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타 종교에 없는 불교의 위대한 점은 무엇인가

담마다사 이병욱 2007. 8. 9. 16:56

 

타 종교에 없는 불교의 위대한 점은 무엇인가

 

 

 

 

착하게 산다고 다 좋은 것일까. 모든 종교의 가르침이 착하게 살아라라고 말한다. 그 선이라는 것도 유루선(有漏善)이 있고 무루선(無漏善)이 있다. 예를 들어 착하게 살면 죽어서 천당간다라는 말이 있다. 이 때 선은 계산적인 선이라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종교가 바로 계산적인 이 유루선 단계라 보면 된다. 그러나 불교가 지향하는 목표는 번뇌가 완전히 없어진 무루선을 지향한다.

 

 

보시와 지계 하면 부귀한 존재로 태어난다

 

지구상에 수많은 종교가 있지만 한꺼풀 벗겨 보면 샤마니즘이라 볼 수 있다. 그들이 바라는 목표는 부귀와 영화이고 오욕락의 추구이다. 보시를 많이 하면 인간세계에서 부귀한 존재로 태어 날 수 있고 지계를 잘 지키면 욕계 천신으로 태어 날 수 있다. 이것이 불교에서 바라본 보시와 지계공덕이다. 즉 보시라는 인()을 지으면 부귀라는 과()를 얻을 수 있다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지계라는 인을 지으면 욕계천신으로 태어나는 과를 누릴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인간에서의 부귀와 욕계천신과의 차이는 과연 무엇일까. 쉽게 말하면 수고 없이 이루어 지는냐 아니면 수고를 해야 이루어지는냐의 차이일 것이다. 욕계천신으로 태어나면 자기가 바라는 모든 것이 수고 없이 쟁취 할 수 있다. 반면에 인간으로 태어나면 스스로 노력해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지구상의 모든 종교가 추구 하는 가치이다. 열심히 보시하고 계를 지키면 하늘나라에 태어나서 부귀와 영화를 누린다라는 말이다.

 

그러나 불교는 여기에 만족 하지 않는다. 완전한 해탈을 목표로 한다. 완전한 해탈을 이루기 위해서는 교리적으로 사정제(四聖諦)를 이해하고 수행으로서는 사념처 수행을 해야 한다. 불교에서 84천가지 가르침이 있지만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고()로부터 해방이다. 그 고로부터 해방에 관한 네가지 성스런 진리가 바로 사성제이다.

 

 

선정수행을 하면 색계나 무색계 천신으로 태어난다

 

사성제는 크게 고성제(苦聖諦), 고집성제(苦集聖諦), 고멸성제(苦滅聖諦), 고멸도성제(苦滅道聖諦)로 나뉜다. 왜 고가 생기는가. 고가 어떤 원인에 의하여 생긴 과라고 한다면 인이 있어야 할 것이다. 바로 그 인이 집이라는 것이다. 도는 어떻게 이루어 지는가. 도를 어떤 원인에 의하여 이루어진 과라고 본다면 어떤 원인이 있을 것이다. 바로 그 원인이 멸이라는 것이다.

 

고통의 원인이 되는 집으로 인하여 그 결과로서 고가 생기는데 이것을 세간의 일이라 한다면 고를 멸하여 그 결과로서 생기는 도를 얻는 다면 출세간의 일이라 할 수 있다. 세간에서 출세간으로 가는 길은 37조도품이다. 즉 깨달음으로 가기 위한 37가지 방법을 말한다. 4념처, 4정근, 4여의족, 5, 5, 7각지, 8정도 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수행방법은 4념처와 8정도이다.

 

4념처를 보면

 

첫째, 신념처(身念處)는 몸은 부정하다고 관한다.
둘째, 수념처(受念處)는 수()가 고통이라는 것을 관한다.
셋째, 심념처(心念處)는 마음이란 무상(無常)한 것임을 관한다.
네째, 법념처(法念處)는 모든 법이 무아(無我)라는 것을 관한다 이다.

 

8정도는

 

정견(正見):올바른 이해로서, 존재의 본질에 대하여 사성제로 설해지는 불교적 진리관을 확신하는 것이다.

정사유(正思惟):정견에 따라 철저히 실천하겠다는 각오이다.

정어(正語):거짓말, 중상하는 말, 모욕하는 말 따위를 삼가하는 것이다.

정업(正業):생명을 해치거나 도둑질을 하거나 부정한 성행위를 하지 않는 것이다.

정명(正命):불교의 가르침에 부응하지 않는 직업은 택하지 않는 것이다.

정정진(正精進):나쁜 마음가짐을 피하고 바른 마음가짐을 계발하는 것,

정념(正念):신체와 감정과 사고의 움직임에 대하여 깨어 있는 것이다.

정정(正定):바르게 집중하여 명상하는 것이다.

 

사성제를 이해 하고 선정 수행하면 어디에 태어나는가. 불교에서는 수행한 정도에 따라 태어나는 곳이 결정 된다고 한다. 예를 들어 이생희락지라는 수행의 정도에 까지 올라 갔다면 색계초선천에 태어 날 것이고 공무변천수행을 하였다면 무색계 공무변처정에 태어 날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 세계를 3계로 구분 하는데 그 기준은 다음과 같다.

 

욕계 는 탐욕과 물질과 정신으로 이루어진 세계이다.

색계는 욕계에서 탐욕이 빠진 물질과 정신으로 이루어진 세계이다.

무색계는 색계에서 물질이 빠진 정신만으로 이루어진 세계이다.

 

색계는 4()으로 나누고 무색계는 4()으로 구분된다. 보통 선정삼매에 들었다 할 때 이 선()과 정()은 각각 색계의 선()과 무색계의 정()을 말한다.

 

 

색계4선을 구분하면

 

초선을 이생희락지(離生喜樂地),

2선을 정생묘락지(定生妙樂地)

3선을 이희묘락지(離喜妙樂地)

4선을 사념청정지(捨念淸淨地)라 한다.

 

무색계4정을 구분 하면

 

1정 공무변처(空無邊處)

2정 식무변처(識無邊處)

3정 무소유처(無所有處)

4정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 이다.

 

 

위의 색계4처와 와 무색계4정의 경지에 올라서려면 수행을 해야 한다. 머리로 이해 해서는 될 일이 아니다. 수행을 해서 체득을 해야 된다는 것이다.

 

 

색계 4선에서 희락과 묘락이라는 말이 나온다. 희와 묘는 무엇을 말하는가. 예를 들어 사막을 가다 오아시스를 발견 했다 하자 이때 오아시스를 찾았을 때의  기쁨을 희라 하고 실제로 물을 마셨을 때의 기쁨을 락이라 한다. 그러고 보면 희는 정신적인 기쁨이고 락은 육체적인 즐거움을 말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색계에서는 정신적인 즐거움인 희락과 육체적인 즐거움인 묘락을 끊어 버림을 알 수 있다. 욕계에서는 오욕락이 있다. 그중에서도 성욕은 가장 강렬하다. 그래서 욕계(Kama-dhatu)의 이름이 산스크리트어로 성()을 의미 하는 Kama 라는 말이 들어가 있지 않은가. 색계에서는 이러한 욕망에 의한 즐거움을 끊어 버린 세계이다. 이말은 수()를 놓아 버린다는 말과 같다.  즉 집착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이때 수는 색수상행식에서의 수를 말한다. 이해 하기 쉽게 말한다면 어떤 고통이 있다 하자. 그런데 그 고통이 육체적인 아픔을 수반 할 때 고수(苦受)라 한다. 그 육체적인 고통은 정신적인 걱정까지 수반하게 마련이다. 그 것을 우수(憂受)라 말한다. 대부분의 중생들은 이 고수와 우수 두가지를 다 느끼게 마련이다. 그러나 수행을 한 사람들은 고수는 느끼지민 우수는 느끼지 않는다. 즉 육체적 고통이라는 제1의 화살은 맞았을 지언정 제2의 화살 내지 제3의 화살은 맞지 않는 다는 말이다.

 

 

위빠사나, 그 위대한 수행

 

무색계 4정은 색수상행식에서 상을 버리는 것과 관계가 있다. 금강경에서 말하는 상견을 없애라는 말과 동일하다. 붓다는 알라라칼라마와 웃타카라마풋타로부터 차례로 무소유처정과 비상비비상처정에 관하여 수행을 하였지만 결국은 떠나게 되었다. 선정수행이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선정에서 깨어나면 다시 현실로 되돌아옴을 본 것이다.

 

8만대장경의 삼분의일은 반야부경전이다. 책으로 따진다면 6백권에 이르는 방대한 양이다. 그 반야부 경전의 주요사상은 공()사상이다. 6백권 반야부경전의 요점만 모아 놓은 핵심경전이 반야심경이다. 비록 260자에 지나지 않지만 내용은 대승경전의 정수이다. 260자의 반야심경을 11자로 압축 한다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될 것이다.

 

조견오온개공도일체고액 (照見五蘊皆空度一切苦厄)

 

여기서 오온개공은 무아를 말한다. 무아는 불교에만 있는 독특한 사상이다. 이 무아를 깨닫기 위해서는 단계가 필요하다. 즉 정()-()-()이다.

여기서 정()은 집중하는 것을 말하고 삼마디(Sammadhi)라 한다. ()는 생각이 그쳐서 평온한 단계로 사마타(Samatha)라 한다. 이러한 정과 지의 상태에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관()한다 라고 하고 이것이 바로 붓다가 발견한 위대한 수행법인 위빠사나이다.

 

붓다는 위빠사나수행을 통하여 무아를 체득한 것이다. 번뇌와 업을 소멸 하려면 무아체득을 하여야 한다. 무아란 결국 공()인 것이다. 일체가 공함을 체득하면 반야(Prajna)의 지혜가 열리고 그와 동시에 자비가 생겨난다. 그래서 반야와 자비는 항상 같이 따라 다닌다. 불교를 지혜와 자비의 종교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반야의 지혜는 번뇌가 사라진 무루법을 말한다. 더 이상 남아 있는 찌꺼기가 없기 때문에 해탈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불교의 최종의 목표인 열반적정이다.

 

우리는 행복하고 잘 살기 위하여 보시를 하고 계를 지키고 산다. 그 과보로서 부귀한 인간으로 태어 나거나 욕계천신으로 태어나기를 원한다. 이런 선을 유루선이라 한다. 다시 말하면 계산적인 선행이라 할 수 있다. 지구상의 대부분의 종교를 한꺼풀만 벗겨 보면  이와 같이 오욕락을 추구 하는 것을 목표로 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오욕락을 추구 하면 할수록 더 욕망이 생기고 그 집착으로 인하여 고통스러움을 알 수 있다. 수행의 전통이 있는 불교는 여기서 한걸음 더 가서 고통의 원인을 찾아 내서 그 고통의 뿌리까지 뽑아버리는 방법을 제시 한다. 그 방법은 오직 수행을 통하여 체득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불교가 타종교와 구별되는 위대한 점이다. 붓다는 위빠사나 수행을 통하여 그 해결방법을 제시 하였는데 바로 그것이 무아이고 줄여서 공이라고 말한다. 공을 체득 함으로서 번뇌가 사라진 반야의 지혜가 열리고 동시에 자비가 생겨 나는 것이다. 따라서 삶의 목표를 오욕락의 추구에서 벗어나 인욕하고 정진해서 궁극적으로 반야의 지혜를 추구 하는 것으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이상은 능인선원 금강회에서 2007년 8월8일 특강한 김진태교수님의 강의 내용을 정리하여 작성한것이다.

 

 

 

2007-08-09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