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살면 살수록 공덕 쌓을 기회도
어제 메일 한통을 받았다. 문제가 있음을 알았다. 담당자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아서 벌어진 참사이다.
하자가 생기면 바로 잡아 주어야 한다. 갯수를 잘못 파악하여 문제가 발생했다. 추가로 제작해야 한다. 그대로 손실로 작용된다.
문제가 생겼을 때는 시인해야 한다. 그리고 재빨리 조치를 해야 한다. 손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신용이다. 딸 뻘 되는 담당자에게 “다시 제작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일을 하다 보면 실수가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실수가 자주 반복되면 의심 받는다는 사실이다. 특히 나이 먹어서 실수를 하면 더욱더 의심 받게 된다.
실수하지 않고자 한다. 눈에 불을 켜고 확인하고 또 확인한다. 그럼에도 피해 가는 것이 있다. 이럴 때 운이 없다고 보아야 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태만이다. 수행용어로 말한다면 매사에 새김(싸띠)이 없는 것이다.
이 나이 먹도록 나는 무엇을 했는가?
요즘 새로 주문 받은 것이 있다. 사이즈가 꽤 크다. 무려 열 개의 도면을 받았다. 견적 내보니 이백팔십팔만원이다. 이는 특별히 50%할인하여 적용한 것이다.
잊지 않고 찾아 주는 고객이 있다. 요즘에는 포털사이트에 키워드광고를 내지 않아도 전화가 걸려 온다. 수년, 또는 십년 이상 거래한 고객들이다.
일이 있다는 것은 다행이다. 이 나이에 일을 해도 일감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알 수 없다.
이 일에는 정년이 없다. 내 사업을 하기 때문에 늙어 죽을 때까지 할 수 있다. 그러나 자꾸 잊어 버리고 실수 하게 된다면 그만 두어야 할 것이다.
내년이면 지공거사가 된다. 전철이나 지하철 무임 탑승이 가능한 나이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제 국가에서 인정하는 시니어에 편입될 날도 머지 않았다.
이 나이 먹도록 나는 무엇을 했는가? 재산을 모아 놓은 것도 없고 청정한 삶도 살지 않았다. 말라버린 호숫가에서 날개 부러진 늙은 왜가리 신세가 될 수 없다.
돈을 벌어서 어디에 써야 할까?
오랜만에 갑자기 큰 주문을 받았을 때 마음이 든든하다. 한달 수입에 해당되는 주문을 받았을 때 다음 한달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이런 주문은 생가지도 못한 것이다. 이럴 때 이를 어떻게 활용해야 할까?
납기가 생명이다. 정해진 날짜에 맞추어 주어야 한다. 늦으면 늦는다고 알려 주어야 한다. 그러다 보니 밤낮없이, 주말 없이 일하게 된다.
어제 한창 배치작업을 하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밤낮으로, 주말없이 시간을 쪼개서 작업해서 번 돈을 어디에다 쓰지?”라고 생각한 것이다.
사람들은 노후에 대한 걱정이 많다. 나중에 힘이 빠졌을 때, 아무것도 할 수가 없을 때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때 모아 두고자 한다.
오로지 일만 하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타인은 물론 자신을 위해서도 돈을 쓰지 않는다. 젊어서 너무 고생을 했기 때문에 ‘돈만이 살길이다’라는 생각이 뼈속까지 박힌 사람이다. 그 많은 돈을 어떻게 해야 할까?
돈이 있으면 든든하다. 부동산이 여기저기에 있으면 뿌듯할 것이다. 한푼두푼 모아 부를 이루었을 때 평생 소원이 성취되었다고 볼 것이다.
쓸 줄 모르는 사람이 있다. 벌기만 했지 쓸 줄 모르는 것이다. 돈 나가는 것에 대하여 마치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아까워하는 것이다.
여기 풍족한 노인이 있다. 그 사람은 죽기 전에 자신의 재산을 다 쓰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래서 철마다 해외로 나간다.
대부분 사람들은 돈을 벌 줄만 알지 쓸 줄을 모른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오로지 자신만으로 위해서 돈을 쓴다. 그래도 후자가 더 나을 것이다.
여러 단계를 거쳐서 숙성된 사람
네 종류의 사람이 있다. 자타에 이익이 되지 않는 삶, 타인에게 이익이 되는 삶,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삶, 자타에게 이익이 되는 삶을 말한다.
대부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산다. 이런 사람은 타인의 이익을 위해서 사는 사람보다는 더 낫다. 오로지 이념투쟁에만 골몰하는 사람보다는 나은 것이다.
최악의 사람이 있다. 어떤 사람인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도 살지 않고 타인의 이익을 위해서도 살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이런 사람에 대하여 화장터에서 타다만 장작과도 같다고 했다.
화장터 장작은 아무도 가져 가려 하지 않는다. 자신을 위해서도 쓰지 않고 타인을 위해서도 쓰지 않는 수전노는 아무도 가까이 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최상의 삶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실천하고 또한 타인의 이익을 위해서 실천하는 사람이다. 이런 행위를 자리이타(自利利他)라고 한다.
자리이타로 사는 사람은 버터크림 같은 사람이다. 버터크림은 우유에서 나온다. 우유에서 버터가 나오고, 버터에서 버터기름이 나오고, 최종적으로 버터기름에서 버터크림이 나온다. 여러단계를 거쳐서 숙성된 사람이다.
작업을 하다가 갑자기 좋은 생각이
일을 할 때 늘 컨디션이 좋은 것은 아니다. 오전이 다르고 오후가 다르다. 어떤 날은 몸 상태가 좋아서 진도가 잘 나가는가 하면 또 어떤 날은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럼에도 납기를 지켜 주어야 한다.
작업을 하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일해서 번 돈으로 무엇을 해야 할까에 대한 것이다.
일이 끝나면 돈이 들어 올 것이다. 주거래통장에 입금 되었을 때 일이 완전히 끝나게 된다. 그런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라지고 만다는 것이다. 허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허무한 일을 하고자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돈을 모은다고는 하지만 좀처럼 남아 있지 않다. 주거래통장 잔고는 늘 마이너스 상태이다. 그럼에도 아무 생각없이 일만 한다면 삶의 노예나 다름 없다. 이럴 때 갑자기 ‘보시통장’이 생각났다.
한달 전에 보시통장을 만든 바 있다. 이를 ‘나눔통장 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가진 것이 많지 않기 때문에 나눔통장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용어를 사용한다.
보시통장을 만든 것은 일생일대에 있어서 획기적인 사건이다. 이전에는 이런 것은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두 세달 전 큰 주문이 들어 왔을 때 이것을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까에 대하여 생각하다가 보시통장을 만들게 되었다.
배고픈 사람에게는 밥을
언젠가 국립박물관에서 ‘이집트보물전’을 보았다. 그때 이집트 상형문자로 “나는 굶주린 자에게 빵을 주었고 헐벗은 자에게 옷을 주었다.” 라는 문구를 보게 되었다. 이 문구를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고대 전제군주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배고픈 사람에게는 밥을 주어야 한다. 옷이 없는 사람에게는 옷을 주어야 한다. 가진 자들의 의무에 해당된다.
이번에 수주한 것을 어떻게 해야 할까? 주거래통장에 들어간다면 아무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이제까지 해온 관행대로 사는 것이다. 이럴 때 보시통장이 생각났다. 보시통장에 입금하는 것이다.
며칠 전의 일이다. 페이스북에서 글을 하나 보았다. 가난한 시의 글을 본 것이다. 보시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났다. 이에 용기를 내어서 계좌번호를 알려 달라고 했다.
누군가 도움을 주겠다고 하면 대부분 거절할 것이다. 자존심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시인은 계좌번호를 알려 주었다. 보시공덕 쌓을 기회를 준 것이다.
시인의 계좌번호에 돈을 입금했다. “소액이지만 능력껏 후원했습니다.”라는 멘트를 날렸다.
보시를 해도 큰 금액을 하지 못한다. 고작 일이만원 소액이 보통이다. 조금 더 하면 오만원이다. 절에 등을 달 때는 십만원이다. 그러나 보시는 능력껏 하는 것이다.
수승한 경전불사 보시
주변 사람들에게 보시를 권고한다. 언젠가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 보시를 요청하는 글을 올린바 있다. 놀랍게도 한 사람이 보시를 했다고 댓글을 달았다. 그러나 그 사람 이름은 알 수 없다. 다만 행위는 기억하고 있다.
이번에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 밀린다팡하가 완역되었다. 지금은 교정작업 중에 있다. 금요니까야 멤버들이 교정작업하고 있다. 이번에 교정작업에 참여하면서 후원금도 냈다.
티내지 말고 보시하라고 했다. 이렇게 세상에 알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덜 성숙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알리고 싶은 본능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와의 인연은 오래 되었다. 2016년 전재성 선생을 만나고 난 이후 계속되고 있다. 그때부터 니까야모임에 참여했는데 정기후원을 했다. 지금까지 매월 오만원 후원하고 있다.
후원은 능력껏 한다. 금액이 많으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보시는 절대금액으로 따지지 않는다. 능력껏 보시 했을 때 고액의 절대금액보다 더 가치가 있을 수 있다.
가문의 영광
새로운 번역서가 출간될 때 교정작업에 참여한다. 그리고 특별후원금을 낸다. 자타카 출간 했을 때 오십만원을 후원 했다. 이번 밀린다팡하 출간에도 오십만원을 후원했다.
오십만원, 큰 돈이라면 큰 돈이고 작은 돈이라면 작은 돈이다. 그러나 오십만원은 능력껏 보시한 것이다. 이는 오백만원이나 오천만원과 같은 금액과 비교되지 않지만 능력껏 한 것이기 때문에 그 금액 못지 않은 가치가 있을 것이다.
이번 밀린다팡하 출간을 앞두고 어느 법우에게 보시를 권유했다. 그 법우는 자타카 출간 때 꽤 큰 금액을 보시한 바 있다. 경전불사에 보시하는 것은 다른 어떤 보시보다도 더 수승한 보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법우에게 밀린다팡하 출간 보시를 권유했다. 법우는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다. 더구나 전재성에게 ‘공양청’을 하겠다고 말했다. 식당에서 식사하는 것이다.
몇 명의 후원자들과 함께 공양청이 이루어질 것 같다. 이렇게 보시를 하면 공덕이 되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전각불사나 종불사 등 갖가지 불사가 있다. 보시를 하면 시주자 명단을 적어 넣는다. 때로 공덕비를 세워 주기도 한다. 봉은사 전각 기둥 받침돌에는 시주와 화주 명단이 새겨겨 있기도 하다. 승가사에 가면 아예 천연바위에 시주자 명단을 적어 놓았다.
이름 석자를 남기고자 보시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보시는 아름다운 것이다. 감각을 즐기는 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쓸 데 없는 일이 될지 모르지만 보시를 하고 나면 마음이 뿌듯하다.
법우는 자타카 출간 당시에 보시를 했다. 그 결과 자타카 서문에 보시자 명단에 오르게 되었다. 돌에 새겨진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이 될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실려 있는 성전에 자신의 이름이 올라가는 것은 가문의 영광이 될 것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죽음을 맞이 했을 때
늘 죽음을 생각해야 한다. 죽음게송에서는 “나의 삶은 불확실하지만 나의 죽음은 확실하다.”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며칠전의 일이다. 눈 부위를 비볐더니 눈 앞이 캄캄해졌다. 갑작스러운 일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심해졌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한쪽 눈을 손바닥으로 가리고 택시를 탔다. 안과 병원으로 갔다.
눈 안에 털이 빠져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문지르다 일이 벌어진 것이다. 약 한시간 동안 패닉에 빠졌다.
사고가 났을 때 그 짧은 순간에 일생이 파노라마처럼 전개된다고 한다. 눈이 점차 어두워 졌을 때 죽음을 생각했다. 이대로 죽기에는 너무 억울하다고 생각했다. 해야 할 일이 많은데 지금 죽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해야 할 일이 있다. 어떤 일인가? 이는 “태어남은 부수어졌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고, 해야 할 일을 다 마쳤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고 아는 아라한선언에서 근거한다.
지금 이 자리에서 죽음을 맞이 했을 때 해야 할 일을 다 했을까? 이것이 의문이다. 해야 할 일을 다해 마치지 않았다면 게으르게 산 것이다.
돈 관리를 직접 하다 보니
어떻게 해야 해야 할 일을 다해 마칠 것인가? 그것은 공덕 쌓는 것밖에 없다. 돈을 벌어서 은행에 쌓아 두기 보다는 활용해야 한다.
은행에 쌓아 두면 은행돈이 된다. 은행에서 돈을 활용하면 은행돈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번 돈을 활용하면 내돈이 된다. 보시통장을 만든 이유에 해당된다.
이번에 작업한 것이 완성되면 보시통장으로 입금하고자 한다. 용돈이나 생활비, 여행비용으로도 사용할 수 있지만 보시전용통장으로 들어가면 오로지 보시하고 나누고 베푸는 용도로 활용된다.
보시통장은 내가 돈 관리 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남에게 돈 관리를 맡기면 엄두도 내지 못하는 것이다.
월급생활자로 살 때는 내 마음대로 쓸 수 없었다. 마치 용돈 타서 쓰듯이 사용했다. 그러다 보니 보시는 꿈도 꾸지 못했다. 그러나 사업자가 되고 나서부터는 돈 관리를 직접 하다 보니 내 뜻대로 쓰게 되었다. 보시통장이 대표적인 예이다.
돈이 보시통장에 들어간다고 생각하니 일하는 의미를 느끼게 되었다. 단지 돈을 벌기 위해서 일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맥 빠진다. 그러나 일을 함으로 인해서 보시공덕을 쌓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헛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이 세상에서도 즐겁고 저 세상에서도 즐거운
사람들은 감각을 즐기기에 바쁘다. 자신의 감각을 즐기는 데는 돈을 아끼지 않는다. 사람을 만나서 식사를 하면 몇 만원 깨질 것이다. 그러나 남에게 주는 것에 대해서는 자신의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아프게 생각할 것이다.
먹고 마시고 배설하면 남는 것이 없다. 아무리 황제식과 같은 밥상도 목구멍을 넘어 가는 순간 똥이 되어 나온다. 고가의 와인도 목구멍을 넘어가는 순간 오줌이 되어서 나온다. 그러나 소액이라도 능력껏 보시하면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선행을 하면, 두 곳에서 즐거워하니
이 세상에서도 즐거워하고 저 세상에서도 즐거워한다.
‘내가 선을 지었다.’라고 환호하고
좋은 곳으로 가서 한층 더 환희한다.”(Dhp.18)
선업공덕에 대한 것이다. 보시와 같은 선업을 쌓으면 이 세상에서도 즐겁고 저 세상에서도 즐거움을 말한다.
감각을 즐기는 자들은 좀처럼 보시하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서 사용한다. 가지고 있는 재산을 다 쓰고 죽고자 하는 사람도 있다. 철마다 해외에 나가서 돈을 쓰는 것이다.
내세를 믿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왜 이렇게 인색할까? 사람들은 감각을 즐기기에 열중할까? 아마 그것은 현세적 가르침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유교에서는 내세를 말하지 않는다. 현세에서 행복하게 즐겁게 잘살면 된다고 말한다. 그래서일까 대부분 인간관계에 대한 가르침이 많다.
인생이 한번뿐이라면 보시하는 삶을 살 필요가 없다. 물론 계를 지키는 삶도 필요 없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다 써버리고자 하는 것이다.
감각을 즐기는 삶을 사는 사람들은 매우 현세적이다. 죽음 이후를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인생은 행복하게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행복을 말한다. 그런데 행복이라는 말은 ‘행복한 느낌’을 말한다. 그것은 즐거운 느낌과도 같다. 이렇게 본다면 내세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감각적 즐거움을 추구하며 사는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감각을 즐기는 자의 말로는
옛날에 환갑잔치 할 때 늘 하던 말이 있었다. 그것은 “오래 오래 행복하게 사십시오.”라는 말이다. 이 말은 “오래 오래 즐겁게 사십시오.”라는 말과 같다. 그래서 맛 있는 것 있으면 맛있게 먹고 여행도 즐기며 살라고 말한다.
나이가 들어 노인이 되면 먹는 것에도 한계가 있고 여행도 한계가 있다. 오로지 감각을 즐기는 삶만 살다가 더 이상 즐길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때 어떤 생각이 들까?
“젊어서 청정한 삶을 살지 않고
재산도 모으지 못했으니,
쏘아져 버려진 화살처럼,
누워서 옛날을 애도한다.”(Dhp.156)
오로지 감각만을 즐기는 삶을 산 자는 늙었을 때 ‘쏘아져 버려진 화살’과도 같다. 숲에 버려진 화살은 아무도 찾지 않는다.
감각만을 즐기는 삶을 산 자가 죽음에 이르렀을 때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 지난날을 회상하는 것밖에 할 것이 없는 것이다. 지난날 먹고, 마시고, 놀고, 춤춘 것을 회상하며 누워 있는 것이다.
오래 살면 살수록 공덕 쌓을 기회도
언제 죽을지 모른다. 오늘이 그날이 될 수 있다. 사고로 죽을 수도 있다. 이는 업보의 성숙과는 무관한 것이다.
돌발적 상황은 언제든지 발생한다. 순간적으로 발생한다. 그 순간에 일생이 파노라마친다고 한다. 이럴 때 해야 할 일을 한자는 죽음을 기쁘게 맞이 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 해야 할 일이 많다고 여기는 자는 아쉬움이 클 것이다.
오래오래 살아야 한다. 그렇다고 감각을 즐기기 위해서 오래 살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나이가 너무 들면 감각을 즐길수도 없다. 그렇다면 왜 오래 살아야 하는가? 다음과 같은 경전적 근거가 있다.
“왕자여, 계행을 갖추고 선한 원리를 갖춘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은 오랜 세월 머무르면 머물수록, 많은 공덕을 낳습니다.”(D.23)
디가니까야 빠야씨의 경에 실려 있는 가르침이다. 오래 살아야 하는 이유를 설명한 가르침이다. 그것은 공덕과 관련이 있다.
오래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다. 오래 살면 살수록 공덕 쌓을 기회도 점점 많아 지기 때문이다.
오래오래 살고자 한다. 이는 오래 살고 싶은 욕망에 기인한다. 생명이 있는 것들 것 누구나 오래 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단지 감각을 즐기기 위해서 오래 살고자 한다면 세속적이다. 범부나 하는 일이다.
수행자는 오래 살면 살수록 이득이다. 지금 보시공덕을 짓고 있는 자는 오래 살수록 보시공덕도 더 많이 짓게 될 것이다. 지금 계행공덕을 짓고 있는 자는 더 많은 계행공덕을 짓게 될 것이다. 지금 사마타와 위빠사나 수행공덕을 짓고 있는 자는 오래살수록 더욱더 많은 수행공덕을 짓게 될 것이다.
공덕은 보이지 않는 정신적 재산이다. 아무도 가져 갈 수 없다. 죽어서 저승에 가져갈 수 있는 노자돈이 된다. 그래서 선업을 지으면 “이 세상에서도 즐거워하고 저 세상에서도 즐거워한다.”(Dhp.18)라고 했다.
보시는 조금 있어도 하는 것
쏘아 버려진 화살이 될 것인가? 공덕 쌓는 삶이 될 것인가? 내일을 알 수 없는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을 마친 자는 죽음은 두렵지 않을 것이다.
보시는 지금 해야 한다. 이따 나중에 돈 많이 보시한다는 것은 거짓이 되기 쉽다. 그 날이 올 수 있을지 오지 않을지 알 수 없다. 내일 죽는다면 허사가 되고 만다.
“조금이면 조금을 보시하라.
중간 정도면 중간 정도를 보시하라.
많으면 많이 보시하라.
보시할 것이 없으면 보시하지 말라.”(Jat.535)
자타카에 실려 있는 게송이다. 유미죽을 얻었다면 나누어 먹어야 한다. 아무것도 없다면 보시하지 않아도 된다.
보시는 조금 있어도 하는 것이다. 조금 있다고 하지 않는다면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이다. 소액이라도 보시해야 하는 이유에 해당된다.
내가 오래 살아야 하는 이유
보시는 능력껏 하는 것이다. 보시를 생활화 하기 위해서 보시통장을 별도로 만들었다. 직접 돈관리를 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타인이 돈 관리한다면 어림도 없는 이야기이다.
이번에 수주한 것은 보시통장에 넣고자 한다. 주거래통장에 넣어 두면 몇 달 지나지 않아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 돈이면 해외여행 한번 할 정도의 금액이지만 보시통장에 넣기로 했다.
나는 오래 살고자 한다. 그것은 부처님 가르침에 따른다. 감각을 즐기자고 오래살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공덕 짓기 위해서 오래 살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오랜 세월 머무르면 머물수록, 많은 공덕을 낳습니다.”(D.23)라는 가르침에 따른다.
장로가 축원할 때 하는 말이 있다. 그것은 “아유 완노 수캉 발랑”(Dhp.109)이라는 말이다. 이 말은 “장수하고 아름답고 행복하고 건강하시길!”로 해석된다. 장로스님이 시주(施主)에게 하는 말이다. 오래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다.
2024-05-21
담마다사 이병욱
'진흙속의연꽃'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동수 열사는 지장보살의 화현 (1) | 2024.05.27 |
---|---|
매번 똑 같은 일이 반복되는 중생의 삶 (0) | 2024.05.25 |
종로는 외국인 이주민노동자들의 해방구, 2024년 우중의 연등축제 (3) | 2024.05.12 |
폐기물 수거장에서 취득한 오단책장 (3) | 2024.05.11 |
빈자일등(貧者一燈) 정신으로 (4) | 2024.05.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