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니까야모임

명색으로 먹은 미소(된장)라멘

담마다사 이병욱 2024. 10. 12. 14:58

명색으로 먹은 미소(된장)라멘
 
 
세상에 이런 세계가 있을까? 기쁨과 행복과 평온이 가득한 세계이다. 눈을 감고 앉아 있으면 전혀 이 세상과 다른 세계에 있게 된다. 백권당 금강좌에 앉으면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오늘 재가우안거 85일째이다. 내일은 우안거해제 탁발법회가 담마와나선원에서 열린다. 본래 음력 구월보름날인 10월 17일(목)에 열려야 하나 평일인 관계로 일요일인 나흘 앞당겨 10일 13일(일)에 있게 된다.
 
오늘 아침 행선 때는 어제 발견한 것을 복습했다. 서 있을 때 새김에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주선(住禪), 서 있는 명상이라고 이름 붙여 보았다. 몸관찰에 있어서 네 가지 행동양식인 행, 주, 좌, 와에 있어서 서 있는 것에 대한 명상이다.
 
매일 행선하다 보니 방법을 발견하게 된다. 누군가 알려 주지 않는 것이다. 행하다 보니 스스로 터득한 것이다. 서 있는 명상도 이에 해당된다.
 
서 있는 명상
 
서 있는 명상은 어떻게 하는가? 이는 전신을 스캔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서 있을 때 마음을 몸에 두는 것이다. 마음은 늘 대상으로 향하고 늘 대상에 가 있기 때문에 망상 하기 쉽다. 이럴 때 마음을 몸에 붙들어 매두기 위함이다.
 
주선, 서 있는 명상을 할 때는 여섯 곳을 본다. 본래 머리 끝에서부터 발 끝까지 훑어 내리듯이 스캔하라고 말한다. 마치 스캐너가 스캔하듯이 하라고 한다. 그러나 초보자에게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그렇다고 멍하니 서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나누어 보기로 했다. 눈, 코, 입, 배, 무릎, 발바닥, 이렇게 여섯 부위만 보고자 한 것이다.
 
서 있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마음을 둔다. 마음은 늘 대상을 향하고 대상에 가 있기 때문에 눈에 마음을 두면 마음은 눈에 가 있는다. 이때 눈이라는 이미지를 떠 올리면 안된다. 눈이라는 언어적 개념이 형성되어서 눈이라는 이미지가 떠올려지게 된다. 이것은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것이 아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실재를 보는 수행이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실재인가? 이는 지수화풍이라는 사대와 그 파생물질을 관찰하는 것이다. 눈이라면 눈의 ‘촉촉함’을 보아야 한다. 지수화풍 사대에서 수대에 해당되는 것인지 모른다.
 
마음을 코로 두면 코의 바람을 느낀다. 콧바람 같은 것이다. 이는 지수화풍 사대 가운데 풍에 해당될 것이다. 마음을 입에 두면 두 입술의 닿음을 느낀다. 이는 육처에서 몸의 접촉에 대한 것이다. 마음을 배에 두면 배의 부품과 꺼짐을 느끼게 된다. 이는 지수화풍 사대 가운데 풍에 해당된다. 좌선할 때 배의 부품과 꺼짐을 보는 것과 같다. 마음을 무릎에 두면 장딴지의 뻣뻣함을 느끼게 된다. 이는 지수화풍 사대 가운데 어느 것에 해당될까? 잘 생각나지 않는다. 아마 수대에 해당될 것이라고 본다. 수대는 뭉치는 성품이 있고 결합하는 성품이 있다. 마음을 발바닥에 두면 차가움과 딱딱함을 느낀다. 이는 지수화풍 사대 가운데 지대에 대한 것이다.
 
서 있는 것도 수행이다. 서 있을 때도 새김이 있어야 한다. 머리 끝에서부터 발 끝까지 새기는 것이다. 모두 다 새길 수 없어서 여섯 가지로 나누어서 새긴다. 눈을 새길 때는 “눈, 눈, 눈”하면서 또한“촉촉함, 촉촉함, 촉촉함”하면서 눈의 촉촉함을 새긴다. 이렇게 하는 것은 빨리 지나가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명칭을 붙임으로 인하여 시간을 버는 것이다. 그래야 눈의 촉촉함이라는 법의 성품을 새길 수 있다.
 
“눈, 눈, 눈”하면서 “촉촉함, 촉촉함, 촉촉함”하며 새긴다. “코, 코, 코”하면서 “바람, 바람, 바람”하며 새긴다. “입, 입, 입”하면서 “닿음, 닿음, 닿음”하면서 새긴다. “배, 배, 배”하면서 “부품, 꺼짐, 부품, 꺼짐, 부품, 꺼짐”하며 새긴다. “무릎, 무릎, 무릎”하면서 “뻣뻣함, 뻣뻣함, 뻣뻣함”하며 새긴다. “발바닥, 발바닥, 발바닥”하면서 “딱딱함, 딱딱함, 딱딱함”하며 새긴다. 이는 나만의 방식이다. 다른 사람도 이렇게 하는지 알 수 없다.
 
자주 다니면 길이 난다
 
자주 다니면 길이 난다. 백권당에 명상공간을 만들어 놓은지 4년 되었다. 자주 앉다 보니 이제 익숙하다. 그래서일까 금강좌에 앉자마자 마음이 고요하고 평화로워진다. 조금 지나면 기쁨과 행복과 평온이 온다. 아마 초선정에 가까이 가는 ‘근접삼매(upacārasamādhi)’상태일 것이다.
 
어떤 일이든지 집중하면 삼매가 형성된다. 똑 같은 일을 계속 해서 반복하면 집중이 되는데 이것도 삼매의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뜨개질을 하면 뜨개질삼매가 될 것이다. 독서하면 독서삼매가 될 것이다. 일에 몰두하면 일삼매가 될 것이다. 행선할 때 발을 떼고, 들고, 밀고, 내리고, 딛고, 누르는 여섯 단계를 반복하면 역시 삼매가 형성될 것이다. 방석에 앉아 배의 부품과 꺼짐을 지속적으로 새기면 역시 삼매가 형성된다. 그것은 기쁨과 행복과 평온이기 쉽다.
 
어떤 이는 아름다운 경치를 즐긴다. 세계 구석구석을 찾아 다니며 소식을 전하기도 한다. 오지여행이기 쉽다. 눈으로 즐기고 입으로 즐기는 여행이다. 이런 것도 행복일 것이다.
 
매일 밥 먹듯이 앉아 명상하다 보면
 
행복의 스펙트럼은 넓다. 오감을 즐기는 감각적 행복은 원초적이다. 이를 거친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선정에서 오는 행복도 있다. 장쾌한 풍광을 찾아 돌아다니지 않아도 된다. 방석에만 앉으면 된다. 눈을 감고 평좌하면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한번 해 보아서는 알 수 없다. 자주 해야 한다. 매일 밥 먹듯이 앉아 있다 보면 길이 되어서 자연스럽게 기쁨, 행복, 평온 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를 미세한 행복, 또는 잔잔한 행복이라 해야 할 것이다. 이 몸과 마음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와 같이 말했다.
 
 
“그러나 벗이여, 세계의 끝에 이르지 않고서는 괴로움의 끝에 도달할 수 없다고 나는 말합니다. 벗이여, 지각하고 사유하는 육척단신의 몸 안에 세계와 세계의 발생과 세계의 소멸과 세계의 소멸로 이끄는 길이 있음을 나는 가르칩니다.”(S2.26)
 
 
부처님이 로히땃사라는 선인에게 말한 것이다. 선인은 세계의 끝에 이르고자 했다. 걸어서 가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이르지 못했다. 가다가 도중에 죽고 만 것이다. 그러나 세계의 끝에 이르는 길은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자신의 몸과 마음을 관찰하는 것이다. 몸과 마음을 새겨서 열반에 이르면 세계의 끝에 도달하는 것이다. 매일 밥 먹듯이 앉아 있다 보면 세계의 끝에 도달할 것이다.
 
목적도 방향도 없는 허무방랑자
 
오토바이 여행자가 있다. 그는 전세계를 대상으로 달린다. 인도나 동남아시아 등대부분 잘살지 못하는 나라가 대상이다. 몇 개월씩 현지에 머물면서 여행한다. 여행자 숙소에서 머문다. 이런 것을 사진과 영상과 글로서 올려 놓는다.
 
어떤 여행자는 배낭여행을 한다. 역시 전세계를 대상으로 한다. 여행자는 ‘다쓰죽’을 신조로 삼고 있다. 이는 ‘다 쓰고 죽자’리는 말이다. 재산을 남겨두지 않고 모조리 써버리겠다는 것이다.
 
‘다쓰즉’의 신조를 가진 사람은 전세계가 대상이다. 이 나라 저 나라 돌아다니면서 쓰는 것이다. 이런 돈을 국내에서 쓴다면 얼마나 좋을까? 소상공인이나 자영업자에게 ‘낙수효과’가 있을 것이다.
 
해외로 떠돌아다니는 사람은 ‘방랑자’라고 볼 수 있다. 즐거움을 찾아서 오지 이곳 저곳을 누빈다. 사람들은 이런 사람을 부러운 눈으로 본다. 일도 하지 않고 해외로만 떠돌아 다니는 사람이 로망인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방황자’라고 말할 수 있다.
 
방랑자는 정처 없이 떠돈다. 목적도 방향도 없다. 마음 내키는 대로, 발길 닿는 대로 간다. 이런 삶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그들이 오지여행에 대한 즐거움을 포스팅하지만 측은한 마음으로 바라본다. 아마 방황의 과정에서 즐거운 일보다 괴로운 일이 더 많을 것이다.
 
방랑자 중에는 스님도 있다. 어떤 스님은 배낭여행한 이야기를 책으로 냈다. 세계를 여행하면서 배운 것이 많다고 했다. 그렇다고 스승을 찾아 구도여행을 한 것은 아니다. 단지 즐기기 위한 여행에 지나지 않는다.
 
방랑승이라는 말이 있다. 언젠가 오래된 신문에서 본 것이다. 신문아카이브에서 S스님 이름을 검색하다가 발견한 것이다. 아마 78년도 신문일 것이다. 흑백으로 되어 있는 사진을 보니 장발이다. 신문에서는 ‘허무방랑승’이라고 했다.
 
S스님은 더 이상 스님이 아니다. 그럼에도 스님이라는 명칭을 붙여 준다. 젊었을 때 인도 등을 방랑하며 이 스승 저 스승 찾아 다니며 배웠을 것이다. 남는 것은 무엇일까? 신문에 난 그대로 ‘허무방랑승’이라고 해야 할까?
 
방랑자는 방황자와 사실상 동의어이다. 오늘날 방향도 목적도 없이 이 나라 저 나라 떠돌아 다니는 사람을 보면 ‘허무방랑자’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그들의 여행기에서 허(虛)와 무(無)를 본다.
 
내가 백권당 금강좌에 매일 앉는 이유는
 
오랜세월 방황했다. 방랑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서 안식처를 찾았다. 이제 더 이상 방황하지 않는다. 즐거움을 찾아서 이 나라 저 나라 방랑하지도 않는다. 이 작은 몸과 마음 안에서 세계의 끝에 이를 수 있다.
 
부처님 가르침에 인생의 해법이 있다. 그것은 괴로움에 대한 해법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지각하고 사유하는 육척단신의 몸 안에 세계와 세계의 발생과 세계의 소멸과 세계의 소멸로 이끄는 길이 있음을 나는 가르칩니다.”(S2.26)라고 했다. 내가 백권당 금강좌에 매일 앉아 있는 이유가 된다.
 
세상의 끝에 이르려면 몸과 마음을 관찰해야 한다. 어떻게 관찰하는가? 집착된 덩어리에 대하여 정신과 물질로 구분해서 관찰하는 것이다. 이렇게 명색으로 구분해서 ‘정신따로 물질따로’ 새기면 괴로움은 일어나지 않는다. 세계의 끝에 이를 수 있다.
 
수행한다고 하여 방석에 앉아 있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걷는 것도 수행이고 서 있는 것도 수행이다. 누워 있는 것도 수행이다. 그래서 행, 주, 좌, 와에 대하여 행선, 주선, 좌선, 와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일상에서도 수행이 되어야 한다. 행선은 일상에서의 수행으로 가는 중간단계라고 볼 수 있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하는 것도 수행이다. 어떻게 수행하는가? 명색으로 구분해서 관찰하는 것이다.
 
가르침을 기억해서 새기는 것도 싸띠(sati)
 
어제 금요니까야모임이 있었다. 전철과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전철 탈 때 마스크를 했다. 나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전철에서 스마트폰을 보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무료해서 글을 보았다. 그리고 글을 썼다. 그러나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단지 어제 보았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 실려 있는 내용을 떠올렸다. 이런 것도 싸띠(sati)에 해당될 것이다.
 
가르침을 기억해서 새기는 것도 싸띠로 본다. 행선이나 좌선할 때 움직임을 새기는 것만이 싸띠가 아님을 말한다. 왜 그런가?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이는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이 멀리 떠나 그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면, 그때 새김의 깨달음의 고리가 시작된다.”(S46.3)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싸띠에 대하여 새김이라고 말한다. 요즘 유행하는 마음챙김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마음챙김이라는 말은 기억을 제1의 의미로 하는 싸띠 번역어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 가지 새김이 있다. 수행용어로서의 새김,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으로서의 새김, 그리고 체험한 것을 기억하는 것으로의 새김을 말한다. 이는 내가 생각해 낸 것이다. 남들도 이렇게 생각하는지 알 수 없다. 이 세 가지에 마음챙김이라는 용어를 대입하면 맞지 않는다. 이는 ‘가르침을 마음챙김한다’라든가, ‘체험을 마음챙김한다’라는 말은 적합하지 않다.
 
전철 안에서 눈을 감고 논서에서 보았던 것을 떠올려 보았다. 이런 행위도 싸띠(새김)에 해당된다. 경전에서 “그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면”(S46.3)이라는 말로 확인 된다. 이렇게 본다면 경전을 읽고, 사유하고, 기억하는 것도 새김에 해당된다.
 
일상에서 어떻게 해야 새김을 유지할 수 있을까?
 
일상에서도 새김을 유지할 수 있다. 밥 먹을 때 밥을 먹는 줄 아는 것이다. 옷을 입을 때는 옷을 입을 줄 아는 것이다. 오줌 눌 때 오줌 눈다고 안다면 새김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먹고 마시고 소화시키고 맛보는 것을 올바로 알아차리고 대변보고 소변보는 것을 올바로 알아차리고”(D22)라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일상에서 어느 것 하나 새김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이 없다.
 
언젠가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새김이 항상 유지 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늘 깨어있음을 말한다. 처음에는 이런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일상에서 어떻게 늘 깨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불가능한 일로 보였다.
 
어제 전철 타고 가다가 깨달은 것이 있다. 어쩌면 나도 일상에서 새김이 늘 유지될 수 있을 가능성이 있음을 생각한 것이다. 어떻게 가능한가? 일체 언어적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이다.
 
이번 우안거가 시작되면서 음악을 듣지 않게 되었다. 평소 즐겨 듣던 이미우이음악을 끊은 것이다. 듣기만 해도 신심과 기쁨이 넘쳐 나고 마음의 평화와 안정을 주는 음악인데 끊은 것이다. 이런 것도 언어적 행위를 차단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유튜브를 보지 않은지 6일째 되는 날이다. 이전에는 오후와 저녁에 정치유튜브를 즐겨 들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내가 ‘가스라이팅’ 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바로 끊어 버렸다. 이런 것도 언어적 행위를 차단한 것이 된다.
 
일상에서 언어적 행위를 차단하면 마음을 빼앗기기 않는다. 영화나 드라마, 음악, 유튜브 등을 보거나 듣게 되면 거기에 마음을 빼앗긴다. 나의 마음이 아니다. 경전에서는 악마의 영역에 가 있다고 본다.
 
일상에서도 항상 새김이 가능함을 알게 되었다. 이는 언어적 행위를 일체 하지 않는 것이다. 가능하면 말도 하지 않아야 한다. 가장 좋은 환경은 선원에서 수행자로 사는 것이다.
 
선원에 가면 할 일이 없다. 수행하는 것 외에 할 일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무엇보다 선원에서는 묵언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하루 종일  새김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늘 깨어 있는 삶을 살게 하는 것이다.
 
전철 타고 가다가 일상에서도 사띠(새김)가 가능함을 알게 되었다. 일체 언어적 행위를 하지 않으면 새김이 유지된다. 그런데 이런 새김에는 부처님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는 것도 해당된다는 것이다. 전철에서 눈을 감고 어제 보았던 마하시 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가운데 일부를 떠올린 것도 새김에 해당된다.
 
명색으로 먹은 미소(된장)라멘
 
구파발역에서 내렸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가 있는 삼송테크노밸리까지는 버스로 세 정거장 가면 된다. 롯데몰에서 식사를 하고 들어 가고자 했다.
 
저녁에 무엇을 먹어야 할까? 롯데몰 식당가에 있는 메뉴를 보니 대부분 만원이 넘는다. 간단히 먹고 싶었다. 멸치잔치국수가 있는데 만원이다. 일식식당에 가니 ‘미소(된장)라멘’이 있었다.
 
새로운 것도 먹어 보아야 한다. 늘 먹던 것만 먹는다면 삶의 변화가 없는 것과 같다. 된장이라는 말에 미소라멘을 선택했다. 한그릇에 만원이다.
 
라면 한그릇에 만원이다. 그러나 먹어 보니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이런 라면을 한번도 먹어 본적이 없다. 꼬불꼬불한 면발을 생각했으나 여지없이 빗나갔다. 마치 꼬들꼬들한 국수 같은 느낌이 들었다. 더구나 돼지고기 수육도 두 점도 들어 있었다.
 

 
미소라멘을 먹을 때 ‘먹는 나는 없다’라고 생각했다.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가? 정신과 물질로 구분해서 보았기 때문이다. 명색이 먹은 것이다.
 
먹을 때 오감으로 먹는다. 먹을 때 오로지 맛 하나로 먹지는 않는다. 눈과, 귀, 코, 혀, 입 등 오감이 총동원 된다. 어쩌면 법의 성품을 보기에 좋은 기회인지 모른다.
 
음식을 눈으로 볼 때 보는 것은 물질이고 이를 아는 것은 정신이다. 위빠사나 수행자라면 양자를 새겨야 한다. 보여지는 형상을 물질이라고 새기고, 보는 앎을 정신이리고 새기는 것이다. 이렇게 물질과 정신을 각각 따로따로 새겼을 때 먹는 나는 없게 된다. 명색이 먹는 것이다.
 
음식을 입에 넣을 때 맛을 본다. 여기서 맛은 물질이다. 맛을 아는 것은 정신이다. 이 양자를 각각 따로따로 새겨야 한다. 이렇게 물질과 정신을 구분하여 따로따로 새겼을 때 먹는 나는 없게 된다. 명색이 먹는 것이다.
 
사람들은 음식을 먹을 때 “아, 맛 좋다.”라고 말한다. 먹방채널을 보면 엄지손가락을 추켜 세우며 최고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범부들이 먹는 것이다. 범부들은 ‘내가 먹는다’라고 말한다.
 
수행자는 음식을 먹을 때도 사띠(새김)해야 한다. 어떻게 새김하는가? 정신과 물질로 구분하여 새기는 것이다. 이렇게 새겼을 때 “아, 맛 좋다.”라는 말이 나올 수 없다. 먹는 것 하나만 보아도 그 사람이 깨달은 사람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
 
존재론에는 답이 없다
 
페이스북을 보면 스님이 음식 먹는 모습을 올린 장면을 볼 수 있다. 마치 먹방채널을 보는 것 같다. 어느 스님은 차를 좋아한다. 늘 차에 대한 포스팅만한다.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맛이라는 감각적 욕망을 드러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깨달은 사람과 깨닫지 못한 사람을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자칭타칭 깨달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책상을 탕탕 치며 “이것입니다, 이것 뿐입니다. 이렇게 명백히 드러나지 않습니까?”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론이 없다. 수행도 없다. 마치 벙어리가 답답함을 드러내는 것 같다.
 
어떤 선사는 평상심시 도를 말한다. 배 고프면 먹을 줄 아는 놈이 있고, 졸리면 자는 줄 아는 놈이 있다고 말한다. 그 놈은 다름 아닌 소소영영한 것이다. 나의 배후에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모든 것을 지켜 본다고 말한다. 이른바 관찰자이다.
 
화두 가운데 ‘부모미생전본래면목’이 있다. 내가 생겨나기도 전에 본래 있던 놈이 있다는 것이다. 원래 있는 것이라고 한다. 이를 본마음, 본래면목, 참나 등으로 말한다. 혜민스님은 자신의 ‘깨달음이란?’라는 시에서 관세음보살이라고 했다. 정말 그 놈은 있는 것일까?
 
흔히 이런 말이 있다. 있다고 말하면 상견에 빠지고, 없다고 말하면 단견에 빠진다는 말이다. 이는 영원주의와 허무주의에 대한 것이다. 또한 이는 존재론에 대한 것이다.
 
존재론에는 답이 없다. 있다고 하면 상견에 빠지고, 없다고 하면 단견에 빠지니 답이 없는 것이다. 부모미생전본래면목이라 하여 본래부터 있는 것이 있다고 하는데 이를 찾는다면 평생 찾아도 못 찾게 될 것이다. 왜 그런가? 스스로 독립적으로 나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시작을 알 수 없는 윤회
 
세상에 그 어떤 것도 홀로 존재하지 못한다. 자연인이 심산유곡에서 홀로 살아가지만 완전하게 자급자족하는 것은 아니다. 나의 배후에 관찰자가 있다고 하는데 그런 놈이 있다면 언어적 명칭으로만 있게 될 것이다. 그 어떤 것도 관계망 없이 존재할 수 없다. 오로지 관계속에서만 존재한다. 이것이 연기법이다.
 
미소라면을 먹을 때 먹는 나는 없다고 보았다. 그 대신에 명색이 먹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을 하자 내가 큰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생각되었다. 갑자기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았다. 이런 것도 깨달음일까?
 
밥을 먹을 때 먹는 나는 없다. 밥을 먹을 때 명색으로 구분해서 새기면 나는 없게 된다. 명색이 먹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연기법적으로 먹는 것이다. 그제 읽은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 이런 게송이 있다.
 
 
Kammassa kārako natthi, vipākassa ca vedako;
Suddhadhammā pavattanti, evetaṁ sammadassanaṁ.
Evaṁ kamme vipāke ca, vattamāne sahetuke;
Bījarukkhādikānaṁva, pubbā kośī na nāyati;
Anāgatepi saṁsāre, appavatti na dissati.(Vism.19.20)
 
(대역)
 
“선업 불선업을
행하는 이, 개인, 중생도 없고,
좋고 나쁜 과보를 경험하는 이, 개인, 중생도 없다.
개인, 중생 등과 섞이지 않은,
순수하게 업과 과보라는 법들만
번갈아 돌아가면서 끊임없이 생겨날 뿐이니,
이와 같이 이것이, 이렇게 보는 것이
틀리지 않은, 바른 앎과 봄이다.
이와 같이, 즉 이렇게 설한 방법을 통해
직접 볼 수 있는 씨앗과 나무 등의
그 처음 시작을 알 수 없는 것처럼
의지하는 과보라는
원인과 함께 생겨나는 업과
업이라고 하는
원인과 함께 생겨나는 과보의,
업과 과보라고 하는 정신·물질 연속의
처음 시작을 알 수 없다.
미래에서도 정신·물질의 연속인 윤회는
원인인 업을 도의 지혜로 아직 다 잠재울 수 없는 한
계속 있던 대로 여전히 존재한다.
업과 과보의 연속이 생겨나지 않음 = 끊어짐을
볼 수 없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2권, 164-165쪽)
 
 
청정도론에 실려 있는 게송을 마하시 사야도가 대역한 것이다. 미얀마어로 대역된 것을 다시 일창스님이 한글로 대역해 놓았다. 대역에서 빠알리어는 생략했다.
 
게송을 보면 윤회에 대한 것이다.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여 관찰 했을 때 조건발생하는 것임을 알게 되는데 이를 삼세에 적용한 것이다.
 
게송에서 ‘씨앗과 나무’가 나온다. 이는 나무와 씨앗의 비유에 대한 것이다. 마치 닭과 달걀의 비유와 같은 것이다. 어느 것이 먼저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업과 과보라고 하는 정신·물질 연속의 처음 시작을 알 수 없다.” (Vism.19.20)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윤회의 시작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마하시 사야도는 청정도론 게송을 비유를 들어 설명해 놓았다. 씨앗과 나무의 비유에 대하여 “이러한 방법으로 달걀과 닭의 처음을 찾을 수 없는 것처럼 “그와 마찬가지로 지금 생의 결과가 생겨나 드러남이 있기 때문에 그 결과의 원인인 업도 과거 생에 있었다. 그 업의 의지처인 과보법도 그 생에서 생겨났었다. 그 과보의 원인인 업도 그보다 더 과거 생에 있었다. 이러한 방법으로 정신·물질의 연속이라고 하는 윤회의 그 처음, 시작을 찾을 수 없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2권, 168쪽)라고 설명해 놓았다.
 
두 가지 이론이 상충될 때
 
나는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 나는 어디서 왔을까? 이런 질문에는 답이 없다. 왜 그런가? 존재론적 질문에는 본래 답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맛지마니까야 63번경에서도 알 수 있다.
 
말룽끼야뿟따는 존재론적 주제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세상은 영원하다든가, 세상은 영원하지 않다든가,..”(M63)라는 질문을 말한다. 그러나 이런 질문에 부처님은 답을 하지 않았다. 존재론적 질문에는 답이 없기 때문이다. 그 대신 연기법을 설해 주었다.
 
말룽끼야뿟따가 의문한 것은 삼세에 대한 것이다. 이는 부처님 당시에 유행하던 외도의 견해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세상을 영원하다고 보는 것은 영원주의에 대한 것이고 세상은 영원하지 않다고 보는 것은 허무주의적 견해이다. 부처님의 연기법에 따르면 있을 수 없는 삿된 견해에 지나지 않는다.
 
유튜브에서 말룽끼야뿟따의 18가지 질문에 대하여 전남대 L교수의 영상을 본 바 있다. 놀랍게도 L교수는 말룽끼야뿟따의 의문에 대하여 윤회에 대한 질문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윤회를 말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는 명백히 잘못된 것이다. 경전을 잘못 해석한 것이다. 자신이 주장하는 이론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경전을 자신의 입맛대로 해석한 것이다.
 
유명하다고 해서 다 훌륭한 사람은 아니다. 불교학교수라고 해서 다 맞는 것은 아니다. L교수의 주장을 보면 많은 사람들을 나락으로 이끌고 간다. 윤회를 부정함으로 인하여 사람들에게 오랜세월 고통을 안겨 줄 것이다.
 
L교수는 자신만의 독특한 이론이 있다. 나마루빠에 대하여 정신과 물질이 아닌 이름과 형태로 보는 것이다. 또한 오온과 육처에 대하여 인식된 것이라고 본다. 그래서 대승의 일체유심조를 말한다. 초기불교를 연구하는 학자가 대승과 접목을 시도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빠알리삼장에 있는 논서와 충돌이 일어난다.
 
L교수는 삼세양중인과를 부정한다. 삼세양중인과는 아비담마 논서에도 있고 청정도론에도 있다. 오랜 세월 경장과 율장과 함께 논장으로서 빠알리삼장으로 구성되어 전승되어 온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이론과 상충이 일어나자 아비담마와 청정도론을 격렬히 비난한다. 자신이 해석한 것이 맞다는 것이다.
 
맛지마니까야에서 말룽끼야뿟따의 삼세에 대한 의문 18가지는 외도 견해에 대한 것이다. 그럼에도 L교수는  이를 윤회에 대한 것이라고 보아 부처님은 삼세에 걸친 윤회를 말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삼세양중인과를 강력히 부정하는 것에서 나타난다.
 
두 가지 이론이 상충될 때 누구의 것을 따라야 할까? 빠알리삼장으로 전승되어온 논서를 따라야 할 것이다. 자신이 새롭게 해석했다는 이론을 따른다면 오랜세월 불행과 고통이 따를지 모른다.
 
창조주를 제1의 원인으로 했을 때
 
마하시 사야도는 청정도론 게송을 설명하면서 나무와 씨앗의 비유를 들어 삼세양중인과에 대하여 설명했다. 이는 윤회의 시작을 알 수 없음을 말한다. 니까야에서도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 없다.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 시작을 알 수 없다.”라고 했다.
 
윤회의 시작을 알 수 없는 것은 무명과 갈애로 인한 것이다. 무명과 갈애가 있는 한 세세생생 윤회할 수밖에 없다. 이를 나무와 씨앗, 닭과 달걀의 비유로 설명했다. 이를 마하시 사야도는 정신과 물질의 시작을 알 수 없다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윤회는 있어도 윤회하는 자는 없음을 말한다. 오로지 정신과 물질만이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는 “업과 과보의 연속이 생겨나지 않음 = 끊어짐을 볼 수 없다.”(Vism.19.20)라고 했다.
 
기독교인들은 창조론을 믿는다. 과연 타당할까? 불교적 관점에서는 있을 수 없다. 왜 그런가? 마하시 사야도는 이렇게 설명해 놓았다.
 
 
“여기에서 ‘창조주가 창조했기 때문에 처음 생겨났다’라고 해 보자. 그 창조주는 누가 창조했는가? 그는 언제, 무엇 때문에 생겨났는가? 이러 한 생각 등으로 그 근본, 뿌리를 거듭 찾아보아야 한다. 그러면 그 처음을 찾아볼 수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따라서 ‘창조주가 처음 창조했다’ 라고 하는 것은 믿기에 적당하지 않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2권, 167쪽)
 
 
유일신교를 믿는 사람들은 이 세상의 시작을 창조주로 보고 있다. 창조주가 원인이 된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것도 원인 없이 생겨나지 않는다. 원인 없이 생겨난 것은 언어적 명칭일 것이다.
 
언어적 명칭은 생멸이 없다. 그래서 실재하지 않는다. 창조주를 제1의 원인으로 하고 있다면 이는 언어적 개념에 따른 것이다. 그 어떤 것도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오로지 관계속에서만 존재한다. 연기적 관계를 말한다. 부처님이 말룽끼야뿟따의 18가지 의문에 대하여 연기법으로 설명한 이유가 된다. 연기법으로 사견을 논파한 것이다.
 
청정도론 게송을 보면 가슴 설레인다. 스리랑카에서 5세기에 붓다고사에 의해서 편역된 것이다. 이후 얼마나 많은 수행자들의 가슴을 설레게 만들었을까? 그런데 이 게송은 삼세에 대한 의혹을 극복하기 위해 설해졌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마하시 사야도는 “죽음과 재생연결의 사라지는 모습, 생겨나는 모습을 이 정도로 알고 보고 이해하면 “과거, 미래, 현재의 모든 법들을 원인과 함께 알고 보았다.”라고 말할 수 있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2권, 171쪽)라고 했다.
 
업과 과보라는 정신-물질법이 번갈아 생겨날 뿐
 
그 사람이 깨달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하나의 방법이 있다. 그것은 연기법적으로 말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삼세에 걸쳐서 인과로 설명하면 깨달은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큰 깨달음은 아니다. 이제 겨우 정신과 물질의 조건발생에 대하여 깨달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을 ‘쭐라소따빤나(cūḷasotāpanna)’라고 한다. 수다원에 이르기 전단계를 말한다. 작은 수다원이다.
 
자칭타칭 깨달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나의 배후에 관찰자가 있다고 말한다. 이를 ‘부모미생전본래면목’이라고도 말한다. 이런 말은 바이블에도 있다. 요한복음 1장에 있는 “그분은 세상이 창조되기도 전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라는 말이다.
 
진제스님은 뉴욕 교회에서 ‘부모미생전본래면목’으로 법문했다. 이에 신학교수 등은 기립박수를 했다. 왜 그랬을까? 요한복음에 있는 “그분은 세상이 창조되기도 전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라는 말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길희성, 오강남과 같은 종교다원주의자들은 불교에서 말하는 참나는 하나님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한국의 선종계통 스님들은 공통적으로 나의 배후에 소소영영한 그놈이 있다고 말한다. 그 놈을 찾기 위해서 수행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그놈은 보이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런가? 본래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어떤 것도 연기적 관계 밖에서 존재하는 것은 없다. 있다면 언어적 명칭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있을 것이다.
 
볼 때 볼 줄 알고, 들을 때 들을 줄 아는 그 놈이 있다고 한다. 가짜 나가 아닌 진짜 나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을 알면 사견이 된다. 그 어떤 것이든지 홀로 존재하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당연히 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나라는 존재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왜 그런가?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연기적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빤냣띠, 즉 언어적 개념에 지나지 않은 것임을 알게 된다. 있다면 정신과 물질뿐이다. 그래서 “근본 원인인 업이라는 조건과 뒷받침해 주는 요인인 과보라는 조건, 이 두 조건 때문에 업과 과보라는 정신-물질 법, 그 자체만 번갈아 가며 끊임 없이 생겨난다. (Hetusambhārapaccaya suddhadhamma pavattanti)”(Vism.19.20,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2권, 170쪽 대역)라고 했다.
 
명색이 먹고 명색이 마시고
 
나는 밥을 먹는다. 내가 먹는 것일까? 위빠사나 수행자라면 ‘명색이 먹는다’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는 집착된 무더기를 정신과 물질로 구분해서 관찰하고, 또한 정신과 물질의 조건을 파악한 것에 따른다. 그 어디를 찾아보아도 나는 없다. 있다면 여기 명색(정신과 물질)만 있을 뿐이다.
 
길을 가도 명색이 가는 것이고, 밥을 먹어도 명색이 먹는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내가 먹는다고 말한다. 이는 ‘오취온이 먹는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달리 말하면 ‘탐욕이 먹는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위빠사나 수행자라면 오취온에서 집착이 떨어져 나갔기 때문에 오온이 먹는 것이 된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명색이 먹는 것이 된다.
 
새김이 없으면 정신 나간 것
 
금요니까야모임 가는 길에 전철에서 스마트폰을 보지 않았다. 사람들은 대부분 고개를 숙이고 스마트폰을 보고 있었다. 눈을 감고 논서의 내용을 떠 올렸다. 이런 것도 싸띠(새김)이다.
 
구파발역 롯데몰에서 미소라면을 먹을 때 정신과 물질을 구분해서 보고자 했다. 이럴 때 내가 먹는 것이 아닌 것이 되었다. 명색이 먹는 것이 되었다. 이런 것도 새김이 있는 것이다.
 
일상에서 새김이 있어야 한다. 새김이 없으면 정신이 나간 것이나 다름 없다. 선원에서는 새김이 유지 되기 좋은 환경이다. 일체 언어적 행위가 없기 때문이다.
 
일상에서 새김을 유지하려면 일체 언어적 행위를 하지 말아야 한다. 음악을 듣지 않고 유튜브를 듣지 않으니 나의 삶을 사는 것 같다. 이제야 제대로 사는 것 같다. 집착의 대상에 시간을 빼앗기지 않으니 시간부자가 된 것 같다. 이런 것도 수행의 진전일 것이다. 작은 수다원이 되고자 한다.
 
 
2024-10-12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