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은

담마다사 이병욱 2024. 3. 27. 10:46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은
 
 
이미우이 음악이 흐르는 백권당의 아침이다. 오늘 따라 아침햇살이 찬란하다. 이제 보리수는 완전히 살아 났다. 하트모양에 긴 꼬리를 특징으로 하는 잎파리가  본모습을 드러냈다.
 

 
예 뿍갈라- 앗타사땅 빠삿타 짯따-리 에따-니 유가-니 혼띠 떼 닥키네이야- 수가땃사 사-와까-”무슨 주문을 외는 것 같다. 이 말은 우리말로 “네 쌍으로 여덟이 되는 사람들이 있어, 참사람으로 칭찬 받으니, 바른길로 가신님의 제자로서 공양 받을 만 하며”(Stn.227)라는 뜻이다. 이 부분에서 음악이 고조된다.
 
어떤 노래이든지 클라이막스가 있다. 잔잔히 음악이 흐르다가 어느 순간 고조된다. 노래 아침이슬도 그렇다.
 
아침이슬은 처음에는 나지막하게 진행된다. “나 이제 가노라”라는 부분에 이르러 고조된다. 그리고 “저 거친 광야에”이르러 절정이 된다. 이미우이의 라따나경 음악도 그렇다. 사향사과 또는 사쌍팔배의 성자를 찬탄하는 부분에 이르러 점차 고조 되면서 다음 게송에서 절정에 이른다.
 
아침에는 커피를 마셔야 한다. 아침에 마시는 커피는 삶의 활력을 주기에 충분하다. 카페에서 파는 커피가 아니다. 손수 절구질해서 만든 절구커피이다.
 
절구질 할 때 커피향이 난다. 절구질 하는 과정에서 커피콩이 으깨지는데 이때 미세한 분말이 튄다. 라일락꽃 향기가 좋다고 하지만 절구질할 때 나는 커피향만 못한 것 같다.
 
커피에는 세 가지 맛이 있다. 쓴맛, 단맛, 신맛, 이렇게 세 가지가 있다. 이 중에서 어느 맛이 강하느냐에 따라 등급이 달라진다.
 
절구커피 맛은 어떠할까? 쓴맛, 단맛, 신맛이 골고루 섞여 있다. 어떨 때는 쓴맛이지만 또 어떨 때는 단맛이고, 또 어떨 때는 신맛이다. 세 가지 맛이 오묘한 조화를 이룬다.
 
쇼펜하우어의 결혼 포기 이유
 
늘 혼자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혼자 일하는 것도 이유가 된다. 직장생활을 하지 않고 자영업, 일인사업을 하기 때문에 늘 혼자 앉아 있는 것이다.
 
사람은 혼자서 살 수 없다. 집에 가면 가족이 있다. 직장에 가면 동료가 있다. 그러나 가정도 없고 직장도 없는 사람도 있다. 늘 혼자 사는 사람이다.
 
혼자 사는 중에는 출가수행자도 있다. 토굴에서 나홀로 수행하는 수행자는 혼자 산다. 그런데 TV를 보면 혼자서도 잘 사는 것 같다. 마치 ‘자연인’처럼 자연을 벗삼아 도를 닦는 것이다.
 
혼자 사는 것에 대한 예찬을 발견했다. 오늘 새벽 페이스북을 보다가 어느 페친(페이스북친구)가 공유해 놓은 글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어떤 글인가? 이는 쇼펜하우어의 혼자 사는 이유에 대한 것이다. 이런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결혼 포기 이유로 두 가지를 들었다. 첫째, 가정을 꾸리는 데 필요한 수단을 충분히 보유했다고 생각하지 못했고, 둘째, 고독을 요구하는 천직이 결혼과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그는 결혼을 전쟁과 곤경으로 보았다. 빵과 버터에만 관심을 쏟는 사람은 창조적 개인이 될 수 없고, 결혼하면 성가신 가정사에 얽매여 생업 종사자로 전락하고, 여가 시간은 아내에게 쓰느라 소진한다고 생각했다.”
 
 
이 글은 페이스북 친구가 작성한 글이다. 홍성광 선생의 ‘쇼펜하우어의 사랑’이라는 글을 읽고 내용을 요약한 글이다.
 
요즘 유튜브에 쇼펜하우어 글이 자주 눈에 띈다. 쇼펜하우어의 얼굴과 함께 소개 되는 글을 보면 ‘혼자 살아라’라는 류의 글을 말한다. 호기심으로 몇 번 들어 보았다. 그러나 지나치게 자주 유튜브에서 언급되어 있어서 식상하게 되었다.
 
오늘날 유튜브는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 듯하다. 너도나도 명사들의 글을 올려 놓는다. 나레이션은 인공지능이 대신한다. 명사들의 주옥 같은 이야기를 인공지능이 읽어 줄 때 조회수는 올라 갈 것이다. 그로 인한 수익도 발생할 것이다.
 
유튜브에서 가장 많이 자주 인용되는 글은 쇼펜하우어가 남긴 글이다. 대개 “이것 저것 다 필요 없다. 혼자 살아라!”라는 류의 글이다. 심지어 친구도 만들지 말라고 한다. 비밀도 말하지 말고 약점도 말하지 말라고 한다. 일종의 처세술을 보는 것 같다.
 
유튜브 이곳저곳에서 쇼펜하우어 사진을 접한다. 쇼펜하우어는 1860년에 사망했다. 그때도 사진기가 있었을까? 유튜브에는 갖가지 모습과 갖가지 표정의 사진이 있다. 썸네일을 보면 “친구 필요 없다. 혼자살아라!”라는 제목이 눈길을 끈다. 이런 것도 자주 보면 식상하게 된다.
 
쇼펜하우어에 대한 간단한 전기를 읽어 보았다. 철학자는 72년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이는 여인에 대한 상처도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철학자는 한번도 결혼하지 않았다. 당연히 가정을 꾸려 보지도 않고 자식도 낳아 보지 않았다. 이런 철학자는 결혼포기에 대하여 가정을 꾸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과 고독한 삶이 가정을 갖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을 이유로 들었다.
 
사랑과 전쟁
 
결혼은 준비된 자가 하는 것이다. 결혼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 경우 인생이 험난해질 수 있다. 이는 전쟁과 같은 결혼이 될 수 있음을 말한다.
 
TV드라마에 ‘사랑과 전쟁’이 있었다. 가정을 꾸리고 사는 부부의 삶이 때로 전쟁과도 같은 삶이 된 것을 말한다. 부부가 매일 싸움 끊일 날이 없다면 사실상 전쟁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성격이 전혀 다른 남녀가 만났을 때 어떠할까? 사랑보다는 전쟁이 되기 쉽다. 왜 그런가? 세계와 세계가 맞부딪치기 때문이다. 서로 가치관이 달랐을 때 한편이 포기하지 않는 한 전쟁을 피하기는 어렵다.
 
누군가 “결혼은 전쟁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말은 “결혼은 미친 짓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상대방에 눈이 멀어 결혼을 했지만 성격차이로 인하여 세계와 세계가 부딪쳤을 때 전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쇼펜하우어는 결혼의 본질을 꿰뚫어 봤을 것이다. 이는 주변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보고서 알 수 있다. 타인이 겪은 것을 자신이 이해 했을 때 자신의 것이 되는 것과 같다. 마치 스님이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즉문즉설 시간에 해법을 내놓는 것과 같다. 간접적으로 경험해서 말하는 것이다.
 
결혼은 이점과 단점이 있다. 쇼펜하우어는 이점보다 단점을 더 중시했었던 것 같다. 이는 “결혼하면 성가신 가정사에 얽매여 생업 종사자로 전락”하는 것이 잘 말해 준다. 처자식을 부양하는 의무가 큰 것이다.
 
가장이 되면 의무가 있다. 그것은 처자식을 먹여 살리는 것이다. 직장에 나가서 싫은 소리도 듣고 묵묵히 일하는 것도 처자식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직장에서 받은 월급의 반은 욕먹고 받은 돈이다.”라는 말이 있다.
 
직장생활을 하면 직장에 메이게 된다. 근무시간에는 개인적인 일을 할 수 없다. 시간을 저당 잡힌 만큼 급여를 받는다. 집에 돌아오면 기진맥진해서 자기계발 할 여력이 없다. 더구나 처자식까지 있다면 더욱더 창조적인 일을 할 수 없다. 아마 쇼펜하우어는 이런 이유로 가정을 꾸리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가정을 만들지 않았다. 이는 창조적인 일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처자식이 있으면 자신이 하는 일에 방해가 되는 것으로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사고방식은 출가자들에게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홀로 사는 즐거움에 대한 게송
 
요즘 쌍윳따니까야를 읽고 있다. 머리맡에 있어서 자기 전에 열어 보고 자고 난 후에 열어 본다. 때로 새벽에 깼을 때도 열어 본다. 오늘 새벽 홀로 사는 즐거움에 대한 게송을 보았다.
 
하늘사람이 부처님에게 다음과 같이 시로써 말했다.
 
아들과 같이 사랑스러운 곳이 없고
소와 같은 재산이 없으며
태양과 같은 밝음이 없고,
바다는 흐름 가운데 으뜸이리.”(S1.13)
 
 
이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시로써 답했다.
 
 
자기와 같이 사랑스러운 것이 없고
곡식과 같은 재산이 없으며
지혜와 같은 밝음이 없고
비야말로 흐름 가운데 으뜸이리.”(S1.13)
 
 
하늘사람(devata: 天神)은 현실적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반면에 부처님은 출세간적 삶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이는 가정을 꾸리고 사는 자와 홀로 사는 자에 관점에 대한 차이에 대한 것이다.
 
하늘사람은 아들과 같이 사랑스러운 것이 없다고 했다. 이는 아들이 재산이기 때문이다. 부처님 당시에는 자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이는 농사지을 노동력이 확보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아들을 선호했다.
 
부처님은 하늘사람과 반대되는 말을 했다. 이는 ‘자기와 같이 사랑스러운 것이 없다’라고 말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부처님은 왜 자기자신이 가장 사랑스러운 존재라고 했을까? 이는 주석에서 “사람들이 부모를 버리고 자식을 돌보지 않더라도 자신을 돌보기 때문이다.”(Srp.I.32)라고 했다.
 
사람은 이타적일까 이기적일까? 이는 위기적 상황에서 나타난다. 죽을 정도 위기에 처했을 때 자신이 먼저 살려고 하기 때문이다. 모성애가 강하다고 하더라도 죽음의 위기에서는 자신을 보호하려 하는 것이다. 이는 부모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중병에 걸린 부모를 고려장 시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요즘은 요양원이 고려장이 되었다.
 
하늘사람은 소가 재산이라고 했다. 그러나 부처님은 곡식이 재산이라고 했다. 왜 이렇게 다르게 말했을까? 이는 “사람들이 굶으면 금이나 은이나 다른 것을 버려서라도 곡식을 얻기 때문이다.”(Srp.I.32)라는 주석으로 알 수 있다. 지금 굶주린 자에게는 소보다 곡식이 더 소중한 것이다.
 
하늘사람은 태양이 가장 밝다고 했다. 이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다. 부처님은 지혜가 가장 밝음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왜 지혜가 가장 밝은 것일까? 이는 “지혜는 백천의 세계를 밝히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가리는 어둠을 부수기 때문이다.”(Srp.I.32)라는 주석으로 알 수 있다.
 
하늘사람은 바다가 흐름 가운데 으뜸이라고 했다. 이는 바다에 물이 가장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비가 흐름가운데 으뜸이라고 했다. 왜 이렇게 말했을까? 이는 “비가 오지 않으면, 커다란 바다도 말라버리고, 비가 오면 세계는 커다란 바다로 변하기 때문이다.”(Srp.I.32)라는 주석으로 알 수 있다.
 
사랑하는 자 때문에 슬픔이 생겨나고
 
경전에서 하늘사람의 사고는 일반사람의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는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며 사는 일반사람들의 삶의 방식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출세간적 삶을 지향하는 수행자는 삶의 방식이 다르다. 더 멀리 보고, 더 높게 보고, 더 깊게 보는 것이다. 그래서 하늘사람의 주장하는 것에 대하여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게송이 있다.
 
 
아들이 있는 사람은 아들로 슬퍼하고
외양간 주인은 소 때문에 슬퍼하듯이
사람의 슬픔은 집착의 대상에서 생겨나니
집착하지 않는 자는 슬퍼할 것도 없으리.”(S1.12)
 
 
아들이 있는 사람은 아들로 인하여 슬퍼한다고 했다. 이는 자식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설령 자식 없이 홀로 사는 사람이라도 간접적 경험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슬픔은 집착의 대상 때문이라는 것이다.
 
슬픔이 생겨나는 것은 집착 대상이 있기 때문이다. 아들이 있다면 아들로 인해 슬픔이 생겨난다. 아내가 있다면 아내로 인하여 슬픔이 생겨난다. 가족이 있으면 가족으로 인하여 슬픔이 생겨난다. 그래서일까 법구경에서는 “사랑하는 자 때문에 슬픔이 생겨나고 사랑하는 자 때문에 두려움이 생견난다.”(Dhp.212)라고 했다.
 
사랑하는 자 때문에 슬픔이 생겨난다면 사랑하는 자를 만들지 말아야 할 것이다. 또한 사랑을 하지 않는 것이다. 어떤 사랑인가? 집착의 대상이 되는 사랑이다. 상대방을 자신의 소유물로 여겼을 때 집착의 대상이 되어 슬픔(soka)뿐만 아니라 비탄(parideva), 고통(dukkha), 근심(domanassa), 절망(ūpāyāsā)이 생겨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은 누구일까? 누군가 자신의 배우자에게 “이 세상에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야?”라고 물어 보았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아마 대부분 “당신을 가장 사랑해!”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대답은 상대방에게 묶이기 쉽다. 상대방에게 집착의 대상이 되는 사랑이 되는 것이다. 그 결과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날 수 있다.
 
빠알리 법명 중에 ‘말리까’가 있다. 이 법명은 주로 여성에게 선호된다. 왜 그런가? 말리까는 지혜로운 여성의 상징과도 같기 때문이다. 이는 말리까왕비가 빠세나디왕과 대화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꼬살라 국의 빠세나디왕이 왕비에게 물었다. 왕은 “말리까여, 그대에게는 그대 자신보다 더 사랑스런 다른 사람이 있소?”(S3.8)라고 물어 보았다. 왕이 이렇게 물은 것은 아마도 왕인 자신이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싶었을 것이다.
 
왕비는 현명했다. 왕이 “나를 가장 사랑해?”라는 식으로 물어 보았을 때 “대왕이시여, 나에게는 나 자신보다 더 사랑스러운 다른 사람은 없습니다.”(S3.8)라며 동문서답식으로 말했기 때문이다.

왕은 최고 권력자이다. 왕에게 잘못 말하면 죽음을 면치 못한다. 그럼에도 왕비는 자신이 가장 사랑스럽다고 말했다. 이를 어떻게 이해 해야 할까?

 
빠세나디왕은 현명했다. 왕비가 말한 것을 알아 들었기 때문이다. 왕은 “말리까여, 나에게도 나 자신보다 더 사랑스러운 다른 사람은 없소.”라고 말한 것이다. 왕도 현명했고 왕비도 현명했다. 진리를 말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누가 가장 사랑스러울까? 대부분 자신의 배우자나 자식이라고 말할 수 것이다. 그러나 지혜로운 자는 자기자신이 가장 사랑스러운 자라고 말한다. 왜 그럴까? 이는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알 수 있다.
 
 
마음 어느 곳으로 돌아다녀도
자기보다 더 사랑스러운 남을 찾지 못하든,
다른 사람에게도 자기는 사랑스러우니
자신을 위해 남을 해쳐서는 안되리.”(S3.8)
 
 
자기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이를 ‘자기애’라고 말할 수 있다. 자기애가 부정적으로 쓰이면 나르시스트가 된다. 오로지 자신만 아는 이기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지혜로운 자는 자기자신을 사랑하듯 남도 사랑하는 것이다.
 
 
자신을 학대하는 사람은
 
자신을 학대하는 사람이 있다. 자학하는 사람은 남도 학대하기 쉽다. 자신을 못살게 굴듯이 남도 못살게 구는 것이다. 자신에게 지나치게 집착하는 사람은 남에게도 지나치게 집착하게 된다. 그래서 “나 사랑해?”라며 자꾸 사랑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렇게 사랑이 집착이 되었을 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발생된다. 그 결과 홀로 살게 될지 모른다.
 
사랑이 상대방에 대한 집착이 되면 불행해진다. 이는 자신만을 사랑해 주기를 바라는 이기적인 태도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것인가? 이는 다음과 같은 부처님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이든 신체적으로 나쁜 행위를 하고 언어적으로 나쁜 행위를 하며 정신적으로 나쁜 행위를 하면, 그들은 자기 자신을 사랑스러운 사람으로 대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 그들이 자기가 자신을 사랑스럽게 여긴다고 말하더라도, 여전히 그들은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처럼 대하는 것이다. 어떤 이유인가? 그것은 그들은 미워하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행하는 것처럼 자기 자신에게 행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으로 대하고 있는 것이다.”(S3.4)
 
 
악한 행위를 하는 자가 있다. 그는 신체적으로 폭력을 가한다. 그는 언어적으로 욕설을 한다. 그는 정신적으로 저주한다. 이러한 자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자이다. 왜 그런가? 이와 같은 악업으로 인한 과보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자가 있다. 막행막식하는 자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자이다. 인과를 모르는 자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자이다. 업이 익으면 업의 과보로 고통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가 자신을 해치는 것이다.
 
악행을 일삼는 자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자이다. 자신도 사랑하지 않는 자라면 남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자명하다. 설령 그 사람이 상대방에 대하여 “당신만을 사랑해!”라고 말한다면 의심해 보아야 한다.
 
악행을 일삼는 자는 폭력적이다. 남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다. 이렇게 남들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은 자신을 사랑하는 자가 될 수 없다. 남들에게 대하는 것처럼 자신에게도 폭력적으로 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으로 대하고 있는 것이다.”(S3.4)라고 한 것이다.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은 남도 미워한다. 반면에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남도 사랑한다. 이에 대하여 “그것은 그들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행하는 것처럼 자신에게 행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을 사랑스러운 사람으로 대하고 있는 것이다.”(S3.4)라고 했기 때문이다.
 
재혼, 삼혼을 해도 대상에 대한 집착이 있다면
 
이 세상에 자기자신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은 없다. 자기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남도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현명한 왕비 말리까는 “대왕이시여, 나에게는 나 자신보다 더 사랑스러운 다른 사람은 없습니다.”(S3.8)라고 말한 것이다. 이 말을 바꾸어 말하면 “대왕이여,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만큼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대여, 그대에게는 그대 자신보다 더 사랑스런 다른 사람이 있소?”라고 물어 보는 것이다. 이 말은 “당신은 나를 가장 사랑합니까?”라며 물어 보는 것과 같다. 현명한 배우자라면 아마도 “그대여, 나에게는 나 자신보다 더 사랑스러운 다른 사람은 없습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이 말은 “나 자신이 사랑스러운 것처럼 당신도 사랑스럽습니다.”라는 말과 같다.
 
쇼펜하우어는 결혼하지 않았다. 이는 얽메이는 삶을 살지 않고자 했기 때문이다. 창조적인 작업을 하는데 있어서 가정을 꾸리는 것에 대하여 방해요인으로 본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가정을 꾸리고 살아간다. 그 결과 처자식에 묶이는 삶을 살아간다. 이런 묶임은 칼로도 끊을 수 없다. 생을 마치기 전까지 계속된다. 그렇다고 하여 공부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홀로 사는 사람이 있다. 독신으로 사는 사람은 묶이는 것이 없어서 창조적 행위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출가수행자들은 도를 닦는 삶을 살아갈 것이다. 그런데 배우자가 사망하거나 이혼하는 등 가정이 해체 된 사람들도 있다. 이런 경우 대부분 외로움을 느낀다.
 
홀로 살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외로움을 견딜 수 없는 것이다. 그 결과 새로운 인연을 만든다. 그러나 또다시 죽을 것 같은 고통을 받는다. 재혼, 삼혼을 해도 대상에 대한 집착이 있다면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에서 벗어날 수 없다.
 
싫어하는 것을 하지 말아야
 
늘 혼자 있는 시간이 많다. 이렇게 백권당에서 자판을 치는 것도 혼자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집에 가면 가장으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 세속의 삶도 살지만 출세간의 삶도 사는 것이다.
 
영화제목에서는 ‘결혼은 미친 짓이다’라고 했다. TV드라마 제목에 ‘사랑과 전쟁’이 있다. 준비되지 않은 자가 결혼을 했을 때 결혼은 미친 짓이 되고 전쟁이 된다. 그렇다면 현명한 결혼생활, 슬기로운 가정생활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결혼생활 삼십육 년차이다. 팔팔년도에 결혼 했으니 이렇게 오랜 세월이 지난 것이다. 그런데 과거를 돌이켜 보면 전쟁과 같았다는 것이다. 드라마 ‘사랑과 전쟁’이 연상되는 것이다.
 
마침내 삼십년 전쟁을 끝냈다. 그것은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세계와 세계가 충돌했을 때 그 쪽 세계가 되고자 했다. 결정적으로는 “세존이시여, 그래서 저는 제 마음을 버리고 이 존자들의 마음을 따랐습니다. 저희들의 몸은 여러 가지이지만 마음은 하나입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의 몸은 다 다르지만 마음은 하나입니다.”(M128)라는 가르침이다.
 
부부는 일심이체가 되어야 한다. 일심동체는 있을 수 없다. 서로 다른 세계에 살고 있을 때 “저는 제 마음을 버리고 이 존자들의 마음을 따랐습니다.”라는 가르침을 새겨야 한다.
 
부부일심이체가 되려면 자신의 마음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상대방의 마음을 따라야 한다. 이것이 부처님 가르침이다. 이것 하나만 실천해도 전쟁과도 같은 상황을 막을 수 있다.
 
상대방이 싫어하는 것을 하지 말아야 한다. 담배 피우는 것을 싫어한다면 담배를 피우지 않아야 한다. 도박하는 것을 싫어하면 도박하지 않아야 한다. 싫어하는 것을 하지 않았을 때 신뢰가 회복된다.
 
솔선수범해야 한다. 해주기만을 기다려서는 안된다. 휴지가 떨어져 있으면 주어야 한다. 먼저 본 사람이 먼저 줍는 것이다. 버리는 사람 따로 있고 줍는 사람 따로 있어서는 안된다. 이는  “가장 먼저 마을에서 탁발하여 돌아오는 자가 자리를 마련하고”(M128)라는 말로 알 수 있다, 또한 나중에 온 자가 “식당을 청소합니다.”(M128)라는 말로 알 수 있다.
 
부부는 사랑공동체이다. 가정 역시 사랑공동체이다. 가장 기본은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이다. 어떻게 사랑하는가? 자기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이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방도 사랑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행복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싫어하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이다.
 
 
2024-03-27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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