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세상에 무지한 스님들이 너무 많아

담마다사 이병욱 2024. 5. 28. 08:13

세상에 무지한 스님들이 너무 많아


 

스님 말에는 권위가 있다. 무지한 불자는 스님 말을 받아 들인다. 정말 스님 말은 맞는 것일까?

스님은 자연이법에 대해서 말한다. 자연의 법칙이 진리라고 말한다. 자연의 흐름대로, 자연의 리듬대로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스님은 청개구리같다. 이렇게 말하면 저렇게 말한다. 스님은 개구쟁이같다. 이렇게 말하면 아니라고 말한다. 부처님 말도 예외가 아니다.

자연의 이법을 말하는 스님에게 이의를 제기했다. “누군가 법을 말했을 때 배척하지 않는다. 부처님의 법과 율에 따라 판단한다. 법과 율에 맞으면 받아 들이고 맞지 않으면 버린다.”라고 말한 것이다. 이에 스님은 법과 율에 집착한다고 말했다.

범부는 깨달은 자를 알 수 없다. 깨달음의 경지를 알 수 없는 것이다. 정신세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고 말하는 것이다.

공부하는 학인이다. 배울 것이 있어서 가르침에 의존한다. 매일 경전을 읽는다. 경전 속의 부처님 말씀을 새기고자 한다. 물론 원음이라 일컬어 지는 니까야 경전이다.

스님은 경전 읽는 것을 못마땅해 하는 것 같다. 이를 법에 대한 집착이라고 말한다. 깨달은 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집착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배우는 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믿고 의지할 것은 경전밖에 없다.

스님은 자연의 이법을 말한다. 스님의 말에 부처님 가르침은 보이지 않는다. 스님이 부처님 같다. 또 하나의 불교이다.

부처님은 망상을 끊으라고 했다. 그렇다고 언어로 이루어진 모든 것을 배척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직 깨닫지 못한 자는 무지(無知)하게 될 것이다. 누군가 “이것이 진리이고 다른 것은 모두 거짓이다.”라고 말한다면 믿고 따를 것이다. 새로운 불교의 탄생이다.

밀린다왕이 물었다. 왕은 ‘어째서 이 수행승들이
경, 응송, 수기, 게송, 감흥어, 여시어, 전생담, 미증유법, 교리문답을 송출하거나 질문하는 것입니까?”(Mil.262)라고 물었다.

왕은 구분교(九分敎)를 배우고 익히는 것에 대해서 질문했다. 경전공부하는 것을 말한다. 이에 나가쎄나 존자는 “모두 그들이 희론을 여임을 얻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대왕이여, 본성적으로 청정하고 그 전생의 인상이 훈습된 자들이 있는 데, 그들은 한 찰나에 마음이 통일되어 희론을 여읩니다. 그러나 눈에 많은 티끌이 있는 수행승들이 있는데, 그들은 이러한 예비적 수행에 의해서 희론을 여입니다.”(Mil.262)라고 말했다.

희론은 빠알리어 빠빤짜(papañca)를 번역한 말이다. 망상이라고도 번역한다. 공부를 하는 목적은 희론망상을 벗어나기 위한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언어적 형성에서 벗어나야 한다. 언어적으로 형성된 개념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당연히 문자적으로 구성된 경전도 보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티끌 없는 자에 한한다. 티끌 있는 자는 티끌이 남아 있는 한 경전에 의지해야 한다.

티끌도 티끌 나름이다. 티끌이 거의 없는 자도 부처님 가르침에 의지했다. 그래서 나가쎄나 존자는 가르침의 장군, 지혜제일 사리뿟따 존자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대왕이여, 배우는 것 은 필요한 것이므로, 대왕이여, 장로 싸리뿟따는 헤아릴 수 없는 무수 한 겁의 우주기를 지내면서 선근을 쌓고 지혜의 궁극에 이르렀으나, 그도 배우는 것이 없이는 번뇌의 부숨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대왕이여, 그러므로 배우는 것은 많은 도움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송출도 질문도 많은 도움이 됩니다. 그러므로 송출과 질문은 또한 희론의 여읨, 무위로 이끄는 길입니다.”(Mil.264)

배움은 필요한 것이다. 아직 티끌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자는 가르침에 의지해야 한다. 마침내 모든 티끌이 사라졌을 때 더 이상 의지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공부하는 학인(學人)이다. 배울 것이 많아서 매일 경전을 읽고 새긴다. 그런데 어떤 스님은 이를 조롱하듯이 놀려 댄다. 부처님 가르침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공부가 되지 않으면 그곳을 떠나라고 했다. 아무리 환경이 좋아도 성장이 없으면 오늘 안으로 짐을 싸서 떠나야 한다. 반면에 환경은 좋지 않지만 성장이 기대 된다면 그 사람에게 머물러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 수행승은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그 사람에게 머무는 것이 좋으며, 쫓겨날지라도 그 사람을 떠나서는 안된다.”(M17)라고 했다.

 
마땅한 스승이 없으면 떠나야 한다. 스승이 없다면 누구에게 의지해야 할까? 이럴 때는 경전이 스승이 된다. 학인에게는 경전이 의지처, 귀의처, 피난처가 된다.

티끌이 있는 자는 가르침에 의지해야 한다. 그럼에도 경전 읽는 것을 폄하 한다면 허물이다. 수행자의 허물은 크게 보인다. 그래서 이런 게송이 있다.
 
때묻지 않은 사람,
언제나 청정함을 구하는 사람에게는
머리털만큼의 죄악이라도
구름처럼 크게 보이는 것이네.”(S9.14)
 

 
청정한 삶을 살고자 서원한 수행승은 허물에서 자유롭지 않다. 어느 정도인가?  밀린다팡하에서 나가쎄나 존자의 답변으로 알 수 있다.

“대왕이여, 때 아닌 때에 식사하는 것은 세상에서는 죄가 아니지만, 승자의 가르침에서는 죄입니다. 대왕이여, 식물을 해치는 일은 세상에서는 죄가 아니지만, 승자의 가르침에서는 죄입니다. 대 왕이여, 물속에서 노는 일은 세상에서는 죄가 아니지만, 승자의 가르침에서는 죄입니다. 대왕이여, 이러저러한 그와 같은 승자의 가르 침에 죄가 되는 것을 시설의 죄라고 부릅니다.”(Mil.267)

출가자는 오후불식이다. 정오부터 그 다음날 해뜨기 전까지는 먹어서는 안된다. 먹으면 죄가 된다. 출가자는 농사를 지어서도 안된다. 식물을 해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식물은 물론 벌레도 해칠 수 있다. 출가자의 죄에 해당된다.

일반사람이 술을 마시면 죄가 되지 않는다. 출가수행승이 마시면 죄가 된다. 재가불자에게 처자식이 있는 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 출가자가 처자식을 가지면 죄가 된다. 왜 그런가? 이백 가지 이상 되는 구족계를 받았기 때문이다.

비구계나 비구니계는 통과의례가 아니다. 구족계를 받아 스님이 되었다면 계행을 지켜야 한다. 그럼에도 스님이 농사를 짓는 다면 허물이 된다. 스님이 차를 즐겨도 허물이 된다. 커피를 즐겨도 허물이 된다. 당연히 곡차로 불리우는 술도 해당된다. 스님이 개를 기르는 것도 또한 허물이 된다. 감각을 즐기는 모든 것은 죄가 된다.

수행자로 살기 쉽지 않다. 구족계를 받아 사는 스님도 살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일반사람들과 다름 없이 산다면 비난 받을 것이다. 스님의 작은 허물은 구름처럼 크게 보이는 법이다.

스승이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믿고 의지할 데가 없다면 경전에 의지해야 한다. 스님이 자신의 견해를 드러냈을 때 따져 보아야 한다. 부처님의 법과 율에 비추어 보는 것이다. 맞으면 받아 들이고 다르면 내쳐야 한다. 세상에 무지한 스님들이 너무 많다.



2024-05-28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