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강아지들을 어이할꼬?
자유, 가슴 설레이게 하는 말이다. 나는 자유가 있는가?
학교 다닐 때 무척 답답했었다. 특히 고등학교 다닐 때 수업 받는 것이 답답했다.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그때는 용기가 없었다. 시간 지나면 벗어날 것이기 때문에 참고 견디었다.
군대 있을 때 답답했다. 병영에 갇혀 사는 것이 마치 감옥에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감옥 경험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제까지 살면서 파출소 한번 가보지 않았다.
지금 나는 자유로운가? 학교에서도 벗어났고 군대에서도 벗어났으니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자유롭지 않다. 그것은 아마도 가족이라는 새로운 족쇄가 채워졌기 때문일 것이다.
출가수행자들은 자유롭다. 가족의 족쇄에서 벗어난 것이 무엇보다 자유로울 것이라고 본다. 그럼에도 여전히 자유를 갈망하는 스님이 있다.
학의천을 따라 백운호수까지
어제 일요일이었다. 일요일에는 산에 가야 한다. 일주일에 한번은 다리가 뻐근하도록 걷는 것이다. 그렇다고 반드시 산에만 가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천길을 걷는 것도 해당된다.
안양에 학의천이 있다. 안양 중심부를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생태하천이다. 하천 남쪽에는 평촌신도시가 펼쳐져 있다.
학의천을 따라 걷기로 했다. 흐름을 거슬러 걷기로 한 것이다. 가다 보면 백운호수가 나온다.
학의천 길은 평탄하다. 남쪽 길은 흙으로 되어 있다. 마치 시골길을 걷는 것 같다.
하늘은 맑았다. 햇살은 따사로웠다. 사월의 싱그러운 봄날에 걷기 딱 좋은 날씨였다. 눈을 감은 듯이 걸었다. 마치 한적한 시골길을 터벅터벅 걷듯이 걸었다.
안양천과 학의천이 만나는 쌍개울에서 백운호수까지는 얼마나 걸릴까? 걷다 보니 두 시간 걸렸다. 한시간에 4키로 걷는다고 치면 8키로가 된다.
이쁜이 보살이 새끼를
스님은 자유를 말한다. 늘 자유롭게 살고 싶다고 말한다. 그래서일까 암자에 홀로 산다. 아니 함께 사는 존재가 하나 있다. 그것은 스님이 ‘이쁜이 보살’이라고 칭하는 개를 말한다.
이쁜이 보살이 새끼를 낳았다. 커다란 점이 몸 곳곳에 있는 점박이 다섯 마리를 낳은 것이다. 이를 축하해 주어야 할까 슬퍼해야 할까? 후자에 가깝다.
2024년 4월 암자 강아지들
스님에게 항의하듯이 댓글을 달았다. 개가 새끼 낳은지 불과 6-7개월 밖에 되지 않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탄식하는 글을 남긴 것이다. 그러자 스님은 자유를 말했다. 그것은 아마 개의 자유일 것이다.
개는 무엇으로 사는가? 딱 두 가지가 생각난다. 그것은 식욕과 번식욕이다. 이것 두 가지 외에 잘 생각나지 않는다.
개는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 한번 태어난 이상 생존해야 한다. 그래서 먹어야 한다. 식욕으로 사는 것이다. 다음으로 중요한 일은 번식하는 것이다. 이는 인간 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 있는 것들에 해당된다. 축생은 번식욕으로도 사는 것이다.
생명 있는 것들은 욕망으로 산다. 그래서 부처님은 우리가 사는 세계에 대하여 욕계, 즉 욕망의 세계라고 했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개는 자신의 본분사에 충실한 것이다. 생존하여 자손을 남기는 것만큼 어디 큰 일이 있을까?
청둥오리의 의연함
하천을 반 이상 걸었을 때 청둥오리떼를 보았다. 녹색과 청색 등 컬러풀한 청둥오리 떼는 여유 있어 보였다. 사람이 다가가자 멀리 달아났다.
생태하천에서 늘 볼 수 있는 것은 물오리와 백로이다. 며칠전 백로가 물고기를 잡아 먹는 장면을 목격했다. 사진을 찍으려 했으나 지나가 버렸다. 백로의 목이 불룩 솟아 있는 사진을 찍었다.
물오리와 백로는 사람 손을 타지 않는다. 자연에서 자연스럽게 살아 간다. 누가 보건 말건 피었다고 지는 들꽃과도 같다.
물오리와 백로는 어쩌다 생태하천에 있게 되었을까? 아마 짝짓기가 있었을 것이고 알을 낳고 부화했을 것이다. 생태하천에 있는 물고기를 잡아 먹고 저런 모습이 되었을 것이다.
청둥오리는 의연했다.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는 삶이 대견하게 보였다. 이것이 자연스러운 삶이다. 그러나 개는 사람에게 의지한다. 사람이 주는 음식을 먹고 자란다. 사람을 주인처럼 모시며 살아가는 것이다.
자타카를 보면 보살이 개와 같은 축생으로 태어난 이야기는 단 한 개도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가축이 아닌 사슴, 백조, 원숭이 등의 축생으로 태어난 이야기는 많다. 이는 자립하는 축생이기 때문이다.
6개월 전과 똑 같은 장면을 보니
청둥오리와 스님의 개 이쁜이 보살이 비교되었다. 스님은 홀로 살지만 외롭지 않은 것은 이쁜이 보살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 가족처럼 아끼는 것 같다. 그런 이쁜이 보살이 새끼를 낳았다. 점박이 다섯 마리를 낳은 것이다.
스님은 한장의 사진을 올렸다. 그것은 점박이들이 어미 개의 젖을 빨고 있는 모습의 사진이다. 그런데 어미개는 우유를 마시고 있었다. 아마 젖이 잘 나오라고 우유를 준 것 같다.
어미 개가 우유를 먹으면 젖이 잘 나올 것이다. 새끼 개들은 어미 개의 젖을 먹고 무럭무럭 잘 자랄 것이다. 하루가 다르게 폭풍성장해서 한두 달 지나면 누구나 좋아하는 강아지가 될 것이다.
스님은 강아지가 젖을 빠는 모습을 즐기는 것 같다. 이런 것은 작년 10월경에도 있었다. 그때도 똑 같은 장면이 연출되었다. 그런데 그 이전에도 있었다는 것이다. 아마 더 그 이전에도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돌고 도는 세상이다. 태어남을 보면 마치 물레방아처럼 무한반복하는 것 같다. 그런데 태어남이 있으면 반드시 죽음이 있다는 사실이다.
목줄하고 있는 개를 보면
강아지는 귀엽다. 오죽 했으면 아기에 대하여 “우리 강아지”라고 했을까? 그러나 강아지가 개가 되면 달라진다. 천하고 천한 개가 되는 것이다. 이는 공원에서 볼 수 있다.
공원에서 애완견과 함께 산책 나오는 사람들을 자주 본다. 반드시 개 목줄을 한 상태이다. 개가 똥을 싸면 치워 주어야 한다.
개는 개의 본성이 있다. 자주 오줌을 누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아마 영역 표시일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목줄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개를 기르는 사람은 개를 사랑해서 기른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어쩌면 이기심으로 기르는 것인지 모른다. 자신의 말을 잘 들으니 기르는 것이다. 사람은 말을 잘 듣지 않지만 개는 주인의 말을 잘 듣기 때문이다.
개를 사랑하는 사람이 개를 기른다. 그러나 개에게는 목줄이 있다. 목줄이 없다면 어디로든지 달아날지 모른다. 이렇게 본다면 개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개를 억압하는 것이 된다. 이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스님이 약속 지키지 않은 이유
스님은 자유를 말한다. 스님은 개의 자유도 말한다. 그것은 아마도 개의 본성에 대한 자유일 것이다. 발정기가 되었을 때 내버려 두는 것도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스님의 개는 이번에 새끼를 낳았다. 작년에도 낳았다. 그 이전에도 낳았다. 더 이전에도 낳았는지는 알 수 없다. 이렇게 본다면 스님의 개는 매년 새끼를 낳았다.
작년 스님의 개가 새끼를 낳았을 때 무척 안타까워 했다. 그 결과 여러 편의 글을 썼다. 스님에게 “이번에는 꼭 중성화 수술을 해주기 바랍니다.”라며 글을 남겼다. 스님은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스님은 2023년 11월 페이스북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우리
이쁜이들이
각자의 운명을 따라
다시 뿔뿔이 흩어졌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진 모르지만
애초에 만나지 마라 ~
만난자는 반드시 이별이다
다들 좋은 분들이
하나씩 데려가셔서
그나마 위안은 되지만 ~
좀있다가 이쁜이
수술도 시켜줘야 한다 ~~
날은 추워지는데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
그래도 씁쓸함은 어쩔수 없다 ~
무슨 일로 어찌하여 태어났던고 ~
이쁜아! 이제 낳지말자 미안하다 ~
각자 어디서든 인연따라 편안하길 ~
나무 우리 이쁜이화신 보살 마하살 ~
사진은 ~ 새끼들을 멀리 떠나보내고
하루종일 새끼들을 찾아 헤매다니다
삶을포기한 이쁜이 ~ 에휴 맘아프다
OO산 OO사 OO암 OO산방”
(2023년 11월 스님의 페이스북 글)
스님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 결과 또 다시 새끼를 낳게 되었다. 스님은 변명아닌 변명을 했다. 중성화 수술은 자연스럽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관리라도 했어야 했다. 그것 마저 하지 않았다. 발정기 때도 내버려 둔 것이다.
매년 새끼를 낳는 스님의 개
스님의 개는 매년 새끼를 낳았다. 그렇다고 스님이 다 키운 것은 아니다. 모두 분양 되었다. 대부분 신도들이 가져 갔을 것이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청둥오리와 개를 비교해 보았다. 똑 같은 축생이지만 청둥오리는 의연해 보이고 개는 천해 보인다. 결정적 차이는 사람 손을 탄 것과 타지 않은 것의 차이라고 본다.
사람과 함께 지내는 축생은 천해 보인다. 아무리 개가 늠름하게 생겼어도 목줄에 묶여 있는 한 천박해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자연속에서 스스로 힘으로 살아가는 축생은 미물이라도 의연해 보인다.
흔히 육도윤회한다고 말한다. 사람이 동물이 되고, 동물이 사람이 되는 윤회를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사람이 개로 태어날 수도 있는 것이다.
강아지 사진을 보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얘네들은 어디서 왔을까?”에 대한 것이다. 육도윤회한다면 사람이었던 자가 개로도 태어날 수 있다.
한번 개로 태어나면 개로서 일생을 살아야 한다. 도중에 바뀌는 일은 없다. 죽을 때까지 개로 살아야 한다. 죽어서야 다른 존재로 태어나는 것이다.
입태에는 세 가지 조건이 있는데
입태에는 세 가지 조건이 있다. 이는 “이 세상에서 부모가 교합해야 하며, 어머니가 경수를 가져야 하며, 태어날 준비가 된 존재가 있어야 하는데, 이처럼 세 가지가 모이면 입태가 이루어집니다.”(M93)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강아지는 어미개와 아비개의 성적교섭으로 태어났다. 이는 어미개가 발정기가 되어야 가능하다. 경수를 가져야 함을 말한다. 결정적으로는 ‘태어날 준비가 된 존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태어날 준비가 된 존재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간답바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빠알리원문을 보니 간답바(gandhabba)라고 되어 있다.
사람은 단일 종이다. 사람과 개는 다른 종이다. 사람의 몸에서 개가 태어날 수 없고 개의 몸에서 사람이 태어날 수 없다. 이렇게 본다면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은 모두 평등하다고 볼 수 있다. 이는 태생적으로 차별이 있을 수 없음을 말한다.
업의 힘에 의해서 태어날 준비가 된 존재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다. 사람이라는 종으로서 평등을 말한다. 그러나 어느 집안에 태어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부처님은 바라문들에게 “존자들께서는 그 태어날 준비가 된 존재가 귀족인지, 바라문인지, 평민인지, 노예인지 확실히 압니까?”(M93)라고 물어 보았다.
좋은 가문에 태어나는 것은 행운일 것이다. 마치 오늘날 선진국에 태어나는 것과 같다. 선진국에 태어나면 후진국에 태어나는 것보다 삶의 질은 확실히 좋다고 말할 수 있다.
노예에 집에 태어나면 어떻게 될까? 아마 한평생 노예로 살아가게 될지 모른다. 고대인도에서는 그랬다. 불가촉천민이라 하여 차별대우 받았던 것이다.
태어날 준비가 된 존재가 태어난다. 그러나 어느 태에 들지 알 수 없다. 가문이 좋은 집안의 태에 든다면 행운이다. 노예의 태에 든다면 불운이다. 이와 같은 태어날 준비가 된 존재에 대하여 맛지마니까야 38번경에서는 간답바라고 했다.
간답바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붓다고사의 주석에 따르면 “업의 힘에 의해서 태어날 준비가 된 존재”(Pps.II.310)라고 했다. 참으로 무서운 말이다.
윤회의 주체가 없는 무아윤회
불교에서는 영혼을 인정하지 않는다. 당연히 몸만 바꾸는 영혼의 윤회는 성립되지 않는다. 그 대신 무아윤회를 말한다.
어떤 이는 윤회를 하기 위해서는 윤회의 주체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어떤 변치 않는 영혼이 있어서 몸만 바꾸는 윤회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영혼윤회는 연기법에 들어맞지 않는다.
연기법은 조건발생의 법칙이다. 원인과 조건이 있어서 결과가 있게 되는 것이다. 어떤 변치 않는 영혼이 있다면 이는 원인과 조건과 결과라는 인연과에 맞지 않는다.
불교에서는 무아윤회를 말한다. 이는 조건발생적 법칙, 즉 연기법에 따른다. 이렇게 본다면 행위가 윤회하는 것이 된다.
행위는 업을 말한다. 업은 조건이 되면 익어서 과보를 낸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는 “행위의 행위자는 없고, 또한 이숙의 향수자도 없다. 단지 사실만이 일아난다.”(Vism.19.20)라고 했다.
행위의 행위자도 없고 이숙의 향수자도 없다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윤회의 주체가 없음을 말한다. 다름 아닌 무아윤회이다. 단지 행위만 상속된다. 행위, 즉 업이 윤회하는 것이다.
죽자마자 틈 없이 재생된다
사람이 태어나는 데는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이는 암수의 교합, 적당한 시기, 그리고 생명현상으로서 의식이 있어야 한다. 이런 세 가지는 축생에서도 적용된다.
생명이 태어나는 데는 적당한 시기를 필요로 한다. 이는 배란기가 될 것이다. 축생은 발정기가 될 것이다. 이런 때 암수가 교합하면 생명이 태어난다. 그런데 이때 생명현상으로서 의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간답바를 말한다.
간답바에 대하여 영혼으로 본다면 부처님 가르침에 어긋난다. 영원주의에 대한 것으로 외도사상이다. 이와 같은 간답바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부모가 성교할 때 그들을 바라보고 서 있는 영혼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 업의 힘에 의해 태어날 준비가 된 존재를 말한다.”(Pps.II.310)라고 설명되어 있다.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될까? 동아시아 불교에서는 49일동안 중음신으로 머물다고 새 몸을 받는다고 한다. 그래서 천도재를 해 준다. 티벳 사자의 서에서 중음신에 대하여 잘 설명되어 있다.
초기불교에서 중음신은 인정되지 않는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는 “그것들에 중간자는 없고, 그것들에 중간은 존재하지 않는다.”(Vism.19.23)라고 했다. 이는 틈이 없음을 말한다. 죽자마자 재생하는 것이다.
중간자가 없다면 천도재를 할 수 없다. 천도가 되기 전에 순식간에 다른 존재로 태어나 버리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일까? 눈깜박할 사이보다 더 짧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간이라고 말한다.
업이나 업의 표상, 태어날 곳의 표상에 따라
어떻게 죽자마자 재생할 수 있을까? 아비담마 이론에 따르면 마지막 죽음의 의식이 일어날 때 업과 업의 표상, 태어날 곳의 표상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 중에 하나를 대상으로 재생연결식이 일어나기 때문에 틈이 없는 것이다.
불교를 알고 나서 궁금한 것이 상당수 해소 되었다. 그 중에서도 죽음과 탄생에 대한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불교를 접하기를 참 잘했다고 생각했다.
불교의 진수는 아마도 아비담마와 청정도론에 있을 것이다. 이 논서를 보면 이제까지 궁금했던 것이 풀어지는 것 같았다. 특히 재생연결식에 대한 것이 그랬다.
나는 죽어서 어디에 태어날까? 이는 자신이 하기에 달려 있다. 마지막 임종순간에 업이나 업의 표상, 태어날 곳의 표상에 따라 다음생이 결정된다. 그러나 대부분 자신이 죽는 줄도 모르고 죽는다.
죽으면 어떤 존재로든지 태어나야 한다. 목숨이 끊어지자마자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기 때문에 어떤 존재로 태어날지 알 수 없다. 자신이 태어날 곳을 정해서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다 보니 개의 태에도 들게 되고 사람의 태에도 들게 된다. 태어나 보아야 아는 것이다.
사람이 태어나면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된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면 축생이나 다름 없다. 오로지 식욕과 번식욕으로 살아가게 된다.
윤회에서 두려움을 보는 자
자신이 누구인지 안다면 윤회의 두려움을 알게 될 것이다. 다시는 새로운 생을 받지 않으려 할 것이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는 “윤회의 두려움을 보기 때문에 수행승이다.” (Samsara bhayam ikkhati bhikkhu)”(Vism.1.7)라고 했다.
윤회에서 두려움을 보는 자가 수행승이라고 했다. 윤회에서 두려움을 보기 때문에 윤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어떻게 벗어나야 할까?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예를 들어 남자가 땅 위에 서서 잘 드는 칼을 들어서 커다란 대나무 덤불을 잘라내는 것처럼, 이와 같이 계행의 땅에 입각해서 선정의 돌로 연마된 통찰의 지혜라는 칼을 정진력으로 책려된 예지적 지혜의 손으로 움켜 잡고 일체의 자신의 상속중에 생겨난 갈애의 결박을 풀고 절단하고 파괴해야 한다.”(Vism.1.7)라고 했다.
여기 얼키고 설킨 매듭이 있다. 어떻게 풀어야 할까? 윤회에서 두려움을 보는 자는 단칼에 베어낸다. 계, 정, 혜 삼학으로 푸는 것이다. 지혜의 칼로 단번에 끊어 버리는 것이다.
인간도 불쌍한 중생일까?
중생들은 기본적으로 어리석은 자들이다. 탐, 진, 치로 살기 때문이다. 그래서 끊임 없이 윤회한다. 사람이 되기도 하고 축생이 되기도 한다.
스님의 개에서 새끼가 태어났다. 작년에도 새끼가 태어났다. 기록을 보니 작년 10월의 일이다. 작년의 사진을 보니 어쩌면 이번에 태어난 강아지와 똑같을까? 어미 개의 젖을 빨고 있는 모습이 똑 같은 것이다.
작년 스님의 개가 태어났을 때 “불쌍한 중생들!”이라고 댓글을 달았다. 그러자 스님은 “인간도 불쌍한 중생이지요.”라며 답글을 달았다. 이런 답은 예상하지 못했다.
개로 태어난 것은 불행한 일이다. 개는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은 커감에 따라 자신이 누구인지 안다. 그리고 윤회에서 벗어나고자 할 것이다. 그래서일까 티벳스님은 거지라도 좋으니 인간의 몸으로만 태어나기를 바란다고 한다.
이번에 스님의 글에 댓글을 달았다. 어미 개는 우유를 먹고 있고 강아지들은 어미 젖을 빨고 있는 모습이다. 댓글에 “불쌍한 중생들 ㅠㅠ”이라고 써 놓았다. 작년과 똑 같은 글을 써 놓은 것이다. 이에 스님은 “불쌍한 중생들~”이라고 답글을 달아 놓았다. 아마 이 말 속에는 인간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한번 축생으로 태어나면 계속 축생으로
개로 태어난 것을 축복해야 할까? 슬프게 본다. 개의 일생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으로 태어난 것은 축복할 일이다. 왜 그런가? 사람만이 윤회를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범부들은 어떤 존재로 태어날지 모른다. 평생 먹는 것에만 관심을 가진 자라면 축생으로 태어날 가능성이 높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이는 “이 세상에서 일찍이 맛을 탐하여 악한 행동을 한 어리석은 자는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축생으로서 물속에서 태어나고 물속에서 자라고 물속에서 죽는 생물 가운데 동료로 태어난다.”(M129)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죽어서 축생으로 태어나기는 쉽지만 사람으로 태어나기는 어렵다. 이는 “축생에서 죽어서 인간 가운데 다시 태어나는 뭇삶들은 매우 적고 축생에서 죽어서 지옥 가운데 다시 태어나는 뭇삶들은 매우 많다.”(S56.124)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한번 축생으로 태어나면 계속 축생으로 태어날 가능성이 높다.
스님의 강아지를 보면 볼수록 불쌍한 느낌이 든다. 비록 사진으로 보는 것이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그래서 “불쌍한 중생들 ㅠㅠ”라고 댓글 단 것이다. 이에 대하여 스님은 작년에 “인간도 불쌍한 중생이지요.”라는 답글을 달았다. 그러나 초기경전에 따르면 잘못된 것이다.
인간은 축복받은 존재
불쌍한 중생은 축생이다. 인간은 불쌍한 존재가 아니다. 축복받은 존재이다. 이는 인간으로 태어나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알면 다시 생각하게 된다. 맛지마니까야 129번 경에 따르면 맹구우목의 비유가 잘 말해준다.
인간으로 태어나기는 하늘의 별 따기 보다 더 어렵다. 낙타가 바늘 구멍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 경전에서는 “인간에서 죽어서 인간 가운데 다시 태어나는 뭇삶들은 매우 적고 인간에서 죽어서 축생 가운데 다시 태어나는 뭇삶들은 매우 많다.”(S56.107)라고 했다.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은 축복이다. 이는 “어떤 사람이 큰 바다에 구멍이 하나가 뚫린 멍에를 던져 넣었는데 그때에 눈먼 거북이가 백년 마다 한 번씩 떠오른다.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 눈먼 거북이가 백년 마다 한 번씩 떠올라서 그 구멍이 하나가 뚫린 멍에에 목을 끼워 넣을 수가 있겠는가?”(M129)라는 물음으로 알 수 있다. 이른바 맹구우목(盲龜遇木)의 비유이다.
맹구우목의 비유를 보면 절망적이다. 축생이 인간의 태에 드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차라리 인간으로 있으면서 깨달음을 얻어서 윤회를 탈출하는 것이 더 빠를 것이다.
지혜에 의한 두려움 상베가
어떻게 해야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출가해서 수행자의 삶을 살면 자동적으로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일까? 청정도론에 따르면 “윤회의 두려움을 보기 때문에 수행승이다.” (Samsara bhayam ikkhati bhikkhu)”(Vism.1.7)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윤회에서 두려움을 보는 자는 모두 수행승이라는 말이다.
윤회에서 벗어나려면 윤회에서 두려움을 가져야 한다. 이는 다름 아닌 지혜에 의한 두려움인 상베가(saṃvega)로 본다.
존재에서 두려움을 보아야 윤회를 끝낼 수 있다. 생명이 계속 되는 것을 두려워 해야 한다. 이런 두려움은 지혜에 따른 것이다. 이를 상베가라고 하는데 주석에서는 "경외감을 일으킬 수 있는 경우에 경외하는 것과 경외하는 것에 자극받아 이치에 맞게 노력하는 것이다.”(It.30)라고 설명했다.
상락아정이 아니라 무상, 고, 무아, 부정으로
사람들은 영원하기를 바란다. 사람들은 즐겁기를 바란다. 사람들은 어떤 변치 않는 자아가 있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깨끗한 것을 좋아한다. 이는 다름 아닌 상, 락, 아, 정을 말한다.
상락아정을 가지고 있는 한 윤회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그래서 수행자들은 상락아정과 반대 되는 삶을 살고자 한다. 현상을 무상, 고, 무아, 부정으로 보는 것이다.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마하시 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위빳사나를 관찰하는 이는 사실대로 바르고 분명한 물질과 정신들만을 알고 보려한다. 개인, 중생, 나, 여자, 남자 등을 보려 하지 않는다. 번뇌를 사라지 게 하는 생겨남, 소멸함, 무상의 특성 등만을 알고 보려 한다. 번뇌들을 계속 생겨나게 하는 항상함, 행복함, 좋은 것, 주재할 수 있는 나라는 것이 있다는 것. 깨끗하고 아름다운 것 등과 만나려 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러한 이에게는 여섯 문에서 여섯 대상이 드러나면 ‘물질과 정신일 뿐이구나, 생멸하고 있는 것들일 뿐이구나, 무상한 것일 뿐이구나’라는 등으로 숙고하고 반조하는 것처럼 다섯 감각문 전향 마음, 마음 문 전향 마음들이 바른 방법, 바른 길에 따라 마음기울이며 제일 먼저 생겨난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권, 499-500쪽)
이것이 바로 보는 것이다. 이렇게 보는 것에 대하여 올바른 마음 기울임, 즉 요니소마나씨까라(yonisomanasikara)라고 한다. 대상에 대하여 상, 락, 아, 정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 대하여 무상, 고, 무아, 부정으로 보는 것이다. 이렇게 보아야 제대로 보는 것이다.
오온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제대로 보려면 있는 그대로 관찰해야 한다. 먼저 정신괴 물질을 구별하여 보아야 한다. 이렇게 보았을 때 “물질과 정신일 뿐이구나, 생멸하고 있는 것들일 뿐이구나, 무상한 것일 뿐이구나”라며 위빠사나 지혜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이렇게 올바로 보았을 때 ‘나’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명칭 붙여진 모든 것은 있을 수 없다. 번뇌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른 견해이다.
인간만이 수행할 수 있다
윤회를 벗어나려면 수행을 해야 한다. 인간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만일 선정수행을 해서 무색계의 존재로 태어났다면 한량 없는 수명이 다 할 때까지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왜 그런가? 정신으로만 이루어진 존재는 몸이 없기 때문이다. 귀가 없어서 들을 수 없는 것이다. 감각기관이 없어서 수행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만이 수행할 수 있다. 천상의 존재는 수행하기 힘들다. 항상 즐거움만 있어서 수행을 할 수가 없다. 지옥 중생은 항상 괴로움만 있어서 수행을 할 수 없다. 축생의 존재는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어리석은 존재이기 때문에 수행할 수 없다.
인간은 여섯 감각기관을 가지고 있다. 감각기관으로 희로애락을 느끼기 때문에 수행을 할 수 있다. 만약 의식이 결여 되어 있다면 수행할 수 없을 것이다. 무상유정천 존재가 대표적이다.
무상유정천 존재는 의식을 혐오한 수행을 한 결과로 색계에 태어난 존재를 말한다. 마치 삶과 죽음을 거꾸로 사는 것과 같다. 오온에서 식온만 없는 것이다. 마치 잠자는 것처럼, 마치 식물인간처럼 사는 존재이다. 죽어야만 의식이 깨어난다.
축생으로 태어나면 수행을 할 수 없다. 개로 태어나면 축생으로 일생을 살아야 한다. 죽어서 어디에 태어날지 알 수 없다. 이는 업으로 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업의 힘에 의해서 태어날 준비가 된 존재”라고 하는 것이다. 또다시 축생으로 태어날 가능성이 높다.
인간만이 수행할 수 있다. 인간으로 태어난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한다. 개가 태어나면 축복하는 경우는 없다고 본다. 그러나 사람으로 태어나면 축하할 일이다.
설령 노예 계급에 태어났어도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윤회를 벗어날 가능성이 있다. 왜 그런가? 모든 땔감의 불꽃은 화염, 광채, 광명에 있어서 동일하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자유란?
스님의 개가 출산 한 것을 보고 여러 편의 글을 썼다. 작년 10월달에도 여러 편 글을 썼다. 이번에도 여려 편을 쓰고 있다. 윤회에서 두려움을 느낀다.
스님의 강아지들은 어떻게 될까? 강아지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그렇다고 스님이 다 키우지는 않을 것이다. 한두 달 정도 지나면 분양될 것이다. 아마도 신도들이 가져갈 가능성이 높다.
세상은 돌고 돈다. 작년 10월에 강아지들을 보았는데 이번에도 보게 되었다. 불과 6개월만이다. 스님은 중성화 수술을 하겠다고 했지만 지켜지지 않았다. 이에 대하여 스님은 ‘자유’를 말했다.
스님은 자유를 말한다. 스님이 말하는 자유는 어떤 자유일까? 출가자라면 이미 자유의 몸이다. 그럼에도 자유롭고 싶다고 말한다. 그래서일까 개에게도 자유를 준 것 같다. 그 결과 새끼를 갖게 되었다.
불교에서 자유는 어떤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해탈일 것이다. 벗어나는 것이다. 무엇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인가? 이는 초기경전 도처에서 발견되는 “ 싫어하여 떠나서 사라지면 해탈한다.”라는 말이다.
자유인이라 하여 마음 내키는 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 내키는 대로 산다면 방종이 된다. 진정한 자유인이 되려면 먼저 싫어하는 마음을 내야 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싫어해야 하는가?
싫어 하면 떠나게 된다. 이를 ‘닙비다(nibbidā)’ 라고 한다. 이는 한자어로 염리(厭離)가 된다. 다음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이 말은 ‘위라가(virāga)’를 번역한 말이다. 한자어로 이욕(離慾)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싫어하여 떠나서 사라지는 것은 욕망을 떠나는 것이 된다. 욕망을 내려 놓았을 때 해탈하게 되는 것이다.
“싫어하여 떠나서 사라지면 해탈한다.”라고 했다. 욕망을 내려 놓으면 대자유인이 되는 것을 말한다. 그럼에도 왜 대자유인이 되지 못할까? 이는 집착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오온에 대한 집착이다. 그래서 오온에 대하여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은 나이고,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는 갈애와 자만과 견해가 생겨나게 된다.
스님은 자유를 말한다. 자유롭게 살면서 자유를 말한다. 스님에게 자유는 어떤 것일까? 스님은 자연스럽게 사는 것을 자유라고 말한다. 또한 자연의 본성대로 사는 것을 자유라고 말한다. 그래서일까 스님은 이쁜이 보살이 발정기가 되었을 때 목줄을 풀어 준 것 같다.
사람에게도 목줄이 있다
백운호수 가는 길에 청둥오리를 보았다. 사람에 의지하지 않고 사는 것이 의연해 보였다. 목줄에 매여 사는 개와 비교 되었다.
산책 나온 개를 보면 마치 사람 같다. 개에게도 옷을 입혀 놓은 것이다. 더구나 유모차에 싣고 다닌다. 그러나 아무리 단장을 해 놓아도 개는 개일 뿐이다. 목줄에 감겨 사는 한 천하고 천한 것이다.
개만 목줄로 사는 것은 아니다. 사람에게도 목줄이 있다. 이는 부처님이 다음과같이 말씀 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가죽끈에 묶인 개가 견고한 막대기나 기둥에 단단히 묶여, 그 막대기나 기둥에 감겨 따라 돌듯, 수행승 들이여, 이와 같이 세상에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은 고귀한 님을 보지 못하고 고귀한 님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고귀한 님의 가르침에 이끌려지지 않고, 참사람을 보지 못하고 참사람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참사람의 가르침에 이끌려지지 않아서, 물질을 자아로 여기거나, 물질을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거나, 자아 가운데 물질이 있다고 여기거나, 물질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긴다.”(S22.95)
몸과 마음이 나의 것이라고 여기고 있는 한 목줄이 있는 것과 같다. 이는 자유인이 아니다. 진정한 자유인이 되려면 목줄을 끊어야 한다.
오온을 토한 음식으로 보아야
목줄은 유신견과 같은 것이다. 어떻게 목줄을 끊어야 할까? 먼저 “수행승들이여, 그러므로 그대들은 반복해서 자신의 마음을 이와 같이 ‘오랜 세월 동안 이 마음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물들어 왔다.’라고 관찰해야 한다.”(S22.95)라고 했다. 결국 욕망을 끊어 내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욕망을 끊어 내야 할까? 이는 오온에 대하여 싫어하여 떠나야 한다. 어떻게 해야 싫어하는 마음을 내야 할까? 이는 토한 음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
토한 음식을 먹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갈애, 무명, 여러 가지 사랑스런 것, 아름다운 형상, 즐거운 느낌, 마음에 드는 감각적 쾌락의 대상을 토해냈으니, 토해서 버려진 것을 내가 다시 삼킬 수 없으리.”(Thag.1131)라고 했다.
대자유인이 되려면 욕망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오온을 토한 음식으로 보는 것이다. 오온을 토한 음식으로 보면 갈애가 일아나지 않을 것이다. 이는 탐욕이 빛바래는 것이다. 이것이 위라가이다. 욕망이 사라지는 것이다.
욕망이 사라지면 해탈한다. 대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스님은 자유를 말한다. 자연스럽게사는 것에 대하여 자유라고 말한다. 자연의 본성대로 사는 것에 대하여 자유라고 말한다. 그래서일까 6개월만에 이쁜이 보살이 새끼를 낳았나 보다.
백운호수에서
학의천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니 백운호수가 나타났다. 안양에 이사 온 후 자주 온 곳이다. 그러나 지금은 옛모습을 찾을 수 없다. 호수 주변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고 커다란 쇼핑몰이 생겨났다.
학의천을 두 시간 걸었다. 아마 8키로 가량 걸은 것 같다. 걸었으니 보상이 있어야 한다. 늦은 점심식사를 하고자 했다. 그러나 싸게 먹을 데는 없었다. 산채비빔밥을 먹고자 했으나 그런 곳은 없었다. 2인분에 무려 3만 5천원에 달하는 명태구이 식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 강아지들을 어이할꼬?
오늘도 글이 길어졌다. 아침에 백권당에 와서 쓰기 시작한 것이 정오가 가까이 되었다. 이렇게 쓴 글은 남는다. 써 놓은 글을 모아 놓으면 책이 된다. 그러나 읽는 사람은 부담스러울 것이다. 시간이 돈인 세상에서 시간을 붙들어 매는 것 같다. 감각적 즐거움에 익숙한 사람들은 패스할 것이다.
2024년 4월 암자 강아지들
청둥오리를 보고 강아지를 생각했다. 개로 태어난 것은 불행한 일이다. 그럼에도 개를 소유물로 알아 목줄을 채우는 사람들이 있다. 개의 본성을 존중한다고 하여, 개에게도 번식의 자유가 있다고 하여 발정기에 목줄을 풀어 버리는 사람도 있다.
축생의 세계는 약육강식이다. 강한 자는 먹고 약한 자는 먹힌다. 강아지들을 보니 앞으로 육식은 하지 못할 것 같다. 저 강아지들을 어이할꼬?
2024-04-29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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