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선문답식 도(道)와 팔정도

담마다사 이병욱 2009. 3. 28. 08:44

 

선문답식 도()와 팔정도

 

 

 

 

 

 

차나 한잔 들게

 

"()가 무엇입니까?" " 차나 한잔 들게" 이 말은 선문답에서 자주 나오는 말이다. 어느 산사에 가면 입구에 이런 말이 게시판 형태로 붙어 있는 것을  실제로 확인 할 수 있었다.  

 

이외에도 도에 관한 질문을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찾을 수 있다.

 

 

 “도가 무엇입니까?” 그랬더니 유엄 선사가 손으로 위를 가리키고 또 아래를 가리키었다

 

“도가 무엇입니까”라는 물음에 “도는 담 너머에 있다.

  

옛날에 한 스승과 사미가 살았는데, 신도들이 와서 스님께 "도가 무엇입니까?" 물었을 때 마다, 스님께서는 손가락을 들어 보이셨다고 한다. 사미가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 하루는 스님께서 출타 중인데, 어느 신도가 와서 "도가 무엇입니까?" 하고 물으니, 사미가 스님의 흉내를 내었다고 한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안 스님은 사미의 손가락을 잘라 버렸다고 한다.

 

어떤 분이 마조 스님께 “도가 무엇입니까?”라는 묻자 “평상심이 도이니라”하였다.

 

 

흔히 도가 무엇이냐고 물어 보면 위와 같은 선문답을 연상하게 된다. 따라서 도는 막연하고 범부들은 알 수 없는 것으로 생각 한다. 또 도는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식으로 함부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 쯤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말로 설명할 수 없고 접근조차 할 수 없는 선문답식의 도를 명쾌 하게 설명한 사람이 있다. 그리고 이런 고정적인 관념을 과감 하게 타파 한 사람이 있다. 불교tv에서 보는 '각묵스님'이다. 도가 무엇이냐고 물어 보거든 손을 높여 들고 일어나서 큰 소리로 "팔정도(八正道)!"라고 외치라는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도는 팔정도이다. 특히 초기불교에 있어서 팔정도는 '불교의 시작이자 끝과 같다'는 것이다.

 

()는 팔정도이다!

 

팔정도의 원어는 빨리어로 '아리야 아땅기까 막가(Ariya-atthangika-magga)'이다. 뜻을 풀이 하면 아리야(Ariya)는 성스럽다는 성()을 의미하고, 아땅기까(atthangika) '8가지 구성요소로 된' 뜻이다. 또 막가(magga)''를 의미한다. 이를 종합 하여 보면 '8가지 구성요소로 된 성스러운 도 '라는 뜻이다. 그래서 '팔지성도(八支聖道)'라고도 말한다.

 

여기에서 성스럽다는 의미의 '아리야(Ariya)'는 매우 중요한 단어이다. 진리를 뜻하는 제()와 더불어 성자가 들어가는 주제어로 사성제가 있다. 이 사성제의 ''자 역시 '아리야'이다. 사성제와 더불어 ''자가 들어 가는 주제어가 하나 더 있는데 그 것은 팔정도이다. 이렇게 사성제와 팔정도 두 주제만이 아리야가 들어 가는 단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교학적으로 보았을 때 사성제가 가장 큰 가르침이고, 수행적인 측면에서 보았을 때 팔정도가 가장 핵심적인 가르침이라 볼 수 있다.

 

최초로 설한 내용은 '팔정도'

 

부처님의 최초의 설법은 무엇일까. 경전에 나와 있는 최초의 설법은 상윳따 니까야에 나와 있는 '초전법륜경'이다. 초전법륜경을 보면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후에 5비구에게 최초로 법을 설 하였다고 한다. 5비구는 콘단냐, 아사지, 바파, 마하나마, 밧디야 비구를 말한다. 그렇다면 초전법륜경에서는 무엇을 설한 것일까. 다름아닌 8정도를 설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비구들이여,

출가자가 가까이 하지 않아야할

두 가지 극단이 있다.

무엇이 둘인가?

그것은 저열하고 촌스럽고 범속하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주지 못하는 감각적 욕망들에 대한

쾌락의 탐닉에 몰두하는 것과,

괴롭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주지 못하는

자기 학대에 몰두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두 가지 극단을 의지하지 않고

여래는 중도를 철저하고 바르게 깨달았나니

[이 중도는] 눈을 만들고 지혜를 만들며,

고요함과 최상의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인도한다."

(상윳따 니까야 초전법륜경(S56:11) §§1~4)

 

 

부처님은 8정도를 설하기전에 먼저 중도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 먼저 쾌락의 탐닉과 자기학대에 몰두 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두 극단에 의지 하지 말고 중도로 가라고 말한다. 결국 이 중도는 최상의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인도 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와같이 부처님이 말하는 중도는 대승불교에서 이야기 하는 중도와 다르다는 것이다. 대승에서 이야기 하는 중도는 반야중관에 나오는 중도를 말한다. , 팔불중도(八不中道)이다. 팔불중도란 무엇인가. 팔불중도는 불일(不一) 불이(不異) 불거(不去) 불래(不來) 불생(不生) 불멸(不滅) 불상(不常) 부단(不斷)을 말한다. 초기불교의 중도는 이와 같은 팔불중도가 아니다.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중도는 '팔정도'를 말한다. 팔정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초기경전에 잘 나와 있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여래가 철저하고 바르게 깨달았으며,

눈을 만들고 지혜를 만들며,

고요함과 최상의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인도하는 중도인가?

그것은 바로 여덟 가지 구성요소로 된

성스러운 도[八支聖道]이니,

바른 견해[正見], 바른 사유[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계[正命], 바른 정진[正精進],

바른 마음챙김[正念], 바른 삼매[正定]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바로 여래가 철저하고 바르게 깨달았으며,

눈을 만들고 지혜를 만들며,

고요함과 최상의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인도하는 중도이다.

(상윳따 니까야 초전법륜경(S56:11) §§1~4)

 

 

최후로 설한 내용 역시 팔정도

 

부처님은 위와 같이 최초로 설한 내용이 팔정도이고 초전법륜경에 그 내용이 나와 있다. 또 부처님은 열반(parinrvana)에 드실 때 마지막으로 설한 내용도 역시 팔정도이다. 부처님의 마지막 제자인 '수밧다'존자에게 설한 내용이다. 수밧다 존자가 부처님에게 "무엇이 진정한 사문의 길입니까"라고 질문 하였을 때 다음과 같이 설하였다.

 

 

수밧다여,

어떤 법과 율에서든 여덟 가지 성스러운

[八支聖道]가 없으면 거기에는 사문도 없다.

거기에는 두 번째 사문도 없다.

거기에는 세 번째 사문도 없다.

거기에는 네 번째 사문도 없다.

 

수밧다여,

그러나 어떤 법과 율에서든 여덟 가지 성스러운

[八支聖道]가 있으면 거기에는 사문도 있다.

거기에는 두 번째 사문도 있다.

거기에는 세 번째 사문도 있다.

거기에는 네 번째 사문도 있다.

 

수밧다여,

이 법과 율에는 여덟 가지 성스러운 도가 있다.

 

수밧다여,

그러므로 오직 여기에만 사문이 있다.

여기에만 두 번째 사문이 있다.

여기에만 세 번째 사문이 있다.

여기에만 네 번째 사문이 있다.

다른 교설들에는 사문들이 텅 비어 있다.

 

수밧다여,

이 비구들이 바르게 머문다면

세상에는 아라한들이 텅 비지 않을 것이다.

(디가 니까야 대반열반경(D22) §5.27)

 

 

부처님이 마지막 제자에게 설법한 내용도 팔정도 이고, 첫번째 제자에게도 설한 내용이 팔정도이다.

 

팔정도의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은 팔정도의 구체적인 내용이다.

 

첫째, 바른견해(정견)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견해인가?

비구들이여, 괴로움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일어남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에 대한 지혜,

이를 일러 바른 견해라 한다.

 

즉 사성제를 아는 것이 정견이라 볼 수 있다. 연기를 아는 것 또한 정견이다. 따라서 사성제와 연기는 같은 내용이라 볼 수 있다.

 

둘째, 바른사유(정사유)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사유인가?

도반들이여,

출리에 대한 사유,

악의 없음에 대한 사유,

해코지 않음[不害]에 대한 사유,

이를 일러 바른 사유라 한다.

 

여기서 '출리' '욕망에서 벗어나다' 라는 의미이고 '악의' '노와 저주'를 말한다. 바른사유는 자비희사의 마음을 말한다.

 

셋째, 바른말(정어)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말인가?

비구들이여,

거짓말을 금하고

중상모략을 금하고

욕설을 금하고

잡담을 금하는 것

이를 일러 바른 말이라 한다

 

거짓말을 삼가 하고 중상모략을 삼가 하고 욕설을 삼가 하고 잡담을 삼가 하는 것을 정의 하고 있다.

 

넷째, 바른행위(정업)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행위인가?

비구들이여,

살생을 금하고

도둑질을 금하고

삿된 음행을 금하는 것

이를 일러 바른 행위라 한다.

 

살생을 금하고 도둑질을 삼가 하고 삿된 음행을 삼가 하는 것이다.

 

다섯째, 바른생계(정명)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생계인가?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제자는 그릇된 생계를 제거하고

바른 생계로 생명을 영위한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바른 생계라 한다

 

여기서 바른 생계는 출가자와 같은 경우는 무소유와 걸식을 말하고, 재가자 같은 경우는 인신매매 독극물판매 무기제조등를 직업으로 삼지 않고 정당한 직업을 통하여 생계를 유지 하는 것을 말한다.

 

여섯째, 바른정진(정정진)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정진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악하고 해로운 법들을

일어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의욕을 생기게 하고 정진하고

힘을 내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쓴다.

 

이미 일어난

사악하고 해로운 법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의욕을 생기게 하고 정진하고

힘을 내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쓴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유익한 법들을 일어나도록 하기 위해서

의욕을 생기게 하고 정진하고

힘을 내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쓴다.

 

이미 일어난 유익한 법들을

지속하게 하고 사라지지 않게 하고

증장하게 하고 충만하게 하고

개발하기 위해서 의욕을 생기게 하고

정진하고 힘을 내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쓴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바른 정진이라 한다.

 

해탈과 열반에 도움이 되는 것이 선법이고, 도움이 되지 않은 것이 불선법이다. 따라서 선법으 증장시켜야 하고, 불선법이라 판단 되면 제거 해야 된다는 내용이다. 8정도에서 부처님이 가장 강조한 부분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일곱째, 바른마음챙김(정념)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마음챙김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몸에서 몸을 따라 관찰하면서[身隨觀] 머문다.

세속에 관한 욕심과 정신적 고통을 제쳐두고서

열심히,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 챙기며 머문다.

느낌들에서 … 마음에서 … 법들에서 법을 따라 관찰하며[法隨觀] 머문다.

세속에 관한 욕심과 정신적 고통을 제쳐두고서

열심히, 충분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며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바른 마음챙김이라 한다.

 

나의 몸과 마음을 하나의 대상으로 삼아서 몸과 느낌과 마음과 심리현상들로 해체 하여 이중 하나에 집중한뒤 알아 차림으로서 무상 고 무아를 통찰하자는 것이다.

 

여덟째, 바른삼매(정정)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삼매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모든 감각적 욕망을 떨쳐내고

해로운 법[不善法]들을 떨쳐버리고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을 수반하며,

멀리 떨쳐버렸음에서 생긴 희열[, pīti]

행복감[, sukha]을 특징으로 하는

초선(初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여기 비구는 일으킨 생각[]

지속적인 고찰[]을 가라앉혔기 때문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자기 내면의 것이고,

확신(sampasādana)이 있으며,

마음의 단일한 상태이고,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없고,

삼매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2(二禪)을 구족하여 머문다.

 

여기 비구는 희열이 사라졌기 때문에

평온하게 머물고 마음챙기고

알아차리며[正念正知]

몸으로 행복을 경험한다.

이 때문에 성자들이 그를 두고

‘평온하게 마음 챙기며

행복에 머문다’라고 일컽는

3선을 구족하여 머문다.

 

여기 비구는 즐거움도 버렸고

괴로움도 버렸고 아울러

그 이전에 이미 기쁨과 슬픔이

사라졌기 때문에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으며,

평온으로 인해 마음챙김의 청정함이 있는[捨念淸淨]

4선을 구족하여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바른 삼매라 한다.

(디가 니까야 대념처경(D22) §21)

 

바른삼매는 초선과 2선과 3선과 4선에 들어 머무는 것이다. 이러한 바른 삼매에 들기 위해서는 감각적욕망, 악의, 해태, 혼침, 들뜸, 후회, 의심이라는 장애를 제거 하는 것이다.

 

팔정도의 의미는 무엇인가

 

팔정도의 사이클은 '정견'에서 시작 하여 '정정'까지 이루어 진다. 그런데 이런 도는 순차적으로 이루어지는가 아니면 동시에 이루어 지는가에 대한 의문이 있을 수 있다. 여러 견해를 보면 순차적일 수도 있고, 동시적일 수도 있다고 한다. 또한 어느 하나의 과정을 강조 해서 도를 닦다 보면 나머지는 자동으로 따라 오게 되어 있다고도 한다.

 

팔정도 그림을 보면 둥그런 원반모양으로 그려 놓았다. 마치 바퀴의 부채살과 같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서로 연결 되어 있다는 말과 같다. 서로가 서로를 의지해서 굴러 가는 것이다. 그래서 법의 바퀴 즉, '법륜(法輪)'으로 비유 하기도 한다.

 

다음으로 팔정도의 의미를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팔정도는 중도이다.

부처님은 초전법륜경에서 중도는 팔정도라고 말 하였다.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팔불중도가 아니라 실천 하는 도로서의 중도를 말한다.

 

둘째, 중도는 철학이 아니라 실천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중도가 빨리어로 빠띠빠다(patipada)인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빠띠(pati) '~대해서' 라는 의미이고, 빠다(pada) ''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길에 대하여' 라는 뜻이다. 통상 도라고 말하는 막가(magga)하고 의미가 다른 이야기기이다. 즉 실천의 의미가 있다는 말이다.

 

셋째, 팔정도를 계정혜 3학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불교는 3학을 강조 한다. 정혜를 말한다. 팔정도를 계정혜 3학으로 구분 한다면 계()에 해당 하는 항목이 '정어' '정업' '정명'이 되고, ()에 해당 하는 항목이 '정정진' '정념' '정정'이 되고, ()에 해당 하는 항목이 '정견' '정사유'가 될 것이다.

 

팔정도는 부처님의 명령(사사나,sasana)

 

팔정도를 닦는 사람을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범부와 성자이다. 범부는 빨리어로 '뿌투자나(puthujjana)'라고 한다. 해석하면 '평범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성자는 '아리야(Ariya)'라고 한다. 성스럽다고 할 때도 '아리야' 인데 이 것의 명사형 또한 '아리야'라고 부르며 번역해서 '성자'라고 한다. 그런데 팔정도를 닦는 사람이 범부라면, 팔정도를 '예비단계의 도'로 볼 수 있고, 성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완성된 도'로 볼 수 있다. 성자에게는 완성된 도가 되지만, 성자가 되지 않은 일반 범부들 입장에서 보면 도를 닦는 과정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범부는 깨달음을 실현 하기 위하여 팔정도를 실천해야 하고, 이미 깨달은 사람은 그 깨달음을 이땅 위에 구현하기 위하여 팔정도를 실천해야 된다고 본다.

 

도를 한 순간에 몰록 깨닫기를 바라는 것은 사행심의 심리와 다름 없다. 아무 노력없이 가부좌만 틀고 앉아서 깨우침이 오기를 바란 다면 '로또복권 '당첨을 바라는 것과 같다. 범부에서 성자로 되는 것이 한 순간 몰록 되기를 바란다면 매우 비불교적인 요소로 볼 수 있다.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팔정도를 잘 실천 하는 것이 바른 길이라 볼 수 있다. 초기경전에서 강조한 내용은 "받들어 행하고, 개발하고, 거듭해서 많이 짖는 것"이라고 말했다.

 

부처님이 가르친 불교를 산스크리트어로 '붓다 사사나(Buddha-sasana)' 라고 한다. 이것을 중국어로 번역 한 것이 불교(佛敎)이다. 한자의 의미 그대로 해석 한다면 '부처님의 가르침 정도'가 된다. 그러나 이를 원어로 해석 하면 말이 달라진다. 여기서 사사나(sasana) '명령'이라는 뜻이다. 지금도 인도의 법원을 '사사나'라고 부른다고 한다. 법원은 명령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 보다는 '부처님의 명령'에 더 가깝다. 결국 팔정도를 실천해서 해탈 열반을 실현 하라는 것을 부처님의 명령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부처님의 명령을 따르는 사람들 만이 진정한 불자라 볼 수 있을 것이다.

 

 

2009-03-28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