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이제까지 무아(無我)를 주장 하는 종교는 없었다

담마다사 이병욱 2007. 10. 11. 16:24

 

이제까지 무아(無我)를 주장 하는 종교는 없었다

 

 

무아를 체득 하고 아집이 사라진다면 두려움이 없고 걸림이 없다

 

 

 

 

 

조견오온개공도일체고액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260자로 이루어진 반야심경의 핵심적인 내용이다. 여기서 조견(照見)’이라는 말에 주목한다. 단순하게 비추어 본다라는 말보다 더 엄청난 내용이 함축 되어 있다는 것이다.

 

한국불교, 포대기는 있는데 정작 애는 없다

 

어떤 학자는 말하기를 불교는 미래의 희망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만 고전 하고 있다고 한다. 그에 대한 비유로 애를 업고 있는 모습으로 비유 한다. 즉 포대기는 있는데 정작 애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애를 찾아 오는 작업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애를 찾아 오는 작업이 현재 진행 중에 있고 그에 대한 설명을 다음과 같이 하고 있다.

 

조견(照見)’에 함축되어 있는 의미를 풀어 보면 다음과 같다.

조견은 지정관혜(止定觀慧)의 과정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지정관혜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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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타(Samatha)라고 한다. 생각이 그쳐서 평온한 단계이다. 하나의 수행방법이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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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마디(Sammadhi, 삼매)라고 한다.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사마타 수행의 결과라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종교가 지()와 정()의 단계를 벗어 나지 못한다

 

지와 정의 단계는 마치 돋보기로 햇볕을 집중시키면 종이를 태워 버릴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힘을 나오게 할 수 있는 것과 같다. 독서에 열중 한다든가 뜨개질을 한다든가 하는 것도 이런 상태에 해당 될 것이다. 무당이 춤을 추거나 아프리카 토인들이 모닥불 주위를 빙빙 도는 행위도 이와 같은 집중을 하기 위해 서이다. 절을 하거나 염불을 하는 것도 마찬 가지이다. 예수를 보았다느니 관세음보살을 보았다느니 하는 것도 이 상태를 말한다. 소위 굿이나 기도를 하면 맛 볼 수 있는 단계가 이 지와 정의 단계이다. 지구상의 대부분의 종교가 이 단계를 벗어 나지 못한다.

 

()에도 단계가 있다. 즉 욕계정과 색계정 무색계정이다. 대부분의 종교가 욕계정에 머무른다. 왜 그럴까. 바로 수행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하는 것이 부귀와 영화의 획득에 머무는 것이다. 욕계천상의 모습이나 기독교의 천국이 여기에 해당 될 것이다. 그런데 수행의 종교인 불교는 욕계정을 뛰어넘어 색계정과 무색계정의 경계에 들어 갈 수 있다. 붓다가 출가해서 사상 편력을 하게 되는데 이때 만난 사람이 알라라칼라마(Alara Kalama)이며, 또 한사람은 웃다카 라마풋타(Uddaka Ramaputta)였다. 즉 알라라칼라마로부터 색계의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을 배웠고

웃다카 라마풋타로부터 무색계의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이라는 선 정(禪定)을 배웠다. 그러나 붓다는 이들로부터 떠나게 된다. 비록 번뇌는 억누를 수 있을지언정 완전히 없어 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행을 하게 되나 이 역시 몸만 상하게 할뿐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 되지 않았다.

 

이제까지 무아(無我)를 주장 하는 종교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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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빠사나(Vipassana)라고 한다. 불교경전 즉 아함경에 남아 있는 유일한 수행방법이다. 붓다가 색계정과 무색계정 그리고 고행을 하지만 남아 있는 억눌려 남아 있는 번뇌찌꺼기 까지 없애 버릴 수 없었다, 그래서 홀로 보리수 나무에 앉아서 개발한 수행법이 바로 위빠사나이다. 바로 붓다의 수행법인 것이다. 사물을 있는 대상 그대로 바라보고 알아 차리는 것이다. 즉 일어남과 사라짐을 봄으로서 즉 제행이 무상함을 깨달은 것이다. 제행이 무상 하기 때문에 나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다. 그래서 무아(無我)를 주장 한 것이다. 지구의 인류역사상 그 어떤 종교도 이제까지 무아를 주장 하는 종교는 없었다. 이점이 불교의 가장 독특한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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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즈냐(Prajna, 반야)라고 한다. ()이 수행의 방법 이라면 혜()는 그 수행의 결과이다. 붓다는 위빠사나 수행을 통하여 제행이 무상함을 보고 무아를 체득 하였다. 그런데 무아는 바로 공()100프로 똑같은 말이라는 사실이다.

 

()이란 누구나 다 부처가 될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공이란 무었인가. 다음 3가지로 요약 할 수 있다.

 

첫째, ()이란 무자성(無自性)이다

즉 독자성이 없는 것이다. 단지 인연속에 있을 뿐이다. 생사와 열반이 같고 번뇌가 보리라는 말과 같이 이분법적 사고를 허용 하지 않는다. 즉 관계속에 있다는 이야기 이다.

 

둘째, ()이란 무집착(無集着)이다.

집착이 들어가면 열반에 이를 수 없다. 금강경에도 뗏목의 비유가 있지 않은가. 붓다의 말씀도 열반에 들어가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만일 집착 하게 되면 고()로 가는 길이 되는 것이다.

 

셋째, ()이란 불성(佛性)이다.

이것을 창조적 발전 가능성이라고 보아도 좋다. 위의 무자성과 무집착은 전통적인 공의 해석 방법이다. 그런데 공이 불성이고 창조적 발전 가능성이라고 말하는 것은 새로운 시도라 볼 수 있다. 이 말은 다른 말로 표현 하면 누구나 다 부처나 될 가능성이 있다라는 말과 같다. 반야심경의 관자재보살은 실제인물이 아닌 상징적인물이다. 즉 누구나 관자재보살과 같이 될 수 있다 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지()와 정()을 닦아서 그 힘으로 관()을 하게 되면 혜()가 열리게 된다. 그래서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 즉 니르바나 즉 해탈(解脫)  하게 되는 것이다. 즉 부처가 되기 위한 방법이 바로 지정관혜인것이다.

 

수행은 목숨 걸고 해야 하는 것이다

 

불교를 지혜와 자비의 종교라고 한다. 지혜와 자비는 지정관혜의 방법으로 성취된다. 지정관혜는 머리로 이해 해서는 성취 될 수 없고 오로지 수행으로만 이 가능 하다. 수행이라는 것은 결국 아상(我相)을 지워 가는 과정이라 볼 수 있다. 무아를 체득 하고 아집이 사라진다면 그 무엇이 두울 것이 있겠는가. ‘심무가애 무유공포(心無罣礙 無有恐怖)’가 바로 여기에 해당 되는 말일 것이다. 따라서 수행은 목숨 걸고 해야 하는 것이다. 수행을 통하여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 고익진 교수는 말했다. 신을 중심으로 한 종교에서는 인간이 신이 되려고 하거나 신과  동일한 위치에 있고자 하는 것이야말로 용서받지 못할 교만이요근원적인 죄라고 하는데에 대해서, 불교에서는 오히려  그러지  않는 것은 '교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깨달음이여 영원하라!

 

이제 반아심경의 마지막 진언을 말할 차례이다.

다 아는 것과 같이 우리나라에서 부르는 말은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揭諦 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菩提 娑婆訶이다. 그러나 산스크리트어로는 가떼 가떼 빠라가떼 빠라상가떼 보디 스와하 (Gate Gate Para-gate Para-samgate Bodhi Svaha)’이다. 약간의 발음상의 차이는 있으나 굳이 해석을 해 본다면 다음과 같다. ‘가자! 가자! 저 언덕으로! 우리 모두 함께 가자! 깨달음이여 영원하라!’일 것이다. 여기서 마지막 부분 깨달음이여 영원하라!’깨달음이여 만세!’라고 불러도 무방 할 것이다.

 

 

김진태교수님의 강연내용을 필자가 요약정리하고 살을 붙인 것이다.

 

 

2007-10-11

진흙속의연꽃

 

원문링크 http://blog.daum.net/bolee591/130967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