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꿈은 무의식으로 통하는 창

담마다사 이병욱 2008. 3. 5. 11:09

 

꿈은 무의식으로 통하는 창

 

 

 

시골에서 건강 하게 잘 사시던 노인이 대도시에 와서 아파트 생할을 하면서 얼마 인 있다 돌아 가셨다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결혼 해서 잘 살던 부부가 애정이 시들 해 지면서 서로 관심조차 가지지 않다가 이혼 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대도시에서의 권태와 무력감 그리고 공허

 

대도시에서 사는 사람들은 쉽게 권태감을 느낀다. 그리고 무력감 공허감과 함께 무었을 어떻게 해야 할지 방향감각을 상실 한 채 살아간다. 공포와 같은 권태와 공허감을 극복 하기 위하여 영화도 보고 TV를 친구처럼 여기고 아침이면 신문이 기다려지기도 한다. 그리고 정치판의 뉴스에 귀를 기울이고 이에 편승 하여 한마디씩 하게 된다. 젊은이라면 게임에 열중하거나 스포츠나 취미생활에 열중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모든 사항이 가공할 권태와 공허를 극복 해주지는 못 한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무언가에 투사 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내면에 있는 의식하지 못하였던 그 무엇이 어떤 계기가 되었을 때 튀어 나오는 것을 말한다. 그 때 느끼는 감정은 자신이 그토록 미워하고 증오해 왔던 그 무엇이 나의 무의식 속에 숨어 있었다는 것을 발견 하게 된다. 운전 하면서 욕설이 튀어 나온 다든지 얌전 하던 사람이 순간적으로 벌컥 화를 낸다든지  어떤 사람만 보면 이유없이 미워진다든지 하는 경우가 바로 그런 케이스 일 것이다. 그러나 무어니 무어니 해도 투사가 가장 많이 이루어지고 있는 곳이 정치판일 것이다.

 

정치판은 공개된 집단투사의 현장

 

정치판은 공개된 집단투사의 현장이라고 보아도 틀림없다. 입이 달린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마디 하고 자신의 주장을 내 뱉는 스트레스 배설 장소의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자신과 생각과 철학이 다른 사람들에게 집단적으로 두들겨 패는 모습을 자주 목격 할 수 있다. 반면에 자신과 뜻이 맞고 이해가 일치 한다면 적극적으로 옹호 하는 것이다. 좋음과 싫음이 극명하게 표출 되는 곳이 정치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정치판은 어른들의 놀이터라 불러도 무방 할 듯 하다.

 

종교 역시 정치판 못지 않게 투사로 얼룩지어져 있다. 오히려 정치판 보다 더 투사가 더 심한 곳인지 모르겠다. 정치판은 이해관계에 따라 이합집산도 하지만 종교판은 그런 분위기와는 무관 하다. 오로지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것이다. 그래서 더욱 더 결렬하게 투사 되는 곳이 종교판이다. 화합과 화해가 거의 불가능 할 정도이다. 한편이 반드시 죽어야 만 되고 내가 살기 위해서는 상대편을 꺽어 놓아야 한다. 한마디로 죽기 아니면 살기 식이다. 불행 하게도 우라나라는 종교적인 투사가 가장 심한 나라가 되어 버렸다. 한쪽에서는 종교패권주의를 추구 하는 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이에 대한 반발과 저항하는 형국이다. 종교의 속성상 어느한편이 승리로 막을 내릴 때 까지 계속 될 것이다.

 

정치와 종교가 결합된 집단 투사판

 

집단투사현장이자 어른들의 놀이터인 정치판과 죽기 아니면 살기 식의 종교판이 결합된 형태의 투사판이라면 어떻게 될까. 바로 그런 현상이 지금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긴쪽에서는 노골적으로 종교를 끌어들이고 종교 또한 적극적으로 활용 하려고 한다. 서로의 이해 관계가 맞아 떨어진 것이다. 그래서 정치판과 종교판이 결합된 유례가 없는 상황이 시작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반발 역시 유례가 없을 정도로 격렬하다. 향후 이슈가 터질때 마다 집단투사는 가열차게 전개 될 것이다.

 

아쉽게도 현정부는 종교를 정치에 끌어 들였다. 종교색 짙은 정치가와 관료들의 등장과 현실정치에 참여 하려는 종교세력의 합작품이 된 것이다. 정치와 종교가 결합되면 이에 대한 반발은 불을 보듯 뻔할 텐데 말이다. 크고 작은 이슈 때 마다 정치와 종교는 안주거리로 전락할 것이다. 가뜩이나 권태와 공허와 무력감에 시달리는 대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 즐거운 놀이터를 제공 하게 된 셈이다.

 

자기를 찾아가는 여행

 

권태와 무력감과 공허는 영화와 TV와 인터넷과 정치판에 투사 됨으로써 일시적으로 해소 되기는 하지만 일시적이다. 스트레스는 해소 될 지언정 또 다시 찾아 오는 권태와 무력감과 공허는 메울 길이 없다는 것이다. 오로지 눈에 보이는 현상과 눈에 보이는 세상에만 집착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일상화된 권태와 무력감과 공허는 극복 할 수 없는 것일까.

 

심층심리학에서는 자기를 찾아 보라고 한다. 자아는 눈에 보이는 의식하는세상의 자신을 말하고 자기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무의식의 심층에 있는 진정한 자신을 말한다. 자아는 자기가 표출된 드러난 결과이지 자기는 아니다. 내면속에있는 자기를 의식화 하는 작업이야 말로 권태와 무력감과 공허를 극복해 주는 열쇠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 생활을 하게 된다면 우리들은 두개의 세상을 살게 되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세상과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을 여행 하는 것은 매우 흥미진진하고 삶에 활력소를 불어 넣을 수 있다는 것이다.

 

꿈을 통한 무의식 세계의 경험

 

사람들은 시골에 한나절만 있어도 심심하고 재미 없어서 견디지 못한다. 책을 읽어도 그때 뿐이고 친구와 대화를 해도 그때 뿐이다. TV를 보아도 영화를 보아도 게임을 해도 그 때 뿐이다. 무섭게 밀려 오는 권태 앞에 속수 무책이다. 담배도 피워 보기도 하고 술도 먹어 보기도 하지만 권태는 극복 되지는 않는다. 그런데 산중에 있는 수행자들은 적적 하고 흥미 거리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산중에서 어떻게 생활 하는 것일까. 분명 그 무엇이 있음에 틀림 없다. 바로 그것이 선정삼매라는 것이다. 선정삼매의 즐거움에 빠지면 부귀영화가 부럽지 않다고 한다. 산중생활이 단조로울 것 같지만 이와 같이 든든한 백이 있다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권태를 극복 하기 위하여 여러가지 시도를 해 보지만 결코 극복 되지는 않는다. 흥미진진한 재미를 찾아 보기도 하지만 그때 뿐이다. 세상은 의식하고 있는 세상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의식하고 있지 못하는 무의식의 세계도 있다는 것이다. 그 세계는 한번도 가보지 못한 세계이지만 간접적으로 경험 할 수 있다. 매일 꾸는 꿈을 통해서 간접적으로나마 엿보는 것이다. 그 꿈을 통해서 메세지를 읽고 해석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꿈속의 장면은 현실세계보다 더 생생 하고 선명 한 경우도 있다. 그리고 예지와 영감을 얻는 경우도 있다. 꿈은 무언가 전달 하려 하고 가르쳐 주려고 한다. 비록 상징적으로 표현 되지만 잘 관찰하고 이해 하려고 노력하면 큰 수확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꿈은 무의식으로 통하는 창인 것이다.

 

 

 

2008-03-05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