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권 진흙속의연꽃 2022 I, 현법낙주(現法樂住)가 아니라 현법관찰(現法觀察)을
지금시각 오전 6시 56분이다. 백권당에서 자판을 두들기고 있다. 현재시각 온도는 24도이다. 스마트폰 첫화면 날씨정보에 따른 것이다. 도시의 온도는 이 보다 몇 도 더 높을 것이다.
오늘 새벽에 열대야 현상을 겪었다. 올해 들어 두세 번 되는 것 같다. 선풍기를 켰으나 더운 바람만 나왔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창문을 모두 닫고 에어컨을 가동시켰다. 올해 들어 처음 있는 일이다.
사람들은 에어컨 틀기가 겁난다고 말한다. 전기세가 부담스러운 것이다. 그럼에도 도시에서 살다 보면 에어컨을 가동하지 않을 수 없다. 도시의 온도는 주변보다 몇 도 높기 때문이다.
열대야의 기준이 있다. 밤 온도가 25도 이상이 되면 열대야로 본다. 그런데 도심에서 밤의 온도는 이보다 훨씬 높다는 사실이다. 이른바 ‘열섬현상’ 때문일 것이다. 낮에 뜨겁게 달구어진 대지가 밤이 되어도 식지 않는 것이다.
열대야가 되면 괴롭다. 유월 하순이 시작되는 이 시기에 벌써 열대야라면 앞으로 두 달을 어떻게 버티어 내야 할까?
에어컨으로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다. 이럴 때 서늘한 나라를 생각하게 된다. 몽골 같은 나라를 말한다. 유한계층 사람들은 멀리 떠날 것이다.
열대야가 극성을 부릴 때 도시를 탈출하고 싶어진다. 외국으로 갈 수 없다. 국내는 가능할 것이다. 평창과 같은 고산지대에는 열대야가 없다고 한다.
흔히 이 세상을 감인토(堪忍土)라고 한다. 우리가 사는 사바세계는 견디기 힘든 세상임을 말한다. 추워도 견뎌야 하고 더워도 견뎌야 한다.
게으른 자는 핑계도 많다. 부처님은 게으른 자에 대하여 “너무 춥다고 일을 하지 않고, 너무 덥다고 일을 하지 않고, 너무 이르다고 일을 하지 않고, 너무 늦다고 일을 하지 않고, 너무 배고프다고 일을 하지 않고, 너무 배부르다고 일을 하지 않습니다.”(D31.12)라고 말씀 하셨다. 공부하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비 온다고 전쟁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눈이 와도 전쟁하고 바람이 불어도 전쟁한다. 어떤 조건에서도 맞아 싸워야 한다. 싸워서 이겨야 한다. 날씨가 덥다고 하여 서늘한 곳으로만 찾아 간다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더우면 더운 대로 견디어 내야 한다.
매일 똑 같은 일의 반복이다. 작년 이맘 때도 이런 날씨였을 것이다. 작년 여름에도 열대야는 극심했다.
매일매일 기록을 남긴다. 삶의 기록이고 삶의 흔적을 남기는 것이다. 누가 보든 말든 인터넷에 올린다. 그리고 책을 만들어 책장에 진열해 놓는다. 이런 것도 삶의 결실일 것이다.
이번에 책을 하나 편집했다. 2022년 전반기 때 일상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에 대한 글모음이다. 책의 제목을 ‘128 진흙속의연꽃 2022 I’로 정했다. 128번째 책으로 2022년 1월부터 7월까지 7개월간의 기록이다. 모두 95개의 글이 실려 있고 413페이지에 달한다. 참고로 목차를 보면 다음과 같다.
목차
1. 욕망을 추구한 대가로 우주적 스케일의 고통을
2. 나의 전략적 키워드광고 문구는?
3. 나도 어떤 이에게는 비호감
4.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면
5. 손자세대는 군대 갈 일 없어야
6. 사람이 밥만 먹고 살 수 없지 않은가?
7. 그들은 왜 이리 인색할까?
8. 현실 도피할 것인가 현실 직시할 것인가?
9. 부가가치세 신고의 날에
10. 내가 만든 책도 금자탑이 될 수 있을까?
11. 부조리한 것을 보면 참지 못하고 지적질 하는데
12. 홀로 있어도 외롭지 않은, 고독을 즐기는 삶을
13. 가지 잘린 낙락장송(落落長松)을 보며
14. 입춘대길(立春大吉), 위대한 축복의 메시지
15. 아파트 쓰레기 분리수거의 날에
16. 세상이 나를 실망시켜도
17.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는데
18. 그 사람에게 10만원 주었다
19. 지식인에게 명예와 칭송이 생겼을 때
20. 나는 내가 몇 살인지 잘 모르겠다
21. 어리석은 자가 명성을 얻으면
22. 허전하고 텅 빈 마음에
23. 그러면 됐다
24. 나는 세상과 싸우지 않는다
25. 진정한 낙수효과는
26. 밤에는 맛지마 낮에는 디가
27. 허망한 정열에 메이지 않고자
28. 믿음이 없는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29. 스님 페북에는 부처님이 없다
30. 식물은 잘라도 싹이 난다
31. 남산 감이당을 무작정 찾아 갔는데
32. 매일매일 절망의 나날인데
33. 불은 누가 냈을까?
34. 소리에 민감해야
35. 막힌 것을 뚫었을 때
36. 꽃이 피었으면 열매를 맺어야
37. 받을 줄도 모르고 줄 줄도 모르고
38. 오미크론 자가격리 기간에 맛지마니까야를
39. 수행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40. 호랑이에게 잡혀먹고 귀신에게 홀리고
41. 나는 왜 인정투쟁하는가?
42. 목숨을 건 나의 인정투쟁
43. 승원의 삶이 저절로 고귀한 삶을 보장할까?
44. 월말정리를 하면서
45. 점심값 아껴서 도자기 난(蘭) 화분을
46. 작은 절에 등불 하나 달고
47. 구글에서는 어느 해에나 연꽃이 필까?
48. 로깐따리까에도 자비광명이
49. 매일 가르침의 연등(燃燈)을
50. 왜 실수를 연발하는 것일까?
51. 깨진 종처럼 반응하지 않으면
52. 나는 이제 열여섯살 먹은 학인
53. 파리코뮌과 광주코뮌의 공통점은
54. 그는 왜 도청에 남았을까?
55. 선과 각의 도시에서
56. 다산(茶山)을 생각하면서
57. 경전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했을 때
58. 삼양동 산75번지를 찾아서
59. 오월의 끝자락에서
60. 나는 언제나 잠을 잘 자게 될까?
61. 티월드페스티벌에서 그윽한 차(茶)의 향기를
62. 스님을 귀의처, 의지처, 피난처로 삼지 말자
63. 네 운명을 아름답게 가꾸어라!
64. 오늘은 물 주는 날
65. 발상의 전환
66. 감이당 방문
67. 남도여행 시동을 걸고
68. 금산인삼랜드 휴게소
69. 득량만이 바라 보이는 아름다운 정원에서70. 소똥 냄새 진동하는 고향마을
70. 양애깐 화분에서 고향을
71. 인생을 즐기며 살자고?
71. 국립5.18묘지 순례
72. 블로그 개설 17년주년
73. 보광당 한약방의 팔미원(八味元)
74. 쌀을 매고 관악산 불성사에
75. 내 등에 짐이 있기에
76. 불성사 보리똥
77. 자타가 이익 되는 글쓰기
78. 제조업 로망스
79. 블로그를 플랫폼으로
80. 깜짝놀랄만한 보시를 하고자
81. S선생을 추모하며
82. 비봉산 산행
83. 제2의 다산이 되고자
84. 납땜 냄새가 그리울 때
85. 모니터를 밭삼고 마우스를 호미삼아
86. 건설현장의 운동가요
87. 리즈시절을 회상하는 사람들
88. 항공다큐 ‘다큐 9분’을 보고
89. 저녁의 혼탁한 마음
90. 블로그 누적조회 8백만명
91. 함께 기뻐할 줄 알아야
92. 세력이 있어야 세상을 바꾼다는데
93. 주말 없는 자영업자의 월화수목금금금
94. 고래바위 계곡은 비밀계곡
95. 결제하는 날은 보시하는 날
하나의 책이 나오기 까지 수많은 편집을 거쳐야 한다. 무엇보다 사진편집 작업하는데 시간이 걸린다. 매일 조금씩 인내를 가지고 편집하다 보면 어느 날 다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서문을 쓰면 책이 하나 완성되는 것이다.
책을 편집하면서 빠른 속도로 스캔해 보았다. 일상에 대한 기록을 보면 매년 똑같은 일이 반복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세월과 함께 반복되는 것이므로 똑 같은 영화를 반복적으로 보는 것과 다르다.
참으로 글을 많이 썼다. 7개월은 200여일 된다. 95개의 글이 있으므로 2일에 한번 썼다. 특히 새벽에 쓴 것이 많다. 스마트폰 앱에 엄지치기 하여 올린 것이다.
요즘은 새벽글쓰기를 하지 않는다. 너무 힘들고 피곤한 일이다. 그러나 2년 전에는 새벽에 일어나서 글을 썼다. 떠오르는 생각, 흘러가는 생각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엄지치기를 한 것이다.
일상에 대한 글은 일상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에 대하여 기록을 남긴 것이다. 그날 가장 인상깊었던 것이 대상이 된다. 그런데 세월이 흐른 다음에 보니 다짐 했던 것이 실현된 것도 있다. 목차 80번 글 ‘깜짝놀랄만한 보시를 하고자’(2022-06-30)라는 글이 바로 그것이다.
올해 봄에 보시통장을 하나 만들었다. 주문 받은 것 중에 일부를 보시전용통장으로 돌린 것이다. 2년 전 글에서 말미에 “나이를 먹었지만 여전히 현역이다. 현업에서 일을 하면 현역인 것이다. 열심히 벌어서 생활에 도움이 되는 것도 좋지만 더 좋은 것은 보시하는 것이다. 보시는 기쁨으로 해야 한다. 잘 보아 두었다가 월말 결재할 때 보시하는 것이다. 이런 것도 삶의 즐거움이다.”(2022-06-30)라고 써 놓았다.
보시와 관련된 글이 하나 더 있다. 목차 95번 ‘결제하는 날은 보시하는 날’이라는 제목의 글이다. 매달 말일에 결재하는 날로 잡았다. 글에서 “나에게 결제하는 날은 보시하는 날이다. 이제 두 달 되었다. 보시 대상을 찾아서 계좌이체 했을 때 그 기분은 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을 것이다.”(2022-07-30)라고 써 놓았다.
금강경에서는 무주상보시를 강조한다. 보시를 해도 티내지 말고 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인터넷에 알리는 것은 무주상보시 정신에 어긋난다. 그럼에도 드러내는 것은 어떤 이유인가?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자만에 따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 하나는 이렇게 드러냄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자극을 주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자신을 지나치게 드러내면 싫어하는 마음이 날 수 있다. 지나치게 참견하면 좋은 소리 듣지 못한다. 오늘 아침에 그랬다.
어느 노스님이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다. 스님은 ‘현법낙주(現法樂住)’에 대하여 이야기 했다. 지금 여기서 즐기면서 머무는 것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그런 말 한적이 없다고 답글을 달았다.
부처님은 지금 여기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에 대하여 그때 그때 잘 관찰하라고 했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다음과 같은 게송이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지 말고
미래를 바라지도 말라.
과거는 이미 버려졌고
또한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리고 현재 일어나는 상태를
그때그때 잘 관찰하라.
정복되지 않고 흔들림이 없이
그것을 알고 수행하라.
오늘 해야 할 일에 열중해야지
내일 죽을지 어떻게 알 것인가?
대군을 거느린 죽음의 신
그에게 결코 굴복하지 말라.
이와 같이 열심히 밤낮으로
피곤을 모르고 수행하는 자를
한밤의 슬기로운 자
고요한 해탈자라 부르네.”(M131)
지금 여기서 일어난 법을 즐기며 머물러 있다면 부처님 가르침과 거리가 먼 것이다. 외도의 ‘현법열반론’과 유사한 것이다.
현법열반론(diṭṭhadhammanibbānavāda)은 어떤 것인가? 디가니까야 1번 경에 따르면 자아를 가진 자가 여섯 감역을 지금 여기서 즐기면서 머물러 있으면 현법열반이 된다. 유사열반 또는 가짜열반을 말한다. 또한 자아를 가진 자가 선정의 즐거움을 지금 여기서 즐기며 머문다면 역시 현법열반이 된다.
현법열반론은 외도의 견해이다. 외도의 62가지 견해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현법락주와 현법열반론은 유사한 것으로 본다.
스님의 말이라고 해서 모두 옳은 것은 아니다. 부처님 가르침과 비교하여 다른 것이 있다면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행위는 비난을 각오해야 한다. 스님은 “열어놓은 문으로 나가지 못하고 봉창만 두드리고 있으니 참으로 어리석구나. 백년 책만 들어다 보고 있으니 어느 날에나 머리를 내밀것인가”라며 신찬게송을 인용하여 비난 했다.
스님의 비난에 어떻게 해야 할까? 스님과 싸울 수 없다. “근기가 약한 자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에 크게 의존하고 있습니다.”라고 글을 남겼다.
초기경전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니까야를 읽어 보면 부처님 그분이 누구인지 알 수 있고 부처님 그분이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알 수 있다.
스승이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특히 재가자에게는 스승이 없다. 수많은 재가불자는 누구에게 의지해야 할까? 이럴 때는 경전에 의지하는 것이 좋다.
경전도 스승이 될 수 있을까? 부처님은 “장자들이여, 그대들이 신뢰하는, 마음에 드는 스승이 없다면, 이러한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을 가지고 실천하는 것이 좋습니다.”(M60)라고 말씀 하셨다.
초기경전을 스승으로 삼고 있다. 니까야 경전을 열면 부처님 그분을 만나는 것 같다. 부처님이 현전하는 것 같다. 누군가 경전만 본다며 비난하건 말건 경전을 스승으로 삼고 있다.
수행이라 하여 반드시 좌선만 하는 것은 아니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행주좌와(行住坐臥)가 모두 해당된다. 일상에서 일거수일투족을 새김하는 것도 수행이 된다.
경전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이 많다. 논서를 통해서도 알게 된다. 마하시 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 따르면 괴로움은 이미 구족된 것이라고 했다. 참으로 이 말에 감명 받았다.
부처님은 사성제를 설했다. 모두 괴로움과 관련된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이것이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이다.”라 하여 가장 먼저 고성제를 설했다.
부처님은 왜 고성제를 먼저 설했을까? 지금 괴로운 상태라면 먼저 괴로움의 원인이 무엇인지 찾아야 할 것 같다. 그런데 부처님은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하여 사고와 팔고를 먼저 설했다.
부처님이 고성제를 먼저 설한 것은 원인과 결과에 있어서 결과를 먼저 말한 것과 같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는 괴로울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생, 노, 병, 사, 애별리고, 원증회고, 구부득고를 설한 다음에 오취온고를 설했다.
고성제는 오취온고가 핵심이다. 오온에 집착된 것이 괴로움의 근본이라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 몸과 마음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오온에 대하여 집착하면 괴로울 수밖에 없다. 이는 오온에 대하여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은 나이고,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는 유신견을 갖기 때문이다.
유신견을 가지고 있는 한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런데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오취온적 존재라는 것이다. 오취온적 존재는 오취온고가 될 수밖에 없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인간은 괴로울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말한다. 그래서일까 마하시 사야도는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 이렇게 써놓았다.
“현재 생에서 생겨나는 괴로움의 근본원인인 갈애는 과거 업(존재)을 행할 때 이미 구족되었다. 어떻게 구족되었는가? 자신의 몸, 자신의 삶, 또는 감각욕망 대상으로서의 물건들을 좋아하고 바라는 갈애가 있기 때문에 그 바람을 성취하기 위해서, 행복하게 잘 살기 위해서 바람직한 방법이든, 바람직 하지 않은 방법이든 이번 생에서 계획하고 노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과거 각각의 생에서도 좋아하고 바라는 갈애가 있었기 때문에 선업을 행했다. 바로 그 업 때문에 재생연결을 시작으로 물질과 정신이라는 괴로움의 진리들이 지금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권, 547쪽)
참으로 탁월한 견해이다. 부처님의 고성제를 잘 설명하고 있다. 특히 오취온고에 대한 것이다. 오온에 집착된 존재로 태어났기 때문에 괴로움을 이미 구족하여 태어났음을 말한다.
일은 벌어졌다. 오취온적 존재이기 때문에 오취온고가 될 수밖에 없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오온에서 집착을 떼어 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수행이 필요하다. 가장 먼저 정신과 물질을 구별해서 관찰해야 한다. 이 몸과 마음은 정신과 물질의 상호작용에 지나지 않음을 아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현재 일어나는 상태를 그때그때 잘 관찰하라.”(M131)라고 말씀 하셨다. 지금 여기서 즐거움에 머물지 말라는 것이다.
괴로움은 어떤 것일까? 이는‘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 따르면 “끊임없이 생멸하고 있 는 법들뿐이다. 계속 무너지고만 있다. 좋지 않은 것만을 새기고 있다. 이것들이 사라지지 않는 한 고요할 수 없다. 그것들이 있어서 괴롭다. 전혀 고요하지 않다.”(1권, 540쪽)라고 써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고요하지 않은 법이 괴로운 것이다.
오온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고 있으면 여섯 감역은 괴로운 것이 된다. 그런데 괴로운 것에 대해서는 “그것들이 있어서 괴롭다. 전혀 고요하지 않다.”(1권, 540쪽)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오온에서 생멸하는 정신과 물질의 현상들 또는 형성들이 괴로운 법임을 말한다. 이런 괴로운 법은 고요하지 않은 법을 뜻한다. 이렇게 본다면 “괴로움인 법 = 고요하지 않은 법”이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도시는 소음이다. 이렇게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도시에는 온갖 소음이 있기 때문이다. 자동차 소음이 가장 크다. 그 중에서도 오토바이 폭탄음은 견딜 수 없다. 사람에 대한 소음도 있다. 끊임 없이 떠들어 댈 때 고요함이 그리워 진다.
마하시 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 따르면 여섯 감역은 괴로운 것이라고 했다. 이는 고요하지 않음과 동의어임을 말한다. 그래서 수행자는 고요함을 추구한다. 그렇다고 현법열반론자처럼 자아를 가진 자가 지금 여기서 선정의 즐거움을 추구하며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니다. 열반과 같은 적멸의 고요에 들었을 때 진정한 고요, 진정한 괴로움의 소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경전을 근거로 해서 글을 쓰고 있다. 일상에서 일어난 일을 기록으로 남길 때도 꼭 경전의 문구를 곁들이고자 한다. 이런 것에 대하여 어떤 이는 ‘백년 책만 보고 봉창만 두드리고 있다’라고 말한다.
지금 여기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지금 덥다고 해서 심산유곡으로 도망 가야 할까? 심산유곡에서 신선처럼 살아야 할까? 그러나 현실을 살아 가는 뭇삶들은 현실을 떠나서 살 수 없다. 더우면 더운 대로 추우면 추운 대로 감내 하며 살아야 한다.
열대야는 괴로운 것이다. 도시에서 에어컨 없이 살기 힘들다. 그럼에도 선풍기 한대에 의지해서 여름을 보내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것에 비하면 행복한 것이다.
덥다고 하여 일하지 않을 수 없다. 덥다고 하여 전쟁하지 않을 수 없다. 서늘한 곳만 찾아 나선다면 지금 여기서 즐기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수행자라면 지금 여기서 즐길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일어나는 현상을 그때그때 관찰해야 한다. 현법낙주가 아니라 현법관찰인 것이다.
2024-06-21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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