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사카모토 료오마, ‘3.1운동’의 먼 발발 요인

담마다사 이병욱 2008. 3. 1. 09:39

 

친일 한 것이 큰 죄가 되듯이 먼 훗날 친미 한 것도

 

 

 

 

멀고도 가까운 나라가 일본이라고 한다. 나라의 면적은 크지 않지만 세계2의 경제 대국이다. 아시아경제를 다 합친것 만큼의 경제력을 가지고 있다 하니 경제지도를 그려 본다면중국 정도의 영토를 가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런 나라가 옆에 있다는 것이 과연 행운 일까 불행일까.

 

일본의 가장 인기 있는 영웅 사카모토 료오마

 

사카모토 료오마(坂本龍馬), 일본인 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영웅이다. 비록 34세에 떠돌이 무사에게 칼을 맞아 일찍 죽었지만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정도의 위상을 누리고 있다. 그 료오마가 활동 하던 시대가 에도 막부 말기 시대이다. 1853년 미국 페리제독이 이끄는 흑선이 출현한 이후 일본은 발칵 뒤집혔다. 배 몇 척으로 인하여 막부의 자존심이 무너 진 것이다. 그 후 젊은 무사들을 중심으로 반 막부 세력이 형성 되고 천왕을 중심으로 뭉치자는 기운이 형성 된 것이다.

 

료오마가 태어 난 곳은 도사(土佐)번이다. 시코쿠섬의 남방에 있는 일본의 최변방이다. 이 곳에서 하급무사의 아들로 태어 났다. 일본의 무사체계는 크게 상사(上侍)와 하사(下侍)로 나뉜다. 무사중에서도 상사는 지배계층이고 하사는 피지배계층이다. 도사번 역시 지배계층은 상사 이었다. 이렇게 상사와 하사로 나뉘어 지게 된 계기는 세키가하라전투에서 시작 되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전국을 통일 하게 된 계기가 바로 이전투에서 승리 함으로써 가능 하였다. 이 전투에서 도쿠가와군의 동군이 토요토미군의 서군을 세키가하라 평원에서 격파 함에 따라 서군의 영지를 모두 몰수 하고 영주를 재배치 하였는데 그 중에 하나가 도사번도 해당 되었던 것이다. 즉 하사는 구 지배세력이고 상사는 승리한 새로운 지배세력 이었던 것이다.

 

하사 출신은 상사에게 모욕을 당해도 신분상의 제약 때문에 참아야 했다. 그러나 상사는 사람을 죽여도 면책특권이 있었다. 이런 불평등한 관계가 250년동안 내려 오다 흑선이 나타나면서 도쿠가와 막부가 별것 아니라는 인식이 싹 트게 되고 그 동안 억눌려 지내던 하사들, 즉 세키가하라 전투 이전의 무사계급이 일제히 발호한 계기가 된 것이다. 이 중심에 선 번국이 일본의 가장 말단에 위치해 있고 에도 막부와도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던 도사, 사쓰마(薩摩), 죠오슈(長州)번 이다.

 

사쓰죠오(薩長)동맹의 주역 사카모토 료오마

 

특히 지금의 큐우슈우 남단 끝에 있는 가고시마에 위치한 사쓰마번과 히로시마의 서쪽에 있는 지금의 야마구치현에 있었던 죠오슈번이 가장 강력하게 중앙정부에 반발 하였고 세력도 강했을 뿐만 아니라 인재도 매우 풍부 하였다. 이 들 두 번이 힘을 합친다면 도쿠가와 막부를 쓰러뜨리고 새로운 체제를 만들 수 있는 상황 이었다. 이 두번의 동맹을 성사 시키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사카모토 료오마 인 것이다.

 

결국 료오마의 중재로 사쓰마.죠오슈 동맹이 맺어지고 사쓰죠오의 반란군과 도쿠가와 막부의 관군이 전투를 벌이게 된다. 이 전투에서 사쓰죠오 군이 승리 함에 따라 일본에서 신정부가 세워지고 메이지유신이 단행 된다.  미국의 흑선이 출현한 이래 꼭 15년 만이다. 사쓰죠오 동맹이 맺어진 1866년까지 13년동안 활약한 인물이 일본인들의 영원한 영웅인 사카모토 료오마가 맹 활약 하던 시대이다.

 

역사에서 가정은 무의미한 것

 

역사에서 가정은 무의미한 것이다. 만약 이때 사카모토 료오마가 출현 하지 않았다면 일본은 미국의 식민지가 되었을 것이고 조선침략도 없었을 것이다. 사카모토 료오마와 같은 걸출한 영웅의 출현으로 인하여 한쪽은 제국주의 반열에 오르고 다른 한편은 그에 희생 당하는 역사가 시작 된 것이다.

 

3.1운동이 일어 난 먼 원인도 한사람의 영웅의 탄생에 기인한 바 가 크다. 만약 조선에서도 사카모토 료오마와 같은 영웅이 있었다면 3.1운동과 같은 거국적인 저항도 없었을 것이다.

 

힘이 모이면 그 힘을 행사 하고 싶은 것이 본능인 모양이다. 중국이 강성 하였을 때는 그 지배하에 들어 갔었고 일본의 힘이 강해 지자 아예 먹혀 버렸다. 일본으로 부터 해방은 되었지만 자력이 아니고 타력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군대가 진주 하게 되고 그 영향력은 일본 점령기간 보다 더 오래 지속 되고 있다.

 

친일 한 것이 큰 죄가 되듯이 먼 훗날 친미 한 것도

 

일본은 민족혼을 말살 시키기 위해서 자신들의 말과 글을 강제로 쓰게 하였다. 또 창씨개명을 하여 일본인과 같이 유사하게 만들었다. 몸은 한국인이지만 남의 말과 글을 쓰고 거기다가 성까지 바꾸고 혼 마저 빼앗긴 다면 더 이상 한국인이라고 말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일제 시대와 같은 현상이 지금 또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일본점령기간 동안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해 왔던 친일파을 미워 한다. 그리고 그때 친일행위를 한 인사들은 부끄럽게 생각 한다. 그 때 당시 그들은 친일 한 것이 큰 죄가 되지 않으리라 생각하였고 또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영원할 것으로 생각 했음에 틀림 없다. 그 때는 지금이나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지배국가의 문화와 사상, 종교와 같은 지배이데올로기로 인하여 민족혼은 빼았기고 있고 더구나 그들의 언어까지 공용화 하자고 한다. 친일 한 것이 큰 죄가 되듯이 먼 훗날 친미 한 것도 그에 못지 않은 평가를 받을 날이 있을 것이다.

 

 

 

2008-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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