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성지순례기

‘마니산(摩尼山)’이 ‘마리산’으로 바뀔뻔한 사연.. 강화도 마니산 정수사(淨水寺)

담마다사 이병욱 2007. 5. 7. 10:08

 

마니산(摩尼山)’마리산으로 바뀔뻔한 사연.. 강화도 마니산 정수사(淨水寺)

 

 

 


 

마니산은 예로부터 민족의 영산으로 숭앙되어 왔고 특히 백두산과 묘향산에 더불어 단군왕검이 강림하였던 장소로 유명하다. 봉우리에는 참성단(塹星壇) 이 있어서 전국체육대회성화가 채집되고 개천절 행사가 열리는 우리 민족과 뗄레야 뗄 수 없는 민족의 영산이다.

 

그런데 이 마니산마리산이라는 이름으로 바뀔뻔한 사건이 있었다. 마니산을 마리산으로 개명하려는 움직임을 알아 차리고 이를 저지 하려는 한 향토 불자의 눈물겨운 기록이 바로 그것이다. 다음은 월간불광에 실린 박덕성씨가 작성한 내용( http://bulkwang.or.kr/zine/zinehome.html  월간불광 99년 11월호) 이다.

 

 

 

관세음보살님의 가피력으로 ‘마니산(摩尼山)’ 이름 개명음모를 저지하다

 

우리 민족의 성산(聖山) ‘마니산’ 이름의 개명음모가 시작된 것은 94년 말부터였다. 서울 기독교 YMCA 명예총무 J, 그의 추종 세력인 당시 부천 출신 경기도 의회 의원 H, 그리고 강화문화원의 L 등이 야합하여, 기독교의 이름인 ‘마리’와 같은 ‘마리산(摩利山)’으로 고치기 위해, 간교하고 교활한 방법을 총동원하여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하여 마니산 이름을 일제가 개명하였다고 허위 왜곡 날조하면서, 주간지 ‘강화뉴스’에 선전하기 시작하였다. 강화의 주간뉴스 사장 S란 사람도 마니산 이름 개명음모의 공동 주관자였으니, 왜곡선전은 가히 극에 달하였다.
서울 기독교 YMCA 명예총무 J는 이미 80년대부터 ‘크리스찬 라이프’라는 기독교계 신문을 통해서 강화의 마니산 일대를 그들의 신앙 대상지라 착각하고 마니산 이름 개명음모를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국조(國祖) ‘단군’께서 하늘의 최고신 ‘석제환인(단군의 할아버지)’에게 제사 지냈다는 점과 기독교의 하나님과는 일맥상통한다는 억지 논리로 정당화하려 하였던 것이다. 저들이 주장하는 마리산으로 고치면 기독교의 성모 이름 ‘마리아’와 같이 된다는 논리를 철저하게 염두에 두고 개명음모를 추진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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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그 당시까지만 하여도 대다수의 강화 군민들은 마니산(摩尼山) 이름이 맞는지, 또는 마리산(摩利山) 이름이 맞는지조차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개명음모 추진자인 J와 강화문화원 L, 그외 몇 명의 향토 사학자만이 알고 있었다. 마니산(摩尼山)을 한문 뜻 그대로 하면 ‘여승이 연마하는 산’, ‘연마하여 화하는 산’으로 해석하게 된다. 그러니 불교 이름으로 해석되는 ‘마니산’ 이름이 저들에겐 몹시 못마땅하고 불쾌한 이름으로 생각되어 개명음모를 추진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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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상고 시대부터 우리 민족은 ‘마니’라는 이름을 사용하여 오고 있었다. 북한 지방에서의 사투리로 ‘오마니(어머니)’와 ‘할마니(할머니)’ 등 위대한 모성을 높여 부르던 이름이었고, 현재도 강원도에서는 산삼을 캐는 사람을 ‘심마니’(여기서의 ‘마니’는 사람을 뜻한다.)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조선조의 성종에서 중종에 걸쳐 발간된 사회 인문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부터는 단독으로 마니산 이름만 사용하기 시작하였으니, 500여 년 전부터 조선조의 문헌과 고지도에 모두 마니산으로 표기되어 현재까지 내려온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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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 자신도 93년에 불교에 귀의하여 마니산 정수사에 다니기 전까지는 전혀 뜻을 알지 못했다. 그러다가 94년엔가 불광사에서 오신 어느 큰스님에게서 처음으로 마니산 이름의 뜻을 법회시에 듣고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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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摩尼)는 마니주(摩尼珠)·마니보주(摩尼寶珠)를 뜻하며, 용이 물고 있는 여의주를 말한다. 즉 마니는 어떠한 탁한 물이라도 맑게 정화하고 모든 나쁜 악을 제거하며 어떠한 염화(炎禍: 무서운 재앙과 근심, 환난)라도 없애주는 무한한 신통력을 지닌 보배로운 구슬이라고 처음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내가 마니산 정수사와 인연이 닿게 된 것은 관세음보살님이 이렇게 될 것을 아시고, 나에게 마니산 이름 개명음모를 막으라는 임무를 부여하기 위해서였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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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년 3월 1
강화가 인천시에 통합된 날이다. 그리고 그 해 95년은 정부가 일제 잔재 청산의 해로 선정한 해였다. 마니산 이름 개명음모론자들은 95년을 가장 효율적인 해로 이용하기 시작하였다. 인천광역시에 편입되었으니, 새로운 인천시 지명위원들은 강화 마니산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잘 알지 못할 것이라는 기대와 또 마니산 이름은 일제가 우리 민족의 민족 정신을 말살시키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개명한 이름이라고 추진 동기를 허위, 왜곡 선전하며 일제 잔재 청산 대상의 이름으로 낙인찍어, 동반 효과를 극대화하려고 주도면밀한 계획을 세우고 추진하였다. 정말 강화 군민들을 완전히 허수아비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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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95년 4월 3자로 ‘마리산 이름 되찾기’라는 제안서를 강화군 지명위원회에 제출하였다. 추진위원장엔 J와 강화문화원장, 주간 강화뉴스사 공동명의로 하였고 당시 강화문화원장 N과 강화문화원 L(개명음모 장본인)이 강화군 지명위원회 위원으로 있었으니 그들의 책동에 동조하는 문화재 담당 공무원 등과 합세해 무엇 하나 걸릴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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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마니산 이름에서 마리산으로 개명하는 제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킨 것은 당연하였다. 그리고 4 18일에 인천광역시 지명위원회에 개명 요청서를 올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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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친구들과 어느 식당에 들렀다가 우연히 ‘주간 강화뉴스’에 기사화된 ‘마리산 이름 되찾기 제안서’를 강화군 지명위원회에 제출하였다는 내용을 본 순간 기가 막히고 울분이 치솟았다. 그때 나는 목적을 위해선 어떠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불법적인 작태를 저지르는 저들과 맞서 어떠한 정신적, 물질적 대가를 치르더라도 저들의 음모를 저지하리라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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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부터 나는 마니산 이름에 대한 정확한 역사적인 문헌자료를 찾아 고증하기 위해, 서울대학교 규장각에서 『해동지도(海東地圖)』라는 고지도 책을 발견하였다는 신문 기사를 읽고 관악산 밑 그곳까지 강화에서 버스를 타고 찾아가기 시작했다. 나는 열람실에 있는 조선조 초기의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강도지』, 『강화부지』 등의 고서적을 찾아 조선조 때의 마니산에 관한 관련기사를 모두 복사해 와서 자료집을 만들었다. 그리고 마니산에 관한 진실된 역사적 기록들을 인쇄하여 약 5천 부 정도를 신문에 끼워 34회에 걸쳐 전 강화에 알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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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95 7월에 인천시에서 지명위원회를 개최하니 ‘마니산 이름 개명 반대에 관한 제안서’를 지참하고 참석해 달라는 연락이 왔다. 그래서 95년 7월 26 나는 준비한 지도첩과 반대 제안서를 지참하고 회의에 참석해 개명 반대 제안을 했지만 아깝게도 4 : 3으로 지고 말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미 저들은 지명위원들에게 인사와 로비를 했다는 말을 어느 직원에게서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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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백하고 확실한 역사적 자료가 있는데도 이길 수 없었다는 사실에 낙담할 수밖에 없었다. 726일자 한국일보 지방판에 마니산 이름을 ‘마리산’으로 고치기로 했다는 인천시 지명위원회의 결정사항이 크게 보도되었다. 모두들 그렇게 알았다. 이제는 건설부 국립지리원의 중앙 지명위원회의 최종 결정이 남았지만 저들의 조직적이고 집요한 공세에 과연 최종 결정에서 이길 수 있을까 걱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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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할 마음까지도 생기고 심신이 다 피로했다. 그럴 즈음에 조선일보 사설란에 이규태 논설위원의 ‘지명 개명하더라도’라는 제목의 논설이 실렸다. 역사적인 지명을 근거 없이 함부로 개명해서는 안 된다는 기사였다. 그 기사가 다시 나에게 용기를 일깨워 주는 계기가 되었다. 저들은 더욱더 기고만장하여 마니산이 마리산으로 개명된 것으로 기정사실화한 기사를 ‘주간 강화뉴스’를 통해 요란하게 실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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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마니산 주유소’ 간판을 단 집에 찾아가서 ‘마리산 주유소’로 간판을 고치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강화군청 간부 공무원 부인들의 친목단체 이름을 원래 ‘마니회’에서 ‘마리회’로 바꿔 사용하고 있었다. 강화 군수가 기독교인이고, 그 부인이 회장으로 있으니 그건 너무나도 당연시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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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착잡했다. 우리 부부는 나름대로 사찰마다 다니면서 관세음보살님에게 불의를 물리치고 반드시 승리하게 가피력과 도움을 달라고 열심히 기도드렸는데 우리의 기도와 원이 부족했단 말인가! 아직은 우리의 정성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더욱 열심히 기도하고 노력하기로 했다. 얼마 지난 후 8월 말 경에 최후 결정기관인 중앙 지명위원회 위원님들의 정의와 양심을 믿기로 하고 국립지리원에 찾아갔다. 지방 자치 단체와는 달리 전문적인 수준의 위원들이라 믿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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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담당 과장의 이야기를 듣고는 아연실색했다. 이미 지명 위원들에게 서류만으로 심사를 통보받고 90% 이상이 개명에 찬성하기로 내락을 받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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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우리들 몇 사람의 능력만으로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불교방송과 불교신문에 도움을 요청하고 여론화시켜야 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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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S
불교방송에 연락하고 도움을 요청하니 보도국의 김봉래 기자가 우리의 말을 들어주기로 했다. 김봉래 기자에게서 9 25일 각 불교 언론계 기자들과의 간담회를 BBS 방송국에서 개최할테니까 마니산에 관한 자료들을 가지고 참석해 달라는 연락이 왔다. 나는 처음 선원사 주지스님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인연으로 성원 스님을 모시고 기자 간담회에 참석하여 마니산 이름 개명음모에 관한 모든 진실를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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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간담회 내용은 그날 저녁과 다음 날 아침, BBS 불교방송’과 ‘불교TV’를 통해서 전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10 4일자 ‘불교신문’과 ‘현대불교’, ‘법보신문’ 등에도 모든 사실이 기사화되어 알려지면서 그때에서야 전국적으로 여론화되었다. 나는 법적인 투쟁도 불사하겠다는 각오로 ‘강화 불교 사암연합회’와 ‘강화 불교 신도연합회’를 통하여 ‘마니산 이름 개명 반대 서명’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불교 방송국 성지 순례에도 참석하여 반대 서명을 받아오는 등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을 총동원하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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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9월 말에 나는 다시 국립지리원에 찾아갔다. BBS 불교방에서 취재를 나가고 여론화되니까 국립지리원에서도 방침을 바꾸어 공개적인 지명위원회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10 17일에 열린 국립지리원의 중앙 지명위원회 개최 회의장에는 김봉래 기자를 비롯해 각 불교계 신문기자가 관람석에 참석하였다. 저들의 개명 당위론 제안과 우리의 개명 반대 제안이 모두 끝나고 이제 위원들의 토론과 심사만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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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저들 편인 한글학회 어느 위원이 말했다. 지방 지명위원회에서 마니산 이름을 개명하기로 다 찬성해서 올라왔으니 중앙 지명위원회에서도 그대로 찬성해서 가결시키자고 제안했다. 아무래도 우리보다 실정을 잘 아는 지방 위원들이 잘 알고 가결한 것이 아니냐고 말했다. 대세가 저들 편에 기우는 듯했다. 개명에 반대하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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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초조하고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거룩하신 관세음보살님에게 기도와 도움을 요청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의자에 앉은 자세로 눈을 감고 마음 속으로 진실하게 기도하였다. “거룩하고 위대하신 관세음보살님! 이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끝났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제가 어떻게 할 방법이 없습니다. 관세음보살님의 무한한 위신력과 가피를 우리에게 내려 주옵소서. 이제 우리가 이 난관에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오직 관세음보살님의 가피력뿐입니다. 거룩하고 위대하신 관세음보살님 우리를 가엾게 생각하시고 도와 주옵소서.”기도가 끝난 바로 그때, 어떤 감응이 오기 시작했다. 미세한 전기를 받은 듯한 아주 가느다란 몸의 떨림이 있었다. 그건 관세음보살님에게 나의 원이 통했다는 답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느 위원이 개명론의 부당함을 지적했다. 기독교인인 J가 자기의 종교적인 목적으로 마니산 이름을 개명하려고 한 것은 진실성이 없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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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마니산 이름을 개명하기 위하여 홍보 선전용으로 위원들에게 돌린 「마리산」이라는 그들의 잡지에서 기독교 YMCA 명예 총무 J가 쓴 기사를 읽었던 것이다. 그는 82년 『크리스찬 라이프』라는 기독교계 신문에 강화도는 하나님 숭배 신앙이 강하고 마니산 꼭대기엔 제사를 지냈던 참성단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거기서 마니가 가지고 있는 본뜻을 철저히 왜곡시킨 사실을 그때 발견한 것이다. 즉 마니산이 기독교계 교리와 일맥상통한다는 기사를 발견하고 제동을 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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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진실을 위장한 채, 개명음모를 추진했던 사실이 여지없이 탄로난 것이다. 자업자득이라고 할까, 자기들의 도끼에 자기가 찍힌 꼴이었다. 바로 관세음보살님의 가피력이 실증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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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다음 대세는 우리에게 기울기 시작했다. 마니산 이름은 역사성 있는 이름이며, 이미 국제적인 지명도를 지닌 이름으로, 본 지명위원회에서 함부로 개명할 이름이 아니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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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자기의 종교적인 이익과 목적을 위하여 개명한다는 것은 더욱 있을 수 없는 일로 중앙 지명위원회에서는 개명불가 한다고 결정적으로 선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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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들의 1년간의 집요한 개명음모가 불보살님의 법과 진리 앞에 여지없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그 해 12 20일 국립지리원에서는 최종 결과를 인천시 지명위원회에 통보하였다. ‘마니산(摩尼山)’ 이름은 개명불가하며, 지명위원회에서 함부로 개명할 이름이 아니라고….     박덕성


 


 

이와 같은 한 향토불자의 집념이 민족의영산 마니산의 개명을 저지 한 것이다. 마니산을 주산으로 한 정수사는 신라시대인 639(선덕왕 8) 회정대사 마니산의 참성단(塹星壇)을 참배한 다음 이곳의 지세가 불제자의 삼매정수(三昧精修)에 적당하다고 판단되어 정수사(精修寺)를 창건했다고 한다. 이후 1426(세종 8) 함허선사가 중창한 다음, 법당 서쪽에서 맑은 샘이 솟아나는 것을 보고 절이름을 정수사(淨水寺)로 바꾸었다고 한다.  정수사 법당인 대웅보전은 조선 초기의 목조건물. 보물 제161호이다. 1424년에 창건되고 여러 번 중창 되었는데 앞면 3, 옆면 4칸으로 다포계 맞배지붕이다. 특히 옆면1칸은 툇마루 형식으로 보기드문 독특한 양식이다.

 

2007-05-07

진흙속의연꽃

 

 

17080

 

정수사 대웅보전. 1424년에 창건된 보물 제 161호.  전면3칸 측면4칸 다포계 맞배지붕.  특히 측면1칸은 툇마루로 되어 있다. 

 

 

 

 대웅보전 안에 모셔진 석가모니 부처님.

 

 

 

 대웅보전 앞의  독특한 툇마루. 측면1칸을 툇마루로 활용 하였다.

 

 

 

 대웅보전 뒷편에 있는 삼성각

 

 

 

 법당 좌측에 있는 큰 바위 위에 세워져 있는 삼층석탑.  오래된 느티나무도 마치 탑과 같이 서있다. 바위에는 사람이름의 글발이 여러개 새겨져 있다.

 

 

 

 

 각종 불교용품을 판매하는 밀향원. 마니산 등산로가 시작 되는 곳이기도 하다.

 

 

 

 

 대웅보전 우측에 있는 새로지은 전각

 

 

 

 

 중창불사 조감도.  색이 바랜 것으로 보아 꽤 시간이 흘러간듯 보인다.

 

 

 

 

 대웅보전 바로 옆에 있는 약수터.  정수사의 어원이기도 하다.

 

 

 

 

 대웅보전 뒷편에 있는 산대나무 숲

 

 

 

 

 이름모를 불자들의 염원이 담겨 있는 돌탑.

 

 

 

 

 중창불사가 이루어질 공터 뒷편에 있는 느티나무. 세월의 무게를 말해준다.

 

 

 

 

 정수사 가파른 계단 아래에 위치한 공양식당.  가건물 형태이다.

 

 

 

 정수사 국수공양.  무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