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성(空性)에 인격을 부여 하면 법신(法身) 즉 ‘비로자나’가 된다
백번 천번 책이나 글을 통해서 아는 것 보다
선지식을 만나서 한번 듣는 것 보다 못함
불교인은 응집력이 떨어 진다고 말한다
흔히들 불교인은 응집력이 떨어 진다고 말한다. 기독교나 천주교와는 달리 서로 뭉쳐서 사찰과 스님을 중심으로 일을 해 나가는데 있어서 현저 하게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천주교나 기독교에서 개종한 사람들이 하는 일과 순수하게 불교로만 시작된 사람들의 일하는 방법에서 알 수 있다고 한다. 아무래도 개종한 사람들은 교회나 성당 시스템에 익숙해 있어서 그 시스템을 그대로 사찰에 적용 하기 때문에 일을 맡기면 헌신적으로 몇 배 이상 일을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교회나 성당 다니는 사람들은 참여율도 높을 뿐만 아니라 헌금이나 교부금도 사찰하고는 게임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왜 그런 현상이 일어 날까 의문이 가기도 한다. 여기에 대하여 어떤 이는 말하기를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교리와 시스템에 있다고 말한다. 즉 ‘겁주기식’이라는 것이다. 작은 겁은 먹혀 들어 가지 않기 때문에 감당 할 수 없는 큰 겁을 주어서 빠져 나가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창조론이라든가 원죄론, 대속론, 종말론, 구원론등이 해당 될 것이다.
불교에서는 큰 겁을 주는 교리는 없다
불교에서는 큰 겁을 주는 교리는 없다고 보아야 한다. 이세상 모든 일이 ‘인연법’에 의하여 돌아 가기 때문에 특별히 두려워 하거나 겁먹을 일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옥에 갈지라도 자신의 업이 다하면 빠져 나올 수 있고 천상에 태어나도 복을 다 찾아 먹고 더 이상 공덕을 짖지 않는다면 아래 세상으로 추락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유일신교는 이원론적이다. 한번 지옥에 가면 영원히 빠져 나오지 못하고 천국에 가면 영원히 천국에 머문다는 것이다. 이런 점이 신도들에게 강하게 어필 되어서 거기에 사로 잡히게 된다는 것이다.
불교는 유일신을 인정 하지 않는 무신론적 종교이기 때문에 사상적으로 무척 자유스럽다. 즉 어떤 대상에도 구애 받지 않기 때문에 걸림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현상에 대하여 부정해 볼 수 있고 의심을 가져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의 변화와 작용에 대하여 심오한 경지까지 연구하고 그에 대한 교리를 발전시키기에 이르렀다. 알고 보면 불교의 8만4천가지 법문이 다 마음에 대한 공부라고 보면 틀림 없을 것이다.
공부를 하려면 좋은 스승 밑에서 하라
그 마음 공부에 대한 정수가 바로 ‘반야심경’이다. 그 반야심경의 핵심은 무어나 무어니 해도 ‘공(空)사상’ 일 것이다. 이 공사상에 대하여
공에는 두 가지 개념이 있다
먼저 ‘오온개공’할때의 공 즉 수냐에 관해 살펴 보면 철저하게 부정의 논리다. 반야경이라는 경전이 부정의 논리로 되어 있다는 것은 다 알고 있는 상식이다. 그렇다면 왜 부정의 논리가 적용 되는 것일까. 그 것은 부정의 논리를 적용 해야만 논리적으로 정확하게 설명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긴 것이 있으므로 짧은 것이 있다’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이 말은 모순이라는 것이다. 그 긴 것 보다 더 긴 것을 대면 그 긴 것은 짧은 것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야경 논리대로 한다면 ‘긴 것이 본래 없으므로 짧은 것도 본래 없다’로 하면 더 이상 논쟁이 생기지 않는다. 그래서 용수보살시대에 중관학파가 논쟁에서 진 적이 없다고 한다.
다음으로 ‘공중무색’할때의 공 즉 수냐타에 대해서이다. 여기에서의 공은 ‘있다’라는 공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하고는 180도 다름을 알 수 있다. 그 ‘있다’라고 하는 공 즉 수냐타는 ‘공성(空性)을 말한다. 그래서 ‘공중(空中)’을 해석 하여 보면 ‘공의 입장에서’ 또는 ‘공의 입장에서 볼 때는’ 뜻이 된다. 따라서 무색이 부정되지 않는 것이다. 즉 ‘공의 입장에서 볼 때는 색이 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다’ 라는 뜻이 되겠다. 이후에 나오는 색성향미척법 안이비설신의 죽 나가서 사성제와 12연기까지 부처님이 설하신 모든 내용의 앞에 공중이 생략된 것이다. 따라서 ‘공의 입장에서 볼 때는’식으로 해석 하면 붓다의 말씀을 부정 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공성(空性)과 진여(眞如), 불성(佛性), 법성(法性)은 같은 말
법성게에서의 법성(法性)은 반야심경의 공 즉 수냐타와 동일한 개념이다. 수냐타는 깊고도 풍요로운 내용이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다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즉 ‘있다’ 라는 개념의 공성인 것이다. 책상을 예를 든다면 책상에서 밥을 먹는 다면 밥상이 될 수 있다. 또 작업을 한다면 작업대가 될 수 있고 연료로 사용 하면 땔감도 될 수 있다. 딱히 책상이라고만 말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쓰임새에 따라 이름이 달리 붙여 지는 것이다. 이와 같이 공성은 다른 것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공을 ‘없다’가 아니라 ‘있다’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이다. 금강경의 ‘반야바라밀 즉비반야바라밀 시명반야바라밀’에서 ‘즉비’개념과 동일한 말이라고도 볼 수 있다.
‘공중무색’할때의 공중의 뜻이 ‘공의 입장에서 볼 때’라는 뜻이라고 말했다. 그 공이 바로 무한한 가능성을 내포한 공성이고 또 다른 말로 하면 진여(眞如) 이며 불성(佛性)이다. 따라서 법성게에서 말하는 법성은 공성, 진여, 불성과 같은 말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인격을 부여 하면 법신(法身) 즉 ‘비로자나붓다’가 되는 것이다.
이런 강의를 듣다 보면 모르고 있던 사항을 알게 된다는 큰 의미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시중에 나와 있는 책이나 인터넷에 떠 돌아 다니는 글의 해석이 제 각각 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느 경우가 맞는지 판단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반드시 올바른 가르침을 펴는 스승 즉 선지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백번 천번 글을 통해서 책을 통해서 아는 것 보다 선지식을 만나서 듣는 것 보다 못함을 절실히 느낀다.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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