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인욕바라밀'하기

담마다사 이병욱 2008. 4. 15. 09:51

 

'인욕바라밀'하기

 

 

 

 

인욕인욕바라밀은 다른 것

 

인욕(忍辱).  참을인()자에 욕될욕()자이다. 단순히 한자로만 풀이 한다면 욕됨을 참고 견딘다라는 뜻이다. 그래서 인욕의 세월이니 하는 말도 있지 않은가. 인욕은 단순히 참는 것과는 뉘앙스가 다르다. 화가 났을때 참을인자 3번생각하면 살인도 하지 않을 수 있는 그런 참음과는 다른 것이다. 사전적인 의미로는 마음을 가라앉혀 온갖 욕됨과 번뇌를 참고 원한을 일으키지 않는 일을 이른다. 여기까지가 일반적인 인욕의 풀이일 것이다.

 

그런데 뒤에 바라밀이 붙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인욕인욕바라밀은 다른 것이다. 인욕이 욕됨을 참긴 참되 참는다는 마음을 가진 것이라면 인욕바라밀은 참는 다는 마음자체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주 대표적인 예가 금강경에 나온다. ‘가리왕이야기이다. 신체가 마디마디 잘라져도 결코 원한을 갖거나 원망을 가지지 않았다는 내용이다.

 

뒤에 바라밀이 붙으면 일반적으로 했다는 마음을 내지 않고 하는 행위를 말한다. 보시바라밀이 그렇고 반야바라밀이 그렇다. 했다고 하는 마음을 내는 순간 그 것은 진정한 보시가 될 수 없고 반야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가장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는 부분 역시 보시바라밀이다. 주었다는 생각 없이 주라는 말이다. 주면서 생색내지 말라는 이야기와 똑같다. 또 티내지 말고 주라는 말과도 같다.

 

인내력 테스트 하는 기분이 들때도

 

지리산 법계사 순례법회에서 주지스님의 법문을 들었다. 좋은 내용도 많이 있었지만 그중에 하나 기억에 남는 말이 바로 인욕바라밀에 대한 내용이었다. 스님은 예를 들어 설명한다. 중생들은 인욕할일이 많지만 스님들은 인욕할일이 별로 없다고 한다. 6바라밀중에 인욕을 빼고 다른 바라밀은 수행하면서 늘상 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인욕할일이 생기지 않으니 인욕바라밀을 할 기회가 별로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부러 인욕할거리를 만들어 인욕바라밀을 실천 한다고 한다. 일종의 자신의 수행력 테스트라고 볼까.

 

우리가 사는 중생계는 인욕할 일로 꽉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떤 때는 인내력 테스트 하는 기분이 들 때도 있다. 보통 나와는 상관 없이 벌어지는 일도 있지만 알고 보면 다 나와 관련된 일이다. 과거에 내가 한 행위에 대한 결과라고나 할까. 그런데 도저히 감내 할 수 없는 인욕도 있을 수 있다. 나의 힘으로는 어찌해 볼 수 없는 인욕같은 것이다. 이런 때는 인욕한다기 보다 그저 받는 수 밖에 도리가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무시를 당하거나 모욕을 당하면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그리고 반드시 복수를 하려고 한다. 가장 먼저 하는 것이 말로서 대응 하는것이다. 그렇게 하면 상대방도 가만 있지 않고 더 심한 말로 공격해 온다. 이쯤되면 감정싸움으로 발전 되고 급기야는 살의가 번득이기까지 한다. 자신의 감정에 휘둘리다 보면 어느새 일은 벌어지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시간이 지나고 나면 후회 하게 된다. 그러나 엎질러진 물이다. 다시는 주어 담을 수 없다. 후회 하지만 그 행위는 남아 있다. 그 행위가 말로서 하는 것이든 신체에 타격을 가했든 아니면 생각으로 살인을 하였든 그 깊고 깊은 상처는 씻을 수 없다.

 

세상살아 가는 것도 일종의 수행

 

모욕과 무시, 욕됨을 참고 견디는 것은 어렵다. 대부분 이에는 이 눈에는 눈식으로 대응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인욕하라고 말한다. 그것도 참고견딘다는 생각도 내지 말고 원한이나 원망도 품지 말라고 한다. 아무생각없이 그냥 그대로 받으라는 것이다. 이것이 인욕바라밀이다. 인욕은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인욕바라밀하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이다.

 

유일신교에서 하는 말중에 왼쪽뺨을 치거든 오른쪽 빰을 내주어라라는 말이 있다. 어찌보면 불교의 인욕하는 모습과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 보면 반발심리가 들어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오히려 저항하는 모습도 보인다. 그것은 상대방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때린사람에 대한 일종의 무언의 저항이라고 보여진다. 그래서 인욕은 될지언정 인욕바라밀은 될 수 없다.

 

살아가면서 무수하게 시험에 든다는 생각을 가질때가 있다. 유일신교에서는 신의 뜻이라고 치부 하지만 불교에서는 철저하게 인과응보론적이다. 지금 당하고 있는 고통과 괴로움도 역시 알고 보면 내가 뿌려 놓은 씨앗의 결과에 불과하다. 스님들과 같이 인욕할거리가 없어서 일부로 인욕할거리를 만들어 놓고 인욕바라밀수행을 한다고 하지만 세상을 살고 있는 중생들은 자신들이 알게 모르게 뿌려 놓은 씨앗이 너무 많기에 인욕할거리로 넘쳐난다. 인욕하기도 힘든데 인욕바라밀까지 하는 것은 무리일지 모르지만 어쨋든 세상살아 가는 것도 일종의 수행일 것이다.

 

 

 

2008-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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