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형성의 그침이 행복

담마다사 이병욱 2024. 3. 20. 10:04

형성의 그침이 행복
 
 
아침햇살 가득한 백권당의 아침이다. 보리수 잎사귀가 햇살에 빛난다. 실내에는 자야망갈라가타 음악이 울려 퍼진다. 부처님의 위대한 승리와 축복의 게송이다.
 
보리수가 부활했다. 잎파리가 모두 떨어져서 죽은 줄 알았다. 기적을 바랬다. 혹시 살아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분갈이를 해 주었다.
 
어느 날 희망을 보았다. 미세한 변화가 있었다. 돋보기로 보니 싹이 보였다. 그리고 이삼주 지났다. 지금은 하트모양에 긴 꼬리를 특징으로 하는 잎이 되었다. 보리수가 부활한 것이다!
 

 
마음이 침체되었을 때는 음악을 들어야 한다. 나에게 있어서 이미우이 음악은 치료제나 다름 없다. 마음이 차분할 때는 라따나숫따를 듣고, 마음이 심란할 때는 자야망갈라가타, 승리와 축복의 노래를 듣는다.
 
승리와 축복의 노래 클라이막스가 있다. 그것은 아홉 번째 게송으로서 유통분에 해당된다.
 
 
“Etāpi  Buddha-jaya-magala-aṭṭha-gāthā      
Yo  vācako  dinadine  sarate  matandi        
Hitvān a neka-vividhāni cupaddavāni          
Mokkha sukha adhigameyya naro sapañño”
 
에따-삐  붓다  자야  망갈라  앗타  가-타-
요 와-짜꼬  디나디네  사라떼  마딴디-  
히뜨와-아네까  위위다-니  쭈빳다와-니
목캉 수캉 아디가메이야 나로 사빤뇨”
 
이 부처님의 승리의 행운을 나타내는
여덟 게송을 매일매일 게으름 없이 독송하면
하나 아닌 수많은 불행을 극복하고
슬기로운 자 해탈과 지복 얻을 것이 옵니다.”

 
 
자야망갈라가타는 여덟 게송으로 이루어져 있다. 부처님의 위대한 승리의 기록이다. 이 여덟 게송을 매일 게으름 없이 독송하면 불행을 극복할 것이라고 한다. 이것이야말로 희망의 메시지 아닐까? 더구나 지복을 얻을 것이라고 한다.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의 게송이다.
 
이 음악을 처음 접했을 때 충만했다. 세상에 이런 음악도 있었던 것이다. 피아노 연주와 함께 이미우이 목소리가 좋았다.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는다. 이 음악을 접하니 대중가요나 클래식 등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음악이 시시하게 느껴졌다.
 
요즘 TV를 일체 보지 않는다. TV 케이블을 빼 버린 상태가 일년 가까이 된다. 뉴스는 물론 드라마, 영화도 보지 않는다. 당연히 노래도 듣지 않는다. 특히 감성을 자극하는 것은 피한다.
 
 
수행승들이여, 고귀한 님의 계율안에서 노래는 울음이다. 수행승들이여, 고귀한 님의 계율안에서 춤은 광기이다. 고귀한 님의 계율안에서 이빨을 드러내고 웃는 것은 장난이다.”(A3.103)
 
 
한국인들은 음주가무를 즐기는데 있어서 뛰어난  민족인 것 같다. 노래방에 가면 누구나 가수가 된다. 즐거운 날 노래가 빠지지 않는다.
 
지역축제 때 사람들은 목청껏 부른다. 그러나 멀리서 들으면 소음에 지나지 않는다. 때로 흐느끼는 것 같다. 그래서 “고귀한 님의 계율안에서 노래는 울음이다.”(A3.103)라고 했을 것이다.
 
한국사람들은 춤도 잘 춘다. 즐거운 날 발동이 걸리면 마구 흔들어 댄다. 성인클럽은 춤을 출 수 있는 합법적 공간이다. 그러나 수행자에게 있어서는 “춤은 광기이다.”(A3.103)라고 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수행자는 이빨을 보여서는 안된다. 그럼에도 어느 스님은 흰 이와 함께 파안대소한다. 스님을 소개하는 유튜브 섬네일에서도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환하게 웃는 장면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부처님은 “고귀한 님의 계율안에서 이빨을 드러내고 웃는 것은 장난이다.”(A3.103)라고 했다.
 
수행자는 어떤 일이 있어도 새김이 있어야 한다. 또한 알아차림이 있어야 한다. 잠을 자기 전까지, 임종순간까지 새김과 알아차림을 유지해야 한다. 그럼에도 스님이 파안대소한다면 이는 계율에 어긋나는 것이다.
 
수행자라고 해서 감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슬플 때 슬픈 느낌이 있고 즐거울 때 즐거운 느낌이 있다. 그러나 슬프다고 하여 울지 않는다. 기쁘다고 해서 파안대소 하지 않는다. 어느 경우에서든지 새김과 알아차림을 유지한다. 그럼에도 기쁨이 있을 때는 어떻게 할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이유가 있어서 기뻐한다면, 단지 미소 짓는 것으로 충분하다.”(A3.103)라고 했다.
 
크게 기뻐할 것도 없고 크게 슬퍼할 것도 없다. 기쁨과 슬픔은 느낌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느낌이든지 괴로운 것이라는 사실이다.
 
괴로운 것은 괴로운 느낌 그것 자체로 괴로운 것이다. 즐거운 것은 즐거운 느낌이 오래 유지 되지 못해서 괴로운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모든 형성된 것들은 소멸하고 말기 때문에 괴롭다는 사실이다.
 
삶은 괴롭다. 지금 즐거운 것 같지만 오래 가지 못한다. 지금 평온할지 몰라도 언제 깨질지 알 수 없다. 새김과 알아차림이 없는 평온은 ‘범부의 평온’이다.
 
수행자는 음주가무를 해서는 안된다. 또한 수행자는 형이상학적 논쟁을 해서도 안된다. 그렇다면 수행자는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가? 이는 부처님이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생각할 때는 ‘이것은 괴로움이다.’라고 생각해야 한다.”(S56.41)라고 말씀 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지금 행복한 사람이 있다. 지금 이 순간 모든 것이 다 행복하다. 이럴 때 이 사람은 “이것이 행복이다.”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수행자는 그렇게 말해서는 안된다. 수행자는 행복하다고 여겨질 때 “이것은 괴로움이다.”라고 말해야 한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형상, 소리, 냄새, 맛,
감촉, 사실의 모든 것들
원하는 것, 사랑스런 것, 마음에 드는 것,
존재라고 하는 모든 것.

그것들은 하늘사람과 인간의 세상에서

즐거운 것이라 여겨지지만
그들이 소멸될 때가 되면
그들은 그것들을 괴로운 것이라 여기네.


개체가 소멸하는 것은
거룩한 님에게는 즐거운 것이라 여겨지지만

 모든 세상을 통해 보이는 것은
거룩한 님에게 그와는 정반대가 되네.

다른 사람들이 즐겁다고 하는 것,

고귀한 님은 괴롭다고 말하고
다른 사람이 괴롭다고 말하는 것,
고귀한 님은 즐겁다고 하네.”(S35.136)
 
 
범부는 즐거운 것을 즐겁다고 말한다. 그래서 “나는 행복합니다.”라고 노래한다. 그러나 현자는 즐거운 것에 대하여 괴롭다고 말한다. 당연히 행복한 상태에 대하여 괴로운 것이라고 말한다. 왜 그런가? 행복은 일시적인 느낌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 행복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즐거운 상태에 대한 것이다. 즐거운 상태에 대하여 행복이라는 말로 표현한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언어적 명칭이다. 그런데 명칭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행복이라는 말은 개념에 지나지 않다. 그런데 개념은 항상 존재한다는 것이다. 개념화된 것은 죽지 않는다. 행복이라는 말을 비롯하여 죽음이라는 말도 개념이고 삶이라는 말도 개념이고 내생이라는 말도 개념이고 윤회라는 말도 개념이다. 그렇다고 죽음, 삶, 내생, 윤회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 세상에 개념 아닌 것이 없다. 그런데 개념은 실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실재하는 것은 생멸을 특징으로 하는데 한번 형성된 개념은 죽지 않는다. 죽지 않기 때문에 개념이다. 이렇게 본다면 개념은 진실이 아닌 것이 된다.
 
행복이라는 말은 즐거움이라는 말과 동의어이다. 즐거움은 행복이 된다. 그런데 즐거움은 즐거운 느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체로 감각적 행복을 말한다.
 
감각적 행복은 오래가지 못한다. 왜 그런가? 행복은 즐거운 느낌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느낌은 생멸한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이 행복이 영원히 계속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착각이다. 행복은 조건이 바뀌면 사라진다. 이는 행복이라는 것이 사실 알고 보면 느낌에 지나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여기서 더 나간다. 행복도 괴로움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어떠한 것이 느껴지든 그것은 괴로움 안에 있다.”(S36.11)라고 했다.
 
현자와 범부의 행복관은 다르다. 현자는 “다른 사람들이 즐겁다고 하는 것, 고귀한 님은 괴롭다고 말한다.”(S35.136)라고 했다. 이 말은 “어떠한 것이 느껴지든 그것은 괴로움 안에 있다.”(S36.11)라고 말한 것과 같다. 왜 그런가? 이는 “모든 형성된 것은 무상하다.”(S35.136)라는 사실 때문이다.
 
최상의 행복은 무엇일까? 이는 법구경에서 열반이 최상의 행복이다.(nibbāna parama sukha)”(Dhp.204)열반이다.”라는 말로 알 수 있다. 이것이 현자의 행복이다.
 
누구나 최상의 행복을 바란다. 범부에게 최상의 행복은 감각적 즐거움이기 쉽다. 또한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무덤덤한 상태이기 쉽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도 행복일 것이다.
 
범부의 행복은 깨지기 쉽다. 조건이 바뀌면 언제든지 사라지기 때문에 항상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범부들은 행복한 느낌에 대하여 목숨을 건다. 행복한 느낌에 대한 것이라면 “죽어도 좋아!”라며 목숨 걸 듯 하는 것이다. 그러나 즐거운 느낌은 깨지기 쉬운 그릇과도 같은 것이다. 범부의 평온 역시 깨지기 쉽다. 그렇다면 깨지지 않은 행복은 없을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수행승이여, 여섯 가지 고요함은 이와 같다. 첫 번째 선정에 도달한 자에게는 언어가 고요해지고, 두 번째 선정에 도달한 자에게는 사유와 숙고가 고요해지고, 세 번째 선정에 도달한 자에게는 희열이 고요해지고, 네 번째 선정에 도달한 자에게는 호흡이 고요해지고, 지각과 느낌의 소멸에 도달한 자에게는 지각과 느낌이 고요해진다. 번뇌가 부서진 수행승에게는 탐욕도 고요해지고 성냄도 고요해 지고 어리석음도 고요해진다.”(S36.11)
 
 
형성의 그침이 행복이다. 이는 선정으로 설명된다. 사유와 숙고라는 언어적 형성이 그치면 행복이다. 호흡이라는 신체적 형성이 그치면 행복이다. 진정한 행복은 지각과 느낌이라는 정신적 형성의 그침이다. 이는 다름 아닌 열반의 행복이다.
 
행복은 즐거운 느낌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즐거운 느낌이 그치는 것도 행복이라고 했다. 이는 행복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벗이여, 바로 거기에 느낌이 없는 것이 행복입니다.”(A9.34)라고 했다.
 
최상의 행복은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고요이다. 그래서 “번뇌가 부서진 수행승에게는 탐욕도 고요해지고 성냄도 고요해 지고 어리석음도 고요해진다.”(S36.11)라고 했다.
 
고요를 즐긴다. 밤 중에 홀로 있는 시간이 가장 행복하다. 모두 잠 들어 있을 때 고요는 최상의 행복이다. 선정에서 행복도 이와 다르지 않다. 이런 행복은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평정한 상태를 말한다.
 
누구나 행복을 바란다. 행복하려거든 먼저 괴로움을 알아야 한다. 형성된 모든 것에 대하여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뼈저리게 알아야 한다. 형성된 모든 것들에 대하여 벗어났을 때 진정한 행복을 맛본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게송이 예로부터 회자 되었을 것이다.
 
 
모든 조건지어진 것은 무상하니,
생겨나고 소멸하는 법이네.
생겨나고 또한 소멸하는 것,
그것을 그치는 것이 행복이네.”(S15.20)
 
 
2024-03-20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