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자기연민에 빠졌을 때

담마다사 이병욱 2024. 3. 24. 08:41

자기연민에 빠졌을 때
 
 
치매부모에 효자 없다는 말이 있다. 치매에 걸린 부모 간병을 하다 보면 한계에 이르기 때문이다. 이런 때 요양원에 보낸다. 그런 자식의 마음은 어떠할까? 어쩌면 자기연민을 느낄지 모른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다 행복해 보인다. 거리에 돌아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불행한 사람들은 없는 것 같다. TV나 유튜브를 보아도 온통 즐겁고 행복한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한꺼풀만 들어 가보면 사연이 있다.
 
대부분 사람들은 고민이 있다. 그것도 말 못할 고민이 있을 수 있다. 부모가 치매에 걸렸다면 말 못할 고민이다. 부모가 불쌍하기도 하지만 자신의 처지도 불쌍하게 생각한다. 자기연민을 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근심걱정 없는 사람 없다. 누구나 하나 이상 말 못할 고민을 가지고 있다. 다만 표를 내지 않을 뿐이다. 이런 사람들은 어떻게 고통을 극복하며 살아갈까?
 
부처님은 이 세상에 대하여 고통의 바다라고 했다. 이는 초기경전에서 정형구로 나오는 문구를 보면 알 수 있다. 그것은 “태어남도 괴로움이고 늙는 것도 병드는 것도 괴로움이고 죽는 것도 괴로움이고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도 괴로움이다.”(S56.11)라는 말이다. 고성제,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를 말한다.
 
누군가 이 세상을 아름답다고 말한다. 정말 그 사람은 이 세상이 행복하고 즐겁고 아름답게 보일까? 그러나 일시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느낌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조건이 바뀌면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 변화에 따른 괴로움이 생겨난다.
 
백권당 가는 길에 안양천을 건넌다. 비산사거리 가까이 있는 안양천이다. 어느날 징검다리를 건너다가 다리 하나가 없는 비둘기를 발견했다. 비둘기는 당연히 다리가 두 개 있는 줄 알았는데 하나짜리도 있었던 것이다. 비둘기는 어쩌다가 불구가 되었을까?
 

 
종종 명학공원으로 산책 나간다. 머리를 식히거나 기분전환하거나 운동하기 위해서 간다. 그런데 공원입구에서 발가락이 잘린 비둘기를 보았다는 것이다. 여러 개 발가락 중에 온전한 것은 한두 개에 지나지 않았다. 비둘기는 어쩌다가 발가락이 잘리게 되었을까?
 

 
불구가 된 비둘기와 발가락이 잘린 비둘기를 보았다. 우연히 발견한 것이다. 이는 비둘기가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본다.
 
불구가 된 비둘기는 한쪽 발로 깡총깡총 뛰며 먹이를 찾는다. 발가락이 잘린 비둘기 역시 뒤뚱뒤뚱하며 먹이를 찾는다. 그러나 하늘을 날아 갈 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새는 날아야 한다. 날지도 못하는 새는 새라고 말할 수 없다. 다리가 불구인 비둘기나 발가락이 잘린 비둘기는 지상에서 불편하게 살지만 날 수 있다. 나는 것 그것 하나로 모든 것이 커버 되는 것이다.
 
사람이라면 지혜가 있어야 한다. 지혜 없는 사람을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 사람이 지혜가 없다면 불구가 된 것이나 다름 없다. 반드시 육체적 장애만 불구가 아닌 것이다.
 
종종 공원에서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어떤 이는 유모차에 개를 태우고 산책한다. 멀리서 보았을 때 아기가 타고 있는 줄 알았는데 흰색 말티즈였던 것이다. 이런 경우 배신감을 느낀다.
 
개가 존중받는 시대가 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하찮은 존재라고 여겨지는 개가 인간과 함께 살면서 가족으로 대우 받는 것이다. 그러나 목줄에 묶여 있는 개를 보면 측은지심이 발동한다.
 
이 세상에 불쌍하지 않은 존재가 없다.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은 모두 다 불쌍하기 그지 없다. 왜 그런가? 태어남 자체가 괴로움이기 때문이다. 이는 니까야경전에서 수도 없이 반복되는 “태어남도 괴로움이고 늙는 것도 병드는 것도 괴로움이고 죽는 것도 괴로움이고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도 괴로움이다.”(S56.11)정형구에 따른다.
 
 
괴로움에는 해결될 수 있는 것도 있고 해결되지 않는 것도 있다. 감기와 같이 시간 지나면 해결될 수 있는 것은 괴로움도 아니다. 문제는 시간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는 괴로움이다. 그것은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태어남, 늙음, 병드는 것, 죽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것,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이 중에서 가장 괴로운 것은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남에 따른 괴로움이 있다. 이는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사건이 될 수도 있다. 부모가 치매에 걸렸다면 사랑하지 않는 사건과 만나는 것이 된다. 원수 같은 사람과 함께 사는 것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된다.
 
자기애라는 말이 있다. 자기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말한다. 자기자신을 사랑하면 남도 사랑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에 대한 사랑이 지나쳐서 오로지 자신만을 사랑한다면 자기애에 빠져 사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자기애라는 말이 있으면 자기연민이라는 말도 있을 것이다. 이는 자기자신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다. 자신이 불쌍한 것은 어떤 상태를 말한가? 그것은 괴로움에 처해 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것은 육체적 고통이 될 수도 있고 정신적 괴로움이 될 수도 있다.
 
자기애는 자애와 가깝고 자기연민은 연민과 가깝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말은 자아를 뜻하는 자기라는 말이다. 항상 내가 빠지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을 세웠을 때 자기애가 되고 자기연민이 된다.
 
불교에서는 자비의 마음을 내라고 한다. 여기서 자비는 자애와 연민의 합성어이다. 이때 자애는 “모든 존재가 행복하기를!”라며 바라는 아름다운 마음이다. 연민은 “모든 존재가 고통에서 벗어나기를!”라고 바라는 아름다운 마음이다.
 
자애가 실패할 때가 있다. 그것은 자애가 애정으로 변질 될 때이다. 그래서 자애의 마음을 낼 때에는 연인을 대상으로 하지 말라고 했다.
 
연민이 실패할 때가 있다. 그것은 연민이 근심걱정으로 변질될 때이다. 이는 상대방의 불행에 대하여 노심초사하는 것을 말한다. 연민이 번뇌가 되었을 때 실패하는 것으로 본다.
 
자애와 연민은 모든 존재가 대상이 된다. 자신도 대상이 된다. 그래서 자애의 마음을 낼 때는 먼저 자신에게 내야 한다. 자신에게 “내가 행복하기를!”라며 자애의 마음을 내는 것이다. 그 다음에 가까운 사람, 먼 사람, 인연 없는 존재를 대상으로 확대한다.
 
연민의 마음을 낼 때 역시 자신이 먼저 대상이 된다. 그래서 “내가 고통에서 벗어나기를!”라며 연민의 마음을 내야 한다. 그 다음에 가까운 사람, 먼 사람, 인연 없는 모든 존재를 대상으로 확대하는 것이다.
 
자애와 연민은 아름다운 마음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기쁨과 평정과 함께 사무량심이라고 한다. 모든 존재에 대하여 한량없는 자애와 연민의 마음을 내라는 것이다. 차별 없이 내는 것을 말한다.
 
자기애와 빠진 사람과 자기연민에 빠진 사람이 있다. 이는 양극단이다. 자기애는 이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행복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자기연민은 이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불행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자기애와 자기연민에 빠진 사람은 자아라는 감옥에서 갇혀 사는 사람과 같다. 이는 오온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는 것과 같다. 그래서 몸을 자신의 것이라 여기고, 느낌을 자신의 것이라 여기고, 지각을 자신의 것이라 여기고, 형성을 자신의 것이라 여기고, 의식을 자신의 것이라 여긴다.
 
모든 괴로움은 오온에 대하여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이는 다름아닌 오온에 대한 집착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고성제에서 사고와 세 가지 괴로움을 언급하고 난 다음에 결론적으로 “줄여서 말하지면 다섯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이 모두 괴로움이다.”(S56.11)라고 말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괴로운 존재이다. 왜 그런가? 오취온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오온에 집착되었기 때문에 태어난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괴로울 수밖에 없다. 이런 괴로움에 대하여 “태어남도 괴로움이고 늙는 것도 병드는 것도 괴로움이고 죽는 것도 괴로움이고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도 괴로움이다.”(S56.11)라고 했다. 바로 이것이 괴로움이다.
 
연민은 괴로움에 대한 것이다. 연민의 마음을 내는 것은 괴로움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렇게 연민의 마음을 냈을 때 초선정에 들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연민의 마음이 근심걱정으로 변질되어 노심초사했을 때 번뇌가 된다. 자기연민도 이에 해당될 것이다.
 
불구가 된 비둘기를 보았을 때 연민의 마음이 일어났다. 유모차에 탄 강아지를 볼 때 연민의 마음이 일어났다. 나보다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을 보았을 때 연민의 마음이 일어난다. 그러나 연민이 근심걱정이 되어서는 안된다. 연민으로 노심초사한다면 괴로운 것이 된다. 자기연민도 이에 해당될 것이다.
 
 
집안에 치매에 걸린 사람이 있다면 자기연민에 걸릴지 모른다. 시간 지나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에 봉착해 있다면 자기연민에 빠질지 모른다.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을 때 절망할 것이다. 슬픔, 비탄, 고통, 근심을 넘어 절망하는 것이다. 이럴 때 강한 자기연민에 빠진다.
 
어떻게 해야 자기연민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것은 자기연민에서 자기를 떼어 내는 것이다. 단지 “내가 고통에서 벗어나기를!”라며 바라는 것이다. 바라는 것을 넘어서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에 빠진다면 자기연민에서 벗어날 수 없다.
 
 
괴로움이 지나치면 자기연민에 빠질 수 있다. 이럴 때는 자아개념을 빼야 한다. “내가 괴로움 없기를!”라고 바라는 것이다. 여기서 "내가"라는 말은 관습적으로 붙이는 명칭에 지나지 않는다. 동시에 “그 사람이 괴로움이 없기를!”라고 바라는 것이다.
 
자기연민은 자신을 불쌍하게 여기는 것이다. 그것도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에 빠질 정도로 불쌍하게 여기는 것이다. 자기연민에 빠졌을 때는 자기자신부터 시작하여 가장 가까운 사람, 먼 사람, 심지어 원 같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든 존재가 괴로움에서 벗어나기를!”라며 연민의 마음을 확대해 가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마음의 평정을 이루지 않을까?
 
 
2024-03-24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