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매번 똑 같은 일이 반복되는 중생의 삶

담마다사 이병욱 2024. 5. 25. 11:45

매번 똑 같은 일이 반복되는 중생의 삶
 
 
매번 똑 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다. 스님은 강아지를 분양하려 한다. 이미 한마리는 아는 스님에게 분양 예약했다고 말한다. 분양 받아 가기를 희망하는 사람에게 주겠다고 말한다.
 
스님에게 개가 있다. 스님은 ‘이쁜이’라고 부른다. 때로 ‘이쁜이보살’ 또는 ‘이쁜이보살마하살’이라고 부른다. 산중 한적한 암자에서 스님과 여러 해 전부터 인연을 함께 하고 있는 반려견이다.
 
이쁜이보살이 지난 4월에 새끼를 낳았다. 다섯 마리 낳았다. 이에 대하여 ‘저 강아지들을 어이할꼬?’(2024-04-29)라는 제목으로 글을 남겼다. 이렇게 글 제목을 자극적으로 단 것은 이쁜이보살의 연속적인 출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뿐이보살은 작년 10월에 강아지를 네 마리 낳았다. 올해 4월에 또 새끼를 낳았으니 6개월만이다.
 
작년 10월 스님의 개가 새끼를 낳았을 때 글을 하나 남겼다. 이는 ‘얘네들은 어디서 왔을까?’ (2023-10-09)라는 제목의 글이다. 제목을 이렇게 잡은 것은 스님이 페이스북에 쓴 글에 따른다. 스님은 강아지들이 나왔을 때 “얘네들은 어디서 왔을까?” 라고 썼다.
 
나는 어디서 왔을까? 누구든지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윤회하는 삶을 살고 있다. 스님은 갓 태어난 강아지들을 보면서 “얘네들은 어디서 왔을까?”라며 신기해 하는 것 같았다.
 
스님의 개, 이쁜이보살의 출산은 올해의 일도 아니고 작년의 일도 아니다. 몇 년 전에도 출산이 있었다. 더 이전에도 있었는지 모른다. 이렇게 본다면 이쁜이보살은 위대하다. 생명을 창조하는 위대한 어머니보살인 것이다.
 
한적한 암자에 이쁜이보살 식구가 생겼다. 마치 암자에 활력이 돋는 것 같다. 그러나 이별해야 한다. 스님이 다 키울 수 없을 것이다. 다 키우기로 한다면 암자는 온통 개의 세상이 될 것이다.
 
스님은 자유를 말한다. 스님은 페이스북에 자유롭게 사는 이야기를 올려 놓는다. 이 세상에서 자유만큼 소중한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누구나 자유롭기 바란다. 매여 있는 삶을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법구경에 이런 게송이 있다.
 
 
쇠나 나무나 밥바자 풀로 만든 것을
현명한 님은 강한 족쇄라고 말하지 않는다.

보석이나 귀걸이에 대한 탐착,
자식과 아내에의 애착을 강한 족쇄라고 말한다.”(Dhp.345)

 
 
형틀에 매인 죄수가 있다. 형틀은 함부로 부술수 없다. 그러나 인간이 만들어 놓은 구조물은 부술 수 있다. 칼로 끊어 버리면 그만이다. 그러나 끊지 못하는 것이 있다.
 
가족과의 인연은 끊을 수 없다. 자식과 아내와의 인연은 아무리 날카로운 칼이라도 끊어 버릴 수 없다. 아무리 날카로운 칼이 있어도 갈애라는 형틀은 부술 수 없다. 그렇다면 개와의 인연은 어떠할까?
 
매일 글을 쓰고 있다. 한번 집중하면 두세 시간이다. 글을 완성하고 나면 블로그와 페이스북에 동시에 올린다. 긴 글이다. 일시적으로 강한 성취감을 느낀다.
 
글을 쓰고 나면 공원에 간다. 머리를 식히기 위한 것이다. 주로 명학공원이다. 그런데 공원을 돌다 보면 자주 목격 되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아닌 애완견이다.
 
세상에 가장 불쌍한 동물은 아마 애완견이 아닐까 생각한다. 왜 그런가? 목줄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목줄은 매여 있는 삶이다. 주인 하자는 대로 해야 한다. 그러나 개에게는 본성이 있다. 오줌으로 영역표시를 하는데 주인은 자꾸 가자고 한다.
 
동물도 동물 나름이다. 자유롭게 사는 동물이 있다. 이제는 생태하천이 된 안양천에서 물오리를 본다.
 
물오리는 의연하다.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다. 가까이 가면 도망가 버린다. 물오리는 무엇을 먹고 사는가?
 

 
어느 날 귀가 길에 물오리 가족을 발견했다. 비산동 안양천 징검다리를 건너다가 목격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비산 안양천 물오리가족’ (2024-05-09)라는 제목으로 글을 남겨 놓았다.
 
물오리 가족은 모두 여덟이다. 어미 물오리 하나에 새끼 물오리 일곱 마리인 것이다.
 
새끼 물오리떼는 어미 물오리를 따라 다닌다. 징검다리 저 건너편에 먹이가 있나 보다. 그러나 새끼 물오리 떼는 거센 물살에 넘어 가지 못한다. 이를 동영상 촬영 해 두었다.
 
개와 물오리, 참으로 대조되는 삶이다. 개는 인간과 함께 살고 물오리는 자연과 함께 산다. 그러다 보니 개는 부자연스러운 삶을 살고 물오리는 자연스러운 삶을 산다.
 
개는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혐오적이다. 이는 인간과 함께 살기 때문이다. 인간의 도움을 받아 애완견으로 사는 것 자체가 혐오임을 말한다.
 
공원에서 개를 보면 측은한 마음이 든다. 그 때마다 “어쩌다가 개의 운명으로 태어났을까?”라고 생각한다.목줄한 개를 보면 연민의 마음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공원에 애완견 산책 나온 사람들은 다양한 연령대이다. 그러나 최근 몇 달 동안 유심히 관찰한 바에 따르면 젊은 여성이 많다는 것이다. 심지어 ‘개모차’에 실어 오기도 한다.
 
애완견은 목줄에 묶여 있다. 집에서는 자유로울지 모르지만 밖에서는 목줄을 해야 한다. 목줄한 것이 측은해 보인다. 개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개를 억압하는 것처럼 보인다.
 
개는 어떤 경우에 있어서든지 혐오적이다. 공원에 산책 나온 애완견을 보면 아무데서나 오줌을 싼다. 만약 사람이 오줌을 싼다면 용서 되지 않을 것이다. 또한 개는 아무데서나 똥을 싼다. 개주인은 준비된 비닐로 똥을 치운다. 만약 사람이 공원에서 똥을 싼다면 누군가 신고할 것이다.
 
개는 아무리 잘 가꾸어 놓아도 개일 뿐이다. 개에 옷을 입혀 놓는다고 하여 품격이 높아 지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어떤 개는 신발까지 신었다. 개 주인의 정성에 따른 것이다.
 
애완견은 애완견일 뿐이다. 사람 손에 사육되는 개는 혐오적 동물이 될 수밖에 없다. 왜 그런가? 주체적 삶을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개의 삶과 물오리의 삶은 비교된다. 목줄에 묶인 개는 사람의 도움으로 살아 가야 하지만 물오리는 묶인 것이 없어서 자유롭게 주체적으로 살아간다.
 
스님은 강아지를 분양하고자 한다. 작년에도 분양 했다. 그 때 강아지들에게 관심 보이자 “한마리 분양하지 않겠어요?”라며 권유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똑같은 말을 듣게 되었다.
 
스님의 이쁜이 사랑은 지극한 것 같다. 이쁜이보살의 배에서 나온 강아지를 합하면 수십마리 될 것이다. 그 많던 강아지들은 다 어디 갔을까? 아마 인연따라 흩어졌을 것이다. 상당수는 신도들이 분양 받아 갔을 것이다.
 
스님은 이번에도 강아지들을 분양한다. 나온지 두 달도 되지 않는 강아지들이다. 이제 눈을 떠서 이곳저곳 돌아 다닌다. 젖은 뗀 것 같다. 사료를 먹는 것을 보니 분양할 때가 된 것 같다.
 
스님은 작년 10월 강아지를 낳았을 때 탄식하다시피 했다. 또 강아지를 가지게 된 것에 대한 자괴감을 표현한 것이다. 그런 한편 새로운 생명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찬 것 같았다.
 
대체 왜 이렇게 똑 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일까? 6개월만에 스님의 처소는 강아지들이 노니는 장소로 변했다. 조금만 더 지나면 감당이 되지 않을 것이다.
 
스님은 작년 11월 분양할 때 장문의 글을 남겼다. 다시는 이쁜이보살에게 부담을 주지 않겠다는 약속을 한 것이다. 강아지들이 모두 떠났을 때 이뿐이보살은 삶의 의미를 잃어 버린 듯 식음을 전폐하듯이 누워 있었기 때문이다.
 
작년 스님은 강아지들을 분양하고 난 후에 글을 남겼다. 마치 윤회의 두려움을 연상케 하는 감동적인 글이다. 스님의 글을 보고서 ‘축생도 하느님의 세계(色界)에’ (2023-11-11)라는 제목의 글을 남겼다.
 
스님은 다시는 생명을 갖지 않고자 다짐 했다. 이쁜이보살의 슬픔을 대변하고자한듯 보인다. 스님이 쓴 글 일부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무슨 일로 어찌하여 태어났던고 ~


이쁜아! 이제 낳지말자 미안하다 ~

각자 어디서든 인연따라 편안하길 ~

나무 우리 이쁜이화신 보살 마하살 ~

사진은 ~ 새끼들을 멀리 떠나보내고
하루종일 새끼들을 찾아 헤매다니다
삶을포기한 이쁜이 ~ 에휴 맘아프다

(OO산 OO사 OO암 OO산방, 2023년 11월)”

 

 
스님의 글을 보면 태어남은 괴로움이다. 부처님의 말씀하신 “이것이 괴로움이다.”라며 사고와 팔고를 설한 것이 틀림 없는 진리인 것 같다. 새끼를 멀리 떠나 보낸 이쁜이의 심정을 글로 노래한 것이다.
 
스님은 자유롭게 산다. 스님은 늘 자유를 강조한다. 그런데 스님은 자연스럽게 사는 것도 자유라고도 말한다. 본성으로도 사는 것도 자유라고 보는 것 같다.
 
스님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이쁜이 보살에게 중성화 수술을 시켜 주지 않은 것이다. 그 결과 또 다시 새끼를 가지게 된 참사가 되었다.
 
이쁜이보살은 작년 강아지들이 떠났을 때 죽을 것처럼 괴로워했다. 이는 남겨진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다. 스님의 글에서도 확인된다. 그러나 인간은 망각의 동물인 것 같다.
 
올해 봄의 일이다. 스님의 이쁜이보살이 발정난 것이다. 단속을 해야 했다. 그러나 스님은 내버려 두었던 것 같다. 이런 것도 자연스러운 일일까? 자연의 본성대로 내버려 둔 것일까?
 
스님의 개는 새끼를 뱄다. 아비 개는 알 수 없다. 발정난 이쁜이가 외출해서 교합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목줄을 해 놓지 않았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일은 벌어졌다. 한번 수태가 이루어지면 그 방향으로 가게 되어 있다. 태내에서는 폭발적인 성장이 이루어진다.
 
개는 어떤 경우에 있어서든지 혐오적이다. 인간이 먹다 남은 것을 먹고 자란 개는 생명을 만들어 낸다. 하찮은 음식을 먹고서도 태아는 폭발적인 성장을 한다. 그리고 마침내 새로운 생명이 탄생되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생명은 아름답다.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축복이다. 특히 새로 태어난 새끼는 기적이나 다름 없다.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새끼는 귀엽다. 설령 그것이 축생일지라도 끌리는 것은 생명의 경외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강아지는 무럭무럭 자랐다. 스님은 이쁜이에게 미역국을 끓여 주었다. 그러고 젖을 물리고 있을 때 그릇에 우유를 가득 따라 주었다.
 
강아지가 태어난 지 두 달 조금 되지 않았다. 강아지 다섯 마리는 스님의 방 이곳저곳에 돌아 다닌다. 사진으로 본 것이다. 그런데 딱 여기까지라는 것이다.
 
스님은 강아지들을 분양하고자 한다. 어느 스님이 강아지 한마리를 분양 받았다.나머지 네 마리는 어떻게 될까? 인연따라 갈 것이다. 신도들도 가져 갈 것이다.
 
스님은 이쁜이에게 중성화 수술을 시켜 주지 않았다. 자연의 본성에 어긋난 것이라고 본 것 같다. 발정기가 되었을 때 내버려 둔 것도 자연의 본성과 관련 있을 것이다. 그 결과 스님의 처소는 개들의 세상이 되었다.
 
사람은 가족과 함께 산다. 한번 인연 맺으면 여간해서는 헤어지지 않는다. 죽을 때까지 함께 하는 것이다. 이는 갈애라는 족쇄가 단단히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가족의 족쇄를 끊는 사람이 있다. 출가자수행자를 말한다. 출가자는 부모와 형제와의 인연을 끊고 산으로 들어간다. 자유롭게 살기 위한 것이다.
 
스님은 가족과 인연을 끊었다. 그러나 혼자 사는 스님은 새로운 인연을 만들었다. 이쁜이보살과 함께 사는 것이다. 가족과 인연을 끊고 세상과 인연을 끊고 산으로 들어 갔는데 개와 인연 맺고 사는 것이다.
 
스님의 개 이쁜이보살은 수도 없이 새끼를 낳았다. 페이스북에서 파악된 것만 해도 이 번에 세 번이다. 이전에 더 있었는지 모른다. 그때 마다 스님은 두 달도 안되어서 분양했다.
 
스님은 늘 자유를 이야기 한다. 스님은 늘 본성을 이야기한다. 자연스럽게 사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사는 것이 자유롭게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논리로 따진다면 스님은 이제까지 출산한 강아지들과 함께 살아야 한다. 출산한 강아지들을 끝까지 책임 져야 한다. 또한 자연의 본성에 따라 짝짓기를 해주어야 한다.
 
사람의 앞날은 알 수 없다. 개의 앞날도 알 수 없다. 한번 태어났으면 죽을 때까지 개로서 일생을 살아야 한다. 윤회의 두려움을 갖게 하기에 충분하다. 이는 다름 아닌 존재의 두려움이다.
 
스님의 처소에는 조만간 고요가 찾아 올 것이다. 새끼들이 모두 다 떠났을 때 결국 스님과 이쁜이만 남을 것이다. 이쁜이보살은 또다시 실의에 잠길 것이다. 작년에 그랬던 것처럼 삶을 포기한 듯 식음전폐하고 드러누울지 모른다. 그러나 알 수 없다. 어쩌면 앞으로 6개월 후에 또 다른 귀여운 강아지들을 보게 될지 모른다.
 
 
2024-05-25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