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미음이 기쁨으로 충만할 때

담마다사 이병욱 2024. 3. 16. 09:36

마음이 기쁨으로 충만할 때

 
나모 바가와떼 바이사쟈~”백권당에 이미우이 음악이 울펴 퍼진다. 이번에는 약사관정진언이다. 짤막한 산스크리트어 게송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29분동안 계속 반복된다.
 
오늘 새벽에 집을 나섰다. 새벽 네 시대 일어나 목욕을 하고 백권당에 도착하니 5시 29분이다. 토요일임에도 이렇게 일찍 나온 것은 오늘 꼭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감 네트리스트를 구성하는 것이다.
 

 
오랜만에 일이 겹치기가 되었다. 마치 배우가 겹치기 촬영되면 즐거운 비명 지르는 것처럼, 사업자에게 일감이 겹치기로 있는 것은 든든한 것이다.
 
이번에 수주 받은 일감은 절대적인 시간을 필요로 한다. 요령이 통하지 않는다. 시간을 투입한 만큼 효과가 있다. 다음주 목요일까지는 마쳐야 한다. 역산해 보니 오늘 하지 않으면 안된다.
 
시간이 없다. 토요일도 행사가 있고 일요일도 행사가 있다. 시간 낼 수 있는 시간은 토요일 오전밖에 없다. 그것도 10시까지 이다. 새벽에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일을 하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하다. 컴퓨터 앞에 앉아 모니터를 바라보면서 한땀한땀 마우스를 클릭하면 마치 농부가 논에서 김을 메는 것과 같고 또한 아낙이 밭에서 호미질을 하는 것과 같다.
 

 
이 일은 요령을 피울 수 없다. 게으름 피워서도 안된다. 노력하는 것만큼 거둔다. 시간 투자한 만큼 효과가 있다. 이는 일이 완성되는데 있어서 절대적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일하는 것은 단순작업이다. 마치 호미를 들고 저 너른 밭을 한땀한땀 메는 것과 같다. 이렇게 본다면 마우스는 호미와 같고, 클릭하는 것은 호미질 하는 것과 같다.
 
단순작업은 반복적인 일이다. 똑 같은 것을 무한 반복하듯이 일 할 때 지루하다. 이럴 때 음악이 필요하다.
 
밭을 멜 때 라디오를 듣는다. 마우스질 할 때는 음악을 듣는다. 이럴 때 이미우이음악만큼 좋은 것이 없다. 라따나숫따, 자야망갈라가타, 약사관정진언 등 주옥 같은 이미우이 음악을 듣는다.
 
두 눈으로는 모니터를 쳐다 본다. 두 귀로는 음악을 듣는다.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는 것이다. 이런 것이 가능한 것은 단순반복작업이기 때문이다.
 
주의를 요하는 작업을 한다면 음악은 귀에 들어 오지 않는다. 지루하고 반복적인 작업을 할 때 음악을 들으면 견딜 만 하다.
 
작업할 때 유튜브를 들어도 좋다. 요즘 선거철이라 보고 싶은 것만 들으면 될 것이다. 그러나 아침부터 들으면 마음이 혼란해진다. 이럴 때는 마음을 정화할 수 있는 음악이 좋다. 이미우이음악만큼 좋은 것이 없다.
 
 
나모 바가와떼 바이사쟈- 구루- 와이두-랴 쁘라바라-자-야
따-타가따-야 아르하떼 삼먁삼붓다-야 따디야타-
옴 바이사제 바이사제 바이사쟈 사뭇가떼 스와-하-“

 

 

 
산스크리트어 약사관정진언이다. 이를 우리말로 해석하면 “약사유리광여래께 귀의 합니다. 가장높은 분, 완전한 분, 정등각자, 상서로운 분이시여! 그 약으로서, 그 약으로서, 약효가 드러나게 하소서!”가 된다.
 
약사관정진언은 아픈 사람이 들으면 효과적이다. 짤막한 게송으로 되어 있어서 금방 지나간다. 그러나 29분 판의 경우 계속 반복된다.
 
진언은 반복적인 것을 특징으로 한다. 예를 들어 “옴마니반메훔” 진언의 경우 한번 암송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계속 반복한다면 효과가 있다. 반복하면서 빠져 들기 때문이다.
 
이미우이의 약사관정진언은 여러 버전이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아끼는 것은 29분짜리 음악이다. 29분 동안 몇 번 반복되는지 알 수 없다. 스마트폰 스톱위치를 이용해서 측정해 보니 1분 가까이 걸린다. 이렇게 본다면 29번 반복되는 것이다.
 
일을 잡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하다. 이는 번뇌가 없음을 말한다. 가만 있으면 마음은 제멋대로 날뛴다. 늘 대상에 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일을 잡고 있으면 마음은 모니터에 가 있다.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마음이 산란되어 있다면 어떤 일이라도 해야 한다. 일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해야 한다. 그런데 돈이 되는 일을 하면 기쁨은 배가 된다는 것이다. 돈을 벌어서 좋고 번뇌가 없어서 좋은 것이다.
 
단순작업 할 때는 동시에 두 가지 일을 할 수 있다. 눈으로는 모니터를 보고 귀로는 음악 듣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이럴 때 기쁨을 넘어 충만된다.
 
일을 할 때 번뇌가 없다. 번뇌가 없어서 기쁨이 일어난다. 특히 반복적인 일을 할 때 집중이 되는데 이는 마치 명상을 할 때 마음이 집중되는 것과 같다. 뜨개질 등 단순하고 반복적인 일도 이에 해당된다. 여기에다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면 금상첨화가 된다. 기쁨을 넘어 행복을 맛본다.
 
이 세상에 가장 행복한 상태는 아마도 선정삼매에 들었을 때일 것이다. 설령 선정에 들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근접삼매에만 이르러도 마음은 편안하고 기쁘고 마음이 충만한 상태가 된다.
 
매일 좌선을 하고 있다. 하루 한시간 하는 것이 목표이다. 그러나 이런 일 저린 일을 하다 보면 한시간 채우기가 힘들다. 그럼에도 하루도 빠지지 않는다.
 
자리에 앉았다고 하여 명상이 잘 되는 것은 아니다. 그날 그날 상태에 달려 있다. 그래서일까 어떤 날은 황홀할 때가 있다. 몸이 나른해지면서 날아갈 듯 하는 것이다. 이런 상태가 되었을 때 그 상태에서 죽고 싶을 때가 있다.
 
오늘 일을 할 때 약간의 황홀감을 맛보았다. 이는 행복한 마음 이상이다. 일을 잡고 있기 때문에 번뇌는 발붙이지 못한 상태이다. 여기에다 무한반복 하듯 하는이미우이의 약사관정진언을 들었을 때 마음이 충만된다. 이럴 때 “죽어도 좋아!”라는 마음이 일어난다.
 
명상하다 죽으면 어떻게 될까? 아마 최상의 행복이 될 것이다. 선정삼매의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 했다면 아마 해당 선정에 해당되는 세계에 태어나게 될 것이다. 색계나 무색계 천상을 말한다.
 
천상에는 어떻게 태어나는 것일까? 초기경전에 따르면 ‘화생’하는 것으로 설명되어 있다. 홀연히 태어나는 것이다. 주석에 따르면 남자는 18세, 여자는 16세의 모습이라고 한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과 천상의 존재로 태어나는 것은 다르다. 인간은 태생이지만 천상은 화생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화생으로 태어나면 금방 태어난다는 것이다. 이를 틈 없이 태어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청정도론에서 개구리 만두까의 이야기를 보면 알 수 있다.
 
부처님 당시에 있었던 일이다. 짬빠시에 있는 각가라 연못 근처에서 부처님 설법이 있었다. 그때 개구리도 있었다.
 
개구리는 부처님 설법을 알아 들을 수 없었다. 다만 부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을 뿐이다. 그럼에도 개구리는 마음이 충만했었다. 그때 설법을 듣던 목동이 있었다. 목동은 막대기를 들고 있었는데 막대기로 중심을 잡고 있었다. 그때 개구리는 막대기 끝에 깔렸다.
 
개구리는 목동의 막대기에 짓눌려 죽었다. 그런데 눈을 떠보니 천상이었던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이는 “세존의 목소리에 대하여 인상을 파악했다.”(Vism.7.51)라는 것으로 알 수 있다.
 
개구리는 부처님의 설법을 알아 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소리는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부처님의 소리는 축생도 감동시켰던 것 같다. 개구리는 부처님의 아름다운 목소리에 충만되었던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목동의 지팡이에 짓눌려 죽었을 때 천상에 태어난 것이다.
 
마음이 충만할 때가 있다. 기쁨이 가득한 마음이 되었을 때 마음이 충만된다. 이런 때 죽음을 맞이 했다면 아마 천상에 태어나게 될 것이다. 개구리 역시 충만된 마음에서 죽었기 때문에 삼십삼천 천상에 태어나게 되었다.
 
천상에서는 화생한다. 어떻게 화생하는 것일까? 마치 눈을 번쩍 뜨는 것처럼 화생한다는 것이다. 이는 근거가 있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개구리가 천상에서 화생하는 장면에 대하여 “잠에서 깨어난 듯, 거기서 천녀의 무리에 둘러싸인 자신을 보고”(Vism.7.51)라고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초기경전과 논서에 따르면 화생은 무간(無間)이다. 이는 화생하는데 있어서 시간적 간극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재생연결식이 일어날 때 틈이 없음을 말한다.
 
아비담마에 따르면 중간(中有)는 있을 수 없다. 왜 그런가?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업, 업의 표상, 태어날 곳의 표상 중에 하나를 대상으로 하여 마음이 일어나기 때문에 중간적 존재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마치 벽에 문이 하나 있는데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과 같다.
 
대승불교에서는 중유를 인정한다. 사람이 죽으면 49일 동안 머물다가 새로운 몸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초기불교에서는 무간이다. 재생연결식이 일어나면 틈이 없이 순식간에 다음 생의 첫마음이 된다는 것이다.
 
개구리는 천신이 되었다. 부처님이 설법할 때 말을 알아 들을 수는 없었지만 마음은 충만된 상태였다. 충만된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에 삼십삼천 천상에 태어나게 되었다. 그런데 청정도론에 따르면 “잠에서 깨어난 듯” 화생했다고 표현했다. 이를 달리 말하면 “눈을 번쩍 뜨듯” 화생했다고 말할 수 있다.
 
나의 죽음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화생이 정말 있다면 나는 다음 생에 “눈을 번쩍 뜨듯” 태어날 것이다. 그곳은 천상일 수도 있고 지옥일 수도 있다. 또한 아귀일수도 있고 아수라일수도 있다.
 
인간은 태생이다. 닭은 난생이다. 그러나 천상을 포함하여 지옥, 아귀, 아수라는 화생이다. 마치 잠자던 자가 마치 눈을 번쩍 뜨듯 화생하는 것이다. 내가 눈을 떴을 때 그 세계는 어떤 세계일까?
 
오늘 작업을 하면서 마음이 충만되었다. 단순반복작업하면서 역시 단순반복게송을 들었다. 번뇌는 없었다. 기쁨으로 마음이 충만되었다. “이런 상태에서 죽으면 어떻게 될까?”라고 생각해 보았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것은 놀고 먹는 것이다. 오감으로 오욕락을 즐기는 것에 열중했을 때 번뇌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마음은 늘 감각대상에 가있기 때문에 갈애가 있어난다.
 
갈애는 아무리 마셔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과 같다. 갈애로 갈애를 없앨 수 없다. 갈애하면 할수록 집착이 된다. 결국 욕망으로 사는 것이 되어서 번뇌가 된다. 그래서 부처님은 “어떠한 것이 느껴지든 그것은 괴로움 안에 있다.”라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즐거운 느낌도 결국 괴로운 것이 된다. 왜 그런가? 모든 형성된 것은 무상하기 때문이다.
 
일을 하고 있을 때 마음이 안정된다. 여기에다 아름다운 음악까지 있으면 금상첨화이다. 그러나 감각을 자극하는 음악은 듣지 않는다. 감성적인 음악은 멀리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중가요나 클래식 등 세상사람들이 즐기는 음악을 듣지 않는다. 다만 단 하나 이미우이음악은 즐겨 듣는다. 그것은 담마에 대한 음악이기 때문이다.
 
오늘 새벽에 백권당에 나왔다. 오전 5시 40분부터 작업을 시작해서 7시 40분에 끝났다. 두 시간 동안 작업한 것이다. 이렇게 일을 해 놓으면 다음 작업 할 때 도움이 된다.
 
모든 일은 단계적으로 완성된다. 오늘 조금이라도 해 놓으면 다음 단계 일을 할 때 탄력이 붙는다. 이렇게 틈틈이 해 놓으면 어느 때 거의 완성되어 가는 것을 알게 된다. 오늘 일감 대장정의 첫 발을 떼었다. 이무우이의 약사관정진언 음악이 가득 울려 퍼진다.
 
 
나모 바가와떼 바이사쟈- 구루- 와이두-랴 쁘라바라-자-야
따-타가따-야 아르하떼 삼먁삼붓다-야 따디야타-
옴 바이사제 바이사제 바이사쟈 사뭇가떼 스와-하-“

https://youtu.be/WONwx7zazRc?si=9TnczJBClyB7QgCu 
 
2024-03-16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