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수 열사는 지장보살의 화현
마치 공간이동 한 것 같다. 불과 두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광주송정역에서 안양 집까지 정확하게 두 시간 오분 걸렸다.
오늘 아침 햇살이 눈부시다. 오늘이 5월 27일이니 초여름 같은 날씨이다. 그런데 오늘은 광주가 함락된 슬픈 날이라는 것이다.
어제 광주에 다녀 왔다. 김동수 열사 44주기 추모제에 참석한 것이다. 이번 추모제는 예년과 달리 열사의 생가에서 열렸다. 장성에 있는 생가이다.
김동수 열사 추모제에 참석한지 오년이 되었다. 2019년 처음 추모제에 참석했다. 서울 양재에서 출발한 대불련 전세버스에 탑승한 것이 시작이다.
매년 추모제에 참석하고 있다. 코로나 때 한 번 빠졌다. 코로나가 절정일 때 모든 활동은 제한 되었다. 이제까지 네 번 추모제에 참석했다.
김동수 열사 생가 마을에서
오전 7시 57분 광명역에서 KTX에 탑승했다. 대불련에서 직책을 맡고 있는 최희숙 선생이 끊어 준 것이다. 공짜로 탑승할 수 없다. 십만원을 후원했다.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최경애 선생이다. 어제 문수스님 추모제에 참석하고 오늘은 김동수 열사 추모제에 참석하기 위해 탄 것이다. 한 자리에 앉아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두 시간도 걸리지 않아 광주송정역에 도착했다. 도착하니 전세버스가 대기하고 있었다. 장성 생가로 가기 위한 것이다. 광주 시내에서 사람들을 더 태웠다.
김동수 열사 생가 마을에 도착했다. 산골 마을이나 다름 없다. 마을 저편에는 마치 고가도로처럼 생긴 것이 하늘을 나는 것처럼 달리고 있다. 처음에는 고속도로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수도(水道)였다. 장성호의 물을 운반하는 수도가 마치 로마시대 ‘수도교’처럼 보였다.
행사는 마을 정자에서 열렸다. 정자가 있는 곳에 너른 터가 있는데 이미 많은 사람들이 도착해 있었다. 이날 모인 사람들은 이백 명 가량이라고 한다.
늘 그렇듯이 행사에 빠지지 않는 음악이 있다. 그것은 ‘님을 위한 행진곡’이다. 상당수는 주먹을 쥐고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라며 이른바 ‘팔뚝질’ 하며 불렀다. 마을 노인들은 단지 일어서서 듣기만 했다.
5.18민중항쟁이 일어 난지 44년이 되었다. 불교계에서는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김동수 열사를 추모한다. 마지막까지 항전한 것을 추모하기 위한 것이다. 이를 어떤 이는 ‘보살정신’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김동수 열사 학교 친구를 알았는데
대불련 출신이 아니다. 그럼에도 매년 대불련 행사에 참여 한다.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김동수 열사를 알게 된 것은 2007년의 일이다. 그때 당시 사업을 처음으로 시작했다. 일인사업이다.
사업초창기 때 일감을 하나 수주 했다. 조립할 사람이 필요했다. 소개 받은 사람은 김동수 열사 친구 ‘최’였다.
최는 김동수 열사와 같은 학교 같은 학번 같은 과이다. 조선대학교 전자공학과 78학번인 것이다. 그는 58년 개띠이기도 하다. 나보다 두 살 더 많지만 이후 친구처럼 지냈다. 이른바 사회친구인 것이다. 사회친구는 능력에 따라 일곱 살까지도 가능하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일이 끝나고 식사를 했다. 최는 놀라운 이야기를 했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겪은 이야기를 한 것이다. 최는 ‘구호대’로 활약했다고 한다. 김동수 열사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친구였기 때문이다.
최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극적이다. 그날 5월 26일 최후의 날에 고민했다고 한다. 도청에 들어갈 것인지 말것인지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같은 과 친구 세 명이서 소주 한병 놓고 고민했다고 한다.
침묵은 길어졌다. 한시간 후에 한 친구가 입을 떼었다. “내가 죽으면 우리엄마가 너무 슬퍼할 것 같다.”라고 말한 것이다. 이 말 한마디에 전의를 상실했다. 모두 뿔뿔이 흩어져 고향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날 마지막 날 26일 도청에 들어가면 죽는다.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과연 죽으러 들어갈 사람은 몇 명이나 있을까? 그럼에도 죽으러 들어간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 중에 한 사람이 김동수 열사이다.
재작년의 일이다. 최에게서 카톡이 왔다. 아들 결혼을 알린 것이다. 통화해 보니 중병에 걸려 있었다. 피를 한번 다 바꾸었다고 한다. 그는 ‘아들을 여운다’는 말을 했다. 전라도 식으로 ‘결혼 시킨다’는 뜻이다. 아마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라 서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최와 연락이 끊겼다. 혹시 일이 났는지 염려 되었다. 함부로 전화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아들을 여운 후에 딱 일년 만에 카톡이 왔다. 자신의 어머니 부고를 알렸다. 이 카톡이 너무나 반가웠다. 한마디로 “살아 있다!”라는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이번 김동수 열사 추모제를 앞두고 최와 카톡을 했다. 건강은 많이 좋아 졌다고 한다. 기침이 심해 약 먹고 있다고 했다. 그는 잘 다녀오라는 말을 남겼다. 건강이 좀 좋아지면 만날 것을 약속했다.
2007년 이후 최와 자주 만났다. 같은 안양에 살고 있어서 저녁에 식사를 종종 함께 했다. 식사 때 들려 준 이야기가 중에 기억 남는 것이 있다.
최의 친구들은 추모행사를 했다. 그들만의 방식이다. 어떤 것인가? 매년 도청이 함락된 날에 세 명이 모여서 소주를 마시는 것이다.
세 명은 빚진 자가 되었다. 어떻게 빚을 갚아야 할까? 그들은 소주 마시는 것으로 대신 한 것 같다. 그런데 소주 마실 때 독특한 퍼포먼스를 한다는 것이다. 첫잔을 반드시 터는 것이다. 소주를 한잔 가득 담아서 “동수야, 미안하다.”라며 바닥에 뿌리는 것이다.
모든 것은 무상하다. 살아 남은 자들의 추모행사도 영원할 것 같았다. 그러나 스무 해가 지났을 때 흐지부지 되었다는 것이다.
김동수 열사는 왜 도청에 들어갔을까?
김동수 열사는 불교계 희생자에 해당된다. 그것도 대불련 출신이다. 대불련 전남지부장으로 활약하다 사망한 것이다. 이에 대불련 선배와 동료와 후배들이 매년 추모하고 있다.
김동수 열사 추모제에 참석한 것은 친구 최와 인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김동수 열사는 ‘친구의 친구’인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높이 평가하는 것은 그의 ‘결사항전(決死抗戰) 정신’이다.
김동수 열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마지막 날 도청에 들어간 것이 좋은 예이다. 그때 당시 도청에 들어가면 죽는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었다. 그런데 죽으러 들어간 것이다.
김동수 열사는 왜 도청에 들어갔을까? 죽어서 돌아오지 않았기에 아무도 모른다.
김동수 열사를 오랜 세월 추모해 온 사람이 있다. 이순규 선생을 말한다. 나이가 무려 86세이다. 그러나 매우 건강하다. 나이를 거꾸로 먹는 것 같다.
이순규 선생은 59학번이다. 전남 대불련을 창립했다고 한다. 80년 오월 당시에는 부처님오신날 행사를 준비 했는데 부위원장은 김동수 열사였다고 한다. 이순규 선생은 정신질환 관련 의사이다. 지금도 의료활동을 하고 있다고 한다.
어제 5.18 묘역에 갔었다. 이순규 선생은 김동수 열사 무덤이 있는 자리에서 사람들에게 말했다. 자신이 죽으면 김동수 열사에게 “너, 그때 왜 그랬냐?”라며 꼭 물어 보고 싶다고 말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죽은 자는 말 없이 무덤에 누워 있다. 김동수 열사는 왜 도청에 들어 갔을까? 이순규 선생은 지금도 미스터리라고 한다. 그러면서 결론적으로 “김동수 열사는 지장보살의 화현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김동수 열사는 지장보살의 화현
불교에서 지장보살은 지옥중생을 구하는 역할의 보살이다. 사전적 의미는 “단 한명의 중생이라도 깨달음을 이루지 아니하면 나는 성불하지 않길 원하옵니다.”라는 대원을 세운 보살을 말한다.
이순규 선생은 김동수 열사의 시신을 수습한 사람이기도 하다. 도청에서 사망했을 때 망월동에 매장 되었는데 이를 찾아 낸 것이다. 이순규 선생에 따르면 그때가 6월 7일이라고 했다.
김동수 열사의 시신은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이순규 선생에 따르면 대불련뺏지와 염주, 그리고 결정적으로 수강신청서를 보고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순규 선생은 혼자 많이 찾아 왔다고 한다. 그날 이후 무려 30년을 챙긴 것이다. 이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자료를 추모위원회에 넘겼다고 한다.
김동수 열사는 불교계에서 보살로 추앙받고 있다. 처음에는 아는 이가 없었는데 차츰 알려져서 이제 지장보살의 화현 위치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에서는 여전히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이순규 선생에 따르면 어느 해 때까지 조계종에서 한번도 찾아 오지 않았다고 한다. 이순규 선생은 지선스님이 있는 백양사 신도가 되어 신도회장 자격으로 조계종에 참석 요청을 했다고 한다. 이후 한번 관심 보였다고 한다. 올해 장성 김동수 열사 생가에는 유일하게 증심사 중현스님이 왔다. 지선스님은 이전 행사에서 대부분 참석 했다.
추모제 하일라이트 씻김굿
추모제 하일라이트가 있었다. 그것은 ‘씻김굿’이다. 이는 망자를 천도하기 위한 것이다. 참으로 구성지다. 그 동안 영상으로만 보던 것을 실제로 본 것이다.
씻김굿을 보면 마치 천도재가 연상된다. 절에서 사십구재 할 때 장엄염불도 연상된다. 거의 비슷한 것 같다. 절정에 달했을 때 “어머니 나는 가요. 극락에서 만납시다.”라고 말한다.
김동수 열사 창고기념관
씻김굿이 끝나고 김동수 열사 생가에 갔다. 생가에는 지금도 노모가 살고 있다. 노모는 행사가 시작될 때 한마디 했다. 흰 소복을 입은 작은 체구의 노모는 “먼데서 오셔서 고맙습니다.”라고 말했다.
김동수 열사 추모사업회에서는 기념관을 만들고자 한다. 그렇다고 광주 시내에 만드는 것은 아니다. 열사의 생가가 대상이다.
열사 생가에는 하나의 커다란 창고가 있다. 여기에 김동수 열사 영정이 모셔져 있다. 사람들은 국화 하나씩 들고 참배 했다.
김영철 열사 가족과 합석
점심시간이 되었다. 추모위원회에서는 부페식으로 준비 했다. 마치 부페식당이 연상된다. 육류, 어류, 나물 등 갖가지 수십 가지 푸짐한 먹거리가 있었다.
추모제는 마을잔치도 된 것 같다. 마을 노인들도 함께 했다. 먹을 때 천막 안에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김영철 열사 가족과 합석하게 되었다. 열사의 부인 김순자 여사와 열사의 아들 김동명 선생과 함께 한 것이다.
김동명 선생은 페이스북 친구이다. 김동명 선생은 한눈에 나를 알아 봤다. 다가와서 인사를 했기 때문이다. 페이스북 프로필에 얼굴을 올려 놓은 것이 효과 있었던 것 같다.
김영철 열사에 대한 글을 쓴 바 있다. 이를 김동명 선생이 읽은 것이다. 김동명 선생은 매우 고마워 했다.
처자식이 있음에도 도청으로
김영철 열사는 마지막 날 도청에 있었다. 처자식이 있음에도 들어간 것이다. 한마디로 죽으러 들어간 것이다.
오월 광주에 대한 여러 종류의 책을 읽었다. 다큐로도 읽고, 특정 인물에 대한 평전도 읽고 소설도 읽었다. 그리고 수많은 유튜브 영상을 보았다.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광주정신’이다.
광주정신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는 마지막 날 결사항전을 빼 놓고서는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그때 투항파와 항전파가 대립하고 있었다. 만약 투항파의 주장을 따랐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오월 광주는 그야말로 폭동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가담한 사람들은 모두 폭도가 되었을 것이다.
오늘날 5.18은 국가기념일이 되었다. 헌법이 개정된다면 전문에 실릴 것이다. 이런 것이 가능하게 된 것은 마지막 날 결사항전을 했기 때문이다.
마지막 날 도청에서 윤상원 열사를 비롯하여 열여섯 명이 죽었다. 열여섯 열사 안에는 김동수 열사도 있다. 이들의 죽음이 있었기에 오늘날 광주정신이 있다. 그때 죽으로 들어간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치가 살아난 것이다.
그들은 왜 도청에 들어갔을까? 대부분 스무 살 안팍의 사람들이다. 내 또래이다. 그런데 처자식이 있는 사람이 들어간 것을 대체 어떻게 이해 해야 할까?
김영철 열사는 처자식이 있었다. 그럼에도 들어갔다. 이는 자칭타칭 혁명가 또는 이론가라고 칭하던 지식인들이 숨어 버린 것과 매우 대조적이다.
2019년의 일이다. 그때 처음으로 김동수 열사 추모제에 참석했다. 그때 백양사 지선스님이 말한 것이 기억난다.
지선스님에 따르면 혁명이 일어나면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의 희생이 크다고 했다. 광주에서도 그랬다. 지금 5.18 묘역에 누워 있는 사람들 대다수는 노동자, 종업원, 대학생, 재수생, 고등학생이다.
광주에서 일이 났을 때 지식인들은 무엇 했을까? 안타까운 이야기이지만 대부분 숨어 버렸다고 한다. 아마 처자식이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럼에도 처자식이 있는 사람이 결사항전에 참여한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지식인들도 해야 할 일이 있을 것이다. 살아 남아서 전하는 것이다. 부채의식을 가진 수많은 지식인들이 책을 내고, 영화를 만들고,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만들었다.
그들은 왜 도청에 들어갔을까? 그들은 싸우러 들어간 것이 아니다. 그들은 지키고자 들어간 것이다. 그렇다면 도청이라는 물리적 공간일까? 결코 아닐 것이다. 이제까지 희생을 헛되게 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들어간 것이다. 그들은 광주정신을 지키고자 총을 든 것이다.
윤상원-박기순의 영혼결혼식에 대하여
김영철 열사 가족과 함께 식사를 했다. 앉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송문식 선생도 함께 했다. 사레지오 고등학교 교사로 정년퇴임한 활동가이다.
식사시간에 막걸리를 했다. 누군가 막걸리를 가져다 준 것이다. 김영철 열사 부인 김순자 여사에게 한잔 따라 올렸다.
김순자 여사를 이곳에서 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여사로부터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들었다.
김순자 여사는 남편 김영철 열사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려 주었다. 그날 마지막 날 진압작전이 시작 되었을 때 무려 일곱 발을 맞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죽지 않았다고 한다.
김영철 열사는 도청에서 살아 남았다. 그것도 결사항전하다가 살아남은 것이다. 바로 옆에 있었던 윤상원 열사는 죽었다.
김순자 여사는 윤상원 열사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 주었다. 여사는 1982년에 있었던 윤상원 열사와 박기순 열사와의 영혼 결혼식을 자신이 중매 했다고 말했다. 이런 이야기는 처음 듣는다.
세상에는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가 많다. 잘못 알려진 이야기도 많다. 윤상원-박기순의 영혼결혼식도 이에 속하는 것 같다. 만약 윤상원-박기순의 영혼결혼식이 성사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김순자 여사는 “아마 님을 위한 행진곡 노래는 나오지 않았을 겁니다.”라고 말했다.
이야기는 전설이 되고, 전설은 신화가 되고
오늘날 윤상원 열사는 전설을 넘어서 신화적 인물이 되었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약간은 불편해 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지나치게 한 사람만 띄어 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어느 시대에나 인물이 있다. 광주항쟁에서도 인물이 없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마지막 최후의 순간까지 항전하다가 죽은 사람이 대상이 된다. 이렇게 본다면 윤상원 열사나 김동수 열사는 좋은 대상이다.
광주항쟁에서 사람들에게 회자 되는 인물이 있다. 윤상원 열사가 대표적이다. 기념관도 만들었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어떤 이는 하나의 대표 주자 개념으로 파악한다. 누군가를 하나 드러내야 하는데 마침 거기에 부합되는 조건을 갖춘 인물이 있었던 것이다. 이를 윤상원 열사로 본다.
광주항쟁에서 희생된 사람들은 망월동에 누워 있다. 수백명 사람들은 사연이 있을 것이다. 추모제를 거창하게 해 주는 사람도 있고 아무도 찾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나의 이야기가 있다. 세월이 지나면 전설이 된다. 프로야구에서 원년 멤버들에 대하여 ‘OOO전설’이라고 불러 주는 것과 같다. 그런데 더 세월이 흐르면 신화가 된다는 것이다. 광주항쟁에 참여 했던 사람들 역시 전설이 되고 신화가 될 것이다.
광주 5.18 묘역에는 무명의 무덤도 많다. 시체를 발견하지 못해서 행방불명 된 사람들 묘역도 있다. 갖가지 사연이 있을 것이다. 이는 비석 뒷면에 쓰여진 문구를 보면 알 수 있다.
김동수 열사 묘역에서 추모가 있었다. 추모할 때 이 무덤 저 무덤을 돌아 보았다. 주로 비석 뒷면에 있는 문구를 주목했다.
김동수 열사 앞에 있는 ‘임병철의 묘’가 있다. 묘비 뒷면에 “전두환이가 우리 대학생을 다 죽인다고 집을 나와 시민군에 가입해서 죽을때까지 싸워야 한다고 5월 18일 나가서 5월 27일까지 열심히 용감히 싸웠음”이라고 쓰여 있다.
마지막 날 죽은 16명은 스무 살 안팍이다. 내 또래의 나이이다. 만약 내가 그때 현장에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그때 총을 들었을까? 어쩌면 들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마지막 말 도청에 들어갔을까? 이것만은 장담할 수 없다. 왜 그런가? 죽을 줄 뻔히 알기 때문이다. 엄마 생각이 나서라도 들어가지 못했을 것 같다.
서삼초등학교에 추모비가
생가에서 행사가 끝났다. 다음 행선지는 열사가 다녔던 초등학교이다. 서삼초등학교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추모비가 있었다.
김동수 열사 추모비는 조선대학교에만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생가 초등학교에도 있었던 것이다. 열사의 초등학교 친구들이 만든 것이라고 한다. 추모비에 말미에 “그의 거룩한 분노는 하늘로 치솟고 의기의 혼은 영원히 푸른 하늘로 스며든다.”라는 문구가 눈에 띈다.
김동수 열사의 행위는 귀감이 되고 있다. 서삼초등학교 교장은 학생들에게 자랑스러운 선배라고 말한다고 했다.
광주는 민주화 성지가 아니라 민주화 마중물
행사는 구도청에서 마무리했다. 전세버스가 4시 반에 현장에 도착함으로 인해 해산되었다. 그런데 표는 밤 10시 30분 KTX이다. 이 많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5.18기록관에 갔다. 금남로에 있는 구카톨릭회관이다. 오년 전에도 온 바 있다. 이번에는 최경애 선생, 손상훈 선생, 그리고 손상훈 선생의 딸과 함께 했다.
기록관은 세계문화유산이 되었다. 유네스코가 인정하는 문화기록유산인것이다. 놀랍게도 일기장도 전시되어 있다. 그날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 취재노트도 발견된다. 기록을 남기면 나중에 유산이 됨을 알 수 있다.
기록관에 가면 해설사의 설명을 들을 수 있다. 마침 한무더기의 사람들이 있었다. 함께 들었다.
해설사의 이야기는 재미 있다. 책에 없는 이야기도 해준다. 그때 마지막 날 새벽 방송이 있었는데 자신의 어머니는 “계엄군이 몰려 오고 있습니다. 우리 좀 살려 주십시오.”라고 들었다는 것이다. 이는 “시민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 마지막까지 싸웁시다.”라는 말을 잘못 들은 것이다.
해설사의 마지막 멘트가 여운으로 남는다. 사람들은 광주에 대하여 민주화 성지라고 말하지만 이런 말은 사양한다고 말했다. 해설서는 “광주는 민주화 성지가 아니라 민주화 마중물입니다.”라고 말했다.
기차는 공간이동하듯이
여전히 시간이 많이 남았다. 조강철 선생에게 연락 했다. 광주에 가면 늘 만나는 사람이다. 작년 정의평화불교연대 관련 북코서트를 했을 때 와 주었다. 조강철 선생을 상무역 부근에서 만났다. 조강철선생과 차도 마셨다. 그러다 보니 기차 탈 시간이 되었다.
기차는 공간이동하듯이 송정에서 광명까지 실어 날았다. 밤 12시가 넘었다. 택시를 타려 했으나 그 시간에도 버스가 있었다. 수원에 가는 3번 버스이다. 집에 두 시간 만에 온 것이다.
길고 긴 하루 일정이 끝났다. 샤워를 하고 잠에 들었다. 모처럼 잠을 잘 잤다.
2024-05-27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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