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생일날 손카드 건네기

담마다사 이병욱 2024. 3. 18. 12:40

생일날 손카드 건네기
 
 
명상도 힘이 있어야 한다. 수면불량으로 인하여 컨디션이 엉망일 때 좌선을 하면 잘 집중되지 않는다. 몸이 아프다면 더욱더 안될 것이다. 정신적 장애가 있어도 앉아 있기 힘들다.
 
오늘 오전 한시간 좌선을 했다. 망상 속에서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개운했다. 아마도 그것은 법념처, 즉 법관찰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법념처는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신념처, 수념처, 심념처를 제외한 모든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대념처경을 보면 오장애, 오온, 십이처, 칠각지, 심지어 사성제까지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법념처는 부처님 가르침을 말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좌선할 때 주로 몸관찰을 한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관찰하는 것이다. 이는 마하시방식을 말한다. 수념처는 느낌관찰에 대한 것으로 통증관찰하는 것이 확실하다. 심념처는 마음이 마음을 아는 것을 말한다. 그외 모든 것은 법념처라고 보면 될 것이다.
 
법념처는 법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법은 담마를 말한다. 담마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다. 진리로 담마, 원리로서 담마, 그리고 가르침으로서 담마가 대표적이다. 이 중에서 가장 핵심은 가르침으로서의 담마이다.
 
법념처에서 법관찰한다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을 새기는 것도 해당된다. 이는 법념처 항목이 오장애, 오온, 십이처, 칠각지, 사성제로 구성되어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 가르침을 새기는 것도 법념처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몸 컨디션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한시간 앉아 있었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관찰해야 하나 힘이 들었다. 이럴 경우 가만 앉아 있는다. 이미 사띠는 확립된 상태이다. 이런 상태가 되면 잡념이 치고 들어와도 번뇌가 되지 않는다. 다만 가르침에 대한 것이 떠오르면 경전에서 보았던 문구가 떠오르게 되어 자연스럽게 법관찰이 된다.
 
좌선 중에서 경전에서 보았던 것이 떠 올랐을 때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잡념으로 여겨서 중단시켜야 할까? 담마와 관련 없는 삶 속에서 있었던 것이 떠 올랐을 때 망상이 될 수 있다. 마치 허공에 집을 짓는 것처럼 망상이 전개되는 것이다. 이런 것을 알았을 때 허무하다. 그러나 담마에 대한 것이 떠 오르면 허무하지 않다. 이렇게 본다면 법념처에서 부처님 핵심 가르침이 나열된 것은 부처니님 가르침도 법념처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매일 경전을 보고 있다. 머리맡에 초기경전이 있어서 쉽게 열어 본다. 그러다 보니 경전 보는 것이 생활화 되었다.
 
경전을 보다 보면 새겨 두고 싶은 내용이 있다. 이럴 경우 스마트폰 카메라로 찍어 둔다. 메모해 두는 것보다 더 낫다. 나중에 글 쓸 때 활용하고자 하는 것이다.
 
신심 있는 불자들은 절에 자주 갈 것이다. 아마도 주로 일요일에 갈 것이다. 마치 교회다니는 사람들이 일요일 빠지지 않고 교회 가듯이 절에 가고자 할 것이다.
 
절에 오래 다닌 사람들이 있다. 십년, 이십년, 삼십년, 사십년, 심지어 오십년 다닌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더 오래 다닌 사람들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신심이 있는 불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절에서 사는 사람들이 있다. 출가한 스님들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 절에서 산다고 하여 모두 다 깨달은 사람이라고 볼 수 있을까? 마찬가지로 절에 다닌 사람이라고 하여 모두 다 깨달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신심과 깨달음은 다른 것이다. 절에 십년, 이십년, 삼십년, 사십년, 오십년, 육십년 다닌 사람들은 신심은 있을지 몰라도 모두 다 깨달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다.
 
절에서 산다고 하여 저절로 깨달아지는 것은 아니다. 절에 다닌다고 하여 역시 저절로 깨달아지는 것도 아니다. 신심과 깨달음은 다른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부처님에 관하여 이와 같이 ‘세존께서는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 히 깨달은 님, 명지와 덕행을 갖춘 님, 올바른 길로 잘 가신 님, 세상을 아는 님, 위없이 높으신 님, 사람을 길들이는 님, 하늘사람 과 인간의 스승이신 님, 깨달은 님, 세상의 존귀한 님입니다.’라고 흔들리지 않는 청정한 믿음을 갖추었으나, 그는 그러한 부처님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청정한 믿음에 만족하여 낮에 멀리 떠나 명상 하거나 밤에 홀로 명상하거나 정진하지 않습니다. 그가 이처럼 방일하게 지내면 즐거움이 없고 즐거움이 없으면 희열이 없고 희열이 없으면 평안이 없고 평안이 없으면 괴로움이 있고 괴로움이 있으면 마음을 집중하지 못하고 마음을 집중하지 못하면, 진리가 나타나지 않고 진리가 나타나지 않으면 방일한 삶이라 볼 수 있습니다.”(S55.40)
 
 
부처님이 재가신도 난디야에게 법문한 것이다. 이는 불, 법, 승 삼보에 대한 흔들림 없는 신심과 계행의 청정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신심에서 머물지 말라고 했다. 신심에서 머물면 방일한 삶이라고 했다.
 
경전에서 인상적인 구절을 보면 새기고자 한다. 글 쓸 때 한번 써 먹는 것이다. 그래서 스마트폰으로 촬영해둔다. 그렇다면 어떤 구절이 매력적으로 작용한 것일 것? 그것은 “흔들리지 않는 청정한 믿음을 갖추었으나, 그는 그러한 부처님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청정한 믿음에 만족하여 낮에 멀리 떠나 명상 하거나 밤에 홀로 명상하거나 정진하지 않습니다.”(S55.40)라는 구절이다.
 
불교는 믿음의 종교라기 보다는 실천의 종교라고 볼 수 있다. 불교에서는 유일신교와 같은 절대적인 믿음을 요구하지 않는다. 불교에서 믿음은 합리적인 믿음이다. 이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정하는 믿음을 말한다.
 
불교가 믿음의 종교로 그치면 기복의 대상이 된다. 부처님에 대하여 복을 비는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믿음에서 만족하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다. 단지 믿는 것으로 그친다면 “방일한 삶”과 같다고 했다.
 
믿음만 있고 실천이 없다면 방일한 삶이 된다. 여기서 방일은 빠마다(pamāda)의 번역어인데 이 말은 새김(sati)과 알아차림(sampajāna)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부처님은 늘 깨어 있으라고 했다. 늘 깨어 있는 상태는 새김과 알아차림이 있는 상태이다. 만약 그 사람에게 새김과 알아차림이 없다면 방일한 상태가 된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게으른 상태가 되는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에서 게으른 것은 큰 허물이다. 어느 정도일까? 이는 법구경에서 “방일한 사람은 죽은 자와 같다.”(Dhp.21)라고 표현되어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마음은 제어하지 않으면 늘 감각대상에 가 있다. 이런 상태가 되면 나의 마음이라고 볼 수 없다. 악마의 영역에 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 그래서 악마가 하자는 대로 할 것이다. 그러나 새김이 있고 알아차림이 있다면 악마의 영역에 있을 수 없다.
 
불교는 믿음의 종교가 아니라 실천의 종교이다. 단지 믿는 것으로 만족하여 정진하지 않은 것에 대하여 게으른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이렇게 방일하면 결국 괴로움으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이처럼 방일하게 지내면 즐거움이 없고 즐거움이 없으면 희열이 없고 희열이 없으면 평안이 없고 평안이 없으면 괴로움이 있고 괴로움이 있으면 마음을 집중하지 못하고 마음을 집중하지 못하면, 진리가 나타나지 않고 진리가 나타나지 않으면 방일한 삶이라 볼 수 있습니다.”(S55.40)라고 했다.
 
절에 수십년 다닌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절에 오래 다녔기 떄문에 대우 받는다. 나중에 온 사람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절에 오래 다니면 다닐 수록 아상이 강화된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그것은 정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절에 다닌다고 하여 모두 불자는 아니다. 절에 다니지 않아도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는 삶을 산다면 절에 다니는 것과 같다. 생활속에서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는 삶이다.
 
생활속에서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고자 한다. 어떤 것이 있을까? 생일날 손카드 작성하기도 이에 해당될 것이다.
 
처와 아들 생일잔치를 한날에 하기로 했다. 멀리 홀로 계시는 장모님 집에서 하기로 했다.
 
생일잔치라고 해서 거창한 것은 아니다. 집에서 밥 먹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올해에는 의미 있는 이벤트를 가져 보고자 했다. 그것은 손카드를 주는 것이다.
 
세 종류의 손카드를 준비했다. 장모와 처와 아들 것을 준비했다. 문구를 어떻게 해야 할까? 길게 장황하게 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긴 문장은 지양했다. 그 대신 짧고 간결한 문장을 준비했다. 그것은 “아유 완노 수캉 발랑 (āyu vaṇṇo sukha bala)”(Dhp.109)이라는 말이다.
 
수 많은 축원이 있다. 이 세상에서 최상의 축원은 아마 장수축원일 것이다. 누구나 오래오래 살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런데 장수축원에 더 붙는 것이 있다. 그것은 용모, 행복, 건강을 말한다. 그래서 빠알리어 “아유 완노 수캉 발랑”은 “장수, 아름다움, 행복, 건강”이 된다.
 
세 가지 문장을 만들었다. 장모에게는 “장수하시고 아름답고 행복하고 건강하시길 바랍니다”라고 경어체를 사용했다. 처에게는 “장수하고 아름답고 행복하고 건강하길”이라고 썼다. 아들에게는 “장수하고 아름답고 행복하고 건강하길 바란다”라고 썼다. 눈높이에 따라 표현을 달리한 것이다.
 

 
카드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구입한 것이다. 하나에 거의 5천원에 달하는 고급이다. 글씨는 만년필로 썼다. 만년필로 쓰면 글씨가 더 잘 써지기 때문이다.
 
세 명에게 손카드를 건넸다. 처음에는 어리둥절 하는 것 같았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카드를 보더니 모두 흐믓해 하는 것 같았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카드는 두 달 전부터 준비했다. 카드를 구입하고 잉크를 구입한 것이다. 문구도 준비해 두었다.
 
좋아하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 존경하는 사람에게 손카드를 보내면 좋을 것 같다. 발렌타인데이나 화이트데이 때 쵸코릿을 주는 것도 좋지만 손카드를 주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
 
물질적인 것도 좋지만 더 좋은 것은 정신적인 것이다. 자신의 마음이 실린 손카드야말로 이 시대 최상의 선물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작고한 부모님과 장인이 생각난다. “살아 계실 때 손카드를 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라고 생각해 보았다.
 
선물은 주어서 좋고 받아서 좋은 것이다. 그런데 손카드만한 선물이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오래도록 남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情)이다. 돈의 가치로 환산할 수 없는 것이다.
 
불교에서 정이란 무엇일까? 아마 그것은 자애라고 말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아름다운 마음이다.
 
일생을 살면서 사람을 감동시켜 본 적이 별로 없다. 늘 자신 위주의 삶을 살았다. 의례 받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남에게 주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다. 이런 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은 자신의 마음이 담긴 글을 건네는 것이다. 누구나 바라는 장수, 용모, 행복, 건강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와 같은 사대축원은 이미 경전에 있었다는 것이다. 법구경에서 다음과 같은 게송이다.
 
 
예경하는 습관이 있고
항상 장로를 존경하는 자에게
네 가지 사실이 개선되니,
수명과 용모와 안락과 기력이다.”(Dhp.109)
 
 
장로는 보시를 받으면 축원해 준다. 이는 수명, 용모, 안락, 기력에 대한 것이다. 이 말은 “아유 완노 수캉 발랑 (āyu vaṇṇo sukha bala)”으로서 달리 해석하면 “장수하고 아름답고 행복하고 건간하길!”라고 바라는 축원이다. 세상에 이것보다 더 좋은 축원 어디 있을까?
 
어떻게 해야 감동적인 삶을 살 수 있을까? 그것은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다. 생일날 손카드 작성하는 것도 하나의 작은 실천이다. 남을 감동하게 하는 것도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다. 자애, 연민, 기쁨, 평정의 삶이다. 손카드 쓰기, 이제 시작이다.
 
 
2024-03-18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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