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신문은 종교비평에 왜 약한 모습일까

담마다사 이병욱 2007. 4. 18. 06:46

 

신문은 종교비평에 왜 약한 모습일까

 

 

얼마 전에 발표된 뉴스를 보면 이삼십년전에 예측된 전망들이 모두다 빗나간 경우의 기사를 보았다.  70년대 오일쇼크가 일어 났을 때 향후 30년정도가 지나면 자원이 고갈 될 이라는 예측이 있었지만 아직도 얼마가 묻혀 있는지 파악도 되고 있지 않다. 80년대에 일본이 한참 잘 나가던 시기에 일본이 미국을 능가 하는 초강대국이 될 것이라는 전망도 한참 비껴 나간 예일 것이다.

 

그러고 보면 언론이라는 매체는 이슈를 만들어 전파 함으로서 먹고 사는 집단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지면은 메꾸어야 하고 시간은 때워야 하기 때문이다. 뉴스거리가 없으면 찾아서라도 만들어야 하고 뉴스 거리를 만들기 위하여 이슈를 증폭 내지는 재생산도 서슴지 않는 곳이 언론이라 할 것이다. 언론에서 발하는 뉴스는 분명히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다. 즉 자신의 의사가 반영되어 있다고 보면 된다. 그것은 언론의 사주의 생각과 철학이 담겨 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언론은 전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공익단체 이다. 수천만 국민들의 생각이나 살아가는 방식 또한 수천만 가지가 될 것이다. 마치 사람의 얼굴이 서로 다르듯이 생각 하는 방식이 서로 다른 것은 말할 나위 없다.  이렇게 수천만의 개성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마당에 획일적인 자신들의 주장을 담았을 때 박수 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루 종일 기분이 찜찜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언론이 나름대로 공평하게 취급한다고는 하지만 은연중에 자신들의 의도를 점잖게 주입하곤 한다.

 

오늘 아침에도 메이저라 불리 우는 신문을 펴 들며 과연 또 어떤 메시지를 전파하는 것일까 하고 보는 것은 이제 자연스러운 현상이 되었다. 보수적인 신문이라면 보수층의 구미에 맞는 기사를 생산 할 것이고 진보적인 세력에 대하는 비판적인 기사를 싣는 것은 이제 상식이다. 하지만 이런 신문들도 종교에 대한 기사만큼은 두리뭉실 하게 넘어가는 것이 허다 하다. 대부분의 기사가 미담형식으로 채워지고 있어서 내부에 어떤 모순과 갈등이 있는지 알 수 없다.

 

우리사회에서 아직도 파헤치지 못하고 있는 곳이 종교계이다. 신문은 좌파에 대하여는 스트레스를 해소 하듯이 기사를 양산 하고 있지만 정작 종교문제에 대하여는 침묵하는 것은 왜 그런 것 일까. 오히려 방송이 더 적극적이라 볼 수 있다. 방송은 시청각 매체로서 파급력이 더 클 뿐 만 아니라 어른이나 아이들 할 것 없이 전국민이 대상이다. 반면에 신문은 문자를 알고 읽을 수 있는 식자층으로서 대체로 보수기득권층이 대상이다. 이들 기득권층의 입맛에 따라서 신문의 운명이 좌우되기 때문에 그들의 주장이 반영될 수 밖에 없다. 

 

몇프로 안되는 소수의 기득권층은 우리나라의 부의 대부분을 소유 하고 있어서 무엇보다도 변화를 좋아 하지 않는다. 그냥 이대로 계속 유지 되는 것이 백번 좋은 것이다. 이들 기득권층은 대체로 반공적이고 친미적이다. 그리고 미국을 매우 중요시 하고 미국의 그늘아래 있기를 원한다. 또한 이들은 기독교 세력이다. 이들 보수기득권세력의 정체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시청앞 집회일 것이다. 그 집회에 참가 하는 단체의 이름을 보면 이들 세력을 파악 할 수 있다. 재향군인회 라든가 이북5도민모임 그리고 한기총등이 단골 단체이다. 즉 신문이 주요 타킷으로 생각 하는 고객이 바로  반공친미기독 세력임을 파악 할 수 있다. 신문은 이들의 입맛에 맞는 기사를 열심히 양산 하고 있다. 그러나 종교비평은 꿈에도 생각 못하고 있다.

 

2007-04-18

진흙속의연꽃

 

 

 

166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