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혜화동 로터리, 추억의 장소에 낯선 이방인들이 서성일 때

담마다사 이병욱 2008. 12. 23. 11:53

 

혜화동 로터리, 추억의 장소에 낯선 이방인들이 서성일 때

 

 

고향. 말만 들어도 아련한 추억이 떠 오른다. 고향에 살고 있지 않고 타지에 사는 경우가 특히 그렇다. 태어나서 부터 고향에서 죽 살아 왔다면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 하겠지만 고향 떠난지가 오래 된 사람들은 매우 정겹게 느껴지는 곳이 고향이다. 그런 고향 못지 않게 정겹게 느껴 지는 곳이 있다. 바로 자신이 다니던 학교이다. 오랜만에 찾아 보는 학교는 잠시 그 시절의 추억을 더듬어 보기에 충분하다.

 

'아카데믹'한 분위기의 혜화동 로터리

 

청소년기의 중고교는 혜화동로터리 인근에 있었다. 혜화동 로터리를 중심으로 가장 가까이에는 '동성중고'가 있고  좀더 안쪽으로는 '경신중고'와 '보성중고', '혜화여고'가 있었다. 종로5가 방향으로는 좀 더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동대부중고''정신여중고'가 있었다. 이와 같이 혜화동 로터리를 중심으로 여러개의 중고교가 밀집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대학도 여러 개가 위치 하고 있다. 가장 가까이에 '가톨릭대'가 있고 명륜동에 '성균관대', 대학로에 '서울대의대'가 있다. 또 '방송통신대'도 부근에 있어서 혜화동 로터리는 '아카데믹'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혜화동로터리. 상징과 같았던 고가차도는 없어 졌다.

 

 

오랜만에 찾아본 혜화동 로터리는 많이 변해 있었다. 가장 큰 변화는 고가차도가 없어 졌다는 것이다. 고가차도는 도로를 가로지르고 항상 머리 위로 지나는 것으로 알고 있었으나 지금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 대신에 탁트인 공간과 함께 마음도 뻥 뚫린 듯한 시원한 느낌을 가져다 준다.

 

 

 

 

탁트인 혜화동로터리. 터줏대감격인 혜화동성당이 보인다.

 

 

떠난 학교, 남아 있는 학교

 

건물을 세웠다 허물었다 하는 것은 도시의 피 할 수 없는 숙명인가 보다. 혜화동로터리 부근의 학교도 예외는 아닐 듯 싶다. 먼저 보성중고 같은 경우는  강남으로 이전 한 자리에 '서울과학고'가 들어섰다. 예전의 교사는 다 허물고 새로 지은 현대식 교사가 자리 하고 있다. 터만 유지 하고 있을 뿐이지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혜화여고' 같은 경우는 교명이 바뀌었다. 교문에서 보는 교명은 '혜화초등학교'이다. 건물자체는 예전의 그 모습 그대로이지만 고등학교가 초등학교로 변화 된 것이 특징이다. 그래도 옛날의 교사가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학교자체가 아예 없어진 곳이 있다. '동대부중고''정신여중고'이다. 이들 학교가 너무 도심 가까이에 있었던 탓도 있었을 것이다. 그 학교부지에는 이제 고층빌딩이 가득 들어차 있다. 예전의 학교모습은 찾아 볼 수 없다. 학창시절의 추억 자체가 사라진 것이다. 이 부분이 가장 애석해 하는 부분이다. 이들 학교들이 사라지지거나 교명이 바뀌는 등의 부침이 있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학교도 있다. '경신''동성'이 그렇다. 다들 강남과 같은 외지로 이전하고 떠났지만 마치 고향을 지키는 노송과 같이 그 자리에 꿋꿋하게 서 있다. 그리고 추억도 간직해 주고 있다.

 

 

 

 

혜화동의 경신중고. 서울외곽성벽 위에 건립 되었다.

 

 

 

 

 

로터리 바로 옆에 있는 동성중고

 

 

혜화동로터리의 변하지 않은 것들

 

고가차도가 사라지고 학교들이 외지로 이전 하였지만 그래도 혜화동로타리 주변에 변하지 않은 곳이 있다. 명륜동 쪽의 반원형 3층 건물 바로 그 것이다. 뒷편의 병원이 아파트로 바뀌고 주변에 큰 건물이 들어 섰지만 3층짜리 벽돌 건물은 예전 그대로이다. 1층의 가게들이 세월따라 여러번 바뀌었지만  그 중에서도 변함 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 서점이다. 예나 지금이나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로터리 안쪽에 반원형의 3층 벽돌건물. 유일하게 변하지 않은 곳이다. 특히 서점은 그대로 있다.

 

 

 

혜화동로터리의 역사와 함께 하고 있는 터줏대감 같은 곳이 있다. 바로 혜화동성당이다. 혜화동을 상징 하는 것과 같은 혜화동성당은 버스 타고 다닐때 언제나 보는 곳이다. 특이한 것은 성당의 벽면에 써진 글씨이다. "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로라"라는 요한복음 14 6절에 나와 있는 문구이다. 여기서 '생명이로다'가 아니라 '생명이로라'이다. '로라'라고 했을까 항상 의문스러웠다. 지금도 왜 '로라'인지 알 수는 없지만 혜화동성당 하면 '로라'라는 끝말이 연상 된다.

 

 

 

 

혜화동성당의 벽면의 글씨. '~생명이로다'가 아니라 '~생명이로라'이다.

 

 

 

혜화동로터리의 극적인 변화는

 

과거에 혜화동로터리의 상징물은 고가차도 이었다. 그런 고가차도가 없어지지는 것과 같은 극적인 변화를 혜화동로터리에서 최근 볼 수 있다. 과거에는 볼 수 없었던 광경이 펼쳐 지고 있는 것이다. 휴일에 보는 필리핀사람들이다. 혜화동성당에서 부터 시작해서 대학로 초입까지 길게 형성 되어 있는 필리핀 공동체의 노점이 바로 그것이다. 이곳에 오가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필리피노이다. 그렇다면 왜 여기가 필리피노들의 모임터가 되었을까.

 

 

 

 

동성고 담벼락의 필리핀 노점시장. 대부분이 필리핀인이고 필리핀인을 상대로 장사를 한다.

 

 

휴일날 외국인들은 갈 곳이 별로 없다. 주로 전철을 이용하여 이동 하는데 돈이 들어가지 않은 곳을 찾아 다니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철과 가깝고 사람들이 많으면서 볼거리가 있는 곳, 거기에다 돈이 들어가지 않은 곳이라면 어디서든지 외국인근로자들을 볼 수 있다. 그 중에 하나가 '대학로'이다. 대학로 놀러 왔다가 근처에 성당이 있는 것을 보고 미사에도 참여 했을 것이다. 이렇게 하나 둘 늘어 가다 세월과 함께 그들 나름의 공동체가 형성 되지 않았을까.

 

 

 

 

노점에서 파는 소세지. 안쪽에서 식사 하는 사람도 보인다.

 

 

 

 

노점에서 파는 갖가지 상품들. 오리알처럼 보이는 알과 작은 바나나, 얼린고기, 생필품등 매우 다양하다.

 

 

막연한 우려가

 

노점에서 보는 필리피노는 한눈에 구별이 된다. 확실히 우리와 다른 피부색깔과 다른 이미지를 풍기기 때문이다. 이런 필리피노가 커다란 공동체를 도시 한복판에서 본다는 것이 일견 신기하기도 하였지만 일견 우려를 주기도 한다. 어느새 도시의 한쪽켠을 점령하고 그들만의 세계를 형성해 나가는 것에 대한 막연한 우려이다. 사실 필리피노들이 우리나라에만 진출해 있는 것은 아니다. 나라가 못살다 보니 전세계각국에 흩어져서 살고 있다. 대부분이 외화벌이를 목적으로 한 근로자들이다. 여성 같은 경우는 '식모'로서의 이미지가 강하다. 주로 주방에서 활동하거나 가정부로 취업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외국인이 절반이 넘는다는 두바이에서 필리핀 여성들은 가정부와 같은 직업에 종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교포가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에서도 필리핀출신 가정부가 일하고 있는 것을 실제로 목격하기도 하였다.

 

 

 

혜화동성당 입구에서 산타복장을 한 필리핀인이 무언가를 나누어 주고 있다.

 

 

추억의 장소에 낯선 이방인들이 서성일때

 

도시의 변화는 무상함을 느끼게 해주기에 충분하다. 고정 되어 있지 않고 항상 변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세월과 함께 변화 하는 모습을 보면 도시는 살아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건물이나 학교, 가게를 보면 마치 고향을 지키고 있는 나이 드신 어르신을 만나는 것 같은 기분이다. 추억을 찾아 왔는데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낯선 건물이 들어차 있다거나 이름이 바뀌어서 예전의 그 모습을 찾을 수 없을 때의 심정은  참으로 착잡하다. 더구나 추억의 장소에 낯선 이방인들이 서성이고 그들만의 공동체를 이루면서 살아 가는 모습을 보게 되었을 때 엄청난 변화를 느끼게 된다. 불과 얼마 안 되는 사이에 이런 극적인 변화를 보게 되는데 앞으로 변화는 더욱더 극적으로 변하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

 

 

 

 

 

 

2008-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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