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동안거기간에 보는 위의 없는 탁발스님, 보시를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담마다사 이병욱 2009. 1. 25. 08:01

 

동안거기간에 보는 위의(威儀) 없는 탁발스님, 보시를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어기성중 차제걸이(於其城中 次第乞已). 금강경 법회인유분에 나오는 말이다. 사위성에들어가서 밥을 빌어 먹는 장면이다.

 

 조계종의 소의경전인 금강경은 불자들이 가장 애송 하는 경전 중의 하나이다. 금강경 독송회와 같은 모임도 있어서 매일 독송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경 하는 사람도 많이 있다. 총5,249자로 이루어진 금강경은 한편의 아름다운 시와도 같다. 책을 보지 않고 암송 한다면 약 40분 내지 50분 정도가 걸린다. 책을 보면서 독송 한다면 훨씬 더 시간이 단축 될 것이다. 그런 금강경의 내용 중에 걸식 하는 장면은 보시의 진수를 보여 준다. 신도들은 보시 함으로써 공덕을 쌓을 수 있고 승가사회는 그런 공덕의 기회를 제공 함으로써 승가와 재가의 끈끈한 관계를 이어 주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지금도 이런 전통은 미얀마나 태국, 스리랑카와 같은 상좌부불교에서 볼 수 있다.

 

전철역 입구에서 탁발 하는 스님

 

영하의 날씨로 인하여 칼바람이 부는 전철역에서 탁발 하는 어느 스님을 보았다. 영하의 날씨임에도 불구 하고 얇아 보이는 승복이 무척 추워 보인다. 전철역 출입구에서 보는 그 스님의 앞에는 보시함이 놓여 있다. 스님은 목탁을 치면서 연신 앉았다 일어섰다를 반복 한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아주 가끔 보시를 하는 사람이 있다. 아마도 불자일 것이라 생각 된다. 스님을 보면 무조건 경배 할 것을 불자들은 배워서 알고 있다. 설령 위의가 없어 보이는 스님일지라도 모든 것을 버렸다는 그 자체 만으로도 존경 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치 걸인을 연상시키는 스님의 탁발을 과연 어떻게 보아야 할까.

 

 

 

 

 

 

조계종에서는 탁발을 공식적으로 금지 하였다고 한다. 자료를 보면 1968년이라고 나와 있다. 금지이유는 승가의 '위의(威儀)'를 해치고 탁발 과정에서 불미스런 일이 종종 발생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공공장소에서 공공연 하게 벌어지고 있는 탁발현상을 심심치 않게 목격 한다. 전철역, 놀이공원, 등산로 입구와 같이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곳에서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탁발하는 스님을 보면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다. 더구나 동안거나 하안거와 같이 수행정진 하는 기간에 보는 경우는 더욱 더 그렇다.

 

우리나라는 남방불교와 달리 탁발의 전통이 사라 졌을 뿐만 아니라 나 홀로 하는 탁발이 과연 현실에 맞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들기도 하다. 그러나 가장 가슴 아프게 생각 하는 것이 승가로서의 위의를 전혀 찾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삭발 하고 염의한 승복을 걸치고 있을 뿐 하는 행태는 걸인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다. 혹시 탁발을 생계의 수단으로 하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 정도이다. 탁발을 할 정도로 절박한 정도라면 불자들의 책임 또한 면 할 수 없다. 불 법 승 3보로 대표 되는 승가를 잘 모시지 못한 죄를 피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탁발에 나선 스님들의 일차적인 책임이 가장 크다. 청정한 생활을 하면서 열심히 기도 정진 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면 어느 누가 외면 할 수 있을까. 설령 이렇게 정진 하는 스님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곤란을 겪고 있다면 누구든 외면 하지 않을 것이다.

 

스님이 되려면 3생에 걸쳐서 공덕을 쌓아야 스님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집안에 스님이 나오면 9족이 승천 한다고 하였다. 그만치 스님 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스님을 인간세상 뿐만 아니라 하늘의 스승이라고도 하였다. 불법승 3보 중에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승가는 존경의 대상이다. 그러나 전철역 앞에서 마치 구걸 하듯이 보시를 바라는 모습은 불자로서 자괴감을 느낀다. 과연 스님으로 인정 하고 보시를 해야 되느냐를 떠나서 먼저 외면 하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이런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연신 앉았다 일어섰다를 반복 하는 그 스님은 과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하다.

 

보시통 대신에 법을 펼칠 수 있는 용기를

 

서울과 수도권은 우리나라에서 인구 밀집도 가장 높은 지역이다. 전인구의 반정도가 얼마 되지 않은 면적에 모여 사는 서울과 수도권은 불교의 불모지대나 다름 없다. 종교인구로 보아서도 만년 2등이고 심지어 강남이나 신도시 지역과 같이 부유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지역에서는 2등도 아닌 '소수종교'에 지나지 않는다. 훌륭한 교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 하고 이렇게 2등 내지 3등 밖에 되지 않는 이유는 승가의 노력 부족도 어느 정도 작용 했다고 보여 진다. 불자들은 승가사회가 좀 더 적극적인 포교활동으로 부처님법을 펼치기 바라는 마음이 간절 하다. 지금도 부처님법에 목말라 하는 잠재적인 불자와 정서적 불자들은 매우 많다. 이들을 포용 하고 제도 해야할 의무가 승가사회에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법을 펼쳐야 하는 것이다. 교리가 아무리 훌륭하다고 해도 그 법을 모르고 있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전철역 앞에서 보시를 바랄 것이 아니라 보시통을 치워 버리고 그 자리에서 포교 하는 용기를 보여 주었으면 하는 것이 솔직한 바램이다. 그렇게 한다면 보시를 하지 말라고 해도 할 것이다. 타종교에서 전도 할때 헌금함을 앞에 놓고 하는 것을 보지 못 하였다. 비록 그들이 '예천불지'를 부르짖고 소란을 부리는 것과 같이 요란 하게 전도 하지만 그들은 목표가 있다. 자신들의 종교를 알리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지 보시를 바라고 하지는 않는다.

 

금강경에서도 수없이 강조 하는 사항이 있다. 바로 보시 하라는 것이다. 보시를 하되 주었다는 생각이 없이 하는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를 가장 큰 공덕으로 여긴다. 그러나 더 큰 공덕은 '법보시(法布施)'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 비유를 보면, 삼천대천 세계를 칠보로 가득 보시 하는 것 보다 금강경 4구게의 한 구절 알려 주는 것 만 못하다고 하였다. 그만치 재보시(財布施)하는 것 보다 법보시의 중요성을 말해 주고 있다. 승가가 유지 되려면 재가는 부지런히 보시를 하여야 한다. 그리고 승가는 재가를 위하여 법보시를 해 주어야 한다. 이와 같이 재보시와 법보시를 함으로써 재가와 승가는 서로 큰 공덕을 쌓게 된다. 그런데 전철역에서 보는 어느 스님의 탁발은 재보시만 바라고 있을 뿐이고 법보시는 없다. 과연 그런 스님에게 재보시 하는 행위와 걸인에게 한 푼 주는 행위와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분명 한 것은 불교의 위상을 추락시키고 승가의 위의를 해치는 것에 지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전철역 앞에서 법을 전하는 법보시 하는 스님의 모습을 보게 되는 날은 과연 언제나 가능 할까.

 

2009-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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