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수능시험을 위한 기도,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 해주 것이 더 중요

담마다사 이병욱 2007. 11. 12. 10:13

 

수능시험을 위한 기도,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 해주 것이 더 중요

 

 

 

 

대학수능시험이 몇 일 앞으로 다가온 모양이다. 신문과 방송에서는 수능시험을 앞두고 각 사찰이나 교회 성당에서 기도회가 벌어 지고 있는 현장을 취재 하여 보도 하고 있다. 특히 대구 팔공산 갓바위 기도처는 이때 쯤 이면 단골로 나오는 장소인 듯 하다.

 

기도는 일종의 수행이다

 

문제는 이런 기도가 자기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인 기도로 오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자칫하면 기복신앙으로 흐를 염려가 있다는 것이다. 불교에서 가장 경계 하는 것이 바로 기복신앙이다. 무조건 자신과 자신의 권속이 잘 되기만을 비는 행위는 절대자에게 자꾸 무얼 달라는 식의 구걸형 기도와 다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구걸형기도를 하지 말고 발원형기도를 하라고 한다. 무얼 달라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겠다는 기도를 말하는 것이다. 이산 혜원선사의 그 유명한 발원기도가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사실 불교에서 기도는 일종의 수행으로 보아야 옳을 것이다. 불보살에 대한 명호를 한다든가 절을 하는 것과 사경을 하는 행위 자체가 수행이라는 것이다. 이런 기도는 무엇을 해 달라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일련의 정신집중으로 보아야 맞는 말일 것이다.

 

구걸형 기도는 지양 되어야

 

기도 하면 가장 먼저 연상 되는 것은 기독교의 기도가 연상 된다. 처음 부터 끝까지 말씀으로 시작 되어서 말씀으로 끝나는 것이 기독교의 기도 방식이다. 그리고 끊임 없이 무언가를 해주십시오 하고 무언가 달라는 기도를 한다. 이 것은 어쩌면 당연한 지 모르겠다. 종인 피조물이 주인인 창조주 에게 무언가를 해 달라는 것은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혜와 깨달음을 추구 하는 종교인 불교에서 무언가 달라는 식의 기도는 매우 어색하기 짝이 없다. 자신이 지은 업에 대하여 그에 대한 과보를 받고 모든 것이 인연법에 움직이는 불교에서 무언가 달라는 구걸형 기도는 어울리지 않는 다는 말이다.

 

 

대학수능을 앞두고 벌어지고 있는 기도에 관한 보도를 보면서 불교의 발원형 기도가 구걸형기도로 변질되고 않나 염려스럽다. 또한 신문과 매스콤에서도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걸형 기도와 같은 맥락으로 취급하고 있지 않나 하는 염려도 없지 않아 있다. 구걸형기도를 하게 되면 이세상 모든 기도를 절대자는 다 들어 줄 수는 없을 것이다. 또 그런 기도를 하는 자체는 매우 이기적이라고 볼 수 있다. 내가 이익을 보면 다른 쪽은 반드시 손해를 보게끔 되어 있다. 이런 이기적인 기도를 절대자는 절대적으로 들어 주지 않을 것이다. 지구상의 대부분의 종교가 한 꺼풀 벗겨 보면 샤머니즘 적인 기복신앙의 또 다른 형태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는 것이다.

 

정신을 집중하면 못할 일이 없다

 

지혜와 깨달음을 추구 하는 불교에서 자기자신만을 위한 이기적인 기복형기도는 지양 되어야 한다. 그 대신에 원래 취지에 맞는 발원형 기도로 되돌아 가야 한다. 발원형기도는 다름 아닌 수행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수행은 다름 아닌 정신집중이다. 마치 돋보기로 햇볕을 모으면 종이도 태워 버릴 수 있는 엄청난 힘이 나오는 것과 같다. 흔히 불교에서 말하는 사마타 즉 지()와 삼마디 즉 정() 수행인 것이다. 집중하게 되면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따라서 누군가에 의지하여 무언가 이루어지게 해 달라는 구걸형기도 보다 정신집중을 위한 환경을 마련 해 주는 것이 진정한 기도가 아닐까 생각 해 본다.

 

 

2007-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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