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월호스님의 라디오 법회를 듣고

담마다사 이병욱 2007. 6. 12. 12:21

 

월호스님의 라디오 법회를 듣고  

 

 

 

일요일 오전에 불교방송을 들으면 라디오법회를 들을 수 있다. 삼귀의 입정 청법가 사홍서원등이 비록 녹음된 형식이지만 법회격식은 다 갖추고 있다. 개인적으로 사정이 있어서 사찰에 가지 못하는 사람들이나 불교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듣기에는 좋은 내용이 많이 있다. 특히 유명스님이 나와서 법문하는 경우 시간가는줄 모르게 빠져들기도 한다.

 

이번 라디오법회는 월호스님이 진행 하였다. 불교방송에서 참선방송도 하고 쌍계사승가대학 강주이기도 한 스님은 이야기를 참 재미있게 잘 하는 편이다. 듣고 있다 보면 가슴에 팍팍 꼽히는 말을 많이 한다. 그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없을 정도로 가슴에 와 닿는 말이다. 종으로 살것인가 주인으로 살것인가의 설명에서는 불교가 신을 믿는 종교 보다 더 수승한 종교라는 것을 실감나게 설명해준다. 또 무엇을 해달라고 기도하는 ‘거지기도’와 무엇을 하겠습니다 라고 기도하는 ‘발원기도’이야기도 새겨들을 만한 내용이다.

 

산사에 가보면 등산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 온다. 불교신자 같은 경우는 법당에 들어거서 3배도 하고 참선도 하고 경전도 읽으며 보낸다. 그러나 신자가 아니고 불교에 대하여 호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사찰 주변을 둘러보고 앉아서 편히 쉬다 가기도 한다. 산을 자주 찾는 사람들은 아무래도 산사에 한번쯤은 들러 볼 기회가 많이 있다. 고즈넉하고 전통의 멋이 살아 있는 산사는 사회생할에 찌든 이들에게 잠시나마 마음의 안정을 찾아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더욱이 예불시간에 울려퍼지는 목탁소리와 독송은 또 다른 느낌을 가져다 준다. 어떤 사찰에서는 일요법회가 열리면 그저 앉아서 듣기만 해도 누가 뭐랄 사람이 없다. 믿어라 말아라 하지도 않는다. 이렇게 산을 좋아 하는 사람들에게 산사는 점점 익숙한 공간이 되어 가는 것이다.

산을 좋아 하는 등산객들이 산사에 머무는 것이 익숙해 지지만 법당에 들어가는 것은 또 다른 용기가 필요하다. 우선 절하는 방법을 모른다. 설령 절을 한다고 해도 무당들이 두손 높이 들고 절하듯이 매우 어색하게 절을 한다. 보는 사람도 참 안타깝다. 무언가 하고는 싶은데 방법을 잘 몰라 못하는 것이다. 이래서 도심에 포교당이 필요 하지 않을까.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서는 불교에 매우 우호적이고 가깝다고 한다. 역사도 오래 되었지만 윤회와 인과응보를 믿는 사람이 많은 것을 보면 친불교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현실은 이들 친불교적인 사람들을 수용할 만한 공간이 절대적으로 부족 하다. 물론 도심에 포교당이 있지만 선지식과 불교공부에 대한 갈증을 해결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이와 같이 친불교적이고 불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위하여 원력을 가진 스님들이 많이 나서 주어야 한다. 열명의 유발법사보다 한명의 삭발스님의 법문이 더 효과적인 것은 자명하다. 우리 주변에는 포교에 원력을 세워서 일생을 매진하는 스님들을 많이 불 수 있다. 초기에는 신도들의 신발도 닦아주고 신도들의 경조사 참석은 물론 행사 뒷풀이까지 포교을 위해서하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선지식을 볼 수있다. 반면에 무소유를 주장 하며 산골의 토굴에서 수행정진 하는 스님들도 많이 있다. 우리 사바세계에 사는 중생은 무명속에 살면서 무언가 갈구 하고 갈망 하는 것이 있다. 이런 중생의 갈증을 풀어주는 역할을 해줄 사람은 한소식 들은 수행자들일 것이다. 한사람의 도인이 나타나면 그 사회가 밝고 깨끗해진다고 하지 않은가. 그래서 우리시대의 중생들은 도인의 출현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지 모르겠다.

 

2007-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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