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선언으로 장애와 고난에서 벗어나기
하루하루가 위태하다. 이 부실한 몸은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 이곳 저곳에서 터질 것 같다. 간신히 하루하루 버티는 것 같다.
이 몸이 무너졌을 때 후회는 없을까? 조금이라도 아쉬움이 남아 있다면 잘 살지 못한 것이다. 어떻게 해야 잘 사는 것일까?
사람이 위기에 처하면 기도한다. 울부짖으며 신에 매달리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차분히 앉아서 명상에 들어 가는 사람도 있다.
요즘 한국불교에서는 기도에 빠져 있는 것 같다. 절의 플레카드를 보면 갖가지 기도가 난무한다. 대체 누구에게 기도하는 것일까?
한국불교에 불공(佛供)이라는 말이 있다. 오래 전부터 써 오던 말이다. 부처님께 공양 올린다는 말이다. 이렇게 좋은 말이 있음에도 기도라는 말을 사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혹시 유일신교 따라 하는 것은 아닐까?
기도와 불공
사람은 위기에 처했을 때 알 수 있다. 그 사람이 얼마나 견고한지, 그 사람이 얼마나 지혜로운지는 재난에 처해 있을 때 알 수 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경우가 많다.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사건이 될 수도 있다. 이럴 때 괴로움을 느낀다. 이른바 원증회고(怨憎會苦)이다.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남에 따른 괴로움이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어느 절에 가면 한가지 소원은 꼭 들어준다고 말한다. 플레카드에서 써 있다. 복전함에 돈을 넣고 소원을 말할 것이다. 이럴 때 대개 “~주십시오.”라며 구걸형 기도를 할 것이다.
불교에서 구걸형기도는 맞지 않는다. 절대자를 부정하는 종교에서 구걸형기도는 있을 수 없다. 그 대신 바라는 불공을 드린다. 어떤 것인가? 이는 “~하기를”라며 불공 드리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종교가 있다. 기도의 대상이 되는 유신론적 종교와 공양의 대상이 되는 무신론적 종교이다. 여기서 공양이라는 말은 불공을 뜻한다. 그렇다면 진정한 불공은 어떤 것일까?
불자들은 불공 할 때 쌀, 양초, 꽃 등을 불단에 올려 놓는다. 그리고 자신과 가족의 건강, 학업, 사업이 잘 되기를 바란다. 불상을 바라보면서 염하는 것이다. 정말 이런 것이 불공일까?
불자가 공양하는 모습은 아름답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러한 것으로 여래가 존경받고 존중받고 경배받고 예경받고 숭배받는 것이 아니다.”(D16)라고 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진정한 불공인가? 이는 부처님이 “아난다여, 수행자나 수행녀나 남녀 재가신자가 가르침을 여법하게 실천하고 올바로 실천하고, 원리에 따라 행한다면, 그것이 최상의 공양으로 여래를 존경하고 존중하고 경배하고 예경하고 숭배하는 것이다.”(D16)라며 완전한 열반에 들기 전에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불교에서 진정한 불공은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는 진리를 실천하는 것과 같다. 부처님의 말씀은 진실된 것이기 때문에 가르침을 실천하면 당당해진다.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아도 된다.
불자들은 처음에는 가르침에 의지한다. 그러나 성자의 흐름에 들면 자신에게 의지하게 된다. 자신을 의지처, 귀의처, 피난처로 삼아 나아 가난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그것은 궁극적 경지를 보았기 때문이다.
열반은 섬과 같은 것이다. 윤회의 바다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다. 또한 열반은 등불과 같은 것이다. 열반을 체험 했다면 자신이 섬이 되고 자신이 등불이 되는 것과 같다.
불교에서 열반은 의지처, 귀의처, 피난처가 된다. 성자의 흐름에 든 자는 열반을 체험한 자이다. 열반을 체험한 자는 자신이 의지처, 귀의처, 피난처가 된다. 또한 열반을 경험한 자는 자신의 자신의 수호자가 된다.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게 된다. 이것이 진정한 불공이다.
진실선언(saccavajja)이라는 말이 있는데
언제 어떤 경우에서나 부처님 가르침은 진실하다. 진실하다는 것은 거짓이 없음을 말한다. 그래서일까 금강경에서는 “여래 시진어자 실어자 여어자 불광어자 불이어자(如來 是眞語者 實語者 如語者 不誑語者 不異語者)”라고 했다.
금강경에서 부처님의 말씀에 대하여 진어(眞語)와 실어(實語)라고 했다. 이는 부처님의 말씀이 ‘진실어’임을 말한다. 이와 같은 진실어에 대하여 빠알리어로는 삿자왓자(saccavajja)라고 한다.
진실어에 대한 주석이 있다. 이는 “여러 가지 악한 원리들(pāpadhamma) 가운데 망어가 가장 중대한 것이고, 선한 원리들(puññadhamma) 가운데 진실어가 가장 중대한 것이다.”(Dat.I.289)라고 했다.
진실어는 공덕이 된다. 반면 망어, 즉 거짓말은 악덕이 된다. 그런데 진실을 말하면 보호가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는 진실선언으로 설명된다.
진실선언이라는 말이 있다. 이런 말은 불교에 입문해서 처음 들어 봤다. 그것도 초기불교를 접하고 나서 들었다. 그것도 또한 가장 최근에 들었다.
자타카 교정작업하다가 진실선언에 대하여 알게 되었다. 진실선언이란 무엇일까?
진실선언은 대승불교 경전에서도 발견된다. 경전을 여는 ‘개경게’에서 “원해여래진실의(願解如來眞實義)”라는 말로 알 수 있다. 이 말은 “부처님의 진실한 뜻을 알기를 원합니다.”라고 번역된다.
원해여래진실의에 대하여 달리 해석해 보았다. 여기서 ‘진실의’는 ‘진실어’라고 볼 수 있다. 빠알리어로는 ‘삿짜왓자’인 것이다. 그런데 삿자왓자에 대하여 ‘진실선언’이라고도 말한다. 영어로는 ‘true speech’가 된다. 그래서 원해여래진실의에 대하여 다시 해석한다면 “내가 이 진실의 힘으로 고난에서 벗어나기를!”라고 바라는 것이 된다.
진실선언으로 고난에서 벗어난 이야기
자타까에서는 진실선언으로 고난에서 벗어난 이야기가 이 자타카 저 자타카에서 발견된다. 먼저 ‘쑵빠라까의 본생이야기’(Jat.463)에서 다음과 같은 게송이 발견된다.
“스스로 기억하는 한,
철이 든 지금까지
고의적으로 한 생명도
나는 해친 적을 알지 못한다.
이러한 진실의 선언으로
배가 안전하게 돌아가기를!”(Jat.463)
쑵빠라까의 본생이야기는 보살이 현자로 살았을 때에 대한 것이다. 현자는 그때 당시 선장이었다. 먼 바다를 항해하다가 폭풍우를 만나 배가 난파지경에 처했을 때 위와 같이 진실선언을 했다.
진실선언하면 위기에서 빠져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청정해야 한다. 청정한 삶을 산자가 진실선언을 하면 재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기억하는 한, 철이 든 지금까지 고의적으로 한 생명도 나는 해친 적을 알지 못한다.”(Jat.463)라며 진실선언 한 것이다.
앙굴리말라 수호경
진실선언에 대항 이야기는 니까야 도처에서 발견된다. 맛지마니까야 앙굴리말라경(M86)에서는 “자매여, 내가 태어난 이래 나는 의도적으로 뭇삶의 생명을 빼앗은 적이 없습니다. 이러한 진실로 인하여 당신이 잘 되고 당신의 아기가 잘 되길 바랍니다.”(M86)라고 표현되어 있다. 이를 ‘앙굴리말라 수호경’이라고 한다.
오늘날 남방에서 앙굴리말라수호경은 임신과 출산용으로 독송된다. 이는 생명과 관계된 것이다. 그래서 “내가 태어난 이래 나는 의도적으로 뭇삶의 생명을 빼앗은 적이 없습니다.”(M86)라고 하는 것이다.
앙굴리말라는 연쇄살인자였다. 그러나 부처님에게 귀의하여 아라한이 되었다. 성자가 된 것이다. 이는 경에서 “내가 고귀한 태어남으로 거듭난 이래” (M86)라는 말로 알 수 있다. 앙굴리말라는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여 성자가 됨으로 인하여 다시 태어난 것이다.
앙굴리말라는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예전의 연쇄살인자가 아니다. 이는 열반을 체험하여 성자로 거듭난 것이다. 그래서 “내가 태어난 이래 나는 의도적으로 뭇삶의 생명을 빼앗은 적이 없습니다.” (M86)라고 말한 것이다. 이것은 진실이다. 또한 이것은 진실어이다.
진실어의 힘은 크다. 이는 진실선언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이러한 진실로 인하여 당신이 잘 되고 당신의 아기가 잘 되길 바랍니다.”(M86)라고 선언할 수 있는 것이다. 연쇄살인자로서의 앙굴리말라가 아니라 성자로서의 앙굴리말라 장로가 축원한 진실선언이다.
쑵빠라까 선장의 진실선언
쑵빠라까 선장은 진실선언 했다. 이는 배가 뒤집힐지 모르는 재난 상황에서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신을 찾아 울부짖는 것이 아니다.
배에는 칠백명이 타고 있었다. 배가 난파당하면 모두 죽는다. 이럴 때 진실선언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이는 보살이 “나를 제외하고 그 어떤 자가 이들에게 안전을 줄 수 없다. 진실에 입각한 서원으로, 이들을 안전하게 해야겠다.”(Jat.463)라고 말한 것으로 알 수 있다.
진실에 입각한 서원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 먼저 준비를 해야 한다. 이는 “여러분, 빨리 나를 향기로운 물에 목욕시키고 새 옷을 갈아 입히고 발우에 음식을 채워 주고, 나를 뱃머리에 두시오.”(Jat.463)라고 말한 것으로 알 수 있다.
보살은 전생에 쑵빠라까라는 선장으로 살았을 때 진실선언을 했다. 그것은 “고의적으로 한 생명도 나는 해친 적을 알지 못한다.”(Jat.463)라는 말이 핵심이다. 이와 같은 선언의 효과가 있어서일까 사 개월 동안 이역을 떠돌던 배는 신통을 지닌 것처럼 하루만에 바루깟차 항구에 도착했다.
대승불교 경전에도 진실선언과 유사한 내용이 있다. 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관음경)을 보면 “만일 한량없는 백천만억 중생이 여러 가지 고뇌를 받을 때에 이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듣고 일심으로 그 이름을 부르면, 관세음보살이 곧 이 음성을 듣고 모두 해탈케 하느니라.”라는 말이 그것이다.
관음경에서는 해상난이 소개 되어 있다. 누구든지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하며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큰 물에 떠내려 가도 얕은 곳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혹은 백천만억 중생이 금, 은, 유리, 차거, 마노, 산호, 호박, 진주와 같은 보배를 구하려고 큰바다에 들어갔을 때, 가령 폭풍이 일어 그들의 배가 나찰귀 들의 나라에 닿게 되었을지라도 그 가운데 만일 한사람이라도 관세음보살 이름을 부르면, 여러 사람들이 다 나찰의 난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리니, 이러한 인연으로 관세음이라 이름 하느니라.”라고 했다.
대승경전을 보면 초기경전과 유사한 내용을 종종 발견하게 된다. 관음경 칠난 중에서 해상난에 대한 것도 이에 해당된다. 이는 자타카의 ‘쑵빠라까의 본생이야기’(Jat.463)와 유사하다. 이는 “그 바다에 황금이 풍부했다.”라든가, “그 바다에 은이 풍부했다.”라든가, “그 바다에 마니주보석이 풍부했다.”라든가, “그 바다에 녹주석이 풍부했다.”라는 말로 알 수 있다.
자타카에서는 진실선언으로 위기를 벗어났다. 그러나 관음경에서는 관세음을 칭명하는 것으로 재난에서 벗어난 것이 다르다. 이렇게 본다면 관음경 해상난에 대한 이야기는 자타카 ‘쑵빠라까의 본생이야기’(Jat.463)를 모티브로 한 것으로 보여진다.
진실선언은 아무나 하나?
진실선언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의 진실한 가르침을 따르는 가장 청정한 자가 하는 것이다. 이는 “고의적으로 한 생명도 나는 해친 적을 알지 못한다.”(Jat.463)라든가, “내가 태어난 이래 나는 의도적으로 뭇삶의 생명을 빼앗은 적이 없습니다.”(M86)라는 말로 알 수 있다. 이는 다름 아닌 진리의 삶을 사는 자가 선언하는 것이다.
진리의 삶을 사는 자는 당당하다. 진리의 삶을 사는 자가 진실선언을 할 수 있다. 이는 다름 아닌 사자후이다. 최상의 진리에서 나오는 당당하고 의미 있는 선언인 것이다.
보살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것은
진리의 삶을 사는 자는 재난에 처했을 때 진실선언을 한다. 진실선언을 하면 진실의 힘으로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또 하나의 자타카에서도 발견된다. ‘쑤따쏘마의 큰 본생이야기’(Jat.537)가 바로 그것이다.
쑤따쏘마의 큰 본생이야기는 보살이 전생에 왕으로 살았을 때 이야기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이 자타카는 앙굴리말라경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부처님이 과거 전생을 회상하며 앙굴리말라에 대하여 “그는 진실에 입각한 서원으로, 난산에 처한 여자를 순산하게 만든 이후에, 탁발 음식을 얻기가 쉽게 되었고, 멀리 여읨을 닦아 훗날 거룩한 경지에 도달한 뒤에, 유명해져, 팔십명의 대장로에 속하게 되었다.”(Jat.537)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쑤따쏘마의 큰 본생이야기’는 진실선언에 대한 이야기 위주로 구성되어 있다. 마치 소설을 읽는 것처럼, 마치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극적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식인귀와의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지상에서
어떠한 맛난 것이라도
그들 가운데 진실보다 맛난 것은 없다.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은
진실에 입각하여
삶과 죽음의 피안으로 건넌다.”(Jat.537)
식인귀는 보살을 먹고자 했다. 그러나 보살은 이 세상 어떤 것보다 진실의 맛이 가장 뛰어나다고 했다. 이는 당당한 선언이다. 이런 당당함은 어디서 나왔을까?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잘 말해준다.
“나는 갖가지
선업을 행했다.
내가 지낸 제사는 널리 상찬받았다.
저 세상으로 가는
나의 길은 정화되었으니,
진리에 입각한다면
누가 죽음을 두려워하리?”(Jat.537)
보살은 식인귀에게 진실선언을 했다. 식인귀에게 잡혀 먹어도 좋다는 것이다. 선업을 행했으므로 두려운 것이 없다. 진실선언을 하면 두려움이 없음을 말한다.
보살은 죽으면 다시 태어날 것이다. 다시 태어나서 또 다시 보살행을 할 것이다. 그래서일까 보살은 “그대 식인귀여, 나를 잡아먹아라.”(Jat.537)라고 말했다.
보살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진실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잡아 먹혀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식인귀는 진실선언을 하는 자를 잡아 먹을 수 없었다. 이는 “진실을 말하는 자를 잡아 먹으면, 그의 머리는 일곱 조각으로 갈라지리.” (Jat.537)라고 말한 것으로 알 수 있다.
진리는 진실한 것이다.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의 몸은 늙어 가지만, 참사람의 진리는 늙지 않는다.”(Jat.537)라고 했다. 왜 그런가? 이는 “참사람이 참사람에게 전하기 때문이다.”(Jat.537)라고 했기 때문이다.
십바라밀 중에 진실바라밀이 있다. 진실바라밀은 목숨걸고 행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사지 때문에
사람은 재물을 버리고
목숨을 지키려고 사지를 버린다.
그런데 진리를 새기는 사람은
사지와 재물과
모든 목숨을 버린다.” (Jat.537)
진리는 목숨 걸고 수호 하는 것이다. 진리는 목숨을 걸만한 가치가 있다. 이는 진리에 대하여 “그에게는 실로 그것이 섬이고 피난처이다.”(Jat.537)라고 보살이 말한 것으로 알 수 있다.
일반사람은 진리를 말하지 않는다. 누가 말하는가? 이는 “진리를 말하지 않으면 참사람이 아니다.”(Jat.537)라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참사람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버리고, 진리를 말하는 자가가 참사람이다.”(Jat.537)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래서 일반사람과 참사람을 구분하는 방법에 대한 게송이 있다.
“현자와 바보와
섞여 있다면,
말하더라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리.
불사의 길을 가르칠 때야
비로소 그를 알아본다.”(Jat.537)
현자와 바보는 말을 한다. 차이는 열반에 대한 것이다. 불사에 대한 길을 말한다면 현자라는 것이다.
진실선언은 어떻게 하는가?
재난을 당했을 때 재난에서 벗어나길 바란다. 신의 이름을 부르고 신의 이름을 부루며 울부짖는 자가 있는가 하면 조용히 앉아 명상하는 자도 있다. 후자는 진리의 힘으로 재난을 벗어나고자 한다. 이른바 진실선언을 하는 것이다.
진실선언은 수행자가 하는 것이다. 계행이 청정한 자, 보시한 한자, 그리고 수행 한자는 진실선언할 자격이 있다. 진리의 힘으로 위기를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일까?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방식이 있다.
etena saccavajjena sotthi te hotu sabbadā
etena saccavajjena hotu te jayamaṅgalaṃ
etena saccavajjena sabbarogo vinassatu
이 세 가지는 영어로 다음과 같다.
By [the power of] this true speech, may you be always blessed.
By [the power of] this true speech, may you have victory and luck.
By [the power of] this true speech, may all illness be destroyed.
우리말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이와 같은 진실의 힘으로 그대에게 항상 축복이 있기를!
이와 같은 진실의 힘으로 그대에게 승리와 행운이 함께 하기를!
이와 같은 진실의 힘으로 그대에게 모든 질병이 사라지기를!
진실선언의 대상은 세 가지이다. 축복과 승리행운, 그리고 질병없음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진실선언 절대자에게 주문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공덕에 따른 것이다.
공덕 쌓은 자가 진실을 도구로 하여
사람은 죽기 마련이다. 목숨을 버려야 할 때 무엇이 자기의 것일까? 재산도 명예도 권력도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자신의 것인가? 이는 “공덕과 죄악, 바로 이 두 가지, 이것이야말로 자신의 것”(S3.4)이라고 했다. 그림자가 몸에 붙어 다니는 것처럼 따라 다니는 것이다.
공덕 쌓은 자는 진실선언 할 자격이 있다. 공덕이 자신을 수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쌓은 공덕은 남에게도 되돌려 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라는 말 대신에 그대를 뜻하는 떼(te)가 사용된다.
진실선언은 지계공덕, 보시공덕, 수행공덕을 지은 자가 그 공덕의 힘으로 자신에게 또는 타인에게 돌리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자신 또는 타인을 수호하는 것이다. 공덕을 타인에게 돌린다면 “이와 같은 진실의 힘으로 그대에게 모든 질병이 사라지기를!(etena saccavajjena sabbarogo vinassatu)”라며 축원해 주는 것이다.
진실선언은 기도와 다른 것이다. 기도는 절대자에게 구걸하는 듯한 바램이다. 일종의 거래관계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진실선언은 명령형이다. 이는 빠알리어 뚜(tu)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래서 “sabbarogo vinassatu”라 하여 “질병이 사라지기를!”라고 하는 것이다.
진실선언은 진실의 힘으로 재난을 물리치는 것이다. 또한 승리와 행운이 함께 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는 “etena saccavajjena”라는 말로 알 수 있다. 여기서 etena는 “이와 같은”의 의미이다. 어미에 ena가 붙었으므로 도구격이다. 또한 saccavajjena는 ‘진실로’라는 뜻이다. 어미에 ena가 붙었으므로 역시 도구격이다.
빠알리어 삿자왓제나(saccavajjena)는 “진실의 힘으로”라고 번역되는 것이 타당하다. 왜 그런가? 이는 삿짜왓자를 도구격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쌓고 이제까지 닦은 공덕의 힘으로 모든 재난을 물리치고 승리와 행운과 축복이 나에게 또는 그대에게 함께 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불교는 서원의 종교
초기경전을 보면 수많은 진실선언을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수타니파타 라따나경(寶石經, Sn2.1)을 들 수 있다. 경의 후렴구를 보면 “에떼나 삿쩨나 수왓티 호뚜(Etena saccena suvatthi hotu)로 되어 있다. 이 말은 “이러한 진실로 인해서 모두 행복하여지이다.”라는 뜻이다. 삼보에 대한 예찬과 예경을 한 공덕으로 행운, 축복, 그리고 승리와 행복이 함께 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라따나경은 테라와다불교의 대표적인 예경문이다. 또한 동시에 수호경이다. 이는 진실선언이 있기 때문이다. 진실의 힘으로 승리와 행운이 함께 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자는 가르침이 보호한다. 마치 법을 지키는 자에 대하여 법이 보호하는 것과 같다. 이는 절대자에게 구걸형 기도하는 것과 다르다. 자신은 물론 타인에게 까지 확장할 수 있다. 그래서 자야망갈라가타에서 여덟 가지 부처님의 승리와 행운에 대해서 “땅 떼자사 바와뚜 떼 자야 망갈라니 (Taṃtejasā bhavatu me(te) jayamaṅgalāni)”라는 진실선언이 후렴구로 붙는다. 이는 “이 위대한 힘으로 승리의 행운 제게(또는 그대에게) 임하길 바라옵니다.”라는 뜻이다.
불교는 서원의 종교이다. 불교는 기복의 종교가 아니다. 절대자에게 무언가 해주기를 바라는 구걸의 종교는 아닌 것이다. 그대신 내가 무엇인가 하려 하는 종교이다. 이는 진실선언에서 동사 어미에 뚜(tu)가 붙는 것으로 알 수 있다. 능동 명령형인 것이다.
타인을 위한 진실선언
진실선언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신에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타인에게 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왜 그런가? 자신은 공덕을 지었기 때문이다. 이미 지계공덕, 보시공덕, 수행공덕을 지었다면 자신은 수호된 것이다. 이런 이유로 타인에게 회향하는 것이다.
남방 테라와다불교에서는 보시하는 자를 위해서 법문을 해준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려 주는 것이 가장 큰 공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처님의 가르침은 참된 진실어라는 것이다.
참된 말(saccavajja)에는 힘이 있다. 부처님 말씀 한마디만 알려 주어도 그 사람에게는 커다란 공덕이 된다. 이른바 자신이 지은 공덕을 회향하는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은 진실된 것이다. 그래서 진실어라고 한다. 이와 같은 진실어에 대하여 빠알리어로 삿자왓자라고 하는데 이는 “여러 가지 선한 원리들(puññadhamma) 가운데 진실어가 가장 중대한 것이다.”(Dat.I.289)라고 했다.
진실어는 진실을 도구로 사용한 것이다. 그래서 “이 진실의 힘으로(etena saccavajjena)”라고 말한다. 이는 다름 아닌 진실선언을 의미한다.
진실선언 하는 방법은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 선언은 “이와 같은 진실의 힘으로 그대에게 항상 축복이 있기를!”라고 바라는 것이다. 이는 재가와 출가 모두 공통으로 적용된다.
두 번째 선언은 “이와 같은 진실의 힘으로 그대에게 승리와 행운이 함께 하기를!”라고 바라는 것이다. 이는 깨달음의 길로 가는 수행자에게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깨달음의 길을 가는데 있어서 장애물을 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 선언은 “이와 같은 진실의 힘으로 그대에게 모든 질병이 사라지기를!”라고 바라는 것이다. 이는 출재가 모두에게 해당된다.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모든 질병이 끝나기를 바라는 것이다.
승리와 행운과 축복의 진실선언
불자들은 절에 가면 법당에 들어가 삼배한다. 이때 어떤 마음을 내는가? 아무 생각없이 복전함에 돈을 넣고 오는 사람도 있고 무언가 바라는 기도를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가장 이상적인 바램은 무엇일까? 그것은 타인에 대한 기원이다. 어떻게 하는가? 구체적으로 사람 이름을 대며
“이와 같은 진실의 힘으로 그대에게 항상 축복이 있기를!
이와 같은 진실의 힘으로 그대에게 승리와 행운이 함께 하기를!
이와 같은 진실의 힘으로 그대에게 모든 질병이 사라지기를!”
라며 진실선언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축원이 이 세상 어디에 있을까?
언어에는 힘이 있다. 말 한마디에 사람이 죽을 수도 있고 죽어 가는 사람을 살릴 수도 있다. 하물며 진리의 말씀에 힘이 없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이 지계공덕, 보시공덕, 수행공덕을 쌓았다면 타인에게 되돌려 주어야 한다. 어떻게 돌려 주는가? “이와 같은 진실의 힘으로 그대에게 항상 축복이 있기를! 이와 같은 진실의 힘으로 그대에게 승리와 행운이 함께 하기를! 이와 같은 진실의 힘으로 그대에게 모든 질병이 사라지기를!”라며 돌려 주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진실선언일 것이다.
2024-04-09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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