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오토바이 폭탄음

담마다사 이병욱 2024. 4. 30. 09:19

오토바이 폭탄음

 

 

요즘 귀에 거슬리는 것이 있다. 오토바이 폭탄음이다. 마치 따발총을 쏘는 것처럼 쏜살같이 달린다. 마치 폭탄을 터뜨리는 것처럼 소리가 요란하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기라는 말이 있다. 폭탄음을 내며 내빼는 오토바이를 쳐다 본다. 이럴 때 나도 모르게 나쁜놈!”이라는 말이 튀어 나온다. 또한 망할놈!”이라는 말이 튀어 나온다.

 

오토바이 폭탄음을 내는 자는 어떤 사람일까? 아마도 자신밖에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신의 만족과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는 어떤 일도 서슴지 않는 악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대부분 사람들은 남에게 폐 끼치지 않고 살고자 한다. 이는 공동생활을 하기 때문이다. 도시에서 삶은 남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보는 눈이 있기 때문이다.

 

자동차 폭탄음을 내는 사람도 있다. 대개 스포츠카처럼 생긴 고급차인 경우가 많다. 운전을 마치 곡예 하듯이 한다. 그리고 마치 화풀이라도 하듯이 폭탄음을 내며 달아난다.

 

폭탄음에 스트레스 받는다. 폭탄음을 내며 달아나는 오토바이를 보면서 속으로 저주의 말을 한다. 공동체 질서를 깨는 한 사람의 미꾸라지 같은 행위로 인하여 불선심을 일으키고 불선업을 짓게 만든다. 이럴 때 다음과 같은 게송이 떠오른다.

 

 

어리석은 자에게 지식이 생겨난다.
오직 그의 불익을 위해서
그것이 그 어리석은 자의 행운을 부수고
그의 머리를 떨어 뜨린다.”(Dhp.72)

 

 

어리석은 자에게서 지식이 생겨나면 어떻게 될까? 아마 악하게 사용될 것이다. 여기서 지식은 빠알리어  ‘냐따(ñatta)’를 말한다. 이 말은  ‘learning; something known’의 뜻으로배워서 아는 것이다. 일종의 기술 같은 것이다. 법기술의료기술교육기술 등도 일종의 기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운전하는 것도 기술이다. 옛날에는 운전기술 하나만 있어도 먹고 살았다. 요즘은 누구나 운전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런데 오토바이 운전하는 것도 기술이라는 것이다.

 

면허증이 있다면 기술이 된다. 기술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격증이 있어야 한다. 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의사면허증이 있어야 한다. 판사와 검사와 같은 법기술자가 되기 위해서는 국가고시를 패스해야 한다. 지혜가 아닌 것은 모두 기술의 범주에 들어간다.

 

기술이 있으면 먹고 살 수 있다. 그래서일까 너도 나도 기술을 배우고자 한다. 지금 인쇄회로기판(PCB)를 하는 것도 기술이다. 엄밀히 말하면 기능에 가깝다. 그럼에도 기술의 범주에 넣고자 한다.

 

오토바이 모는 것도 기술이다. 오토바이 면허증이 있어야 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토바이 타는 사람들 대부분은 젊은 사람들이다. 그 중에는 이십 세 미만 십대로 보이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다.

 

폭탄음을 내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은 아닐 것으로 본다. 공동체 질서를 파괴하는 것으로 보아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가진 자로 볼 수 있다.

 

오토바이 폭탄음을 들으면 스트레스가 쌓인다. 쫓아 가소 혼내주고 싶어도 잡을 수 없다. 오토바이 폭탄음은 아마 법적으로 규제되어 있을 것이다. 구청이나 시청, 경찰서에 신고하면 해결될까?

 

대한민국은 선진국일까? 오이씨디(OECD) 회원국이기 때문에 선진국임에 틀림 없다. 그러나 오토바이 폭탄음을 들으면 여지 없이 무너진다. 독일이나 일본과 같은 나라에서 오토바이 폭탄음은 상상이 가지 않는다.

 

오토바이 폭탄음을 들을 때 도시를 떠나고 싶어진다. 폭탄음이 없는 곳에서 살고 싶다. 한적한 시골이나 깊은 산중에 산다면 폭탄음에서 자유로울까?

 

이 도시를 사랑한다. 이 도시에서 오래 살아서 이제 제2의 고향이나 다름 없다. 일년 삼백육십오일 집과 일터를 왕래하면서 글을 쓰고 살았다. 그런데 오토바이 폭탄음으로 인하여 도시를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오토바이 폭탄음을 피해서 시골에 산다면 좋을까? 아마 시골도 시골 나름일 것이다. 알지 못하는 불편함이 있을지 모른다.

 

어떤 이는 시골로 자리를 옮겼다. 한적한 시골이 좋았다고 한다. 그러나 시골을 떠나고 싶은 사건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것은 개가 밤새도록 짓는 다는 것이다.

 

도시에서는 오토바이 폭탄음이 싫고 시골에서는 개소리가 싫다. 그러면 어디로 가야 할까? 깊은 산중 밖에 없다. 그러나 생업이 있는 자는 가능하지 않다. 출가수행자나 자연인이라면 가능할지 모른다.

 

세상에서 어느 곳이 가장 조용할까? 아마도 그곳은 사막일 것이다. 이는 2013년 실크로드 여행을 하면서 알게 되었다.

 

돈황에서 우루무치로 가는 길은 사막의 연속이다. 그런데 사막에는 풀 한포기 나지 않는 불모지대가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산맥에도 풀이나 나무가 보이지 않는다. 마치 달나라에 온 것처럼 고요했다. 아마도 이런 곳이 수행하기 좋을 것이다.

 

요즘 매일 좌선을 한다. 한시간 앉아 있는 것을 목표로 하지만 다 채우지 못한다. 그럼에도 매일 앉아 있는 것은 습관들이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앉아 있다 보면 갖가지 소음에 시달린다는 것이다.

 

도시에서 차량소음은 기본이다. 그러나 요즘은 차의 성능이 좋아져서 소리가 거의 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질주하는 소리가 창 밖에서 들려 오면 방해가 된다. 냉장고 모터 돌아가는 소리도 거슬린다. 건물자체에서 나는 저주파음도 불편하다.

 

좌선을 하다 보면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소음 없는 곳에서 원 없이 앉아 보는 것이다. 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는 동굴에 앉아 있다면 집중이 잘 될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실크로드를 여행하다 보면 굴속 수행처가 있다. 돈황의 막고굴이 대표적이다. 또한 투루판에 있는 베제크리크 천불동도 이상적이다. 모두 사막 가운데 있는 동굴이다.

 

여행을 많이 다니지 않았다. 그럼에도 가장 인상에 남는 곳이 있다. 그곳은 2013년에 여행한 베제크리크 천불동이다.

 

베제크리크 천불동 가는 길은 마치 화성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 풀 한포기 나는 산악지형에 황량하기가 그지 없었다. 그런데 계곡 사이에 푸르름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른바 오아시스를 말한다.

 

 

베제크리크 천불동에는 수십 개의 동굴이 있다. 법당도 있지만 거처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개인 수행동굴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동굴에서 명상하면 수행이 잘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사막에서는 하늘과 곧바로 만난다. 그래서일까 사막의 종교가 탄생되었을 것이다. 막고굴이나 베제크리크 천불동 역시 하늘과 맞닿아 있다. 이는 수풀이 우거진 열대나 아열대 우림지역과는 다르다.

 

베제크리크 천불동을 보자 초록으로 가득한 지역이 시시해 보였다. 수행처로서는 사막이 열배, 백배 나아 보였다. 그래서 나중에 기회 된다면 사막의 동굴에서 수행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시를 떠나고 싶지만 도시를 떠날 수 없다. 오토바이 폭탄음이 있어도 이곳에서 살아야 한다. 그럼에도 요란한 폭탄소리를 들으면 나도 모르게 욕설이 튀어나온다. 이를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떤 문제이든지 부처님 가르침에 해법이 있다. 게송에서는 지식을 가진 자가 지식을 남용 했을 때 머리가 떨어질 것이라고 했다. 참으로 무서운 말이다.

 

현명한 자가 지식을 가진다면 문제가 없다. 왜 그런가? 남을 배려 할 줄 알기 때문이다. 남에게 폐 끼치지 않고 사는 최소한 소극적 공리주의를 실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어리석은 자에게 지식이 생겨났을 때 발생한다.

 

지식은 기술과 동의어가 될 때도 있다. 지식이 있어야 기술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판사와 검사와 같은 사람도 기술자라는 것이다. 이른바 법기술자를 말한다.

 

어리석은 자가 법기술을 갖게 되면 재앙이 된다. 이는 검사가 정치에 관여했을 때 명확하게 드러난다. 마치 운전면허증도 없는 자가 운전을 하는 것과 같다.

 

오토바이 폭탄음을 내는 자는 지혜가 없는 자임에 틀림 없다. 배달하는 사람들이대부분이다. 시간이 돈인 세상에서 빨리 달리고자 한다. 그러나 폭탄음 내는 장치를 달았다면 이는 반사회적 행위로 보아야 한다.

 

어리석은 자에게서 지식이 생기면 머리가 떨어진다고 했다. 지혜가 결여된 자의지식은 악한 행위를 하기 쉽다. 오늘날 검사정치도 이에 해당된다.

 

어리석은 자가 지식을 갖게 되면 불운할 가능성이 높다. 지식만 있고 지혜가 없을 때 경거망동하기 쉽다. 작은 지식, 작은 기술 하나로 기고만장 했을 때 어떤 불운이 닥칠지 알 수 없다.

 

지식과 지혜는 다르다. 지식은 세속적인 기술이나 권위나 명예나 명성에 대한 앎의 힘에 대한 것이다. 이른바 지식인이 되었을 때 지식권력을 갖게 된다.

 

어떤 권력이든지 자제하지 못하면 남용된다. 마치 조폭의 주먹이 근질근질한 것과 같다. 이렇게 지식권력이 남용되면 그 사람의 기술이나 권위는 오로지 그 사람의 퇴락을 위한 것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결국 지식권력의 남용은 자신을 해치는 것으로 작용한다.

 

오늘도 오토바이 폭탄음을 듣게 될 것이다. 그 결과 불선심을 자극하여 불선업을 짓게 만들 것이다. 이를 어떻게 해소해야 할까? 도시를 떠날 수도 없다. 사막과 같은 동굴에서 있을 수도 없다.

 

도시는 소음으로 가득하다. 귀가 있어서 들릴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귀를 막고 살 수 없다. 보기 싫다고 하여 눈을 감고 살 수 없다. 알아차리는 수밖에 없다. 그런 줄 아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부처님 가르침이다.

 

어리석은 자에게 지식이 생겨나면 재앙이 된다. 어리석은 자의 지식은 오로지 그의 불익을 위해서 작용한다.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는 마음을 내었을 때 어리석은 자의 경거망동은 행운이 오는 것을 막는다. 어리석은 자의 지식은 행운보다는 불운이 많게 되어서 결국 고개를 푹 숙이게 만들 것이다.

 

 

2024-04-30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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