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중년에 마음공부 하는 이유는

담마다사 이병욱 2009. 1. 17. 12:33

 

중년에 마음공부 하는 이유는

 

 

사무실에 앉아 있다 보면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누구냐고 물어보고 문을 열어서 확인 하기 전에는 들어 오지는 않는다. 문을 열어서 확인 하면 전도 하러 나온 사람들이다. 대게 나이는 지긋한 노인인 경우가 많다. 그 들은 준비한 팜플렛을 주면서 한번 읽어 보라고 말한다. 그 팜플렛을 보면 매우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의 그림이 그려져 있고 그림에 대한 내용이 적혀져 있다. 이런 경우 거의 대부분이 '여호와의 증인'이다. 기독교에서도 이단 취급을 당하는 그들의 전도열정은 본 받을 만 하다. 비록 거절 당할 지라도  태도는 매우 공손하다. 이렇게 가정집은 물론 사무실까지 가리지 않고 돌아 다니는 정열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천주교에서 불교로 개종한 법우

 

종교에 입문하는 경우를 보면 전도에 의해서 믿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자발적으로 찾아 가서 믿는 경우도 많다. 이런 경우 산전수전을 다 겪은 케이스라 볼 수 있다. 알고 지내는 법우 중에 한 분이 바로 그런 경우에 해당 된다. 그 분은 20여년간 성당을 다니다 불교로 개종한 케이스이다.

 

그 법우님은 불교교양대학에 다니게 되었을 때 알게 되었다. 방향이 같아서 수업이 끝나면 '카풀'해 드렸다. 그러면서 여러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왜 불교로 개종하게 되었는가 하고 물어 보았다. 성당이 싫어서라고 또는 천주교가 믿음이 가지 않아서 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오히려 누구 보다 더 열심히 활동하고 적극적으로 20여년간 신행생활을 하였지만 충족 되지 않은 무언가가 있어서라고 말한다. 그러다가 우연히 불교의 교리에 대한 CD를 접하게 되었고 호기심이 나서 스스로 인터넷에 들어가 이것 저것 뒤져 보았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재미있고 그 동안 모르고 지냈던 사항도 알게 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좀더 구체적으로 알고 싶어서 스스로 찾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식의 이야기는 처음 듣는 것은 아니다. 전에 직장 다녔을 때 직장 상사도 비슷한 케이스이다. 그 분도 천주교 신자 이었는데 불교에 대하여 누구 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천주교에 계속 다닌다. 그 분이 불교에 관심을 가지게 된 동기는 인터넷 덕분이다. 불교와 관련된 인터넷사이트를 들락 거리다 보니 불교에 대하여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불교가 매우 재미 있다고 말한다. 천주교 사이트의 경우 볼 것이 별로 없는데 불교는 교리가 방대하고 모르고 지냈던 사실도 교리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현대에 있어서 인터넷의 위력을 실감 하는 대목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불교교양대학에서는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만난다. 젊은 층 보다는 나이 지긋하신 분들이 대부분이다. 보통 자녀들을 다 키워 놓고 시간적인 여유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정도 나이가 되면 인생을 한 번쯤 뒤 돌아 보는 여유가 생기는 모양이다. 나이가 먹어 가고 그에 따라 점점 늙어 감에 따라 무언가 허전함을 느끼는 시기라 볼 수 있다. 따라서 물질적으로 성공을 거두었을 지라도 마음 한 구석에는 무언가 텅 빈 듯한 채워 지지 않는 공허함이  있을 수 있다. 또 하는 일 마다 되는 것이 없을 정도로 잘 풀리지 않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이 모두가 과거에 옆을 돌아 볼 여유도 없이 정신 없이 살다가 문득 멈추어 서서 뒤 돌아 보았을 때 느끼는 회환과도 같을 것이다.

 

불교는 왜 전도 하지 않을까

 

불교는 타 종교와 달리 전도를 하지 않는다. 길거리에서나 전철 또는 가정집과 사무실을 돌아 다니며 전도 하는 것을 이제까지 본 적이 없다. 왜 그럴까. 훌륭한교리이기 때문에 굳이 전도할 필요를 못 느끼기 때문일까. 아니면 불교의 사회적인 위상이 낮아서 일까. 전도를 한다는 것은 자신의 종교의 신념이 강하기 때문에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자신이 믿고 있는 종교로 부터 은혜를 받았다든가 특별한 종교적인 체험을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아직 믿지 않은 사람들을 보게 되면 불쌍해서 견딜 수 없을 정도가 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과연 그런 이유 만으로 전도 하는 것일까.

 

새로운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서 입주 할 때 쯤 되면 여기 저기에서 경쟁적으로 전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에 빠지지 않은 곳이 교회이다. 주변 동네의 교회는 총 동원 되어 커피를 서비스 한다거나 팜플렛을 돌리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심지어는 천주교 성당에서 나와 전도 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불교의 사찰에서 나와 전도 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여기에는 아마도 생활종교와 수행종교의 차이도 분명 있을 것이다. 성직자가 대부분 결혼도 하고 자녀교육도 시켜야 하기 때문에 교회를 유지 하기 위하여 전도에 나갈 수 밖에 없는 요인은 없지 않을까. 반면에 수행의 종교인 불교는 생활로 부터 어느 정도에 자유롭기 때문에 굳이 전도를 하지 않아도 유지 되기 때문이 아닐까. 아니면 그만치 교리에 자신이 있어서일까.

 

도시에서 사찰 구경 하기는 매우 희귀한 일이다. 설령 있다고 해도 상가건물의 한쪽켠을 임대 하여 간판을 걸어 놓고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단독건물에 높은 첨탑을 가진 이웃종교와 비교 하면 너무나 초라 하다. 특히 젊은 사람들은 보았을 때 가 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 정도로 무엇을 하는 지 모를 정도로 외관상 빈약하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나이를 먹게 되고 늙어 감에 따라 자발적으로 불교에 귀의 하는 사람이 늘어 가는 현상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그것은 첫째로 인생에 대한 무상감을 느꼇을 때이다. 나이를 먹음에 따라 모든 것이 상실 됨을 느낀다. 아끼고 소중 하게 여겼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떠나고 홀로 남았을 때의 허전함 같은 것이다. 또 이제까지 자기 방식대로 살아 가다 그 것이 여의치 않았을 때의 당혹감과 같은 것이다. 즉 세상사는 모든 일들이 자신의 뜻과 의지대로 반드시 되지 않음을 깨닫게 될 때이다. 또 한편으로는 너무 사회와 가정 생활에 매몰 되다 보니 내면에서 올라 오는 반작용도 크게 작용 했을 것이다. 이럴 때 내면을 한번 되돌아 보게 된다. 불교에서는 이런 모든 것이 자신이 지은 업보 때문이라고 말한다. 절대자에게 의지 해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지은 과보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또 한가지는 유일신교와 정서가 맞지 않아서 입문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믿고 의지 하고 싶은데 유일신교는 정서가 맞지 않는 것이다.  이럴 때 믿고 의지 하는 방편이 관세음보살이다. 입문할 때 가장 많이 찾는 보살이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이다. 깨달음으로 가기 위한 징검다리라 볼 수 있다. 이 것은 유일신교에서 보는 절대자를 대체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마리아상과 관세음보살의 이미지는

 

천주교와 불교는 어느 정도 소통이 되고 있다. 아마도 그런 이면에는 성모마리아와 관세음보살의 이미지가 비슷한 측면도 크게 작용 해서 일 것이다.

 

흔히 교회에서 천주교를 공격할 때 하는 말이 '마리아숭배'사상이다. 마리아숭배사상은 우상이고 이단적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천주교신자들의 마리아 숭배사상은 매우 중요한 경배대상중의 하나이다. 그런 마리아숭배사상과 관세음보살 숭배 사상은 정서상 일맥상통 하는 부분이 있다. 보이지 않는 대상에 막연히 의지 하기 보다 그림이나 형상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소원을 비는 형태는 거의 일치 한다. 기도를 해도 두 손을 모으고 합장 하는 것 까지 비슷하다.

 

 

 

 

마리아상을 보면 나약한 이미지에서 풍겨 나오는 연민에 가득찬 얼굴임을 알 수 있다. 그 앞에 서 있으면 무엇이든지 다 들어 줄 수 있을 것 같은 어머니의 이미지이다. 특히 죄를 많이 지었다거나 잘 못을 많이 저질러서 참회 해야 될 일이 있을 경우에 그 앞에서면 순수해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마리아상과 마찬가지로 관세음보살상 역시 그와 같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참회의 대상으로서 또는 구원의 대상으로서의 관세음보살의 이미지는 불자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보살이다. 법당에서 보는 관세음보살은 화려한 보관과  보석으로 치장된 목거리, 귀한 사람들이나 입을 벗 만한 옷을 걸치고 있다. 그림으로 보는 관세음보살의 이미지는 이 보다 더 화려 하다. 마치 천상에 사는 귀족이미지가 물씬 풍긴다. 분소의 하나만 걸쳐 입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이미지와는 매우 대조적이다. 표정은 온화하고 안정 되어 있다. 마리아상에서 보는 나약하고 슬픈표정의 이미지와는 대조적이다. 왜 그럴까. 불교에서 보는 관세음보살은 영웅의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모든 중생이 성불하기 전까지 남아서 자신의 사명을 완수 하려는 영웅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수 많은 이미지의 관세음보살의 이미지는 법당에서 볼 수도 있지만 산중의 암각화에서도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불교가 가장 왕성하게 일어났던 시기인 통일신라나 교려시대의 작품에서 이다. 그 중 가장 인상적인 마애상이 도선사에 있다. 그 표정을 보고 있으면 중생에 대한 연민이 그대로 묻어 나온다. 업장이 많거나 죄 지은 사람이 보고 있으면 눈물이 나올 정도이다. 그래서 그럴까 그 곳에는 일년 내내 참회 하는 기도객으로 넘쳐 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마음공부 한다는 것

 

천주교에서 불교로 개종하 법우님도 열심히 관음기도를 하는 것을 보았다. 그 열정이 일반신자보다 더 치열하다. 지금은 작은 암자에서 총무소임을 보고 있어서 가끔 만나지만 그 열정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무엇이 그 법우로 하여금 불교로 개종 하게 된 직접적인 요인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다만 불교가 믿음을 강요 한다거나 권위주의적인 위계질서를 요구 하는 것과 거리가 멀고 교리자체가 매우 합리적이고 과학적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을 듯 하다. 처음에는 방편으로 관세음보살을 찾게 되지만 좀 더 공부가 성숙되면 불교의 근본 교리인 무상 고 무아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것이말로 불교를 불교 답게 하는 기본이다.

 

사람은 중년이 되면 한 번쯤 뒤를 되돌아 보게 된다고 한다. 이제까지 사회에서 또는 가정에서 나름대로 하나 이상의 가면을 쓰고 살아 오다 보니 자아의식만 팽창해 왔다. 한쪽으로만 치우친 자아의식의 팽창은 필연적으로 우을증과 두통등 이유를 알 수 없는 신경증을 유발 하게 된다. 이럴때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무의식적 콤플렉스에 주의 해야 된다. 억눌려 있던 또다른 자아가 있는 것이다. 이런 또 하나의 자신을 인식 하게 될때 인격적으로 성숙 하게 된다. 그런 과정을 알게 되는 것이 중년 부터 라고 볼 수 있다. 중년이 되었을 때 종교에 귀의 하는 것이 내면에서 요구 하는 소리 없는 아우성, 또 하나의 자신을 찾아 가는 과정이다. 그런 역할을 훌륭히 수행 하게 해주는 것이 불교이다. 그래서 불교를 믿는 것을 마음 공부 한다고 하지 않던가.

 

 

2009-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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