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보살'은 점집이나 무속인에게만 쓰이는 말인가

담마다사 이병욱 2008. 6. 21. 10:12

 

'보살'은 점집이나 무속인에게만 쓰이는 말인가

 

 

보살(菩薩), 위대한 원력과 신심을 바탕으로

모든 유정중생을 열반으로 이끄는 영웅

 

 

맨날 얻어 먹기만 하는  친구

 

맨날 얻어 먹기만 하는  친구가 있다. 모임이 있어서 나가면 의례히 식당에 가서 식사를 하고 술도 한잔 하게 마련이다. 그러면서 그 동안 지내온 이야기나 세상돌아 가는 이야기도 하게 된다. 학교친구 같은 경우는 비교적 이해관계에서 자유로운 사람들이다. 그리고 연령도 똑같고 같은 과 출신이면 생각 하는 것도 비슷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격의 없게 어울리고 때로는 호기를 부리기도 한다. 그런데 나중에 계산 할 때 꼭 빠지는 사람이 있다. 자신은 돈이 없기 때문에 못 낸다는 식이다. 그런 것도 한두번이지 매번 그런다면 그런사람으로 이미지가 굳어버리게 된다. 친구이니까 용서 되지만 사회에서 그렇게 한다면 거래관계는 오래전에 종료 되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주는데 참으로 인색하다. 심지어 가장 가까이 사는 사람조차도 줄지 몰라 주지도 않는 경우도 많이 있다. 주는 것도 주어 버릇해야 느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사랑도 한꺼번에 다 주면 안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조금씩 야금 야금 주어야 고마움을 안다고 하는데 매우 얌체같은 사람이라 볼 수 있다. 사랑을 주는데 있어서 찔끔찔끔 주면서 감질나게 만드는 행위야 말로 매우 이기적인 발상이라 볼 수 있다. 사랑을 주는 데 있어서도 조건을 따지고  이해관계로 파악 하는 것이다. 마치 유일신교에 말하는 조건부 사랑을 보는 것과 같다.

 

 

 

'보살'은 점집이나 무속인에게만 쓰이는 말인가

 

불교에서는 가장 이상적인 인간상을 보살이라 부른다. 그런데 그 보살이라는 말이 엉뚱한 곳에 쓰여져서 본질이 흐려지게 되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점집을 들 수 있겠다. 길거리를 가다 보면 무슨보살 하는 식의 간판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이 그 것을 보고서 보살인란 점집에서 점을 봐 주는 사람을 지칭해서 보살이라고 오해 하기 쉽다는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스포츠지의 광고란에서도 무수히 볼 수 있고 인터넷에서 카페에서도 볼 수 있다. 보살이라는 이름을 사칭하기에는 무당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점집과 무당집에서 이 보살이라는 용어를 사용 하였을 때 타종교인이 보았을 때 공격하기 좋은 빌미를 제공 하는 것이다. 즉 불교는 점집과 무당집에서나 믿는 미신적이고 우상숭배의 종교로 폄하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종교의 우월성을 강조 하는 것이다.

 

점집과 무속인들이 무분별하게 사용함에 따라 일반인들에게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주고 타종교인게 공격 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해주는 보살이라는 말은 어떤 말일까. 인터넷에서 사전을 찾아 보았다.

 

 

국어사전

 

보살[菩薩]

1. 부처가 전생에서 수행하던 시절, 수기를 받은 이후의 몸.

2. 위로 보리를 구하고 아래로 중생을 제도하는, 대승 불교의 이상적 수행자상.

3. 같은 말: 보살승(菩薩乘).

 

 

위키백과

 

보살[菩薩]

보살(산스크리트어 bodhisattva, 菩薩)은 원래 부처가 되기 위해 수행하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다. 이후 불교의 발전에 따라 흔히 수 없이 많은 생을 거치며 선업을 닦아 높은 깨달음의 경지에 다다른 위대한 사람을 뜻하게 되었다. 해심밀경에서는미세하고 아주 깊고 통달하기 어려워 범부나 이승은 이해할 수 없는 승의제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을 보살이라 하고 있다. 보리살타, 보살마하살, 각유정 등으로도 불린다.

 

 

사전적인 의미에서 보살은 상구보리 하화중생하는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나와 있다. 점집이나 무속인이 사용하는 보살의 이미지 하고는 한참 거리가 있는 말이다. 그러나 보살이라는 용어를 좀 더 쉽고 분명하게 잘 전달 하는 말은 다음과 같은 말이 아닐까 생각 된다.

 

보살 [菩薩]

위대한 원력과 신심을 바탕으로 모든 유정중생을 열반으로 이끄는 영웅

 

이말은 불교교양대학 다닐때 교재에 나오는 말이다. 보살을 일종의 영웅으로 본 것이다. 그 것도 사람만이 아닌 모든 유정중생들 즉 지옥에서 고통받고 있는 지옥중생부터 축생 그리고 심지어 천상에서 온갖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는 천신들까지 모든 존재를 제도 하는 이상적인 인간상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보살이야말로 진정한 영웅이고 가장 본 받아야할 인간상이다. 그런 대표적인 보살이 아마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이 될 것이다.

 

 

 

 

 

가장 이상적인 인간상은

 

보살은 대승불교가 발생 되면서 만들어낸 이상적인 인간상이다.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은 역사적인 실제인물은 아니다. 다만 닮고 싶어 하는 인간상이다. 그래서 불교신자들에게 보살칭호를 붙여 주는 이유도 아마 보살과 같은 보살행을 하라는 의미에서 붙여 주었을 것이다. 특히 여성신자들에게 보살칭호를 붙여 주는데 매우 아름다운 말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보살이 가장 이상적인 인간상이라면 이에 반대 되는 개념은 중생이라 볼 수 있다. 불교에서 중생의 개념은 사람만이 해당 되는 것은 아니다. 축생도 해당되고 지옥에서 고통 받는 있는 존재도 해당된다. 이뿐만이 아니라 천상에 있는 천신도 중생에 해당 된다. 선행을 해서 천상에 태어 났다 하더라도 보살행을 하지 않으면 제도해야 될 중생인 것이다.

 

불교는 최종적으로 성불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성불을 하지 않은 모든 존재는 중생인 것이다. 그런데 보살은 수 억겁동안 보살행을 해서 성불단계에 이르른 존재이다. 그러나 자신 혼자만 성불의 길로 갈 수 없어서 모든 중생들이 성불할때 까지 잠시 성불을 미루어 놓은 것이다. 마치 나혼자 만 잘 살겠다고 좋은 옷을 입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안락하고 편안한 삶을 접어 놓은 것과 같다. 남들은 헐 벗고 굶주리고 고통 속에 사는데 나만 잘 살겠다는 이기적인 욕심을 내지 않는 것과 같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도움을 주려고 한다. 그 실천 방안이 '6바라밀'이라 볼 수 있다. 이렇게 아름답고 위대한 사상이 대승보살 정신이다. 한낱 점집이나 무속인이 사용하는 그런 이기적인 인간상은 아닌 것이다. 보살은 이 세상을 제도 하겠다는 원력을 품은 위대한 영웅인 것이다.

 

'대승기독교' '보살예수'를 주장 하는 학자도

 

대승보살사상은 최근에 타종교에서도 연구대상인 모양이다. 타종교 학자의 경우 불교의 대승사상을 받아 들여 '대승기독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 하고 예수도 '보살예수'이어야 한다고 말하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이제야 불교의 진면목을 제대로 알리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제까지 기독교도 알고 보면 소승기독교이고 자신의 구원에만 관심을 가지는 소승적 사고방식이었다는 것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는 2000년전에 벌써 이런 훌륭한 사상이 열려져 왔고 또한 실천사항으로 전수 되어 왔다. 다만 서세동점의 과정에서 심하게 왜곡되고 폄하 되어 와서 진실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을 뿐이다.

 

21세기는 다양화시대이다. 어느 한 사상이 그 시대를 지배하여 획일적인 사고방식으로 통제 하는 시대는 지났다. 종교 역시 편협한 독선적인 교리와 배타적인 구원만이 먹혀 들어가지 않는 시대이다. 그렇게 되기 까지에는 정보통신과 인터넷의 발달의 영향이 크다. 과거와 같이 지식을 통제하고 제제 하기에는 사회가 너무 열려져 있다. 과거로 되돌아 갈 수 없는 시대가 된 것이다. 만일 과거로 되돌아 가서 일사분란한 통제의 시대를 그리워 한다며 이미 낡은 패러다임이 될 것이다. 모든 정보가 오픈되고 공유되는 개방화시대에 불교의 진면목이 알려지고 있는 것은 다행이라 여겨 진다. 보살이라는 말이 결코 점집이나 무속에서나 사용 되는 천한 말이 아니라 위대하고 아름다운 말이라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도 인터넷 덕분이 아닐까.

 

 

 

2008-06-21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