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연예인 자살로 본 허무주의와 영생주의

담마다사 이병욱 2008. 10. 5. 10:49

 

연예인 자살로 본 허무주의와 영생주의

 

 

경제가 좋지 않다고 한다. 주가는 폭락하고 경제지표는 매달 하강곡선을 그리고 있다. 매번 경제가 좋지 않다고 이야기 하지만 이번 만큼은 더 심한 모양이다. 그러나 IMF가 터졌을 때 같이 정신적인 공황을 야기 하던 때가 있었을까. 그런데 IMF공황에 못지 않은 정신적인 충격을 주고 있는 것이 있다. 바로 연예인들의 자살 소식이다. 그것도 국민탤런트라는 사랑과 인기를 받던 연예인의 죽음은 생활경제의 어려움 못지 않게 국민을 우울하고 허탈하게 만든다.

 

행복감과 행복은 같은 말일까

 

이세상을 고해(苦海)라고 한다. '고통의 바다'라는 뜻이다. 즐겁고 행복한 일보다 괴롭고 슬픈 일이 더 많은 것이 인간사라는 것이다. 많이 가진다고 행복할 것 같지만 그 기분은 일시적이다. 50억을 가졌으면 100억을 가지고 싶고 99억을 가졌으면 100억을 채우고 싶어 하는 곳이 본성이다. 그런데 100억을 가졌다고 행복해 할까. 이제는 목표를 1000억을 잡을 것이다. 이렇게 한도 끝도 없는 것이 인간욕심이다. 목표달성 했을 때 잠시 행복감을 느낄 지언정 이것이 영원히 오래 가지 않는다. 일시적인 행복감일 뿐이지 진정한 행복은 아니라는 것이다. 대학에 붙었을 때, 가고자 하는 회사에 취업이 되었을 때, 가지고 싶었던 물건을 샀을 때, 크고 넓직한 아파트에 입주 하였을 때, 연인과 같이 있을때 행복감을 느낀다. 그러나 그 행복감이 영원히 지속 되지 않는다. 또 다른 행복과 만족을 찾아서 앞으로 나갈 뿐이다. 그 끝은 어딘지 알 수 없다.

 

돈을 많이 가지면 행복한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돈으로 인하여 고통을 맛본다. 마찬가지로 많이 먹으면 먹을 수록 입이 고급화 되어 맛있는 것만 찾게 된다. 그 결과 뚱뚱해지고 각종 성인병에 시달린다. 순간적인 쾌락을 위하여 성을 탐닉 하지만 도무지 그 끝은 알 수 없다. 더욱 더 갈증만 날 뿐이다. 마음껏 잠을 자고 개으름을 피워 보지만 점점 더 늘어질 뿐이다. 서 있으면 앉고 싶고 앉아 있으면 눕고 싶고 누워 있다 보면 자고 싶은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 분야에서 성공하여 명예를 누리고 권력까지 맛보지만 명예와 권력을 유지 하기 위하여 무리수를 둔다. 이 모든 것이 이루어졌을 때 순간적으로 쾌감을 느끼고 행복감을 느끼지만 아쉽게도 이런 기분은 영원히 지속 되지 않는다.

 

윤회하면서 흘린 피의 양은 얼마나 될까

 

사람들은 식욕과 성욕 그리고 재물욕, 수면욕, 명예와 권력욕을 추구한다. 이것들이 이루어졌을 때 일시적인 행복감을 맛보고 순간적으로 스트레스가 해소 되지만 영원히 지속 되지는 않는다. 영원히 이런 행복이 계속 되기를 집착 하면 할 수록 그와 비례하여 이루지 못하였을 때 고통도 증가 하게 되어 있다. 영원을 추구 하면 추구할 수록 고통만 가중 될 뿐이다. 인기연예인의 자살도 아마 영원을 추구 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일 것이다. 인기와 명예가 영원히 지속 되기를 바랐으나 뜻대로 되지 않게 되자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을 것이다. 비단 이런 연예인들에게만 이런 현상이 일어 난다고 볼 수 있을까. 세상에 사는 사람들 누구에게나 이런 현상을 있을 수 있다. 바로 오욕락을 추구 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는가는 다음의 글이 잘 말해 주고 있다.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가 없다. 무명에 덮인 뭇 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가 없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대들이 오랜 세월을 통해서 유전하고 윤회하면서 목을 잘려 흘리고 흘린 피와 사대양에 있는 물 가운데 어느 쪽이 더욱 많겠는가?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설하신 가르침으로 미루어보건대 세존이시여, 저희들이 오랜 세월을 통해서 유전하고 윤회하면서 목을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훌륭하다. 수행승들이여, 훌륭하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내가 설한 가르침을 제대로 잘 알고 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을 통해서 유전하고 윤회하면서 목을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을 소로 태어나 소가 되어 목을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을 물소로 태어나 물소가 되어 목을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을 양으로 태어나 양이 되어 목을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을 염소로 태어나 염소가 되어 목을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을 사슴으로 태어나 사슴이 되어 목을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을 닭으로 태어나 닭이 되어 목을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을 돼지로 태어나 돼지가 되어 목을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을 도둑으로[7] 살면서 마을을 약탈하다 사로잡혀 목을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을 도둑으로 살면서 길섶에서 약탈하다 사로잡혀 목을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을 도둑으로 살면서 부녀자를 약탈하다가 사로잡혀 목을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가 없다.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가 없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참으로 오랜 세월을 그대들은 괴로움을 맛보고 아픔을 맛보고 허탈을 맛보고 무덤을 증대시켰다. 수행승들이여, 그러나 이제 그대들은 모든 지어진 것에서 싫어하여 떠나기에 충분하고 초연하기에 충분하며 해탈하기에 충분하다.

 

 

이글은 재성박사의 '왜 빠알리 니까야를 읽어야 하는가'에 나온 이야기이다. 이 경전을 보면 수억겁동안 윤회 하면서 흘린 피가 지구상에 있는 사대양의 바다물 보다 더 많았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인생이 단 한번 뿐이라면 그 흘린 피의 양은 얼마 돠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지구상의 모든 바닷물 보다 더 많은 피를 흘렸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얼마나 많은 삶을 살았기에 바닷물 보다 더 많은 피를 흘렸을까. 경전에는 수억겁을 살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수억겁중에 1겁은 어느 정도의 시간이라 볼 수 있을까. 겁에 대하여 여러 가지 비유가 있지만 가장 실감 나는 비유가 바로 아래와 같은 경우일 것이다.

 

 

'억겁'은 어떤가? ''은 공식적인 단위 수는 아니지만, 불교적인 의미를 갖는 시간 단위다. 불교에서 정의하는 겁은 상상할 수 없는 가장 긴 시간이다. 달구지로 한나절 걸리는 거리( 14km)를 한 변으로 하는 정육면체 모양의 바위를 선녀의 옷자락으로 100년에 한 번씩 스쳐 바위가 다 닳아 없어져도 겁이 끝나지 않는다고 한다. 겁이 억 개나 있는 억겁은 상상조차 어려운 오랜 시간이다. 동양의 방식은 10 4승 단위로 올라가나 서양식은 10 3승 단위로 올라간다. 영어의 thousand(10 3), million(10 6), billion(10 9), trillion(10 12)에서 그 사실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아라비아 숫자에서 세 자리마다 찍는 코마는 우리말에서는 이득을 볼 것이 없다. 차라리 네 자리마다 코마를 찍어야 억.조를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한변이 14Km에 달하는 바위를 100년에 한번 선녀의 옷자락으로 스쳐서 바위가 다 닿아 없어졌을 때를 일겁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일겁도 아니고 억겁이라고 말한다면 우리의 상상력을 초월 한다. 그런 수억겁동안 윤회 하면서 흘린피의 양은 당연히 5대양의 바닷물 보다 더 많음에 틀림없다. 그런 논리로 따진 다면 수억겁동안 윤회 하면서 흘린 눈물의 양도 당연히 바닷물 보다 더 많을 것이다. 이 뿐인가 수억겁동안 윤회 하면서 먹어 치운 고기의 양은 에베레스트 산 꼭대기 보다 더 높았음에 틀림 없다. 수억겁동안 윤회 하면서 뿌린 정액의 양은 또 어떠 할까. 이 또한 오대양의 바닷물 보다 더 많았을 것이다. 또 명예와 권력을 추구 하면서 남을 밝고 올라가거나 불법과 탈법도 서슴치 않고 저질렀을 것이다. 이렇게 �힌 사람들 또한 지구상에 살아온 전인류 보다 더 많았을 것이다.

 

 

 

 

 

죽으면 끝나는 것일까

 

억겁의 윤회론적인 관점에서 본 다면 인간의 일생은 거의 찰나에 가깝다. 그리고 흘린 피가 이번 생 단 한번 뿐만이 아니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이미 오래전에 수 없이 많은 피를 흘렸었고 그 것도 사람의 몸을 받아서만 흘린 피가 아니라 사람들이 매일 먹는 소나 돼지, 닭과 같이 동물이었을 때도 피를 흘렸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사람들은 죽으면 끝이라는 생각과 인간의 영혼이 영원히 살 수 있다고 생각 한다. 만일 단 한번 뿐인 인생이라면 막 살아도 될 것이다. 마음껏 쾌락을 추구 하고 악행을 저질러도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 하기 때문이다. 일종의 허무주의라 볼 수 있다. 또 인간의 영혼이 있어서 영생할 것이라는 믿음도 있다. 즉 죽은 후에 절대자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이다. 이 모두가 인생은 단 한번 뿐이라는 사고와 닿아 있다. 오로지 한번 뿐인 이번 생을 위하여 최대한 쾌락을 즐기고 오욕락과 같은 욕망을 추구 하는 것이다. 어차피 죽은 다음에는 끝이므로 누릴 것 다 누리고 지구상의 가용 자원을 다 소모 하고 사라 지는 것이다. 이와 같은 허무주의와 영생주의 모두는 윤리적으로 타당 하지 않다. 오늘의 삶이 어제와 다르면서 지속 하듯이 죽은 후에도 윤회하며 지속 하는 삶을 가정 하지 않는 다면 결코 윤리적인 삶을 살 수 없을 것이다.

 

윤리적으로 본 허무주의와 영생주의

 

사람들은 사소한 일에 얽매여도 고통스러워 한다. 그런데 무량업겁을 관통하는 죽음이라는 실존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다면 그런 고통은 고통이 아닐 것이다. 한 연예인의 죽음을 본다면 분명 허무주의에 빠져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한번 죽으면 끝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을지도 모른다.  것이다. 이런 경우 자신이 믿는 종교는 그다지 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허무주의와 영생주의 모두 인생을 단 한번으로 본다. 그런데 구원을 얻지 못했다고 생각 한다면 절대자의 우편에 앉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즉 버림 받았다고 생각 했을 것이다. 거기에다 죽으면 끝이라는 허무주적 생각이 들었다면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은 커다란 장애 요소가 되지 않았을지 모른다.

 

불교는 허무주의와 영생주의를 배격 한다.  이들 모두가 윤리적으로 타당 하지 않기 때문이다. 단 한번 뿐이 인생 이라면 죽으면 끝이라면 마음껏 쾌락을 즐기면 되고 지구환경이야 오염 되든 자원이 고갈 되든 나와 상관 없는 일이 될 것이다. 인간의 영원을 믿어 현실을 무시한 채 죽은 후에 절대자의 우편에 앉아서 영생하기만을 바라는 것도 윤리적으로 타당 하지 않다는 것이다. 윤리적이고 지속적인 삶을 가정 한다면 불교의 윤회야 말로 지구와 인류의 멸망으로 부터 구해 낼 수 있는 나침반과 같은 것이다. 사소한 일에 얽매여 목숨을 거는 일 도 없어 질 뿐더러 우리의 삶과 환경을 풍요롭게 이끌 수 있는 중요한 가르침이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오래전 부터  수억겁 동안 윤회 하면서 5대양의 바닷물 보다 더 많은 피를 이미 흘렸다.  다만 알아채지 못 했을 뿐이다. 경전에 나와 있는 다음의 부처님의 말씀이 가슴에 와 닿는다.

 

 

 참으로 오랜 세월을 그대들은 괴로움을 맛보고 아픔을 맛보고 허탈을 맛보고 무덤을 증대시켰다.

 

 

 

 

 

2008-10-05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