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화사한 벚꽃에서 찬란한 슬픔을

담마다사 이병욱 2024. 4. 4. 10:40

화사한 벚꽃에서 찬란한 슬픔을
 
 
봄바람이 부드럽다. 백권당 가는 아침에 일부로 빙 돌아 갔다. 예전에 살았던 미륭아파트로 해서 학의천으로 갔다. 벚꽃구경 하기 위한 것이다.
 
해마다 사월이 오면 벚꽃이 화사한 모습으로 반겨준다. 마치 예식장에서 백색 웨딩드레스 입은 신부 같은 모습이다. 벚꽃 아래를 사뿐사뿐 걸어 갈 때 내가 주인공이 된 것 같다.
 

 
비산사거리 미륭아파트 벚꽃은
 
미륭아파트 벚꽃은 여전하다. 수령이 사십년이 넘는다. 아파트는 78년에 세워졌다. 그때 벚꽃나무도 식재했을 것이다.
 

 
안양에 온 것은 1995년 여름이다. 직장 따라 온 것이다. 그 다음해부터 벚꽃 잔치가 시작되었다. 해마다 사월이 오면 화사한 벚꽃은 어김 없이 피었다. 이런 세월이 삼십년 가까이 되었다.
 
벚꽃은 칠일천하에 지나지 않는다. 일년 중에 오로지 일주일 동안 자신의 존재를 과시한다. 이럴 때 사람들은 카메라를 가까이 댄다.
 
벚꽃은 곧 잊혀 질 것이다. 누구도 쳐다 보지 않을 것이다. 가을에 단풍이 들면 모를까 있는 듯 없는 듯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
 

 
미륭아파트 재건축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비산사거리 주변은 온통 아파트 천지가 되었다. 재개발되고 재건축 되어서 마치 첨탑처럼 타워형 마천루로 변했다. 그럼에도 미륭아파트는 추진위와 비대위의 갈등이 여전하다.
 
학의천변 벚꽃군락
 
학의천으로 왔다. 롯데아파트로 이사 간 이후 학의천은 잘 오지 않게 되었다. 가능하면 직선거리로 다니다 보니 패싱 된 것이다. 그 대신 안양천 징검다리가 코스가 되었다.
 

 
학의천이 노랑과 백색으로 물들었다. 이맘 때면 볼 수 있는 광경이다. 동서로 흐르는 학의천 북변 개나리 군락을 보면 온통 노랑의 세상이다. 남변의 벚꽃 군락에는 백색의 세상이다.
 

 
노랑과 백색의 군락이 구름처럼 펼쳐졌다. 이십여년 전에도 이 자리에서 보았고 십여년 전에도 이 자리에서 보았다. 작년에도 이 자리에 있었다. 나는 용케 살아 있었구나!
 
학의천 벚꽃군락은 삼십년 되었다. 평촌신도시가 완성되었을 때 벚꽃나무도 식재 되었을 것이다. 그때 이사 왔었을 때 작은 나무였으나 이제 아름드리가 되었다.
 

 
개나리는 봄의 전령사와도 같다. 벚꽃이 피면 봄이 확실히 온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개나리와 벚꽃이 동시에 피는 것은 전에 없는 일이다.
 
삼십년 전에는 개나리가 먼저 피었다. 개나리가 지고 나면 벚꽃이 피었다. 그러나 벚꽃 개화시기가 점점 당겨지고 있다. 사월 중순에 피어야 할 벚꽃이 사월 초순에 핀다. 요즘은 더 당겨져서 삼월 말에도 핀다. 지구온난화 때문인가?
 

 
학의천을 따라 안양천으로 들어섰다. 동서로 흐르는 학의천과 남북으로 흐르는 안양천은 ‘쌍개울’에서 만난다. 안양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곳이다. 그래서일까 이곳 쌍개울에서는 축제가 열린다.
 

 
쌍개울은 해마다 모습을 달리한다. 올해에는 튤립이다. 튤립이 밭을 이루었다. 이국적인 풍광이다. 또한 인위적이다.
 
자연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인위적 조작이 가해지면 인공이 된다. 생태하천으로 거듭난 학의천과 안양천도 인공하천이다. 그럼에도 썩은 냄새 나던 죽은 하천보다는 휠씬 낫다.
 

 
벚꽃군락은 인위적이다. 개나리군락 역시 인위적이다. 그러나 천변에 잡초는 누가 돌보지 않아도 잘 자란다. 이름 모를 잡초에서는 보라색 꽃이 피었다. 보라색은 황제의 색이라고 한다. 인공으로 만든 꽃과 비할 바가 아니다.
 
잡초에서 이슬을 보고
 
오늘 아침 잡초에서 이슬을 보았다. 아침이슬이다. 이슬이 마치 작은 구슬방울 같다. 이슬방울을 보자 다음과 같은 자타카 게송이 생각났다.
 
 
 “풀끝의 이슬과 같아, 
해가 뜨면 떨어지듯, 
사람의 목숨은 이와 같은 것이니, 
어머니, 저의 출가를 말리지 마십시오.”(Jat.460)
 

 

 
이 게송은 청정도론 ‘죽음의 명상 수행(死隨念)’(Vism.8.12)에도 실려 있다. 출가를 허락하지 않는 어머니에게 “어머니, 나를 말리지 마십시오. (mamaṃ ammā nivāraya)”라고 말한 것이다.
 
자식이 출가한다고 하면 어떤 마음이 들까? 아마 부모는 눈물로 말릴 것이다. 이는 부처님이 “왕자여, 내가 나중에 젊은 청년이 되어 칠흑 같은 머리카락을 지니고 다복하고 혈기왕성하여 인생의 청춘에 이르렀으나, 부모를 즐겁게 하지 않고, 그들이 눈물을 흘리고 통곡하는 가운데, 머리를 삭발하고 가사를 입고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했습니다.”(M85)라고 말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했다. 그리고 발우를 들고 걸식하며 살았다. 그렇다고 걸인처럼 산 것은 아니다. 청정한 삶을 살기 위한 것이다.
 
사람들은 왜 출가했을까? 그것은 아마도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을 것이다. 지금 살아 있다고 하더라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아침 풀잎에 맺힌 이슬과도 같은 존재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아침이슬은 해가 떠오르면 말라버리고 만다. 생명 있는 모든 존재는 망할 운명에 처해 있다. 죽음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살아 가야 갈 의미를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가장 큰 걸림돌은 부모였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자신을 낳아 준 어머니였을 것이다.
 
눈물로 만류하는 어머니에게
 
보살은 전생에 왕자였다. 이는 460번 자타카인 ‘유반자야의 본생이야기’(Jat.460)에 실려 있다. 부처님이 과거 전생을 회상하면서 수행승들에게 이야기를 들려 준 것이다.
 
유반자야 왕자는 부왕(副王)의 지위가 되었다. 아버지가 죽으면 자동적으로 왕이 된다. 어느 날 왕자는 아침에 유원에서 풀잎 끝이나 거미줄에 진주방울처럼 달려 있는 이슬방울을 보았다. 왕자는 저녁에 다시 유원을 찾았다. 그러나 진주방울처럼 영롱한 이슬을 발견할 수 없었다.
 
왕자는 궁금했다. 아침에 본 이슬방울이 사라진 것이다. 마부에게 어디로 갔는지 물어 보았다. 이에 마부는 “왕이여, 그것들은 태양이 떠오르면 모두 부서져 땅에 떨어집니다.”(Jat.460)라고 말했다.
 
왕자는 충격 받았다. 자타카에서는 이를 ‘외경’이라고 했다. 외경은 빠알리어 ‘상베가’를 번역한 것이다. 이는 ‘지혜에 의한 두려움’을 말한다. 왕자는 “이 뭇삶들의 삶의 조건도, 풀 끝의 이슬방울과 같다. 나는 질병과 늙음과 죽음으로 괴로워하기 전에 부모에게 허락을 구하고 출가를 해야겠다.”(Jat.460)라고 다짐한다.
 

 
왕자는 왕에게 출가를 간청했다. 그러나 허락하지 않았다. 왕은 “네게 애욕으로 부족함이 있으면, 얼마든지 채워주겠다.”(Jat.460)라며 출가하지 말라고 말했다.
 
왕자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얼마든지 애욕은 채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죽음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그래서 “늙음이 압도하지 않는 피난처를 만들고자 합니다.”(Jat.460)라고 말했다.
 
왕은 왕자에게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이에 왕자는 왕이 출가를 허락한 것으로 간주하고 어머니에게 찾아 갔다. 이에 어머니는 숨을 헐떡이면서 “얘야, 나는 너에게 청원한다. 아들아, 나는 막으리라. 나는 오래도록 너를 보고 싶다. 유반자여, 출가하지 말아라.”(Jat.460)라고 말했다.
 
유반자야 왕자는 어머니의 간청을 뿌리쳤다. 생사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삶의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그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풀 끝에 있는 이슬이었다. 그래서 눈물로 만류하는 어머니에게 “풀끝의 이슬과 같아, 해가 뜨면 떨어지듯, 사람의 목숨은 이와 같은 것이니, 어머니, 저의 출가를 말리지 마십시오.”(Jat.460)라고 말한 것이다.
 
사람은 언제 죽을지 모른다. 업생이기 때문이다. 과거에 지은 업이 어떻게 작용할지 모른다. 이렇게 본다면 한시가 급한 것이다. 그래서 자타카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이 뭇삶들은 젊을 때나 늙을 때나 죽는다는 것은 매한가지 아닐까요? ‘이 자는 젊을 때 죽을 것이다. 저 자는 늙을 때 죽을 것이다.’라는 표지가 어떠한 자의 손이나 발에도 없습니다. 저는 제가 죽을 때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출가하겠습니다.”(Jat. 509)
 
 
젊었을 때 출가한 수행자가 있다. 머리가 칠흑처럼 젊었을 때 출가한 것은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는 수명이 보장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자는 젊을 때 죽을 것이다. 저 자는 늙을 때 죽을 것이다.”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왕자가 눈물로 만류하는 어머니를 뿌리치고 출가한 이유가 될 것이다.
 
안양천 변에서 풀잎을 보았다. 아침이슬은 햇볕이 나면 사라질 것이다. 지금 절정에 이른 개나리와 벚꽃 등 갖가지 꽃들 역시 며칠 지나면 사라질 것이다. 생명 있는 모든 것들 때가 되면 사라지고 만다.
 
유행가 “사랑을 하면서 이별을 생각했었지”
 
유행가에서 진리를 본다. 유행가 중에서 “사랑을 하면서 이별을 생각했었지.”라는 가사가 있다. 사랑과 이별을 동시에 보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것이 가능할까?
 
사람들은 꽃에 도취되어 있다. 아름다운 꽃에 카메라를 댄다. 그러나 떨어진 꽃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이렇게 본다면 핀 꽃은 떨어질 운명에 처해 있다.
 

 
화려한 꽃에서 기쁨을 본다. 그러나 동시에 슬픔도 본다. 피어난 것은 지고 말 운명이기에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는 것이다.
 
화려한 꽃에서 찬란한 슬픔을 본다. 풀잎 끝에 있는 아침이슬과 같은 운명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꽃을 보면 기뻐하고 영원히 간직하고자 한다.
 
오늘 새벽 쌍윳따니까야를 읽다가 새기고 싶은 가르침을 발견했다. 그것은 기쁨과 슬픔에 대한 것이다. ‘까꾸다의 경’(S2.18)에서 하늘아들과 부처님의 대화를 보면 다음과 같다.
 
 
하늘아들이 물었다. 하늘아들은 “수행자여, 당신은 기쁩니까?”라며 물은 것이다. 이에 부처님은 “벗이여, 그대는 내가 무엇을 얻었다고 생각합니까?”라며 역질문했다.
 
하늘아들은 부처님의 역질문에 답하지 못했다. 이번에는 “수행자여, 그렇다면 슬픔니까?”라며 물었다. 이에 부처님은 “벗이여, 그대는 내가 무엇을 잃었다고 생각합니까?”라며 또다시 역질문했다.
 
이번에도 하늘아들은 답변하지 못했다. 그러자 “수행자여, 그렇다면 즐겁지도 슬프지도 않습니까?”라며 물었다. 이에 부처님은 “벗이여, 그렇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와 같은 질의응답에서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기쁘면 이득이 있는 것이고 슬프면 손실이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을 말한다. 이는 세상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말한다. 그러나 수행자는 기쁘다고 하여 기뻐하지도 않고, 슬프다고 하여 슬퍼하지도 않는다.
 
오르면 기뻐하고 내리면 슬퍼하고
 
수행자라고 하여 감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마치 SF판타지 영화 ‘이퀄스(Equals, 2015)’에서처럼 감성이 마른 무미건조한 인간은 아니라는 것이다. 수행자는 지혜가 있어서 자애와 연민이 넘쳐 나는 사람이다. 여기에 기쁨과 평정도 있다.
 
수행자는 감성이 없는 로보트와 다르다. 인공지능 인간이 출현하면 지식은 풍부하겠지만 감성이 메마른 인간이기 쉽다. 프로그램된 대로 움직이는 것이다. 그러나 감성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기쁜 일이 있으면 기뻐하고 슬픈 일이 있으면 슬퍼하는 것이다. 이는 얻는 것과 잃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마치 세속팔풍(世俗八風)을 보는 것 같다.
 
세상사람들 특징이 있다. 이익과 손해, 칭찬과 비난, 명예와 치욕, 행복과 불행으로 사는 것이다. 마치 바람에 따라 방향을 바꾸는 팔랑개비와 같은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이득과 손실에 대한 것이다.
 
이득과 손실의 생생한 삶의 현장이 있다. 그것은 주식시장이다. 요즘 사람들은 집에다가 홈트레이딩시스템을 깔아 놓고 거래한다. 그것도 실시간 초단타매매 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래서 주가등락에 따라 수시로 마음이 변한다. 오르면 기뻐하고 내리면 슬퍼한다.
 
주식이 오르면 얻는 것이 있다. 반대로 주가가 내리면 읽는 것이 있다. 그래서 기뻐할 때 무엇인가 얻었다고 생각하고 슬퍼할 때 무엇인가 잃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수행자에게는 얻을 것도 없고 잃을 것도 없다. 그래서 수행자는 얻을 것도 없고 잃을 것도 없어서 기뻐하지도 않고 슬퍼하지도 않는다.
 
슬픔이 있는 자에게 기쁨도 있고, 기쁨이 있는 자에게 슬픔도 있는 것
 
수행자에게는 기쁨도 없고 근심도 없다. 그렇다면 홀로 사는 수행자에게 불만족은 없을까? 이에 부처님은 하늘아들에게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말한다.
 
 
“슬픔이 있는 자에게 기쁨도 있고
기쁨이 있는 자에게 슬픔도 있는 것,
수행자는 기쁨도 여의었고 슬픔도 여의었네.
벗이여, 그대는 그렇게 알아야 하리.”(S2.18)
 
 
슬픔이 있는 자에게 기쁨이 있고 기쁨이 있는 자에게 슬픔도 있다고 했다. 이는 “세상의 삶은 이러하고 존재의 획득은 이러하다. 이러한 삶을 취하고 이러한 존재를 획득하여 여덟 가지 세상의 원리가 돌게 만들고 세상의 여덟 가지 원리를 돌게 만든다. 그것은 곧 획득과 손실, 명성과 악명, 칭송과 비난, 즐거움과 괴로움이다.”(A4.192)라는 가르침에 따른다.
 
세속팔풍으로 사는 자에게 기쁨과 슬픔이 있다. 그런데 기쁨이 있으면 슬픔이 있고, 슬픔이 있으면 기쁨도 있다는 것이다. 마치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나 수행자에게는 얻는 것이 있어도 기뻐하지 않고 잃는 것이 있어도 슬퍼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기쁨과 슬픔을 모두 여의었기 때문이다.
 
기쁨과 슬픔을 여읜 자는 얻을 것도 없고 잃을 것도 없다. 이런 마음이 되었을 때 불만이 있을 수 없다. 평정의 마음이다. 그래서일까 하늘아들은 “세상에 애착을 뛰어넘어 기쁜 것도 슬픈 것도 없는 수행자, 참 열반을 성취한 거룩한 님을 내가 참으로 오랜만에 친견하네.” (S2.18)라며 게송으로 말했다.
 
수행자는 기쁘다고 하여 기뻐하지도 않고 슬프다고 하여 슬퍼하지도 않는다. 이는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 소멸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진정한 행복이다. 열반의 행복이다.
 
최상의 행복은 열반의 행복이다. 세속에서의 행복은 느껴지는 것이다. 이는 행복감을 말한다. 그러나 일시적이다. 왜 그런가? 조건 지어져 있기 때문이다.
 
조건이 바뀌면 사라지고 말 것들
 
세속적 행복은 진정한 행복이 아니다. 조건이 바뀌면 언제든지 사라진다. 이 행복이 영원하지 않음을 말한다. 조건부 행복이다.
 
조건부 행복은 진정한 행복이 아니다. 조건 없는 행복만이 진정한 행복이다. 그것은 열반의 행복이다. 모든 조건이 사라진 상태가 진정한 행복이다. 이는 행복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행복이다.
 
행복은 지금 여기서 느껴지는 행복감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열반의 행복은 느낄 수 없다. 역설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행복이 진정한 행복인 것이다. 느껴진 행복이라면 언제 바뀔지 알 수 없다. 마음은 늘 대상에 가 있기 때문에 수시로 바뀐다.
 
지금 행복하다가도 한순간에 행복하지 않은 상태로 된다. 마치 아기가 웃다가 우는 것과 같다. 쾌와 불쾌가 번갈아 일어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일시적인 행복은 행복이 아니다. 단지 행복하다고 느끼는 행복감일 뿐이다. 그러나 열반의 행복은 느낌마저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바뀌지 않는다. 그래서 열반의 행복을 진정한 행복, 최상의 행복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행복을 말한다. 과연 진짜 행복한 자는 얼마나 될까? 많이 가졌다고 하여 행복할까? 지위가 높다고 해서 행복할까? 많이 배웠다고 해서 행복할까? 자손을 많이 가졌다고 해서 행복할까? 그러나 조건이 바뀌면 사라지고 말 행복이다. 마치 아침이슬 같은 것이다.
 
화사한 벚꽃에서 찬란한 슬픔을
 
오늘 아침 화사한 벚꽃을 보면서 찬란한 슬픔을 느꼈다. 그것은 조만간 사라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사랑을 하면서 이별을 생각하는 것과 같다. 시집간 날 첫날밤에 우는 것과 같다.
 

 
아기가 태어나면 기뻐한다. 그러나 아기는 울음으로 신고한다. 아기는 왜 울까? 아마도 험난한 자신의 인생을 예지해서 운 것 아닐까? 이유 없이 눈물 흘리는 사람도 있다.
 
시간역행 영화로 잘 알려져 있는 ‘박하사탕’에서 첫 장면은 주인공의 눈물이다. 철길을 바라보면서 이유 없는 눈물을 흘린다. 영화는 눈물대로 진행된다. 이렇게 본다면 이유 없는 눈물은 없는 것이다.
 
화사한 벚꽃에서 찬란한 슬픔을 본다. 햇볕이 나면 사라지고 말 이슬 같은 운명이다.
 
 
2024-04-04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