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기회인줄 알면서도 망설이는 사이에 지나 가 버렸을 때

담마다사 이병욱 2007. 10. 2. 22:02

 

기회인줄 알면서도 망설이는 사이에 지나 가 버렸을 때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에선가

한숨을 쉬며 이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갈라져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것으로 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유명한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의 마지막 부분이다. 자신의 선택의 결과에 따라 정 다른 길로 가게 된 것에 대한 회한과 후회가 가슴저리게 담겨져 있다.

 

사람들은 선택을 해야 될 때가 있다. 사소한 작은 선택에서부터 일생을 결정 지을 중요한 선택까지 자신의 판단에 따라 결정을 해야 한다. 그 선택이 올바른 선택이었을 수 있고 반면에 최악의 선택이었을 수 있다. 시간이 지나 가 보아야 만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선택은 고사 하고 선택의 기회가 왔는지 모르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기회인지도 모르기 때문에 왔다 지나 가도 그렇게 억울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기회인줄 알면서도 망설이다 지나가버린 경우가 가장 안타 깝다. 이것 저것 재고 따지다가 머뭇거리는 사이에 다른 사람이 나타나서 채 가 버리는 것이다. 다시는 그런 기회가 올 것 같지 않다. 설령 온다고 할지라도 언제 올지 보장이 되지 않는다. 두고 두고 아쉬움에 한숨만 쉴 뿐이다.

 

기회와 선택, 결국은 자신의 이해관계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자신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에 기회를 엿보고 또한 선택을 하는 것이다. 그 기회가 지나가 버리면 자신에게 손해가 되기 때문에 못내 아쉬워 하는 것이다. 기회가 왔는지도 모르게 지나가고 기회가 왔지만 망설이다 놓쳤다 할 지라도 다 자신이 선택 한 것이다. 설령 남의 의해 선택 되어 �을지라도 최종 결정은 자신이 하는 것이다. 자신이 원하지 않으면 될 수 없는 일이다.

 

살다 보면 분명히 두갈래 길이 있다. 사람이 많은 길로 갈것인지 아니면 사람이 다니지 않은 길로 갈 것인지는 본인의 판단에 달려 있다. 분명한 것은 되돌아 갈 수는 없다는 것이다. 선택 되었으면 그 길로 가야 하는 것이다. 그 선택된 길로 가는 순간 다른 길은 사라진다. 마치 양자론에서와 같이 두개의 길이 모두 가능성이 열려 있지만 한쪽 길을 선택 하는 순간 그 길이 실재가 되고 다른쪽 길은 허상이 되어 버리는 이치와 똑같다. 거시적으로 보면 우리가 선택 하는 순간 우주가 분기 되는 이치와 똑같다고 할까. 소위 다우주론과 유사 한 것이다. 이쪽을 선택한 나는 선택한 세상에서 살게 되고 반면에 다른쪽을 선택한 나는 또 다른 세상에 존재 하는 것이다. 그런데 두 세상은 동시에 존재 할 수 없다. 오로지 선택한 세상만이 실재이다. 우리가 산택 하기 전까지는 모든 가능성이 다 열려 있다. 그러나 일단 선택만 하면 바로 그 세상이 내가 사는 세상이다. 마치 불교에서 이야기 하는 분별론과 같다.

 

선택을 한고 그 선택된 세상에서 사는 것은 일종의 행위이다. 그 행위는 의미가 있고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진행 된다. 또 그 의미 있는 행위는 분별이다. 하기로 작정 하였다면 마음에서 먼저 한 생각이 일어나 행동으로 옮긴 것이다. 한생각 일으킨 것 자체가 이 세상에서 또 다른 세상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래서 수도 없이 많은 세상이 탄생 하는 것이다. 다만 현재 내가 선택된 세상에서 내가 살뿐이다. 한생각 일으켜 분별하는 것이야 말로 함이 있는 행동이다. 즉 불교에서 말 하는 유위법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금강경에서 말하기를 멋진 게송으로 마지막을 장식 하고 있다.

 

 

 

일체유위법 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 如夢幻泡影
여로역여전 如露亦如電
응작여시관 應作如是觀



일체 현상계의 모든 생멸법은
꿈과 같고 환상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 같으며
이슬과 같고 번개와도 같으니
응당 이와 같이 관할지니라.

 

 

만일 프로스트가 이 게송을 알았다면 그의 시에서와 같이 자신이 선택한 길에 대하여 아쉬워 하며 한숨을 쉬며 이야기 할 수 있었을까.

 

 

2007-10-02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