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불일불이(不一不二), 동일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다르지도 않다

담마다사 이병욱 2008. 1. 3. 08:33

 

불일불이(不一不二), 동일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다르지도 않다

 

 

 

 

한국불교는 지난 600년간 핍박을 받아 왔다. 조선시대에 유교가 국교로 정해 짐에 따라 지배 이데올로기가 바뀌었고 그에 따라 탄압을 받아 왔다. 더구나 도성에는 출입도 되지 않는 철저한 핍박의 세월이었다. 거의 빈사지경에 이르고 껍데기만 남은 상황에서 근세에는 서양종교의 유입으로 인하여 다시 한번 휘청 거리는 상황이다.

 

한국불교, 애를 찾았으니 잘 키우는 일만 남았다

 

불교가 중국에서 전래 된 이래 한국불교는 중국의 선불교의 전통을 유지 하고 있으나 엄밀히 따지면 인도에서의 부처님 당시의 초기 불교와는 거리가 한참 떨어져 있는 모습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그래서 극단적인 표현을 빌자면 애는 없고 포대기만 있는 형국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애를 찾아 오는 작업이 80년대 부터 시작된 초기 근본불교로의 회기 운동이다. 즉 부처님이 말씀과 가르침으로 되돌아 가자는 것이다. 곧 부처님의 말씀과 가르침은 수행으로 귀결 해야 한다. 제대로 된 불교를 할려면 수행을 살려야 한다. 그 수행방법이 바로 부처님을 깨달음으로 이르게 한 위빠사나수행인 것이다. 경전으로 따진 다면 북방불교에서는 아함경이고 남방불교에서는 니까야이다. 이제 애는 찾았는데 잘 키우고 보살펴서 성장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한국불교의 희망이라 말 할 수 있다. 다음 내용은 김진태 교수의 법성게 강의 요약내용이다.

 

 

법성원융무이상 제법부동본래적(法性圓融無二相 諸法不動本來寂)

 

여기서 법성은 법계,공성,기성,진여와 같은 말이다. 제법은 법성이 드러난 것을 말한다. 법성을 ()라 한다면 제법은 ()라 할 수 있다. 여기서는 ()는 평등의 개념이라 볼 수 있고 ()는 차별의 개념이라 볼 수 있다.

 

법성이 드러난 것이 제법이라는 말은 곧 불일불이(不一不二()) 관계이다. 동일하지도 않지만 다르지도 않다라는 말이다. 예를 들어 보자. 한알의 볍씨가 있다. 이 볍씨가 생성 되기 위해서는 물과 바람과 구름이 동원 되고 사람의 노고가 동원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볍씨 하나가 나오기 까지 우주의 모든 요소가 관계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볍씨는 우주가 드러난 또 다른 모양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불일불이라 한다.

 

하나 더 예를 들어 보자. 금강경에 나오는 논리가 있다. A즉비A시명A 논법이다. A에 책상을 대입해 보자. 책상즉비책상시명책상이 된다. 책상은 책상이 아니라 그 이름이 책상이다라고 풀이 할 수 있다. 책상은 인연에 따라 밥상도 될 수 있고 사다리도 될 수 있고 땔감도 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따라서 인연따라 임시로 붙여준 이름에 불과한 것이다. 수 많은 가능성 중에 하나가 채택 된 것이다. 즉비에서 ()은 불이(不二())를 말하고 ()는 불일(不一)을 말한다.

 

똑같은 논리를 반야심경에서도 볼 수 있다.

 

색불이공 공불이색(色不異空 空不異色)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空卽是色)

 

여기서도 금강경과 마찬가지로 즉은 불이이고 불은 불일이다. 즉 불과 즉은 같은말이라는 것이다. 똑같은 의미의 말이 법성게 다음에 오는 원융이다. 결국 반야심경이나 금강경이나 법성게나 표현 하고저 하는 것은 불일불이인 것이다. 즉 표현만 다를뿐 같은 세계를 이야기 하는 것이다. 또 다른 표현으로 말한다면 불일불이는 사사무애를 말한 다고도 볼 수 있다.

 

제법부동본래적에서 부동은 금강경에서 말하는 즉비와 같고 은 열반을 의미 한다. 이세상이 고통 스러운 것은 내가 영원히 살겠다는 생각과 영원불변에 대한 집착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무상을 이야기 하고 무아를 이야기 한다. 영원히 변치 않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이런 이치를 알면 고통에서 벗어 날 수 있다. 이런 이치를 모르기 때문에 사는 것이 고통스럽고 윤회 하는 것이다. 즉 영원 불변하기를 바라는 상집에서 벗어 나야 하고 영원히 살겠다는 아집에서 벗어 나야 한다. 이런 이치에 맞추어 살면 부처가 되는 것이다. 상집과 아집을 끊기 위해서는 수행을 해야 한다. 절한다고 기도 열심히 한다고 끊어 지는 것은 아니다. 아집과 상집이 남아 있는 한 고통은 계속 될 것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생과 도교에서 말하는 불로장생도 상집과 아집이 남아 있기 때문에 고통에서 해방 될 수 없다. 예수는 마지막에 끝까지 전도 하라고 말 하였지만 붓다는 방일 하지 말라고 하였다. 즉 열심히 수행하라는 말이다. 그 수행은 다름아닌 부처님의 수행법인 위빠사나수행인 것이다.

 

무명무상절일체  증지소지비여경(無名無相絶一切 證智所知非餘境)

 

앞서 법성을 진여라 하였다. 진여는 진실로 그러 하다하는 뜻이다. 산스크리트어로 말하면 타따타(Tathata)이다.  여여한 그러한 것 의 의미이다. 법성이 드러난 것이 제법이라 하였다. 마치 우주가 드러난 것이 볍씨이듯이 말이다. 책상도 인연에 따라 쓰임새가 다르다고 하였다. 즉 책상즉비책상시명책상인 것이다. 책상에다 그 무엇을 갖다 붙여도 된다. 하물며 사람을 갖다 붙인다면 어떻게 될까. 수천수만가지의 인생이 있을 것이다. 의상대사가 무명부상절일체 증지소지비여경이라고 말한 것도 알고 보면 수행 하라는 이야기의 다름이 아니다. 즉 부처가 되라는 이야기이다. 지혜를 증득해야 알수 있는 경계가 열린다는 것이다. 여기서 경계는 위빠사나 수행을 하라는 말과 같다고 보면 된다.

 

일중일체다중일(一中一切多卽一)?잉불잡란격별성(仍不雜亂隔別成)

 

일중일체다중일 부터 잉불잡란격별성까지는 같은 맥락이다. 여기서 일중일다중일을 보자.

 

()은 예로 든다면 볍씨한알 또는 하나의 책상이 되겠다. 일체(一切)온우주라고 보면 된다. 그렇다면 먼저 이야기한 법성원융무이상과 똑같은 패턴이라 말 할 수 있다. 불일불이 인 것이다. 우리들이 한 생각 하는 것은 찰나행동을 유발한다. 한 생각은 언젠가 인연이 되면 몸과 입으로 표출되게 되어 있다. 사라지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이런 힘이 쌓이면 업력이 된다. 이 업력은 자신도 제어 하지 못할 정도로 커지면 그 사람의 운명을 결정 하게 된다. 그 한 생각은 다음 생에도 영향을 미쳐서 반드시 나타난다는 것이다. 소위 습관이라는 것이 바로 업력을 만드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보이지 않는 손  바로 그것이 업력이다. 이 업력이 영향을 주는 것이 업장인 것이다. 한생각, 말한디, 한행동 모두 사라지지 않고 어떻게 해서 든지 영향을 주게 되어 있다. 그런 업력의 영향을 받는 것을 흔히 사주니 팔자니 하면서 말한다. 그렇다면 이런 습관으로 인한 업력과 업장을 없애 버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절하고 기도 한다고 없어 질까. 답은 수행을 해야 한다. 수행은 다른말로 수습(修習)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새로운 습관을 들이는 것이다. 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지금 여기에 펼쳐져 있다. 과거의 업장을 소멸하고 미래의 업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는 수행해야 한다. 수행하면 깨달을 수 있다. 깨닫게 되면 자유로워 질 수 있는 것이다. 그 깨달음으로 가는 수행법이 바로 부처님이 수행 했다는 위빠사나이다.

 

일생을 걸고 목표를 추진한다는 것

 

이상은 김진태교수의 법성게 강의를 요약한 것이다. 김진태교수로부터 한달에 한번씩 1년간에 걸친 강의를 들었다. 반야심경과 금강경, 그리고 법성게 강의까지 하였지만 맛만 본 셈이다. 김교수님의 소원은 위빠사나 선원을 세워서 널리 보급 하는 것을 일생의 목표로 삼고 있다고 말한다. 또 제대로 된 책을 써서 한국은 물론 영역본 심지어는 아랍어본까지 만들어 보급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한국불교가 애는 없고 포대기만 남아 있었는데 이제 애를 찾았으니 잘 키우는 일만 남았다고 말한다. 애만 잘 키우면 한국불교의 희망이 있다는 이야기이다. 일생을 걸만한 목표를 정하고 추진 하는 것을 보면 참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2008-01-03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