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덕수궁 석조전에서 발견한 특이한 문양, 오얏꽃인가 벗꽃인가

담마다사 이병욱 2009. 2. 3. 23:45

 

덕수궁 석조전에서 발견한 특이한 문양, 오얏꽃인가 벗꽃인가

 

 

창경원에서 보았던 천수각

 

지금은 창경궁으로 불리우지만 예전에는 창경원으로 불리던 때가 있었다. 그 때 당시 창경원은 종합놀이공원과 같았다. 서울 대공원의 동물원에서나 볼 수 있는 코끼리 사자 호랑이 늑대 원숭이 등 웬만한 동물은 다 있었다. 창경원은 동물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각종 열대식물을 모아 놓은 별도의 식물원도 있었다. 이 뿐만이 아니다. 창경원에는 회전목마와 같은 놀이 시설도 있었고 연못에서는 보트를 탈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아마 지금의 창경궁을 보면 언제 그런 시절이 있었을 까 의문이 들 정도이다.

 

그 때 당시 창경원에는 특이한 건물이 하나 있었다. 주변의 우리의 궁궐건축물과 전혀 어울리지 않은 일본식 건축물이 바로 그것이다. 생긴 모습은 전형적인 일본성의 모습이다. 오사카성이나 일본황성의 천수각을 연상시킨다. 이 건물은 창경원의 중앙에 위치해 있었고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멀리서 보면 마치 일본의 봉건시대의 성을 보는 것 같았다.

 

석조전에서 발견한 특이한 문양

 

오랜만에 덕수궁을 찾았다. 매번 느끼는 사항이지만 건축물의 부조화를 느낀다. 한켠에는 전통양식으로 지어진 우리고유의 궁궐이 있는 가 하면 또 한켠에는 전혀 정서가 다른 서양식 석조건축물이 있기 때문이다. 전통과 근대가 어우러진 덕수궁의 인상은 석조전이 더 강렬하고 기억에 오래 남는다.

 

석조전은 보기에도 참 잘지어진 예술품을 보는 것 같다. 시원스럽게 열지어 서는 있는 석주, 그 끝부분을 이오니아식으로 처리하여 경쾌함과 우아함을 더해 준다. 전면 뿐만 아니라 측면 후면등 사방을 돌장식으로 처리 하여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다. 이런 양식을 콜로니얼 스타일이라 부른다. 즉 식민지 양식이라는 뜻이다. 이런 모양의 건물은 18세기 이후 영국식민지의 여러 곳에 세워진 바 있다. 그런 석조전의 전면에서 특이한 문양을 발견 하였다. 

 

 

 

덕수궁 석조전. 1909년에 완공 되었다. 대한제국의 궁궐로 사용 하기에 위하여 만들어 졌다. 중앙에 '오얏꽃' 문양이 보인다.

 

 

석조전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문양은 영락 없는 '벗꽃문양'이었다. 꽃잎이 5개인 것으로 보아 벗꽃임에 틀림 없었다. 궁궐안에 서양식 건축물이 있다는 그 자체가 일제의 소행으로 여겨 졌다. 마치 창경원에 천수각이 있었던 것처럼 덕수궁에도 민족자존을 짓밝기 위하여 만들어 진 것으로 생각 되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틀렷음을 알았다. 인터넷으로 자료를 찾아 보니 석조전은 일제에 의하여 합방되기 바로 1년전에 완공 된 것이다. 대한제국의 궁궐로 사용 하기 위하여 지어 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석조전 전면의 꽃문양은 왜 벗꽃모양일까. 자료에는 '오얏꽃' 문양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대한제국을 상징 하는 문양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필이면 '오얏꽃'일까

 

조선왕조는 이씨가 세웠다. 이씨의 이()자는 오얏리라고 부른다. 그래서 오얏꽃을 대한제국의 상징으로 삼은 것 일까. 하필이면 벗꽃과 구별이 가지 않을 정도로 똑같은 것일까. 대한제국을 선포 하고 황제라 칭 하였으면 그에 걸 맞는 상징물은 없었을까. 용이나 봉황 주작 현무와 같이 황실의 권위를 나타내는 전설 속의 상징물 같은 것 말이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전제주의 국가체제이었다. 따라서 지방 분권을 허용 하지 않았기 때문에 봉건제도가 발달 될 수 없었다. 반면에 일본은 가문을 중심으로한 지방분권적인 봉건체제이었다. 그래서 독자적인 군대를 가지고 있었고 서로 전쟁 하던 시기가 있었다. 이때 상대방과 구별하기 위하여 독자적인 독특한 문장을 사용 하였다. 도쿠가와 막부 같은 경우는 '벗꽃' 도사번은 '도라지꽃' 일본황실은 '국화꽃'과 같은 것이다. 주로 꽃이 문양으로서 많이 사용 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지방분권적인 봉건제가 발달 하지 않았던 우리나라에서는 가문을 나타내는 문양을 보기 힘들다. 강력한 중앙집권제 전제 국가에서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터넷의 문화원형을 찾아 보면 '오얏꽃무늬는 이씨(李氏) 왕가를 직접적으로 상징하는 소재로, 독립국임을 알리고 외국의 내정간섭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라고 쓰고 있다. 이씨 왕가임을 상징 하는 소재로 오얏꽃 문장을 채택 했다는 것이다. 마치 일본에 있어서 가문을 중심으로 한 문장을 보는 것 같다. 오얏꽃이 황실문장으로 제작 되기 이전에는 문양이나 회화소재로 사용된 적이 없었다. 대한제국이 생기고 나서 부터 황실문장으로 채택 되었는데 본격적으로 황실문장으로 만들어진 것은 1908년에 설립된 한성미술품제작소라고 한다. 이 도안실에 있었던 핵심적인 위치에 있었던 사람이 일본인 기술고문이었고 아마도 일본도안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으로 추측 하고 있다. 1908년이면 이미 일본으로 국권이 넘어간 상태이다.

 

벗꽃과 너무도 유사

 

석조전을 지을 당시 대한제국은 기울 대로 기울어져 있었다. 1897년에 대한제국이 선포 되고 3년후인 1900년 부터 석조전을 짖기 시작하였다. 1909년에 석조전이 완성 되고 일년 후인 1910년에 대한제국은 멸망 하였다. 이론상 석조전에서 업무를 본 것은 단 1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미 1905년에 을사늑약에 따라 외교권이 박탈되고 일본의 실질적인 지배에 들어가게 되었기 때문에 큰 의미는 없다. 실질적으로 일본의 지배하에서 만들어진 석조전의 오얏꽃 문양은 공교롭게도 벗꽃과 너무도 유사하다. 석조전을 영국인 이 설계 했을 지라도 공사 감독은 일본인이었다. 그리고 오얏꽃 문양의 도안 기술자도 일본인이었다. 국권이 찬탈된 상태에서 일본인에 의하여 지어진 석조전의 오얏꽃, 처음으로 석조전 문양을 본 사람이라면 거의 대부분이 벗꽃이라고 볼 것이다.

 

 

 

오얏꽃

 

 

 

 

 

벗꽃

 

 

 

 

 

 

석조전의 전면

 

 

 

 

 

 석조전 기등. 우리나라에서 흔히 보는 화강암이다.

 

 

 

 

 

 

석조전 난간. 화강암이 아닌 수입산으로 보인다.

 

 

 

 

 

 

석조전 후면

 

 

 

 

 

 

 

석조전 측면

 

 

 

 

 

 

 

석조전 서관. 미술관 목적으로 1936-1938년에 일제에 의하여 지어졌다.

 

 

 

2009-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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