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그럼에도 행복하게 살아야죠

담마다사 이병욱 2024. 4. 3. 09:38

그럼에도 행복하게 살아야죠
 
 
매일 아침 부활한다. 아침이 되면 명경지수(明鏡止水)의 마음이 된다. 흙탕물이 가라앉은 듯 하다.
 
길을 갈 때 배낭을 맨다. 목적지까지 1.3-1.5키로 정도 걸린다. 약 20여분 천천히 걸어간다. 이런 저런 생각하며 걷는다. 생각하다 보면 생각이 정리된다.
 
걷다가 갑자기 비를 만나는 경우가 있다. 한두 방울 비가 떨어질 때 난감하다. 비가 더 심해지면 멈추어야 한다. 이럴 때 우산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다.
 
차로 이동하는 사람들은 우산 걱정하지 않는다. 걸어 다니는 사람들은 우산이 있어야 한다. 비가 오지 않아도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빈 배낭에 접이식 우산 하나 넣어야겠다.
 

 
준비 된 자는 당황하지 않는다. 비가 오면 우산을 펼치면 된다. 아무런 준비 없이 인생을 산다면 어떻게 될까? 곤혹의 연속일 것이다.
 
나는 준비된 자인가? 인생길을 가는데 얼마나 준비 되었는가? 미리미리 준비 했더라면 지금과 같이 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본다.
 
인생에 대한 계획이 없었다. 청소년시절 꿈이 없었다. 딱히 무언가 되겠다는 희망이 없었다.
 
중학교 때 일이다. 그때 국민윤리 선생이 각자 장래희망을 말해 보라고 했다. 어떤 학생은 검사가 되겠다고 말했다.
 
중학교 2학년 때 검사가 어떤 직업인지 구체적으로 몰랐다. 그런데 그 학생 장래희망은 검사였다는 것이다. 검사집안 출신일까? 어린 학생이 어떻게 검사가 될 꿈을 꾸었을까?
 
그는 정말 검사가 되었을까? 아마 검사가 되었을지 모른다. 어린 시절 꿈이 있었다면 실현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나는 과학자가 되겠다고 말했다. 남들이 좋다고 하니 말해 본 것이다. 특별한 꿈도 없었고 희망도 없었다. 삶에 이유도 없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니 중학교에 갔고, 중학교를 졸업하니 고등학교에 가는 것이었다.
 
수행자의 삶이 있다. 수행자로 평생 살아가는 사람들은 남다르다. 어렸을 적부터 삶의 방향이 정초(定礎)되어 있었기 때문으로 본다. 세상을 사는 이유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출가수행자라 하여 모두 다 똑 같은 사람은 아니다. 출가이유가 분명한 사람도 있지만 불분명한 사람도 많다.
 
어떤 이는 죽음에서 두려움을 보고 출가했다고 말한다. 죽음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상당수는 도피형출가나 생계형출가에 가깝다.
 
세상 것들에 대한 호기심이 많은 스님이 있다. 스님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하여 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 같다. 아마 세상을 모르고 출가한 것도 이유가 되는 것으로 본다. 어려서 절에 맡겨져 자란 경우도 해당되리라 본다.
 
스님은 자유를 외친다. 아무것에도 걸림이 없는 자유를 말한다. 깊은 산속에서 홀로 살고 있음에도 자유를 말한다. 번뇌에서 해방되지 못했기 때문으로 본다.
 
스님은 사막에 있다. 호주 아웃백에서 샤우팅한다. 오토바이로 대륙을 횡단하려 하는 것이다.
 
스님은 아웃백에서 샤유팅했다. 이번 총선에서 무지하고 무능하고 무도한 정권을 심판해 달라고 외쳤다. ‘이채양명주’ 피켓을 들고 있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스님들은 걸림 없는 것 같다. 어느 스님은 해제기간 중에 외국에 있다. 외국에서 한철 보내는 것이다. 가족이 있는 사람들은 상상도 할 수 없다.
 
사람을 겉으로 판단할 수 없다. 남긴 글이 있다면 판단해 볼 수 있는 근거가 된다. 그러나 그 사람과 함께 지내보지 않는다면 알 수 없다. 그것도 오랜 세월 지켜 보아야 한다.
 
스님에 대하여 이러쿵저러쿵 언급하는 것은 구업(口業)이 되기 쉽다. 그럼에도 드러난 사실만으로 평가하려 한다. 스님이 세상 것들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하다면 세속인과 다를 것이 없다.
 
수행자보다 더 수행자다운 삶을 살고자 한다. 재가에 있더라도 늘 출세간을 지향한다. 그러나 생활로 돌아가면 여지없이 깨진다.
 
매일 아침이 되면 부활한다. 죽었다가 부활하기를 수도 없이 반복하고 있다. 언제까지 계속될까?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 한번 형성된 것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태어났으니 죽음이 있을 수밖에 없다.
 
시간이 없다. 앞으로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십년이 될지 이십년이 될지 그 이상이 될지 알 수 없다. 오늘이 그날이 될 수도 있다. 왜 그런가? 업생(業生)이기 때문이다.
 
나의 전생은 무엇이었을까? 궁금하기도 하지만 알고 싶지도 않다. 왜 그런가? 비참할 것 같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모르고 사는 것이 더 나을 듯 하다.
 
매일 새로운 아침을 맞는다. 아침에 샤워를 하면 마음이 새롭다. 배낭을 메고 길을 걷다 보면 새로운 생각이 불쑥불쑥 떠오른다. 모두 글쓰기 소재가 된다.
 
하루일과는 오전과 오후와 저녁으로 나뉜다. 오전에 정신이 가장 맑다. 뉴스도 보지 않고 유튜브도 보지 않는 것이 큰 이유이다. 이런 때 글을 쓴다.
 
오후가 되면 정신이 혼탁해진다. 유튜브 영향이 크다. 보고 싶은 것만 보아도 마음이 혼란스럽다. 우리편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노심초사하게 된다.
 
총선이 이제 일주일 남았다. 내일부터 사전투표 할 수 있다. 이번 선거에서 민주진보진영이 대승할 것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염려가 있다. 재산문제나 막말문제가 있는 후보가 있기 때문이다.
 
요즘 지나치게 선거에 매몰되어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승리에 고무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무 가까이 하면 타버린다.
 
후보자 문제에 개입할 수 없다. 후보의 재산문제에 대하여 내 문제처럼 여긴다면 타버리게 된다. 이럴 때는 냉정해야 한다. 그 사람의 업(業)으로 보는 것이다.
 
세상에는 불운하고 불행한 사람은 많다. 지금 행복해 보이는 사람도 사실 알고 보면 말 못할 고민이 있다. 그 사람이 불운하고 불행에 처해 있다고 해서 내 것처럼 여긴다면 근심, 걱정, 슬픔이 일어난다.
 
그 사람 업은 그 사람 것이다. 그 사람이 행위 한 것에 대한 과보를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럼에도 내일처럼 여기면 괴로움이 된다. 이럴 경우 “하루빨리 고통에서 벗어나기를!”라며 연민의 마음을 내는 것으로 족하다.
 
연민이 지나쳐서 근심하고 걱정하고 슬퍼한다면 그 사람의 업을 짊어지고 가는 것이 된다. 마음의 평정을 찾아야 한다. 이럴 때는 “이 사람에게 행위가 주인이고, 행위가 상속자이고, 행위가 모태이고, 행위가 친족이고, 행위가 의지처이다. 선하거나 악한 행위를 하면, 그것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A5.161)라며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다.
 
남의 업에 개입해서는 안된다. 남의 업에 개입할 수도 없다. 단지 업이 그 사람의 주인이고, 그 사람은 업의 상속자인 것만 알아도 마음이 안정된다. 이는 다름 아닌 중립의 마음이다. 또 다른 말로 평정의 마음이다.
 
누구나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다. 누구도 나의 행복을 방해할 수 없다. 지금 불운하고 불행한 처지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 속에서도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
 
사람들은 지난 시절은 쉽게 잊어버린다. 힘들고 괴로운 시절을 애써 잊어버리려고도 한다. 사랑하지 않는 것과의 만남으로 인한 괴로움이 극에 달했을 때 벗어나고자 하지만 막상 홀로 있게 되었을 때 심심함을 갖게 된다.
 
한국의 출가자들은 못하는 것이 없다. 외국에 나가 방랑하는 가하면 오토바이를 타고 대륙을 질주하기도 한다. 걸림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무료, 권태를 참을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홀로 사는 출가자는 세상 것들에 대한 호기심이 많다. 홀로 살지 않는 재가자는 벗어 나고 싶어 한다. 어떻게 해야 잘 사는 것일까?
 
좌선은 중요한 하루일과 중에 하나이다. 아침에 글쓰기가 끝나면 곧바로 좌선에 들어간다. 글쓰기에서 집중된 힘을 활용하고자 하는 것이다.
 
한시간 좌선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앉아 있다 보면 한시간 채우기가 힘들다. 선원이라면 가능할 것이다. 생업이 있어서 한시간 보내기가 힘들다. 대개 삼사십분 앉아 있는다.
 
명상을 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마음이 고요해졌을 때 “이곳이 내가 있을 자리이다.”라는 마음이 생겨난다.
 
사람과 사람들 사이에서 살다 보면 벗어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렇다고 산속으로 도망갈 수 없다. 남의 불운이나 불행에 대하여 지나치게 근심하고 걱정하면 마음이 탁해진다. 이럴 때 업이 그 사람의 주인이라고 반조하면 마음이 조금은 낫다. 더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라면 좌선을 해야 한다.
 
명상은 최후의 보루와도 같다. 사랑하지 않는 것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도피처인 것이다. 고요한 상태에 이르면 “이곳이야말로 내 자리이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세상일은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남편이나 아내도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당연히 자식도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하물며 대통령을 내 뜻대로 조정할 수 있을까?
 
세상에 내 뜻대로 되는 것은 없다. 돈도 내 뜻대로 벌리지 않는다. 하물며 남을 내 뜻대로 할 수 있을까?
 
총선후보자의 재산문제와 막말문제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럴 때는 눈을 감아야 한다. 평좌를 하고 자리에 앉는 것이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보다 보면 잊어 버린다.
 
생겨나는 것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어느 것도 머물러 있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집착하고 있다면 괴로움이 된다. 업이 자신의 주인임을 반조해야 한다. 세상살이 내 뜻대로 되지 않지만 “그럼에도 행복하게 살아야죠.”라고 말하는 것이다.
 
 
2024-04-03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