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나도 부처님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을까

담마다사 이병욱 2008. 5. 25. 10:42

 

나도 부처님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을까

 

 

 

 

"그 사람은 이름은 잊었지만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인환의 시에 나오는 내용이다. 영화도 마찬가지로 내용은 생각 나는데 영화제목이 떠오르지 않는 경우가 있다. 미국의 어느 동네에서 사는 사람들 이야기 인데 흑백화면으로 시작 된다.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세상은 오로지 흑백 세상이다. 마치 옛날에 흑백TV를 보는 것과 같은 세상이다. 그런데 어느 날 컬러로 된 세상을 보게 되는 사람이 나타난다. 마음을 어떻게 쓰는냐에 따라 흑백에서 컬러로 극적인 변화를 보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마음을 잘 내게 됨에 따라 동네의 모든 사람들이 원래의 모습인 컬러의 세상을 보게 된다는 줄거리이다.

 

탐진치 3독을 금하는 계율이 불교 말고 있을까

 

불교에서는 지혜를 강조 한다. 지혜가 열리면 자비 또한 동시에 자연스럽게 열린다고 믿고 있다. 이제 까지 어느 종교든지 지혜를 강조 하는 종교는 그리 많지 않았다. 대체로 유신론적인 종교는 지혜보다는 사랑을 강조 한다. 창조주로부터의 사랑과 은혜를 말한다. 단지 믿고 따르고 의지 하면 된다. 따라서 인간과 자연과 우주에 대하여 심각하게 고민 하지는 않는다. 반면에 무신론적인 종교는 일단 신의 속박으로 부터 자유롭다. 그렇기 때문에 사유할 수 있는 대상이 있으면 모두 의심 하여 본다. 그래서 믿음이 가면 진실로 믿게 된다.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라 어느 정도 검증된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이다.

 

불교에서의 지혜의 중요성은 어느 정도 일까. 먼저 기독교에서 말하는 10계와 불교의 10계에 대하여 알아 보았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근본계율

 

다른 신을 섬기지 말 것,

우상을 섬기지 말 것,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하지 말 것,

안식일을 지킬 것,

어버이를 공경할 것,

살인하지 말 것,

간음하지 말 것,

도둑질하지 말 것,

거짓말하지 말 것,

이웃의 재물을 탐내지 말 것

 

 

가톨릭의 근본계율

 

1. 하나이신 하느님을 흠숭하여라.

2.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아라.

3.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라.

4. 부모에게 효도하라.

5. 사람을 죽이지 말라.

6. 간음하지 말라.

7. 도적질하지 말라.

8. 거짓 증언을 하지 말라.

9.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

10. 남의 재물을 탐내지 말라.

 

 

 

불교의 근본계율

 

① 살생하지 말라.

② 훔치지 말라.

③ 간음하지 말라.

④ 거짓말하지 말라.

⑤ 이간질하지 말라.

⑥ 멸시하는 말을 하지 말라.

⑦ 실없고 잡된 말을 하지 말라.

⑧ 탐욕하지 말라.

⑨ 노여워하지 말라.

⑩ 사견(邪見,어리석음)에 빠지지 말라

 

 

 

위의 내용은 인터넷의 사전에 나와 있는 내용이다. 유일신종교와 불교와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볼 수 있다. 유일신종교는 철저하게 신위주이고 또한 가장 먼저 지켜야 할 덕목으로 올려 놓았다. 그러나 불교는 마음의 종교답게 내면에서 일어나는 마음의 변화에 대한 경계를 잘 표현 해 주고 있다. 여기서 다른 종교와 가장 차별화 되는 부분이 마지막 3개에 관한 내용일 것이다. 즉 탐진치 3독에 관한 내용이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금하는 계율을 가진 종교가 불교 말고 더 있을까?

 

누구 에게 참회를 할 것인가

 

불교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소위 생활경전이라 불리우는 천수경에서는 탐진치 3독을 중죄로 가정 한다. 그리고 중죄를 지었으니 다음과 같이 참회하라고 말한다.

 

 

살생중죄금일참회《殺生重罪今日懺悔》
투도중죄금일참회《偸盜重罪今日懺悔》
사음중죄금일참회《邪淫重罪今日懺悔》
망어중죄금일참회《妄語重罪今日懺悔》
기어중죄금일참회《綺語重罪今日懺悔》
양설중죄금일참회《양舌重罪今日懺悔》
악구중죄금일참회《惡口重罪今日懺悔》
탐애중죄금일참회《貪愛重罪今日懺悔》
진에중죄금일참회《진에重罪今日懺悔》
치암중죄금일참회《痴暗重罪今日懺悔》

 

 

그렇다면 누군한테 참회 한단 말인가. 부처님인가 자기자신인가. 먼저 참회라는 말부터 알아 볼 필요가 있다. 참회의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은 산스크리트 크샤마(kama)를 음역한 것으로 '뉘우치다', '참다'라는 뜻이고, ''()는 이것을 의역한 것이다. 원시불교 이래 석가모니의 제자들은 죄를 참회하는 방법으로 포살(布薩)과 자자(自恣) 등의 의식을 행했다. 포살은 수행자들이 보름마다 1번씩 부처나 큰 스님을 모시고 계본(戒本)을 읽으며 계를 범한 수행자가 대중 앞에 자신의 죄를 고백하여 참회하는 의식이다.

 

 

여기서 '포살(布薩)' '자자(自恣)'라는 말이 나온다. "포살은 보름달이 뜰 때와 초승달이 뜰 때 사찰의 구성원들이 모여 계율의 조문을 암송 하면서 스스로를 반성하는 것이다" 라고 나와 있다. 자자는 무었인가. 보통 음력 7월 보름에 실시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하안거가 끝났을 때 수행도중 일어난일을 서로 반성 하고 자발적으로 고백 하는 행위를 말한다. 수행자가 아닌 일반신자들 입장에서 포살과 자자를 통해서 참회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자신이 의도적으로 한 행위에 대해서 자신에게 뉘우치고 진리에 따른다는 의미에서의 목적이 더 클 것이다. 부처님이 열반에 들려고 할 때 마지막으로 당부 한 말인 '자등명 법등명'의 가르침을 떠 올리면 될 것 같다.

 

나이를 먹으면 지혜로워 진다고 하는데

 

사람들은 나이를 먹어 감에 따라 지혜로워 진다고 한다. 한 때 어리석었던 행위에 대한 과보를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인들의 말을 경청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비록 많이 못 배우고 가진 지식은 별로 없을 지라도 살아 가면서 몸으로 부딪치며 체득한 지혜는 말 한마디에 실려 있는 경우도 있다. "허황된 욕심을 부리지 말라"와 같은 말이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맹목적인 믿음 또한 어리석음의 범주 안에 들어 간다. 무조건적인 믿음은 독선적이고 배타성을 띠기 쉽다. 특히 유일신교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일찌기 부처님은 이런 맹목적인 믿음에 대하여 큰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비판 한 바 있다. 지금의 유일신교와 비숫한 교리를 가진 종교가 부처님 당시에 브라만교가 있었다. 세상을 창조한 창조주로서의 브라흐마가 있고 사람들은 이를 굳게 믿고 있었다. 그래서 인간의 이성이나 자유의지는 박탈되고 오로지 신에게만 의지 하는 행위만 남아 있는 형태이었다. 부처님은 결국 신의 속박에서 인간을 해방한 역할을 한 것이다. 21세기의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현상 또한 부처님당시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너무 신에 얽매여 있고 모든 것을 신의 뜻대로 처리 하는 풍조가 결국은 자연환경의 파괴와 전쟁도 불사 하는 시대에 사는 세상을 만들었다.

 

불교의 근본계율인 탐진치 3독을 제거 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아니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깨달았다는 사람들의 한결 같은 이야기는 3독에서 벗어 났다고 말한다. 단지 신의 뜻대로 자신을 맡기는 것 보다 스스로 깨우쳐 갈려고 할 때 지혜는 더 빨리 열릴 것이다. 옛말에 남이 나의 안전을 책임져 주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근본적인 문제는 자신이 풀어 가야 한다. 남이 해주기를 바라고 그대로 따라 간다면 노예나 종의 다름이 아닐 것이다.

 

나도 부처님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을까

 

금강경에 육안(肉眼) 천안(天眼) 혜안(慧眼) 법안(法眼) 불안(佛眼)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육안은 단지 눈으로만 보이는 세계이다. 보이는 세상이 흑백이라면 그 사람은 세상이 오로지 흑백으로만 이루어진 세계만 있는 줄 안다. 그러나 영화에서와 같이 컬러로 된 세상을 보게 되면 이제 까지 보지 못하였던 세상을 경험하게 되는 장면을 본다. 천안이 열린다면 흑백세상에서 컬러세상으로 바뀌는 것 과 같은 현상이 아닐까 생각 해 본다. 거기다가 들리지 않은 소리 까지 들려 온다면 혜안이 열린다고 또 가정해 본다. 이 외에도 법안과 불안이 있지만 인간의 사유 능력의 범위를 벗어 나기 때문에 알 수 없을 것이다. 마치 강아지가 생각 하는 것과 사람이 인식 하는 정도라 할까 그 간격은 너무 커서 자신의 생각의 틀을 깨뜨리지 않는 한 접근조차 할 수 없을지 모른다.

 

금강경에서 가장 높은 경지를 불안이라 하였다. 부처님의 눈으로 본 세상이다. 그런 세상을 보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그러나 금강경에서는 분명히 말하고 있다. 약견제상(若見諸相非相)하면 즉견여래 (卽見如來)라고 하였다. 모든 상을 상 아닌 것으로 본다면 여래를 보리라고 말이다. 그 경지는 인간의 인식으로는 느낄 수 없는 세계일 것이다, 부처님경지에 다다른 사람들만 보게 되는 세상일 지 모른다. 그렇다고 먼 훗날 수 억겁 후로 미루어 둘 일인가. 누구나 볼 수 있고 접근 할 수 있는 세상이라면 가르침대로 하면 될 것이다. 즉 자신의 주관적인 인식을 내려 놓고 보게 된다면 볼 수 도 있지 않을까. 인식을 하기 때문에 주관과 객관으로 분리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는 부처님의 경지를 볼 수 없다는 말과 같을 것이다. 인식을 하지 않는 것 즉 나라는 생각이 없을 때만 보이는 것이 아닌지.

 

불교는 신이라는 속박에서 벗어나 있다보니 인간의 상상력을 거의 무한대까지 확장 시켜 갈 수 있었다. 만일 모든 것을 신에게 의지 하여서 잘 되도 신의 탓이고 잘 못 되도 신의 탓으로 돌렸다면 인간의 상상력을 발휘 할 수 있었을까. 그런 면에 있어서 불교는 종교임과 동시에 철학이고 과학이다. 아니 종합학문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 할 것이다. 의심나는 모든 사항에 대하여 의심하고 의문이 풀리는 사항에 대하여 믿기 때문이다. 그런면에서 불교는 진리에 가깝다. 이제 까지 잘못 알려진 불교가 정보통신시대와 인터넷 세상에서 활짝 꽃필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다.

 

 

 

 

2008-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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