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백권당 가는 길에 청둥오리를

담마다사 이병욱 2024. 3. 9. 10:52

백권당 가는 길에 청둥오리를
 
 
아침 햇살에 녹청색빛깔이 반짝인다. 이런 장면을 놓칠 수 없다. 카메라를 줌으로 잡아 당겨서 순간포착했다.
 
매일 아침 안양천을 건넌다. 비산사거리 근처에 있는 안양천을 말한다. 일터에 가는데 징검다리를 건너야 한다. 물오리가 눈에 띄었다. 그것도 청색과 녹색 등 컬러풀한 것이다. 청둥오리가 있었던 것이다.
 

 
안양천에서 청둥오리를 본 것은 한두 해가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이십여 년 전에 안양천이 생태하천으로 바뀌고 난 후부터 보아 왔다. 이번에는 바로 앞에서 보았다.
 
물오리는 가까이 가면 도망간다. 백로도 마찬가지이다. 사진을 찍기 위해 살금살금 접근해 보지만 인기척에 놀라 날아 오른다. 하늘로 비상 했을 때 물오리의 자유를 본다.
 
청둥오리는 무엇을 먹고 살까? 먹이가 있기 때문에 살 것이다. 그것도 새끼까지 거느리고 산다. 그렇다면 새끼는 또 언제 낳았을까?
 
작년 여름 물오리 떼 가족을 본 적이 있다. 어미가 새끼 너댓마리를 거느리고 유유자적 물살을 헤치며 가는 장면을 보았다. 언제 짝을 이루어 알을 낳았을까?
 
저 들꽃은 누가 보건 말건 그 자리에 피어 있다. 깊은 산속에 있는 꽃 역시 누가 봐주건 말건 때가 되면 피고진다. 저 물오리 역시 누가 보건 말건 짝을 이루어 알을 낳고 부화시킨다.
 
도시에서는 축생을 볼 기회가 거의 없다. 사람과 사람이 사는 도시에서는 인간만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를 조금만 벗어나면 생명이 있다.
 
생태하천에만 생명이 있는 것은 아니다. 아파트 단지에서도 볼 수 있고 공원에서도 볼 수 있다. 도시에서 목줄이 달린 애완견을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안양천을 건너면 메가트리아 대단지가 있다. 무려 5천세대 가까이 된다. 인구로 따진다면 지방 면 정도 되는 인구가 살고 있다. 단지는 잘 꾸며져 있다. 마치 공원을 보는 것 같다.
 
메가트리아를 가로 질로 일터로 향한다. 그런데 늘 보는 장면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애완견과 함께 산책하는 사람들이다. 여기도 눈에 띄고 저기도 눈에 띈다.
 
애완견은 주인의 말을 잘 듣지 않는 것 같다. 자꾸 엉뚱한 데로 가서 냄새 맡는다. 애완견은 잠시도 가만 있지 않는다. 목줄이 채워져 있지만 자신이 가고 싶은 데로 가고자 한다. 이럴 때 주인은 “야, 이리와.”라고 말한다. 애완견은 이런 주인의 말을 알아 듣는 것 같다.
 
애완견은 때로 오줌을 눈다. 만약 사람이 공원에서 오줌을 누웠다면 처벌받을지 모른다. 애완견은 때로 똥도 싼다. 주인은 미리 준비해 온 비닐을 이용해서 똥을 처리한다.
 
애완견을 볼 때마다 측은한 느낌이 든다. 이럴 때 “어쩌다가 개로 태어났을까?”라는 연민의 마음으로 바라보게 된다. 흰 색의 애완견은 깨끗해 보인다. 때로 옷을 입혀 준 것도 볼 수 있다. 마치 가족처럼 보인다. 그러나 목줄을 보면 안타깝다. 청둥오리와 매우 대조적이다.
 
청둥오리의 삶이 있고 애완견의 삶이 있다. 청둥오리는 자유가 있다. 그러나 먹을 것은 보장되지는 않는다. 애완견은 먹을 것은 보장된다. 그러나 자유는 없다. 어느 삶이 더 나을까?
 
자유, 누구나 바라는 것이다. 동물원의 사자가 되는 것보다 초원의 사자가 되는 것이 더 낫다. 월급생활자로 사는 것보다 자영업자로 사는 것이 더 낫다.
 
개인사업자로서 삶을 살고 있다. 개인사업자등록증을 보니 개업일자는 2005년 11월 3일이다. 처음에 상호 등록했을 때를 기준한 것이다. 이후 2007년에 상호를 다시 변경했으나 개업날자는 여전히 2005년 11월 3일이다.
 
올해로 사업 19년차를 맞이했다. 이전에는 직장생활을 했었다. 1985년부터 2005년까지 20년 월급생활자로 살았다.
 
직장생활 할 때 답답했다. 왜 그런가? 자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직장에 꽉 묶여 살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간에 묶인 만큼 돈을 받았다. 시간을 팔아 생계를 유지한 것이다.
 
더 이상 직장을 다닐 수 없었다. 사오정이 되었을 때 아무데도 갈 곳이 없었다. 아니 아무데도 오라고 하는 데가 없었다. 할 수 없이 개인사업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홀로서기 하면 춥고 배고프다. 마치 야생에 버려진 것 같다. 마치 도시의 들개처럼 일감을 찾아 헤맸다. 일감은 마치 먹이 같은 것이다. 치타가 먹이를 발견했을 때 폭발적인 스피드로 나꾸어 채는 것처럼 일감을 발견했을 때 놓치지 않았다.
 
직장생활 20년 살았고 사업자로 19년 살았다. 직장생활은 우리에 갇힌 사자와 같은 삶이었고 사업자는 초원의 사자와 같은 삶이다. 어느 삶이 더 나을까? 당연히 후자가 더 낫다. 왜 그런가? 배가 고파도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청둥오리의 삶과 애완견의 삶을 비교해 본다. 청둥오리는 보기에도 좋다. 어떻게 저렇게 아름다운 깃털을 가질 수 있을까? 보면 볼수록 아름답고 신비하다. 더구나 하늘을 날아 오르기까지 한다. 반면에 목줄에 매인 강아지를 보면 마치 동물학대를 보는 것 같다. 나만 그런 것일까?
 
목줄에 묶인 애완견은 늘 주인과 함께 있다. 목줄에 묶여 있어서 주인이 하자는 대로 해야 한다. 애완견의 얼굴에서 슬픔을 본다. 슬픈 눈망울이다. 자유가 없는 것이다. 세상사람들도 이와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사람들도 목줄에 묶여 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 어떤 것인가? 이는 다음과 같은 인연의 목줄을 말한다.
 
 
쇠나 나무나 밥바자 풀로 만든 것을
현명한 님은 강한 족쇄라고 말하지 않는다.
보석이나 귀걸이에 대한 탐착,
자식과 아내에의 애착을 강한 족쇄라고 말한다.”(Dhp.345)
 
 
옛날에 죄수들은 차꼬를 찼다. 목에 나무토막을 붙여 만든 형틀을 말한다. 쇠로되 것도 있다. 이런 형틀을 차면 빠져 나오기 힘들다. 그러나 성자는 이런 차꼬를 강력한 족쇄라고 부르지 않는다. 왜 그런가? 언제든지 칼로 자를 수 있기 때문이다.
 
쇠붙이로 된 형틀보다 더욱 더 강력한 형틀이 있다. 그것은 가족간의 인연이라는 형틀이다. 처자식에 대한 갈애는 번뇌로 이루어진 족쇄로서 칼로 베어낼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것이다.
 
사람들은 자유를 원한다. 어떤 사람은 처자식을 내버려두고 출가를 한다. 갈애라는 번뇌로 이루어진 족쇄를 부수어버린 것이다. 왜 그렇게 했을까? 대자유를 맛보기 위한 것이다.
 
남자만 가족을 버리는 것은 아니다. 여자도 가족을 버렸다. 이는 뭇따 장로니가 “오! 자유! 정말로 나는 벗어났다. 세 가지 굽은 것들에서 벗어났다. 절구, 절구공이, 그리고 마음이 비뚤어진 남편으로부터 벗어났다.”(Thig.11)라고 노래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출가수행자들은 가족과 인연을 끊은 자들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다시 태어남을 말한다. 세속에서 삶은 단절되고 출세간의 삶을 살고자 한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서 자신은 죽은 것이다. 출가로 인하여 다시 태어난 것이다.
 
절에 산다고 하여 모두 깨달은 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세상과 인연을 끊고 절에 산다고 하여 저절로 깨닫는 것은 아니다. 세상과의 인연을 끊어 자유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번뇌에 사로잡혀 있다면 갈애라는 족쇄에 묶여 있는 것이 된다.
 
뭇따 장로니는 자유를 얻었다. 그것은 남편에게서 벗어난 것이었다. 그러나 진정한 자유는 아니었다. 장로니는 마침내 진정한 자유를 얻었다. 이는 “나는 생사에서 벗어났다. 윤회로 이끄는 것은 뿌리째 뽑혔다.”(Thig.11)라고 선언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출가자는 자유롭다. 출가자가 매여 있다면 자유롭지 않은 것이다. 출가자는 가족과의 인연을 버리고 출가했는데 또 다른 인연을 만든다면 이는 매여 있는 삶이 된다. 자유가 박탈된 것이다.
 
스님은 개를 키우고 있다. 스님은 산중에서 개와 친구가 되어 사는 것이다. 그런데 스님은 요즘 걱정이 있다. 개가 임신할까봐 염려되는 것이다.
 
스님의 개가 발정 난 것 같다. 주변에 있는 수케들이 어슬렁거린다. 목줄을 잠시라도 놓아 버리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스님의 개는 벌써 두 번이나 출산 했다. 작년 추석 때 두 번째 출산을 했는데 네 마리를 낳았다. 지금은 신도들에게 모두 분양해서 없다.
 
강아지는 언제 보아도 귀엽다. 그러나 강아지의 일생을 생각하면 마음이 불편하다. 강아지의 운명은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목줄로 개의 일생을 사는 것이다.
 
스님의 강아지는 이번에도 임신을 하게 될 것 같다. 중성화 수술을 권유했으나 실행되고 있지 않다. 이번에도 또다시 임신하게 된다면 또 다른 인연을 만들게 될 것이다.
 
출가수행자는 자유롭게 사는 사람이다. 가족과의 인연도 끊은 수행자가 또 다른 인연을 만든다는 것은 스스로 족쇄에 갇히는 꼴이 된다. 그렇다면 진정한 수행자의 자유로운 삶은 무엇일까? 아마도 다음과 같은 로히니 장로니의 게송일 것이다.
 
 
“마을에서 떠날 때에
아무것도 살펴보지 않고,
미련 없이 떠납니다.
그 때문에 저는 저들이 사랑스럽습니다.” (Thig.282)
 
“창고에도 항아리에도 바구니에도
자신의 소유를 저장하지 않고,
줄 준비된 것만을 구합니다.
그 때문에 저는 저들이 사랑스럽습니다.” (Thig.283)
 
 
떠날 때는 미련 없이 떠나는 것이다. 미련이 남아 있다는 것은 묶여 있는 것이 된다. 그것은 소유와 관련이 있다.
 
출가수행자는 무소유를 실천하는 자이다. 옷 세 벌과 발우 이외에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다. 한마디로 빌어 먹고 사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수행자의 모습이다.
 
출가수행자는 한곳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머물러 있으면 소유가 생긴다. 그래서 “마을에서 떠날 때에 아무것도 살펴보지 않고, 미련 없이 떠납니다.”(Thig.282)라고 했다.
 
미련 없이 떠나는 것이 진정한 수행자의 모습이다. 미련이 있다면 이는 갈애와 번뇌가 있다는 말과 같다. 새로운 인연을 맺어 놓는 것은 스스로 족쇄를 채우고 자물쇠에 갇히는 것과 같다.
 
대부분 사람들은 족쇄에 갇혀 살고 있다. 마치 목줄을 하고 있는 개와 같은 신세인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그는 물질에 따라 감겨 돌고, 그는 느낌에 따라 감겨 돌고, 그는 지각에 따라 감겨 돌고, 그는 형성에 따라 감겨 돌고, 그는 의식에 따라 감겨 따라 돈다.”(S22.99)라고 했다. 오온이라는 족쇄에 갇혀 있는 것이다.
 
목줄은 자유를 억압한다. 기둥에 묶여 있기 때문에 행경은 매우 좁다. 언제부터 이런 신세가 되었을까? 이에 부처님은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 없다.”(S22.99)라고 했다.
 
윤회의 시작점은 알 수 없다. 시작을 알 수 없으면 끝도 알 수 없다. 왜 그럴까?갈애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오온에 대한 갈애가 있는 한 세세생생 윤회할 수밖에 없다. 가죽 끈에 묶여 있는 개의 신세와 다름이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하셨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가죽끈에 묶인 개가 견고한 막대기나 기둥에 단단히 묶여, 그 막대기나 기둥에 감겨 따라 돌듯,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세상에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은 고귀한 님을 보지 못하고 고귀한 님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고귀한 님의 가르침에 이끌려지지 않고, 참사람을 보지 못하고 참사람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참사람의 가르침에 이끌려지지 않아서, 의식을 자아로 여기거나, 의식을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거나, 자아 가운데 의식이 있다고 여기거나, 의식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긴다.”(22.99)
 
 
오온 중에 의식에 대한 것이다. 의식을 자신의 것으로 여겼을 때 가죽 끈에 묶이는 것이 된다. . 한마디로 자아가 있다는 유신견(有身見: sakkāyadiṭṭhi)을 가지고 있으면 묶여 있는 것이 된다.
 
어떻게 해야 가죽 끈을 끊을 수 있을까? 그것은 “의식을 자아로 여기지 않고, 의식을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지 않고, 자아 가운데 의식이 있다고 자아로 여기지 않고, 의식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자아로 여기지 않는다.”(S22.99)라고 아는 것이다. 유신견을 부수어 버리면 목줄에서 풀려나는 것이다.
 
일반사람들은 목줄에 묶여 있는 개의 신세나 다름 없다. 그러나 유신견을 타파하여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면 목줄은 부서진다. 진정한 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성자의 흐름에 들기 전에는 자유인이라고 말할 수 없다. 집을 뛰쳐나왔다고 해서 자유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자아 개념을 가지고 있는 한 개의 신세나 사람의 신세나 다름 없다.
 
백권당으로 가는 길에 청둥오리를 보았다. 아무것에도 매여 있지 않은 모습에서 자유를 보았다. 더구나 하늘을 날아 다니는 것이다. 마치 걸림 없는 삶을 사는 대자유인을 보는 것 같았다.
 
 
어리석고, 지혜가 없고
삿된 생각을 가진, 어리석음에 덮인 자,
악마가 밧줄을 던지면
그와 같은 자들은 거기에 물든다.”(Thag.281)
 
그러나 탐욕과 성냄 그리고
무명이 사라져 버린 자,
그 밧줄을 끊고 밧줄을 여의니
그와 같은 자들은 거기에 물들지 않는다.”(Thag.282)
 
 
 
2024-03-09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