사대를 보기 위한 것이다. 사대는 물질에 대한 것이다. 배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것은 물질 가운데 풍대를 관찰하는 것이기 때문에 몸관찰이 된다.
몸관찰은 육문에서 어디에 해당될까? 눈도 아니고 귀도 아닌 몸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촉각에 해당된다. 눈, 귀, 코, 혀를 제외한 몸전체에 대한 것은 촉각에 해당된다.
몸관찰할 때 몸은 수동적이다. 왜 그런가? 몸은 아는 기능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대사기능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숨을 쉰다. 배도 불룩불룩한다.
아는 기능은 정신에만 있다. 몸과 마음은 알려지는 몸과 아는 마음, 이렇게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물질인 몸은 아는 마음이 없고 비물질인 정신은 아는 마음이 있다. 이렇게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여 새기는 것이 위빠사나수행이다.
죽어도 참석해야 하는 금요니까야모임
사람들은 늘 대상에 마음이 가 있다. 눈은 늘 매혹적인 대상을 향한다. 이는 마음이 향하는 것이다. 눈이라는 시각기관을 대상에 머물게 하는 것이다. 귀는 소리로 향하고, 코는 냄새로 향하고, 혀는 맛으로 향하고, 몸은 감촉으로 향한다.
눈만 뜨면 세상이 시작된다. 이에 대하여 안이비설신의가 색성향미촉법을 만난다고 말한다. 만나면 의식이 형성된다. 그렇다면 안비설신의와 색성향미촉법은 서로 묶여 있을까? 금요니까야모임에서 이런 주제로 토론이 있었다.
삼박사일 여행을 다녀왔다. 청송-단양 국내여행이다. 여행 후유증이 있었다. 그제 귀가 했는데 탈진했다. 그날 저녁에 금요니까야모임이 있는데 가야 했다. 그러나 체력이 소진 되어서 갈 처지가 못됐다.
이번만큼은 모임에 빠지고 싶었다. 그러나 가야 할 수밖에 없었다. 빠질래야 빠질 수 없다. 죽어도 가야 하는 것이다. 이런 것도 집착일까?
금요니까야모임은 7년된 모임이다. 2017년 이후 거의 개근하다시피 하고 있다. 모임의 산역사와 다름 없다. 더구나 후기를 남기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빠질 수 없다. 몸이 천근만근 무거워도 가야 한다.
두 시간 걸려 고양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 도착했다. 금요일 늦은 오후 극심한 교통체증에 시달렸다. 기진맥진해서 도착했다.
사람들은 힘이 들면 가지 않는다. 꼭 가야 할 필요성이 들지 않는다면 빠질 것이다. 시간과 돈과 정력을 낭비해 가며 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때 빠진다. 한두 번 오다 마는 것이다.
나는 왜 이렇게 기를 쓰고 그 먼거리를 힘겹게 가는 것일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그것은 우정(友情)이다. 가면 반가운 얼굴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법의 향연도 좋지만 더 좋은 것은 서로 정을 주고 받는 것이다. 이럴 때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모임에는 공부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과 정을 나누는 것도 크다. 동료간의 우정이라고 본다. 세상에 우정만큼 고결한 것이 어디 있을까?
여기 미운사람이 있다. 그 사람만 보면 짜증이 난다. 그 사람이 언젠가 나를 힘들게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사람 보기 싫어서 모임이 나가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 사람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다. 그 사람을 미워하는 나의 마음에 문제가 있다. 그 사람이 미운 것은 나에게 그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 사람에 잘못은 없다.
사람을 호불호와 쾌불쾌로만 보면 각박해진다. 그러나 사람을 우정의 관계로 보면 따스하고 훈훈해진다. 왜 그럴까? 거기에는 정이 있기 때문이다. 우정이 있으면 원수도 사랑할 수 있다.
우정은 다름 아닌 자애의 마음이다. 이는 자애를 뜻하는 빠알리 멧따(metta)가 친구를 어원으로 갖기 때문이다. 빠알리로 친구는 밋따(mitta)이다.
친구와 동료간에는 우정이 있어야 한다. 이런 우정은 자애와 동의어이다. 그런데 불교는 자애의 종교라는 것이다. 부처님은 초기경전 도처에서 자애를 말했다.
어제 탈진한 상태에서 차를 끌고 두 시간 간 것은 의무를 다하기 위한 것이다. 모임 초기멤버 가운데 하나로서 빠지면 안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목숨 걸고 가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도반들과의 우정이다
어제 금요니까야모임 2학기가 시작되었다. 2024년 가을학기가 시작된 것이다. 2024년 9월 27일 금요니까야모임에는 아홉 명 참석 했다. 본인을 포함하여 홍광순, 장계영, 안진현, 이태영, 유경민, 정진영, 박관철 선생이 참석했다.
모임은 저녁 7시부터 시작된다. 끝나는 시간은 저녁 9시이다. 그런데 정진영 선생은 저녁 8시 25분에 참석했다. 그것도 친구와 함께 온 것이다. 노력이 가상하다.
대부분 사람들은 늦으면 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끝나기 30분을 남겨 놓고 오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정진영 선생이 대표적이다. 그런 정진영 선생은 20대 후반이다. 더구나 누나와 어머니와 함께 참석하기도 한다.
안이비설신의와 색성향미촉법은 서로 묶여 있을까?
이번 금요니까야모임시간에 두 개의 경을 합송했다. 육처에 대한 것이다. ‘꼿티따의 경’(S35.232)과 ‘우다인의 경’(S35.234)을 합송했다.
육처에 대한 것은 개념잡기가 쉽지 않다. 마하 꼿티따가 사리뿟따 존자에게 “시각이 형상을 묶고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형상이 시각을 묶고 있는 것입니까?”(S35.232)라며 물은 것에서 시작된다.
눈이 있어서 대상을 본다. 눈이 없다면 형상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꼿티타 존자는 시각과 형상이 서로 묶고 있는 것 아닌지 물어 본 것이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묶여 있는 것에 대해서 ‘족쇄’로 번역했다. 사리뿟따 존자는 꼿티따 존자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연기법이 핵심이다. 그 어떤 것도 아무런 이유 없이 생겨나지 않음을 말한다. 지금 보고 있는 형상이나, 지금 듣고 있는 소리도 조건발생에 따른 것이다. 그래서 사리뿟따 존자는 꼿티따 존자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한다.
“시각이 형상을 묶고 있는 것도 형상이 시각을 묶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 양자를 조건으로 생겨난 욕망과 탐욕이 있는데 그것에 묶여 있는 것입니다.”(S35.232)
부처님의 가르침은 연기법이 핵심이다. 그 어떤 것도 아무런 이유 없이 생겨나지 않음을 말한다. 지금 보고 있는 형상이나, 지금 듣고 있는 소리도 조건발생에 따른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감각기관과 감각대상은 서로 묶여 있는 것은 아니다.
꼿티따 존자는 감각기관과 감각대상에 대하여 서로 묶여 있는 것으로 보았을까? 이 말에 대하여 토론이 있었다. 서로 묶여 있는 것이 어떤 상태인지 말한 것이다.
육처에 대하여 인식된 것으로 보았을 때
초기경전, 즉 니까야를 보면 수행지침서같다는 느낌이 든다. 특히 육처에 대한 가르침이 그렇다. 수행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 머리를 굴려서 자신의 견해를 이야기 했을 때 망상이 되기 쉽다.
어떤 이는 육처에 대하여 인식된 것으로 보았다. 한역 아함경에서는 육내입처와 육외입처로 설명되어 있는데 모두 인식된 것이라고 한다.
어떤 대상이든지 여섯 가지 감각기능에 포착되면 인식의 틀 안에 들어오게 된다. 머리 속에 들어와서 재구성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지금 보는 형상은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다. 머리 속에서 재구성되어 보이는 것이다. 육처에 대하여 인식론적으로 보았을 때 실재를 보는 것이 아닌 것이 된다.
육처에 대하여 인식론적으로 본다면 어떤 일이 발생될까? 그 어떤 것도 실체가 없게 된다. 모두 마음이 만들어낸 것으로 보았을 때 이 세상은 ‘환영(幻影)’이 된다. 금강경에서 말하는 “일체유위법여명환포영(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이 되는 것이다.
이 세상이 꿈속의 세상이라면
선사들은 이 세상에 대하여 꿈과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꿈에서 깨는 것이 깨달음이라고 한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 세상에 대하여 꿈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다만 오온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말한 것이 있다.
“물질은 포말과 같고
느낌은 물거품과 같네.
지각은 아지랑이와 같고
형성은 파초와 같고
의식은 환술과 같다고
태양의 후예가 가르치셨네.”(S22.95)
게송을 보면 오온에 대하여 꿈과 같고 환영과 같다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왜 그런가? 물질과 정신으로 구분해서 설명했기 때문이다. 이는 오온에 실체가 없음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이 세상이 꿈속의 세상이라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꿈속의 세상이기 때문에 막행막식해도 될 것이다. 왜 그런가? 꿈속에서의 범죄에 대해서는 처벌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이 세상을 꿈의 비유로 설명하지 않았다. 현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면 실체가 없다고 말했다. 물질을 예로 든다면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이 갠지스 강이 커다란 포말을 일으키는데, 눈 있는 자가 그것에 대하여 보고 고요히 관찰하여 이치에 맞게 탐구한다고 하자. 그가 그것에 대하여 보고 고요히 관찰하여 이치에 맞게 탐구하면, 비어 있음을 발견하고, 공허한 것을 발견하고, 실체가 없는 것을 발견한다. 수행승들이여, 무엇이 실로 포말의 실체일 수 있겠는가?”(S22.95)
부처님은 물질을 관찰하면 텅 비어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는 다름 아닌 수행에 대한 것이다. 이 몸을 대상으로 하여 관찰 했을 때 이 몸의 실체가 없음을 알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이 세상이 꿈속의 세상이라면 수행을 할 필요가 없다. 꿈만 깨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오온에 대하여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수행을 해서 알아야 한다. 수행을 해서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아내야 하는 것이다.
명색에 대해여 이름과 형태로 보는 것은
육처는 물질과 정신에 대한 것이다. 안이비설신은 물질에 대한 것이고 의는 정신에 대한 것이다. 이는 명색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오온에서 명색을 말한다. 그런데 육처에 대하여 모두 인식된 것이라고 말한다면 오온 역시 모두 인식된 것이 된다. 몸이라는 물질도 인식된 것이 된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
부처님은 십이연기에서 명색을 설명했다. 이때 명색은 정신과 물질에 대한 것이다. 이는 ‘십이연기분석경’(S12.2)에서 “명색이란 무엇인가? 그것에는 느낌, 지각, 의도, 접촉, 정신활동이 있으니 이것을 명이라고 부르고, 네 가지 광대한 존재, 또는 네 가지 광대한 존재에서 파생된 물질을 색이라고 한다.”라고 정의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명색에 대하여 정신과 물질이 아니라 오로지 인식된 것으로 본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아마 명색에 대하여 이름과 형태로 볼 것이다. 이는 언어적 개념에 대한 것이다. 전남대 L교수가 주장하는 이론이다.
명색에 대해여 이름과 형태로 보는 것은 외도사상에 영향 받은 것이다. 우파니샤드에서는 명색에 대하여 이름과 형태로 본다. 이는 명에 대하여 느낌, 지각, 의도, 접촉, 정신활동으로 보고, 색에 대하여 네 가지 광대한 존재, 또는 네 가지 광대한 존재에서 파생된 물질로 보는 부처님 가르침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언어적 개념만 타파하면 깨닫는다는데
방향이 다르면 목적지도 다르다. 명색에 대하여 정신과 물질로 보는 것과 명색에 대하여 이름과 형태로 보는 것은 완전히 다른 방향이다. 당연히 결과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전자는 부처님의 가르침이고, 후자는 동아시아 선사들의 가르침이라고 볼 수 있다.
명색에 대하여 이름과 형태라 하여 언어적 개념으로 보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아마 언어적 개념만 타파하면 깨닫는다고 말할 것이다. 수행할 필요가 없다. 오로지 스승의 입만 바라보면 된다. 자주 듣다 보면 언젠가 ‘언하대오’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 요즘 유튜브에서 ‘이것’을 말하는 자들의 ‘이것타령’에서도 발견된다.
명색을 언어적 개념으로 보면 일체유심조가 된다.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낸 것으로 보는 것이다. 육처도 마음이 만들어 낸 것으로 본다. 그래서 이 세상에 대하여 꿈속의 세상으로 보고, 이 세상에 대하여 환영으로 보는 것이다.
금강경에서 대미를 장식하는 게송은 ‘일체유위법여몽환포영’이다. 그러나 니까에서 이런 말은 보이지 않는다. 왜 그런가? 명색에 대하여 정신과 물질로 구분하여 보기 때문이다. 명색에 대하여 우파니샤드식으로 이름과 형태로 본다면 이 세상은 꿈속의 세상이고, 이 세상은 환영이 된다.
흑소와 백소의 비유, 그리고 보석목걸이의 비유
꼿티따의 경에서 시각과 형상은 서로 묶여 있지 않다고 했다. 사리뿟따 존자는 검은 소와 흰 소의 비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벗이여, 예를 들어 검은 소와 흰 소가 하나의 밧줄이나 멍에 줄에 묶여 있는데, 누군가 검은 소가 흰 소를 묶고 있는 것 이라든가 흰 소가 검은 소를 묶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는 옳게 말하는 것입니까?”(S35.232)
흑소와 백소는 밧줄로 서로 묶여져 있다. 그렇다고 흑소가 백소를 묶은 것도 아니고 백소가 흑소를 묶은 것도 아니다. 단지 두 소가 줄에 묶여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감각기관과 감각대상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니까야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감각기관과 감각대상이라는 물질이 서로 묶여 있지 않은 것에 대하여 맛지마니까야 77번 경에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이 나의 몸은 물질로 이루어지고, 네 가지 위대한 존재로 이루어지고, 부모에 의해 생겨나고, 밥과 죽으로 키워지고, 무상하고, 떨어져 나가고, 닳아 없어지고, 부수어지고, 흩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나의 의식에 의존하고 그것에 관련된 것이다.”(M77)
부처님이 우다인 존자에게 말한 것이다. 물질은 의식에 묶여 있는 것이지 감각기관과 감각대상이라는 물질이 서로 묶여 있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부처님은 비유의 천재이다. 물질과 정신이 서로 묶여 있는 것에 대하여 보석목걸이의 비유를 들었다. 여기서 보석은 물질이고 줄은 정신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물질에 대하여 “그것은 나의 의식에 의존하고 그것에 관련된 것이다.”(M77)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부처님의 비유의 가르침은 논서에서도 활용된다. 마하시 사야도는 ‘담마짝까법문’에서 보석목걸이의 비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 ‘veluriya’라는 묘안석 루비 안을 뚫어 검푸르거나 노랗거나 붉거나 희거나 연노랑인 어떤 하나의 줄로 깬 뒤 그 묘안석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본다고 할 때, 눈이 좋은 이라면 보석과 줄을 따로 구별해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보석 안에 줄이 꿰뚫어 들어가 있는 것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관찰하여 알아지는 물질이 따로, 관찰하여 아는 의식이 따로 구별되어 알 수 있습니다. 관찰되어 알아지는 물질 쪽으로 관찰하여 아는 마음의식이 계속해서 달려가는 것처럼 알 수도 있습니다. 이 비유에서 물질은 묘안적과 같습니다. 관찰하여 아는 마음은 줄과 같습니다. 줄이 묘안석 안으로 꿰뚫고 들어가 있는 것처럼 관찰하여 이는 마음의식이 관찰되어 알아지는 물질 대상 쪽으로 계속해서 달려갑니다. 그렇게 물질과 정신 두 가지를 구분하여 아는 모습을 설명해 놓으셨습니다. 이 설명에 특별히 주의해야 합니다. 그렇게 설명하는 모습 중에 물질이 몇 종류와 몇 개, 마음과 마음부수가 몇 종류와 몇 개라고 알아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물질과 관찰하여 아는 마음의식 정도로 구분해서 아는 것만 포함됐습니다. 이것에 특히 주의해야 합니다.”(담마짝까법문, 360-361쪽)
사리뿟따 존자는 흑소와 백소의 비유를 들어 감각기관과 감각대상이 서로 묶여 있지 않음을 설명했다. 물질은 물질끼리 서로 묶여 있는 것이 아니라 물질들은 의식에 의해서 묶여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리뿟따 존자는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벗이여, 시각이 형상을 묶고 있는 것이고 형상이 시각을 묶고 있는 것이라면, 올바로 괴로움을 소멸시키기 위한 청정한 삶을 시설 할 수 없습니다. 벗이여, 시각이 형상을 묶고 있는 것도 아니고 형상이 시각을 묶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양자를 조건으로 생겨나는 욕망과 탐욕이 있는데, 그것에 묶여 있는 것이므로 올바로 괴로움을 소멸시키기 위한 청정한 삶을 시설할 수 있습니다.”(S35.232)
감각기관과 감각대상이 묶여 있다면 소멸시키기 위한 청정한 삶을 살 수 없다고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안이비설신의라는 육내처가 색성향미촉법이라는 육외처를 가지고 있는 한 결코 해탈할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동아시아불교에서 아함경에서는 육처에 대하여 육내입처로 설명한다. 안이비설신의라는 육내처와 색성향미촉법이라는 육외처가 있는데 이는 모두 인식된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서로 묶여 있음을 말한다. 서로가 서로를 족쇄처럼 채우고 있음을 말한다. 그러나 초기불교에서는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
초기불교와 동아시아불교는 다르다. 이는 명색에 대한 정의에서도 다르다. 동아시아 불교에서는, 특히 선불교에서는 명색에 대해서도 일체유심조로 본다. 그래서일까 육처에 대해서도 인식된 것으로 본다. 그러나 초기경전, 즉 니까야를 보면 명색은 정신과 물질로 명백히 구분되어 있다. 명색은 인식된 것이 아닌 것이다. 물질은 물질이고 정신은 정신인 것이다. 이는 십이연기분석경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물질을 묶는 것은 의식이다. 이는 ‘흑소와 백소의 비유’(S35.232)와 들었고 ‘보석목걸이의 비유’(M77)로도 알 수 있다.
명색에 대하여 따로따로 구분하여 새기는 것은
2024년 우안거를 맞이하여 매일 행선과 좌선을 한다. 마하시 방식으로 위빠사나 수행을 한다. 이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명색에 대한 것이다. 집착된 무더기를 정신과 물질로 구분해서 관찰하는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에서 명색을 구분해서 관찰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이것이 되어 있지 않으면 다음 단계를 진행할 수가 없다. 위빠사나 16단계 지혜 가운데 1단계는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이다.
행선과 좌선 할 때 정신과 물질을 구분해서 관찰하고자 한다. 행선 할 때 발을 떼고, 들고, 밀고, 내리고, 딛고, 누르는 육단계 행선할 때 발의 모양이나 형태를 보지 않는다. 경쾌함이나 무거움, 딱딱함 등 운동성과 느낌만을 본다. 발모양이라는 개념을 걷어내고 실재를 보자는 것이다.
실재를 보면 모든 것이 끊어져 있다. 왜 그런가? 순간집중해서 관찰하면 정신과 물질은 매우 짧은 시간에 생멸하기 때문이다. 발을 뗄 때의 물질과 이를 아는 정신은 매우 빨리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은 이를 새기는 것이다. 물질적 현상을 따로 새기고 정신적 현상을 따로 새기는 것이다.
명색에 대하여 따로따로 새겼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궁극적으로 끊어지게 될 것이다. 명색의 끊어짐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열반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학인 아지따에게 “아지따여, 그렇게 질문한다면, 그대에게 명색(정신· 신체적 과정)이 남김없이 소멸하는 것에 대해 말하겠습니다. 의식이 없어짐으로써, 그 때에 그것이 소멸합니다.”(Stn.1036)라고 말했다.
열반은 명색이 끊어지는 것이다. 수행은 명색이 끊어지는 것을 연습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분리해서 관찰해야 한다. 무더기인 상태에서는 끊어짐을 볼 수 없다. 집착된 무더기에 대하여 정신과 물질로 구분해서 관찰하고, 정신과 물질을 각각 따로따로 새겼을 때 무상, 고, 무아임을 알게 되는데, 이 무상, 고, 무아 가운데 하나를 대상으로 하여 열반에 들어가는 것이다.
동아시아불교에서는 열반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다. 동아시아 선사들은 합일을 말한다. 이는 마음이 끊어지지 않는 것이다. 마음은 연결되어 있어서 하나로 통합된다고 말한다. 더구나 일체유심조를 말한다. 명색에 대해서 인식된 것이라고 한다.
명색이 끊어지지 않으면 열반에 이를 수 없다.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는 먼저 끊어져야 한다. 물질과 정신으로 구분해서 관찰해야 하는 이유에 해당된다. 또한 조건발생하는 것이어야 한다. 조건발생 해야 끊어지는 것이다.
매일 명색(名色)을 구분하여 새기는 연습을
위빠사나 수행은 명색을 관찰하는 것이 핵심이다. 어떤 수행방법이든지 명색에 대하여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부처님 수행방법이 아니다. 집착된 무더기에 대하여 명색으로 구분해서 관찰하고, 명색으로 환원해서 새겨야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윤회에서 벗어난다.
작년에 이어 두 번째로 안거를 나고 있다. 두 번 안거하면서 화두는 명색에 대한 것이다. 집착된 무더기를 정신과 물질로 구분해서 관찰하고, 더 나아가 구분해서 새기는 것이다. 이런 연습을 매일 행선과 좌선을 통해서 행하고 있다.
2024-09-29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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