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지금의 나는 단지 우주가 드러난 것일 뿐

담마다사 이병욱 2008. 1. 9. 09:19

 

지금의 나는 단지 우주가 드러난 것일 뿐

 

 

 

 

흔히들 인생무상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 알고 보면 무상이라는 말은 불교의 핵심교리로서 영원한 것은 없다라는 말이다. 그러나 잘못 해석하면 소극적이고 비관적으로 해석 할 수 있는 우를 범할 수 있는 것이다. 인생무상이라고 말 하였을 때 대전제는 무아이다. 순간 순간 변하는 나가 있을 뿐이지 영원히 변하지 나가 있을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같은 듯이 보이지만 엄밀히 말하면 다른 나인 것이다.

 

학창시절에 배운 영어 표현 중에 이런 말이 있었다.

 

I am not what I was (나는 옛날의 내가 아니다)

 

지금의 나와 예전의 나는 다르다는 말이다. 10년전의 나 그리고 20년 전의 나는 이미지는 비슷할 지언정 동일한 나는 아니다. 그사이에 어떤 변화가 있었음에 틀림 없기 때문이다. 그 때 당시의 몸의 변화 뿐만 아니라 가슴속에 자리 잡고 있는 생각의 변화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어의 표현과 같이 나는 옛날의 내가 아닌 것이다.

 

무아의 개념으로 본다면 이세상 만물은 고정 되어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시시각각 변화 하고 있을 뿐이다. 어제의 그 하늘도 오늘의 하늘과는 다르고 어제의 나무도 오늘의 나무와는 미세하나마 변화가 있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서 똑 같은 나무라 볼 수 없다. 심지어는 책상과 걸상과 같은 무정물들도 미세하나마 원자의 변화가 있을 것이다. 이것을 불가사량한 시간 개념을 도입하면 존재 하지 않을 것은 너무나 당연 하지 않은가.

 

불교에서는 불가사의불가사량이니 무량대수이니 하는 무한대의 개념이 곧잘 인용 되곤 한다. 지금 살아 움직이고 있는 생명체들도 우주적인 시간에 비한다면 번쩍 했다 사라지는 번개와도 같이 짧은 찰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 찰나에 지나지 않는 시간을 사람들은 영원히 살 것 처럼 착각 한다. 거기에 덧 붙여 영생을 이야기 하는 종교도 있다. 이것은 무상법을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내가 있다는 아집과 모든 것은 영원하다는 상집(常執)이 있는한 고통에서 헤어 날 길이 없다고 불교는 가르친다. 그래서 무아를 주장하고 무상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무아와 무상의 법칙을 적용 한다면 나는 옛날의 내가 아님에 분명하다. 지금 머리 속에서 생멸 하는 무수한 번뇌들도 실체가 없는 것처럼 이 몸과 마음으로 이루어진 나도 무한의 개념을 도입하면 생각의 생멸과 다를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지금의 나는 단지 우주가 드러난 것일 뿐이다. 이 우주를 불성 또는 법성이라고 해도 상관 없다. 마치 한 알의 볍씨가 나오기 까지는 우주적인 요소가 총동원 되듯이 말이다.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공이 색이 되고 법성게에서 말하는 법성제법이 되듯이 우주의 드러난 모습이 나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세상을 법계라고 하고 또 여기에 인격을 부여 하면 법신이 되지 않는가. 그 법신이 다름아닌 비로자나 부처님이다. 내가 바라보는 이세상 자체는 바로 비로자나 부처님의 몸과 마음이 다름이 아닌 것이다.

 

 

 

2008-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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