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시전용통장을 만들고
어떤 학회가 있다. 학회는 회비로 유지된다. 회원은 회비를 내야 할 의무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가 논문 쓴 것을 회비로 인정해달라고 말한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어느 불자가수가 있다. 가수는 절 창립 행사 때 무보수로 노래 불렀다. 이른바 재능기부한 것이다. 이런 것도 보시라고 해야 할까?
글을 잘 쓰는 것도 재능이고 노래를 잘 부르는 것도 재능이다. 그림을 잘 그리는 것도 재능이고 춤을 잘 추는 것도 재능이다. 재능이 있어서 먹고 산다. 그런데 돈을 받지 않았을 때 흔히 재능기부라고 말한다.
재능이 없는 사람이 있다. 재능 없는 사람은 재능이 없기 때문에 재능기부를 할 수 없다. 몸으로 때우거나 돈으로 보시할 수밖에 없다.
재능 있는 자는 재능을 보여준다. 재능도 있으면서 재물도 있다면 재능뿐만 아니라 재물보시도 해야 할 것이다.
매일 글을 쓰고 있다. 그것도 장문의 글이다. 오전 일과는 글쓰기로 보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글쓰기에 대하여 재능보시라고 말하지 않는다.
재능을 가진 자의 재능은 일상이다. 그럼에도 재능기부라 하여 내야 할 것을 내지 않는다든가 면책하려 한다면 재능 있는 자의 자만에 해당될 것이다.
통장을 하나 만들었는데
오늘 통장을 하나 만들었다. 이른바 보시통장이다. 이것은 한달 전에 구상한 것이다. 이는 갑작스러운 수주와 관련이 있다.
점심약속도 약속이다. 인터넷에서 약속한 것도 약속이다. 한달전 보시통장에 대한 글을 썼다. 약속을 지켜야 한다.
사업을 하다보면 생각지도 않은 돈이 들어올 때가 있다. 그렇다고 누군가 무상으로 주는 것은 아니다. 그 동안 잊고 있었던 고객이 갑자기 나타나 일감을 준 것이다. 그런데 생각보다 더 높게 쳐 준 것이다. 이것은 공짜나 다름 없다.
이 세상에 공짜는 없다. 수주를 받았기 때문에 밤낮으로 주말없이 일 했다. 그리고 수정설계까지 해 주었다. 자신의 몸을 갈아 돈을 번 것이다. 또한 자신의 시간을 투자해서 돈을 번 것이다. 이런 돈은 불로소득과 다르다. 그럼에도 공짜라고 한 것은 보시통장에 들어갈 돈으로 보기 때문이다. 내 것이 아닌 것이다.
여러 개의 통장이 있다. 입출금 통장 등 갖가지 통장이 있는데 모두 개인에 대한 것이다. 이런 때 보시통장의 필요성을 느꼈다. 보시전용통장을 만들어 돈이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자 하는 것이다.
오늘 아침 입출금통장을 확인해 보니 기다리고 기다리던 돈이 입금되었다. 고객사에서 설계비용 대금을 결재한 것이다. 이 금액을 별도의 통장을 만들어 관리하고자 했다. 이른바 보시전용통장을 만드는 것이다.
보시를 생활화 하고자 한다. 불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보시공덕, 지계공덕, 수행공덕 중에 하나를 실천하는 것이다. 이제 돈이 들어 왔으니 보시통장을 만들면 된다.
오늘 아침 국민은행에서 보시통장을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한달 이내에 새로운 통장을 만들었을 때 불가능하다는 말을 들었다. 이른바 보이스피싱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사오일전 새마을금고에서 통장을 하나 만들었다.
돈은 입금 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통장을 만들 수 없다. 한달 전에 만들어 놓은 농협통장이 생각 났다. 이 통장을 보시통장으로 활용하고자 한다.
보시통장은 오로지 보시용도로만 활용된다. 언제 어디서나 보시가 가능하도록 농협 앱 ‘NH콕뱅크’를 스마트폰에 깔아 놓았다. 걸어가면서도 보낼 수 있고 전철에서도 보낼 수 있다.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났다. 국민은행 주거래통장으로 입금된 288만원을 농협 보시통장으로 송금했다. 베풀고 나누고 보시할 수 있는 금액이 확보 되었다.
보시는 능력껏
사람들마다 모두 능력이 다르다. 어떤 이는 돈 버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있다. 이른바 돈벌기 선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돈 버는 능력이 뛰어나지 않다. 그래서 보시를 해도 능력껏 해야 한다.
불교에서는 보시가 강조된다. 보시하고 지계하면 천상에 태어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큰 액수를 보시한 사람은 천상에 더 가깝게 다가가는 것일까?
보시는 능력껏 하는 것이다. 이는 절대적인 금액과 관련이 없다. 아니 상대적 금액과 관련 있다고 본다. 왜 그런가?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잘 말해 준다.
“어떤 사람은 조금 있어도 베풀고
어떤 사람은 많아도 베풀지 않으니
조금 있어도 주는 보시는
천 배의 보시와 동일하게 헤아려지네.”(S1.32)
조금 있어도 주는 보시는 천 배의 보시와 동일하다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보시공덕은 절대적이 아니라 상대적이라는 뜻이다.
여기 월 일억원을 버는 자가 있다. 그는 수입의 1%에 해당되는 백만원을 보시한다. 여기 월 백만원을 버는 자가 있다. 그는 수입의 10%에 해당되는 십만원을 보시한다. 누구의 보시공덕이 더 클까? 절대적인 금액이 아닌 상대적인 금액으로 따졌을 때 백만원에서 십만원을 보시한 자가 일억원에서 백만원을 보시한 자보다 열 배 더 큰 공덕을 짓는 것이다.
보시는 능력껏 하는 것이다. 이 다음에 돈을 많이 번 다음에 큰 보시를 하려 한다면 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그 사이에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면 허사가 될 것이다.
보시는 있을 때 해야 한다. 또한 보시는 능력껏 해야 한다. 가난하다고 하여, 가진 것이 없다고 하여 보시 하지 않는다면 보시하는 삶을 살 수 없다. 가진 것이 없으면 없는 대로 하는 것이 진정한 보시이다. 그래서 “능력에 따라 보시하고 또한 즐기면 비난 받지 않고 하늘나라를 성취하리.”(S1.41)라고 했다. 이처럼 보시는 “능력껏” 하는 것이다.
보시는 능력껏 하는 것이라는 말에 크게 공감했다. 여기서 ‘능력껏’이라는 말은 빠알리어 ‘ānubhāva’을 번역한 말이다. 이 빠알리어는 영어로 ‘after ability, according to power’의 뜻이다. 그래서일까 빅쿠보디의 영역에서는 “as fits his means”라고 번역했다. 이는 “그의 수단에 맞게”라는 뜻이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도 “능력껏”이라고 번역했다.
비천한 자의 부(富)
쌍윳따니까야 1권 사가타쌍윳따에는 보시에 대한 훌륭한 게송이 있다. 언제 읽어 보아도 새롭다.
“험한 길을 함께 가는 좋은 벗처럼
조금 있어도 나누어 주는 사람은
죽은 자 가운데 죽지 않는다.
이것은 영원한 가르침이네.” (S1.32)
게송에서 “조금 있어도 나누어 주는 사람은 죽은 자 가운데 죽지 않는다.”라고 했다. 여기서 ‘죽은 자’는 무슨 뜻일까? 주석에 따르면 죽은 자는 인색한 자를 말한다. 이는 “인색한 자가 소유한 것은 아무에게도 나누어 주지 않기 때문에 죽은 것과 같다.”(Srp.I.58)라는 뜻이다.
여기 지독하게 인색한 자가 있다. 근검절약이 몸에 밴 사람이다. 그는 먹고 싶은 것도 먹지 않고 입고 싶은 것도 입지 않고 오로지 돈만 모았다. 나이 들어서도 늙어서도 여전히 마찬가지이다. 그는 자신을 위해서 쓸 줄도 모르고 타인을 위해서 쓸 줄도 모른다.
인색한 자에게 재산은 없는 것이나 다름 없다. 부동산이 있고 현금이 있다고 하지만 쓰지 않는 다면 장부에나 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 이렇게 재산권을 행사하지 않았을 때 죽은 자와 같다는 것이다.
“사람이 없는 곳에 시원한 물이 있어도
마시지 않아 말라 없어지는 것같이
비천한 자가 부를 얻으면,
스스로도 사용하지 않고 남에게도 주지 않네.”(S3.19)
인색한 자의 부는 비천한 자의 부와 같다. 재산이 있어도 보시하고 나누지 않으면 깊은 산 속 옹달샘과 같다는 것이다. 누구도 찾지 않은 샘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말라 사라질 것이다. 비천한 자의 부 역시 사라지고 말 것이다.
비천한 자의 부는 누가 가져 가는가? 그가 죽으면 국가에 귀속될 것이다. 도둑이나 강도가 가만 놔두지 않을 것이다. 불이 나서 타버릴 수 있고 바람에 날아가버릴 수도 있다. 악의적 상속자가 가로챌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보시하면 좋은 공덕을 얻지만
보시하지 않으면 좋은 공덕이 없다네.
도둑이나 왕들에게
약탈당하거나 불타서 사라진다네.”(S1.41)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재산은 나의 것일까? 자신의 노력으로 부를 이루었다고 생각하면 자신의 것이 된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자만이다. 부자의 자만을 말한다.
여기 진짜 부자가 있다. 진짜 부자는 겸손하다. 진짜 부자는 늘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라고 말한다. 자신의 부에 대하여 사회로 돌리는 것이다. 부를 이루기 위한 여건이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인터넷 시대에 부자가 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기회를 잘 잡았다. 누구에게나 기회가 있지만 기회를 잡은 것은 운이 따랐다고 볼 수 있다.
천문학적 부는 자신의 것이 아니다. 이 부가 있게 되기까지 여건이 조성되었기 때문에 사회의 것으로도 본다. 이런 이유로 진짜 부자는 자신이 이룬 부를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지 않고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다.
가진 것이 조금 밖에 없어도
보시는 부자만 하는 것이 아니다. 가진 것이 조금 밖에 없어도 보시할 수 있다.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잘 말해준다.
“벼이삭을 모아 아내를 부양하며 살면서
조금 있어도 보시하네.
천 사람의 십만의 제물조차도
그러한 보시에 비해 십육분의 일의 가치도 없네.”(S1.32)
군대 있을 때 일이다. 추수가 끝난 마을에서 어떤 여인이 논을 비로 쓰는 것을 보았다.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나중에 알고 보았더니 떨어진 벼이삭을 주어 담는 것이었다.
게송에서는 벼이삭을 모아 아내를 부양하며 사는 자의 보시를 말했다. 이는 매우 작은 보시를 말한다. 그러나 이런 보시에 대하여 부정한 보시보다 더욱 가치 있는 것이라고 했다.
거의 삼십년전의 일이다. 용산 한강변 낡은 아파트에 사는 이는 어느 해 재개발로 인하여 로또를 맞았다. 그 사람은 자신이 다니는 교회에 일억원을 기부했다고 한다. 아마 십일조를 실천했을 것이다.
눈물로 얼룩진 보시가 있다. 타인을 피눈물 나게 하여 부를 이룬 자의 보시를 말한다. 이는 다름 아닌 부정한 보시에 해당된다. 그런데 부정한 보시는 바른 보시에 비해 십육분의 일의 가치도 없는 것이라고 했다.
하루벌어 하루먹고 사는 사람이 있다. 걸식 수행자에게 밥 한주먹 보시했다면 부정으로 인한 눈물로 얼룩진 막대한 보시와 비교되지 않을 것이다.
천 배의 선물처럼
불교에서는 보시하는 삶을 강조한다. 육바라밀에서도 보시바라밀이 가장 선두에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보시를 하면 손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어리석은 자는 보시하고 하고 현자는 취한다.”라는 말이 있다.
요즘 유튜브에서 주식에 대한 광고를 자주 접한다. 이 주식을 사 놓으면 부자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돈 놓고 돈 먹기’ 식에서는 보시할 마음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 보시한다고 말하면 웃어 버릴 것이다.
항상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고자 한다. 부처님이 보시를 강조한 것은 이유가 있다. 보시를 하면 큰 공덕이 될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주식을 사 두면 큰 부자가 될 것이라고 하지만 보시를 하면 이와 비교 되지 않을 정도로 큰 이익이 될 것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이런 게송이 있다.
“ 어떤 사람은 조금 있어도 베풀고,
어떤 사람은 많이 있어도 베풀지 않지만,
조금 있어도 보시를 행하면,
천 배의 선물처럼 헤아려지네.”(S1.33)
게송에서 “조금 있어도 보시를 행하면, 천 배의 선물처럼 헤아려지네.”라는 말이 크게 와 닿는다. 지금 소액에 해당되는 만원을 계좌이체 하여 보시했다면 나중에 천 배에 해당되는 천만의 갚음이 기대된다는 말이다. 이렇게 본다면 보시는 결국 자기자신에게 하는 것이 된다.
한때 주식에 빠져
한때 주식에 빠져 산 적이 있다. 인터넷이 활성화 되기 시작한 2000년대 전반기를 말한다. 그때 사무실 컴퓨터에 홈트레이딩 시스템을 깔아 놓고 몰래 거래 했었다. 이른바 단타매매를 한 것이다.
지금은 주식을 하지 않는다. 그때 여유 돈이 다 털렸을 때 그만 두었다. 더 하고 싶어도 여유 돈이 없어서 하지 못했다. 마치 도박장에서 돈이 다 털렸을 때 일어나는 것과 같다.
주식을 손절 했다. 글쓰기가 시작되는 2006년 이후 일체 주식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때 주식을 했을 때 기부는 생각도 못했다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돈이 생기면 주식을 샀다. 그러나 잦은 단타매매로 인하여 통장잔고는 줄어만 갔다. 마침내 잔고가 말라 버렸을 때 그만 두지 않을 수 없었다.
주식을 해서 돈을 벌고자 했으나 정반대가 되었다. 유튜브에서 주식광고를 보면 내 돈을 빼앗아 가려는 것처럼 보인다. 사기로 보는 것이다.
주식을 그만 두고 저축을 했다. 저축의 효과는 대단했다. 시간이 갈수록 세월이 흐를수록 커진 것이다. 공덕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여유 돈이 있으면 주식을 사야 할까 보시를 해야 할까? 후자를 선택하기로 했다. 전자는 이미 실패를 맛보았다. 다시 한다고 해도 실패할 것이다. 왜 그런가? 욕망이 제어되지 않기 때문이다.
보시를 하면 주식 하는 것보다 백배천배 낫다. 왜 그런가? 이는 “조금 있어도 보시를 행하면, 천배의 선물처럼 헤아려지네.”(S1.33)라는 가르침에 따른다. 만원을 보시하면 천만원의 갚음이 기대되는 것이다. 세상에 이런 일이 어디 있을까?
보시는 믿음으로 하는 것
사람들은 보시를 하면 손해 본다고 생각한다. 당장 자신의 호주머니에서 돈이 나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로또를 사는 데는 돈을 아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원으로 천배, 만배를 기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로또는 허황된 꿈에 지나지 않는다. 로또 살 돈이 있으면 보시를 해야 한다. 돈이 필요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주는 것이다. 그런데 보시를 하면 천 배의 갚음이 기대된다고 했다. 로또와 비교되지 않는 것이다.
“보시와 싸움은 같은 것이라 불리니,
조금 있어도 베풀면 다른 많은 사람을 이기리.
조금 있어도 믿음으로 보시하면,
참으로 저 세상에서 안락하게 되리.”(S1.33)
보시는 믿음으로 하는 것이라고 했다. 믿음이 없으면 보시하기 힘든 것임을 말한다. 어떤 믿음을 말할까? 주석에 따르면 “믿음이란 그 과보에 대한 신념을 말한다.”(Srp.I.61)라고 했다.
세상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어리석다. 왜 어리석은가? 대부분 탐욕으로 살기 때문이다. 그래서 손해나는 일을 하려 하지 않는다. 어리석은 자는 보시하고 현자는 취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보시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뚜렷한 신념이 없으면 남에게 주고 베풀고 나누는 삶을 살기 힘들다. 더구나 가진 것이 없다면 더욱더 주려 하지 않을 것이다.
보시는 전쟁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승리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승리에 대한 믿음이 있으면 병사 숫자가 적어도 많은 숫자의 적을 격파할 수 있다. 그래서 “적은 것으로도 많은 사람을 이긴다.”(S1.33)라고 했다.
부처님 가르침을 믿는 사람은 조금 가졌어도 주고자 할 것이다. 왜 그런가? 이 번 생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금 있어도 믿음으로 보시하면, 참으로 저 세상에서 안락하게 되리.”(S1.33)라고 했다.
저 세상의 노자돈
초기경전에는 보시에 대한 수많은 가르침이 있다. 가진 것이 있으면 베풀고 나누는 삶을 살라는 것이다. 이런 행위에 대하여 “보시하는 것이야말로 좋은 밭에 뿌려진 씨앗처럼, 커다란 공덕을 가져오리.”(S1.33)라고 했다.
보시공덕은 당장 오는 것은 아니다. 오늘 만원을 소액송금 했다고 하더라도 당장 천 배의 갚음이 오라는 보장은 없다. 다만 공덕의 행위가 무르익었을 때 천 배의 과보로 나타날 것이다.
보시는 미래에 대한 투자나 다름 없다. 주식처럼 실시간으로 지금 당장 수익을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번 생에 갚음이 기대될 수도 있고 다음 생이 될 수도 있다. 먼 후생이 될 수도 있다. 특히 죽은 다음에 의지처가 된다. 그래서 이런 게송이 있다.
“바르게 얻거나 힘써 노력하여 얻은
재산과 물건을 베푸는 사람은
지옥의 베따라니 강을 뛰어넘어,
죽을 때 하늘나라로 간다네.”(S1.33)
기독교인들은 죽을 때 요단강을 건넌다고 말한다. 그런데 불교에도 죽을 때 강을 건넌다는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베따라니 강이다.
베따라니 강은 잿물이 흐르는 강으로 지옥에 있는 강 이름이다. 베따라니 강을 건넌다는 것은 지옥에 가지 않음을 말한다. 천상에 태어남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보시공덕을 비롯하여 지계공덕, 수행공덕 쌓는 것은 저 세상의 노자돈을 마련하는 것과 같다.
가장 가치 있는 것은
오늘 보시통장을 만들었다. 이를 ‘나눔통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돈이 필요한 사람에게 주려고 한다. 그렇다고 큰 금액을 주는 것이 아니다. 능력에 맞게 소액 보시하려 한다.
“먹을 것을 베풀어 힘을 주고
옷을 베풀어 아름다움을 주고
탈 것을 베풀어 안락을 주고
등불을 베풀어 밝은 눈을 주네.”(S1.42)
보시라 하여 반드시 돈으로 주는 것만을 말하지 않는다. 돈이 없으면 가진 것을 주면 된다. 또한 기술이나 재능을 주어도 된다. 이른바 재능기부인 것이다. 이도 저도 없으면 봉사라도 해야 한다. 미소 짓는 것도 봉사이다. 그러나 가장 가치 있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이다.
“살 집을 베푸는 자는
모든 것을 주는 자이지만,
가르침을 베푸는 사람이야말로
불사의 삶을 주는 자이네.”(S1.42)
2024-04-23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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