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종교적 병역거부와 대체복무 논란을 보고

담마다사 이병욱 2007. 9. 19. 09:51

 

종교적 병역거부와 대체복무 논란을 보고

 

 

출가수행자에게 병역의무는 매우 가혹하고 야만적 행위

 

 

 

 

 

군대를 갔다 온 사람들이 정신질환에 시달리고 있다면 믿기나 할까

 

2009년부터 양심적 병역 거부자에 대하여 대체복무가 허용된다고 한다.

그동안 특정종교 단체에서 제기된 문제가 이제는 법적으로 보장 되는 모양이다. 군대를 가느니 차라리 감옥에 가겠다고 선언한 사람이 해마다 수백명이나 되고 이들 모두 전과자로 처리 된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징병제와 이와 관련된 주변환경이 새삼 문제 되지 않을 수 없다.

 

대한민국 남성이라면 국민의 4대 의무중의 하나인 국방의 의무를 해야 한다. 남북이 대치 하고 있는 상황에서 60만대군을 유지 하려면 징병제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그래서 남성들은 한 번쯤 갔다 와야 하는 통과의례가 되었다. 그런 전통은 벌써 해방후 60년 가까이 지속 되어 온 것이다. 지금의 할아버지 세대부터 손자 세대에 이르기까지 철책의 초소는 면면히 대를 이어 온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대한민국 군대를 갔다 온 상당한 사람들이 정신질환에 시달리고 있다면 믿기나 할까.

 

필자는 군대를 갔다 온지 오래 되었지만 지금도 꿈속에서 군대에 관한 악몽을 꾸고 있다. 그것도 매번 똑같이 반복 되는 내용이다. 다름 아닌 재입영에 관한 꿈이다. 군대를 갔다 왔음에도 불구 하고 또 영장이 나온 것이다. 그러면 항의 하지도 못하고 또 끌려 가서 3년을 채우고 나오는 꿈이다. 여러 사람들에게 물어 보면 많은 사람들이 이런 꿈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마 이것도 정신질환중의 하나 일 것이다. 그 정도로 군대의 경험이 끔직하였다는 것을 말해 준다.

 

대한민국 군대는 만20세만 넘으면 의무적으로 입영 하야 한다. 그 중에는 주먹깨나 쓰는 뒷골목 출신도 있고 가방끈이 긴 모범생도 있어서 매우 다양한 인생들의 집합처라고 볼 수 있다. 전쟁을 하기 위해서 소집되었기 때문에 이성보다는 감정이 우선이고 말보다는 행동이 우선이다. 튼튼하고 완력이 있어야 대우를 받을 수 있고 또 단 1주일이라도 먼저 온사람과 늦게 온 사람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만큼이나 크다. 그리고 시쳇말로 숫놈들만 사는 세계이기 때문에 위계질서는 매우 엄격하고 이를 유지 하기 위한 집합과 얼차려 심지어 구타는 거의 일상화 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때 당시 군생활을 하면서 이런 고통스러운 현실이 당대에서 끝나고 자식세대에서는 없어지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모른다. 지금은 옛날과 달이 많이 개선 되었다고 하나 총기난동과 자살소식이 들려 오는 것을 보면 군대특유의 분위기는 변함이 없는 모양이다.

 

 

출가수행자에게 군복무요구는 야만적 행위

 

필자가 청소년시절에 가까운 친척이 하나 있었다. 그 형은 대학입시에 실패하고 절에 들어 가서 공부 하던중 스님이 되었다. 가끔 승복을 입고 집에 오는 모습을 보았는데 그렇게 의젓하고 경외스러워 보일 수 없었다. 그런데 입영통지가 나와 입대 하게 되었다. 그는 군복무를 마치고 더 이상 출가생활을 하지 않고 사회인이 되는 것을 보았다. 군대 3년은 출가수행자도 이렇게 바꾸어 놓는 것이다. 출가수행자에게 군복무는 매우 가혹한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5계 즉 불살생(不殺生) 불투도(不偸盜) 불사음(不邪淫) 불망어(不妄語) 불음주(不飮酒) 모두를 어기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어떤 저명한 해외종교학자는 말하기를 한국에서 출가수행자를 입영시키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고 이는 매우 야만적인 행태라고 비판 하였다. 물론 출가수행자에 한하여 일반병과는 다른 군종병과에 배치 한다든가 하는 배려는 있지만 헛점은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이왕 말이 나온김에 출가수행자에 한하여 대체복무할 수 있는 방안도 연구 해야 할 일이다.

 

다음은 팔리어문헌연구소장으로 있는 마성스님의 군대 시절 이야기이다. 출가수행자가 군대에 가서 느낀 사항에 대하여 쓴 글로서 우리나라 병역제도의 모순과 야만성에 대하여 폭로한 글이다

 

 

나의 슬픈 군대 이야기

 

나의 군 생활은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까지 약 3년간이었다.
처음 논산훈련소로 입대했다.
승복을 입은 채 입영 버스에 올랐다.
그때 논산훈련소에서는 신체검사와 여러 가지 절차가 끝날 때까지 사제복(집에서 입고 온 옷을 말한다)을 입고 생활했다.
입대 다음 날 아침 연병장에 집결했다.
승복에 검은 고무신을 신은 채였다.
조례가 끝나자마자 어떤 교관이 고무신을 신고 군대에 왔다는 이유로 큰 통나무를 들어 올리는 기합을 주었다.
연병장을 몇 바퀴 돌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어떤 군인이 내게 다가와서 무엇을 잘못했기에 이런 기압을 받느냐고 물었다.
고무신을 신고 입대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분개했다.
아마 불자였을 것이다.

그 교관은 분명히 내가 스님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기합을 준 것이 틀림없다.
그때부터 나의 힘든 군 생활은 시작되었다.
신병훈련소에서 훈련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내가 보급 받은 물건이 자꾸만 없어졌다.
점호 시간에 철모나 수통 등이 없다는 이유로 나는 날마다 몽둥이를 맞아야만 했다.
훈련을 시키는 기간병이 고의로 나의 물건을 숨기는 것이었다.
스님이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나는 맞지 않기 위해 남의 물건을 훔쳐야 할 것인가를 망설였다.
양심과 고통과의 치열한 갈등 속에서 맞기로 결정했다.
곡괭이 자루로 거의 매일같이 맞았다.
엉덩이에 핏자국이 마를 날이 없었다.
그 이후 군 생활을 마칠 때까지 이러한 일은 반복되었다.
그러나 나는 양심상 남의 물건을 훔칠 수가 없었다.

어떤 지휘관이나 고참이 타종교인일 경우 나는 부대를 대표해서 맞았다.
그때 옆에 있던 동료들이 나를 대신해서 울어주기도 했다.
후반기 교육을 마치고 자대에 배치되었는데, 그때까지 말로만 듣던 강원도 철책선이었다.
나는 태어나서 서울 이북으로 한번도 올라와 본 적이 없었다.
그때는 광주민주화 운동이 한창일 때였기 때문에 군 내부에 지역감정이 팽배해져 있었다.
나의 바로 위 기수들이 전라도 병역이었다.
나는 경상도 출신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수없이 맞았다.
하루도 맞지 않으면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또 밤에 깨워 때리기 때문이다.
나는 탈영하기로 결심했다

그때 나는 탈영하여 깊은 산속에 들어가서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앞으로 갈 수도 없고 뒤로 갈 수도 없었다.
부대 근처가 거의 전부 지뢰밭이었기 때문이었다.
고참들로부터 이유 없이 맞을 때 한번만 더 때리면 총으로 쏴버리고 나도 죽을 것이라고 마음을 바꾸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한번만 더 참자하고 나를 달랬다.
그렇게 하여 순간순간을 넘겼다.
그 결과 군복무를 마치고 무사히 돌아오긴 했으니, 불보살님의 보살핌이라고 생각한다.

 

출처 ; http://www.bulgyofocus.net/  마성단상

 

 

 

2007-09-19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