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개처럼 살지 않고자

담마다사 이병욱 2024. 4. 14. 08:40

개처럼 살지 않고자

 

 

햇살 가득한 백권당의 아침이다. 아침 햇살에 백권의 책이 빛난다. 책장 가득 백권의 책을 보면 부자가 된 듯한 느낌이다. 물질적으로 가진 것은 없어도 마음만은 부자인 것이다.

 

 

내세울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부와 명예와 권력, 그 어떤 것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책을 바라 보면 요즘 속된 말로 자뻑이 된다.

 

이 세상에 태어났으면 흔적을 남겨야 한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손을 남긴다. 그래서일까 고교시절 어떤 학생은 저는 기필코, 기필코 아버지가 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학생은 아버지가 되겠다고 말했다. 결혼을 해서 자식을 낳는 것을 일생일대에 있어서 가장 잘한 일로 보는 것이다. 정말 그는 아버지가 되었을까? 아마 틀림 없이 아버지가 되었으리라고 본다.

 

요즘 공원에 애완견을 자주 본다. 애완견과 함께 산책 나오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개가 들어 있는 유모차를 끌고 나온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다.

 

붕어빵에는 붕어는 들어있지 않다. 유모차에는 아기가 들어 있지 않다. 아기처럼 비슷하게 생긴 흰색 털을 가진 말티즈가 들어가 있다. 이런 세상이 되어서일까 요즘 광고를 보면 개 전용 유모차가 등장했다. 이를 이름 붙인다면 개모차라 해야 할 것이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말한다. 사람도 귀천이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동물은 어떠할까?

 

공원에서 개를 보면 천하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이 아닌 이유가 클 것이다. 인간을 상대하다가 개를 보게 되었을 때 매우 비천해 보이는 것이다. 이런 마음이 생겨나는 것도 죄악일까?

 

개가 왜 비천한가? 애완견이 된 것이 비천한 것이다. 주인이 주는 음식만을 먹고 살아가는 것이 비천하다. 주인의 말만 잘 듣는 것이 비천하다. 아무 곳에서나 오줌을 누고 똥을 싸는 것이 비천하다.

 

개는 개의 동료를 보면 꼬리친다. 품종이 달라도 동족은 알아 보는 것 같다. 그런데 개는 가족이 없다는 것이다.

 

개는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고 어머니가 누군지도 모른다. 강아지로 태어나서 어느 정도 자라면 분양되어 가기 때문에 항상 혼자이다. 이렇게 본다면 축생으로 태어난 것이 얼마나 불쌍한 것인지 모른다.

 

개는 비천함의 대명사와 같다. 사람들은 욕을 할 때 개새끼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개 같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개로 태어난 존재가 이런 말을 알아 듣는 다면 부끄러움을 느낄 것이다.

 

개는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 그저 본능대로 살아간다. 오로지 식욕과 번식욕 뿐이다. 먹는 것과 자손을 남기는 것에 충실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그 학생이 저는 기필코 아버지가 되겠습니다.”라고 말한 것은 번식으로서 인간을 말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스님의 개가 임신했다. 작년 추석 무렵 출산을 했는데 일년도 안되서 임신한 것이다. 이전에도 임신을 해서 출산한 바 있다. 페이스북에서 소식을 전해서 알고 있다.

 

강아지는 귀엽다. 할머니가 우리 강아지 왔는가라며 손자를 반갑게 맞이해 주는 것도 귀엽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아지 시기가 지나가면 개가 된다. 비천한 개가 되는 것이다.

 

스님은 강아지를 기다리는 것 같다. 산중에서 홀로 사는 스님에게 개는 유일한 낙인 것 같다. 그런 개가 임신을 했으니 마치 손자를 기다리는 심정이 된 것 같다.

 

산중에 강아지가 태어나면 삶의 활력이 될 것이다. 이번에는 몇 마리나 나올까? 강아지가 두 달 정도 자라면 분양될 것이다. 아마 신도들이 가져 가리라고 본다.

 

매번 반복되는 삶이다. 스님의 삶도 반복된다. 강아지와 함께 사는 스님의 삶 역시 반복된다.

 

스님은 작년 강아지가 태어났을 때 다시는 인연 만들지 않겠다고 했다. 인연을 끊고 산에 들어 왔는데 개와 인연을 맺은 것을 후회한 것이다. 더구나 강아지가 태어났을 때 탄식했다. 이에 독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중성화 수술을 권했다.

 

동물은 식욕과 번식욕으로 살아간다. 오로지 먹는 것과 자손을 남기는 것으로 살아간다. 이것 이상은 없다. 스님은 중성화 수술을 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번에 개가 임신함으로 인하여 약속은 무너졌다. 혹시 스님은 강아지 출산을 즐기는 것 아닐까?

 

세상 살아가면서 가장 궁금한 것이 있다. 나는 어디서 왔는가에 대한 것이다. 어디서 왔다면 또 어디로 갈 것이다. 축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스님은 작년 강아지들이 태어났을 때 얘네들은 어디서 왔을까?”라며 글을 남겼다.

 

사람과 축생이 다른 점이 있다. 사람은 사유를 할 수 있지만 축생은 사유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나는 누구인가?”라든가,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며 사유할 수 있다. 그러나 동물은 이런 사유가 불가능하다.

 

동물은 오로지 식욕과 번식욕으로 살아간다. 사람도 식욕과 번식욕으로 살아간다면 동물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수행자는 식욕과 번식욕을 끊기 위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 같은 사람은 아니다. 사람 중에는 축생에 가까운 사람도 있는가 하면 사람 중에는 사람을 뛰어 넘은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사람을 뛰어 넘은 사람이 바로 수행자이다.

 

수행자의 삶은 어떤 것인가? 동물적 삶을 살지 않는 자가 수행자라고 볼 수 있다. 본능적으로 살지 않는 것이다. 감각적으로 살지 않는다. 욕망을 내려 놓는 삶을 산다.

 

이 세상에서 어리다고 해서 무시해서는 안될 네 가지가 있다. 왕족, , , 수행승을 말한다. 왜 그런가? 왕족으로 태어나면 왕이 될 수 있고, 뱀으로 태어나면 독사가 될 수 있고, 작은 불은 큰 불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수행승은 어떠할까?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알 수 있다.

 

 

계행을 지키는 수행승이

청정의 불꽃으로 불타오르면

아들과 가축이 없어

그 상속자들은 재산을 알지 못하리.

자손이 없고 상속자가 없으니

그들은 잘린 종려나무처럼 되네.”(S3.1)

 

 

여기 어린 사미승이 있다. 어리다고 해서 무시해서는 안된다. 사미승은 빠르게 배워 나간다. 이는 세속에 사는 사람들과 조건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늘을 나는 목이 푸른 공작새가 백조의 빠름을 따라잡을 수 없는 것처럼재가자는 멀리 떠나 숲속에서 명상하는 수행승그 성자에 미치지 못한다. (Stn.221)라고 했다.

 

사미승은 사미승으로 머물러 있지 않는다. 출가해서 한철 안거만 지나면 깨달은 자가 될 수 있다. 이는 세속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이런 이유로 나이 어린 사미를 무시해서는 안된다. 사미에게도 합장하며 경배해야 하는 이유에 해당된다.

 

수행자의 최종 목적은 열반이다.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는 청정한 삶을 살아야 한다. 탁발을 하며 무소유로 사는 이유에 해당된다. 이런 수행자에게 처자식이 있을 수 없다.

 

수행자는 이번 생이 마지막 생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계행을 지킨다. 그런데 계행을 지키는 수행승에 대하여 청정으로 불타오른다고 했다.

 

수행승은 청정의 이미지가 있다. 그런데 청정의 불꽃으로 타오르면 잘린 종려나무처럼 된다고 했다. 이는 재산과 자손을 남기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정신적 재산은 있다. 믿음, 계행, 부끄러움, 창피함, 배움, 지혜와 같은 재산을 말한다.

 

수행자는 자손을 남기지 않는다. 이는 아버지가 되고 할아버지가 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래서 잘린 종려나무처럼 되는데 이는 완전한 열반에 드는 것을 말한다. 다음 생이 없는 것이다.

 

불은 어떤 경우에서라도 위험하다. 작은 불씨가 큰 불이 되면 모든 것을 태워 버린다. 그런데 수행승에게도 불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계행에 바탕을 둔 청정의 불이다.

 

수행승은 불꽃 같은 존재이다. 누군가 수행승을 해치려 한다면 타 죽게 될 것이다. 왜 그런가? 이는 수행승이 복수를 하려 해도, 자신의 계행의 불로 다른 사람을 해칠 수 없는 것에 따른다. 그래서 수행승에 죄를 범한 자는 수행승이 인내하여 참아낼 때에만 불태워진다.”(Srp.I.134)라고 했다.

 

공원에서 애완견을 본다. 어떤 애완견은 개모차에 실려 있다. 그러나 개를 보면 볼수록 비천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럴 때 어쩌다 개로 태어났을까?”라며 연민의 마음을 갖게 된다.

 

세상에 비천한 사람은 많다. 개처럼 사는 사람은 비천하다. 식욕과 번식욕을 사는 것이다. 아버지가 되고 할아버지가 되는 것만이 해야 할 일은 아니다. 진정으로 해야 할 일은 개와 같은 삶을 살지 않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바람직한 삶은 수행자로 사는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알고 사는 것이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고자 하며 사는 것이다. 그가 비록 미천한 가문 출신이라도 수행자로 살아 삶을 결실을 맺었다면 왕족도 경의를 표하게 될 것이다.

 

 햇살 가득한 백권당에 햇살이 사라졌다. 창문이 북동방향이라 아침에 잠깐 햇볕이 들고 만다. 글 쓰다 보니 시간이 지난 것이다.

 

시간은 가만 있지 않는다. 나를 자꾸 늙음으로 죽음으로 밀어내는 것 같다. 시간에 저항하기 위해서 쓰는 것인지 모른다. 수행자의 삶을 살고자 한다.

 

백권당 책장에 백권의 책을 보면 마음이 뿌듯하다. 이런 것도 삶의 결실일 것이다. 그러나 아침의 마음과 저녁의 마음은 다르다.

 

아침에는 늘 새로운 기분이다. 그러나 저녁이 되면 무너진다. 이런 일이 계속 반복되고 있다. 이는 수행이 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늘 새김과 알아차림이 없는 것이다.

 

일상이 수행이 되어야 한다. 늘 새김이 있어야 한다. 마치 허리 아픈 환자처럼 천천히 움직여야 한다. 나는 언제나 자유로운 사람이 될까?

 

 

2024-04-14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