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뿌리 없는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

담마다사 이병욱 2024. 3. 13. 10:19

뿌리 없는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
 
 
뿌리도 없는 놈이.” 이 말은 유튜브에서 들은 것이다. 사망유희 토론에서 승리한 어느 유튜버가 일본 유학을 다녀 온 어느 유튜버를 공격하면서 말한 것이다. 정말 그 유튜버는 뿌리가 없는 것일까?
 
아파트 단지에서 유기견을 보았다. 흰 색 말티즈이다. 집에서 애완견으로 기르는 개가 어떻게 나왔을까? 목줄도 보이지 않는다. 아마 내다 버린 것으로 본다.
 
도시에서 또 다른 유기견을 보았다. 마치 진돗개처럼 늠름하다. 역시 목줄은 보이지 않는다. 누군가 버린 것 같다. 유기견은 어떤 운명에 처하게 될까?
 
개는 발정기가 되면 교미를 한다. 목줄을 묶어 놓아도 목줄을 끊어 버리고 기어이 교미를 하고 만다. 이때 상대가 되는 수컷 개는 거의 대부분 유기견이라고 볼 수 있다.
 
한때 강아지 영상을 본 적이 있다. 시골 동네 사람 이야기를 들어 보면 떠돌아 다니는 수컷 개가 온 동네 암컷 개를 임신시킨다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유기견은 암수가 만나서 교미를 한 후에 새끼를 낳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개는 새끼를 한두 마리 낳는 것이 아니다. 최소 대여섯 마리는 낳는다. 열 마리 낳는 경우도 있다. 이는 암케의 젖꼭지 숫자를 보면 알 수 있다.
 
세상에서 가장 하찮은 존재가 개이다. 오죽 했으면 개 같은 사람, 개 같은 놈이라는 말을 할까? 개가 하찮은 존재라면 개의 새끼 역시 하찮은 존재 플러스가 되기 쉽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강아지를 보면 귀여워한다. 그러나 두 달뿐이다.
 
오래 전의 일이다. 아마 삼십 년도 더 된 것 같다. 그때 수원 어느 삼류극장 간판에서 ‘개 같은 내인생’이라는 제목을 보았다. 이 영화는 보지 않았다. 그러나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미국 빈민가 청소년들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인생이 개 같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아마도 뿌리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키우던 개가 임신을 했는데 아비 개가 어떤 것인지 모르는 것과 같다.
 
개 주인은 강아지들을 분양하고자 했다. 그러나 분양이 잘 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개 주인에 따르면 개의 족보가 없다는 것이다. 이는 강아지의 아비 개가 어떤 종인지 모른다는 뜻이다. 이런 개를 유튜브에서는 ‘시골잡종’이라고 했다.
 
나는 족보가 있는가? 다행스럽게도 족보가 있다. 작년 가을 사촌형님으로부터 족보를 받았기 때문이다. 아마 이삼십년만에 업데이트 된 것 같다. 전주 이씨 덕천군파 운수군보 족보이다. 이렇게 본다면 나는 뿌리가 있는 사람이다.
 
누구나 뿌리가 있다. 다만 모르고 있을 뿐이다. 설령 떠돌이 개에게서 태어난 강아지도 추적해 가다 보면 뿌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랑스런 뿌리를 가지고 있을 경우는 많지 않을 것 같다. 그저 그렇고 그런 평범한 사람들의 뿌리이기 쉽다.
 
뿌리가 없으면 뿌리를 만들면 된다. 당대에서 뿌리가 될 수 있다. 역사에서는 1세가 이에 해당된다. 한 사람의 걸출한 영웅이 탄생되면 시조가 되는 것이다.
 
뿌리를 만들고자 한다. 어떤 뿌리인가? 불교계에서 뿌리를 내려 보고자 한다. 그렇다고 계보를 만들자는 것은 아니다. 삶의 족적을 남기고자 하는 것이다. 글로서 보여 주는 것이다.
 
경전을 근거로 하는 글을 쓰고 있다. 그래서 스스로 ‘불교블로거’라고 말한다. 현재 티스토리에 있는 블로그 ‘진흙속의연꽃’은 누적조회수가 855만명이다. 교계에서 가장 누적조회수가 많은 것으로 본다. 이런 것도 뿌리를 만드는 작업에 해당될 것이다.
 
불교를 주제로 하여 글을 쓰다 보니 비난이나 비방을 받을 때도 있다. 그 중에는심하게 태클을 건 스님도 있었다. 또한 자주 견제구를 날리는 학자도 있었다. 그들은 왜 이렇게 모질게 대했을까?
 
어제 유튜브 매불쇼에서 문화평론가 한갑수 선생 이야기를 들었다.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난교논란의 장예찬에 대한 것이다. 한갑수 선생에 따르면 이런 논란에 대하여 끝장토론을 제안했다.
 
한갑수 선생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뿌리에 대한 문제로 본다. 이에 한갑수 선생은 김제동의 예를 들었다.
 
요즘 김제동이 보이지 않는다. 왜 보이지 않을까? 한갑수 선생에 따르면 과도한 비난 때문이라고 했다. 놀랍게도 사람들은 김제동의 학력을 문제 삼고 있었던 것이다.
 
김제동의 학력은 그다지 내세울 것이 없다. 지방 전문대 레크레이션 학과 출신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김제동은 사회를 볼 때 대단히 능숙하다. 또한 토론 할 때는 학식도 있어 보인다. 이는 개인적으로 노력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주류에서는 김제동을 내버려 두지 않았다. 이른바 좌파인 것도 큰 이유가 될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일반사람들도 매도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김제동의 학력을 문제 삼은 것이다. 댓글로 학벌이 낮은 것을 조리돌림 한 것이다.
 
사람을 판단하는 여러 가지 기준이 있다. 그 중에 하나가 학력이다. 그래서 학력을 속이는 문제가 발생하는 것인지 모른다. 그런데 일단 학력이나 학벌이 좋으면 사람도 달라 보인다는 사실이다. 이는 재산도 다르지 않다.
 
언젠가 그 사람에 대하여 말한 적이 있다. 삼삼오오 모여서 이야기를 하다 보니 그 사람에 대하여 이야기하게 되었다. 누군가 “그 사람 돈 많아.”라고 말했다. 그 순간 허름해 보이던 그 사람이 갑자기 크게 보이는 것이었다. 심지어 어떤 이는 “지금부터 그 사람한테 잘 보여야겠는데.”라며 농담조로 말했다.
 
학벌이 있고 돈이 있으면 사람이 달라 보인다. 반면 허우대는 멀쩡해도 학력이 별볼일 없고 빈궁하면 가치가 낮아 보인다.
 
사람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사회적 지위도 중요한 항목에 들어간다. 그 사람의 현직을 보고 평가하는 것도 이에 해당된다. 또한 자격증이나 면허증을 가지고 있어도 고평가 대상이 된다.
 
장제동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남의 일 같지 않아 보였다. 인터넷에 글을 쓴다는 이유로 태클을 걸고 견제구를 날리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M스님은 노골적으로 공격했다. 불교계 인터넷 신문 중에 하나인 불교닷컴에 필명을 거론하며 ‘선무당 같다’느니, ‘반풍수 같다’는 등으로 비난했다. 어느 불교학자는 써 놓은 글에 대하여 평가절하했다. 논문도 아니고 법문도 아닌 잡문인 것이 큰 이유인 것 같다.
 
그들은 왜 그토록 모질게 굴었을까? 아마도 그것은 자신들의 영역에 들어와 있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이유가 크다. 요즘 속된 말로 ‘듣보잡’, 즉 듣도 보도 못한 잡스런 존재가 출현한 것으로 본 것 같았다.
 
스님과 학자로부터 견제를 받은 것은 아마도 뿌리가 없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불교계에서 활동하지 않은 것이 크다. 또한 불교와 관련된 학위가 없는 것도 큰 이유가 된 것 같다.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다. 인터넷 시대에 자신의 블로그를 만들어서 쓰고 싶은 것을 쓰면 되는 것이다. 사오정이 되어서 실업의 아픔을 글에서 위안을 찾았다. 이후 매일 썼다.
 
인터넷에 글이 엄청나게 축적되었다. 검색하면 글이 걸리기 때문에 이름 없는, 얼굴 없는 유명인이 된 것 같았다. 그러나 엠비시절 미네르바 사건처럼 알고 보니 별볼일 없는 사람이었다. 스님인줄 알았는데 학자인줄 알았는데 공대출신의 자영업자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태클을 걸고 견재구를 날렸다. 그럴 때마다 이른바 오기가 생겼다. 그때마다 일본 NHK 대하드라마에서 본 ‘신센구미(新選組, 2004년)’의 한장면을 떠올렸다.
 
2000년대 후반 ‘일드’에 심취해 있었다. 인터넷이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함에 따라 이른바 일드, 즉 일본드라마를 무료로 볼 수 있었다. 그때 포착된 것이 NHK 대하드라마 시리즈였다. 신센구미도 그 중에 하나이다.
 
신선조는 일본 도쿠가와 막부 말기 낭사(浪士)집단이었다. 떠돌이 무사들이 모여서 일본 최강 무사집단을 만든 것이다.
 
신선조는 막부에서 고용한 일종의 경찰조직이었다. 그런데 대원을 모집하는데 있어서 신분의 제한은 없었다. 그래서 하급무사, 떠돌이 무사, 심지어 상인이나 농민까지 지원했다.
 
낭사로 이루어진 신선조는 막부말기 일본 최강의 무사집단이 되었다. 이는 엄격한 무사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최고가 되겠다는 의지가 있었다. 그것은 “무사보다 더 무사답게”라는 구호이다.
 
무사가 아닌 자가 무사행세를 하면 무사가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떠돌이와 상인과 농민은 무사가 되고자 했다. 그래서 검(劍) 한 자루에 목숨을 걸었다.
 
떠돌이들은 최강의 무사가 되었다. 검에 있어서 달인이 된 것이다. 이는 실전과도 같은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진검승부를 한다면 상급무사라도 당해 낼 자가 없었다.
 
아무 배경도 없고 뿌리 없는 자는 검 한 자루에 의지했다. 출세하기 위해서는 검술의 달인이 되어야 했다. 더 높은 지위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무사보다 더 무사다워야 했다. 그들은 “무사보다 더 무사답게”라며 용맹정진한 것이다.
 
글을 쓸 때 신선조의 구호 “무사보다 더 무사답게”를 생각했다. 그래서 태클을 거는 스님에게는 “스님보다 더 스님다운 재가수행자가 되겠다.”라고 다짐했다. 견제구를 날리는 학자에게는 “학자보다 더 학자다운 글을 쓰겠다.”라고 다짐했다.
 
페이스북에는 이른바 자칭타칭 시인들이 많다. 글 쓰는 사람 중에는 왠만하면 시인인 것 같다. 이런 사실을 알았을 때 나도 시인이 되고 싶었다.
 
코로나 이전의 일이다. 안양아트센터에서 안양문인회에서 주최하는 시화전이 열렸다. 백권당 가까이 있어서 점심시간에 보러 갔다.
 
시인이 되고 싶었다. 이에 안내 데스크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어떻게 하면 시인이 될 수 있습니까?”라며 물어 보았다. 그 사람은 신문사 등에서 주최하는 백일장에 참가하면 될 것이라고 했다.
 
시인이라는 말이 좋아 보였다. 문인협회에 멤버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써 놓은 시가 백 편도 넘는다고 말하면서 회원으로 받아 줄 것을 요청했다.
 
시인이 되려면 등단해야 한다. 등단하지 않은 자는 회원자격이 없었다. 그럼에도 명예회원이라도 되고 싶었다. 그러자 사무를 총괄하는 사람이 “시인은 나이롱뽕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라는 취지로 말을 했다.
 
시인이 되려면 제도권에서 인정하는 자격증이 있어야 한다. 백일장에라도 참여하여 자격증을 따고 싶었다. 그러나 그만 두었다. 시인이라고 해서 반드시 시인자격증이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시만 잘 쓰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백권당에는 백권이 넘는 책이 있다. 현재 121권까지 만들었다. 앞으로 이삼십 권 더 만들어야 한다. 이 중에 시집도 있다.
 

 
네 권의 시집이 있다. 2014년부터 2018년 까지 쓴 것이다. 블로그에는 ‘나에게 떠나는 여행’라는 카테고리가 있는데 시에 대한 것이다. 모두 503편의 시가 있다. 나는 시인일까?
 
백권당에는 시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영화와 드라마에 대한 책도 있다. 2007년부터 2021년까 쓴 것으로 세 권이다. 블로그에는 ‘영화드라마후기’라는 폴더를 만들어 놓았다. 모두 135개의 글이 실려 있다. 나는 영화평론가가 될 수 있을까?
 

 

 
수행기도 있다. 2008년부터 2023년까지 쓴 것으로 여섯 권이다. 블로그에는 ‘수행기’라는 카테고리가 있는데 397개의 글이 실려 있다. 나는 수행자인가?
 
작년 우안거를 보냈다. 매일 한시간 좌선한 것이다. 이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무려 600페이지가 넘는다. 한시간 좌선에 두세 시간 후기를 쓴 것이다.
 

 
우안거 때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그야말로 88일동안 죽기살기로 좌선하고 후기를 썼다. 마치 떠돌이가 “무사보다 무사답게”라고 결의한 것과 같다. 그래서 재가자임에도 “출가수행자보다 더 출가수행자답게”라고 독한 마음을 먹은 것이다.
 
불교학 관련 학위는 없다. 이는 뿌리가 없는 것과 같다. 뿌리가 없으니 무시당하는 것 같다. 이는 아마도 열등적 자만에 해당될 것이다.
 
불교학 학위가 없다 보니 족보가 없는 것 같다. 족보에 올라 간 사람 입장에서 보았을 때 제아무리 노력해도 아웃사이더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럴 때마다 “학자보다 학자답게”라며 글을 썼다. 그 결과 121권의 책을 쓸 수 있었다.
 
요즘 선거철이다. 이제 총선이 한달도 남지 않았다. 정치인 이언주는 민주당으로 복당했다. 이언주는 복당할 때 국힘당과 민주당의 정서에 대한 차이를 말했다. 어떤 것인가? 이는 서사에 대한 것이 크다.
 
이언주에 따르면 민주당에는 서사가 있다고 했다. 어떤 서사인가? 이는 스토리가 있는 삶을 말한다. 자신의 운명을 자신이 스스로 개척한 것을 말한다. 한마디로 개천에서 용나는 것이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는 서사가 있었다. 이는 김대중, 노무현, 이재명을 보면 알 수 있다. 모두 학벌이 낮고 가문이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다. 바닥에서 출발하여 자신의 운명을 개척했다. 민주당에서는 이런 입지적 인물이 후보가 될 수 있다고 했다. 한마디로 서사가 있는 자가 후보가 될 수 있음을 말한다.
 
국힘당에는 서사가 없다. 이는 대통령 후보를 보면 알 수 있다. 흙수저가 후보가 되는 경우는 드물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후보가 반듯해야 함을 말한다. 서울대 법대를 나오고 가문이 좋아야 후보가 될 수 있음을 말한다.
 
이번 총선에서 어느 당이 승리할까? 그것은 유권자의 선택에 달려 있다. 흙수저 출신으로서 서사가 있는 입지적인 인물을 선택할 것인지 명문가의 명문대 출신을 선택할 것인지는 개인의 취향에 달려 있다.
 
요즘 유튜브를 자주 보고 있다. 총선과 관련된 것이다. 대체로 보수측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재명을 비난한다. 재판 받는 것도 비난한다. 범죄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 재판 받고 있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그냥 싫은 것 같다. 왜 그럴까? 아마도 뿌리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동네북처럼 마구 두들겨 패도 되는 것 같다.
 
뿌리가 없으면 천대받기 쉽다. 길거리 유기견에서 나은 강아지 취급 받는 것과 같다. 글도 그런 것 같다. 스님도 아니고 학자도 아닌 것이 글을 썼을 때 태클이 들어오고 견제구가 날라 온 것이 좋은 예이다.
 

 
오늘도 한편의 글을 쓴다. 매일 글 쓰는 것에 대하여 M스님은 일주일에 한편만 쓰라고 점잖게 충고했다. 그리고 논문과 같은 깊이 있는 글을 쓰라고 했다. 그러나 스님의 말을 듣지 않았다.
 
스님의 충고를 받았다면 글을 쓸 수 없었을 것 같다. 일주일에 한번 쓴다면 결국 쓰지 않게 된다. 논문과 같은 글을 쓴다면 대학원에 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늘도 내일도 쓸 뿐이다. 누가 뭐라고 하든 말든 쓰고 싶은 것을 쓴다. 언제나 가슴에 품는 것이 있다. 그것은 “수행자보다 더 수행자답게”라는 말과 “학자보다 더 학자답게”라는 말이다. 이것이 뿌리 없는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2024-03-13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