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드라마후기

한국불교, 또 한번의 기적을 위하여

담마다사 이병욱 2009. 3. 31. 10:29

 

한국불교, 또 한번의 기적을 위하여

 

 

 

 

 

 

영화 밀양을 보았다. 공중파 방송과 일부위성채널을 제공하는 MATV공청시스템에서 케이블의 기본채널로 자동전환 됨에 따라 영화 채널이 생긴 덕분이다. TV에서 보는 밀양은 중반부서 부터 보았지만 워낙 잘 알려진 영화라 대충의 스토리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본 영화는 매우 익숙한 장면이 많았다. 그것은 고교 3년동안 다녔던 미션스쿨에서 보았던 장면 그대로 이었기 때문이다.

 

영화 '밀양'을 보면

 

기독교영화로 분류 될 만한 이영화는 예배장면과 신행장면등이 특징이다. 특히 주인공의 신행장면은 여로모로 시사 하는 바가 크다. 여러가지 장면이 있지만 가장 인상에 남는 장면은 배신하는 장면이다. 누구보다도 열렬히 신앙생활을 하던 주인공이 하루 아침에 돌변하여 저주 하는 장면이다. 그 것도 하늘을 향해서 내뱉듯이 하는 말이다. 마치 하늘에 누가 보고 있는 것처럼 행동 하는 것이다.

 

가장 열심히 믿는 사람이 배신 또한 쉽게 할 수 있다. 한번 가열차게 끓어 올랐다가 식으면 뒤도 돌아 보지 않는 것이다. 이런 류의 이야기는 종종 듣는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기대를 너무 많이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기대에 못 미치게 되었을 때 실망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강한 자아가 도사리고 있다. 그 강화된 자아 만큼이나 탐심 또한 매우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화에서도 너무 바랐기 때문에 실망한 것이다. 그 배경에는  자아 자의식 자존심이 꿋꿋하게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영화에서 또 한가지는 보이지 않는 대상에 대하여 두려워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 또한 한국불교에서도 볼 수 있는 장면이다.

 

한번 프레임에 걸려들면

 

영화를 보고 현재의 한국불교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이미 사람들의 일상에 깊숙히 들어와 있는 기독교의 신행생활과 한국불교의 신행행태가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하늘을 향해 쳐다 보고 하늘에서 다 내려다 보고 있을 것 같은 두려움과 긴장을 조장 하는 것 역시 한국불교에도 있다는 것이다. 어느 법회를 보면 보이지 않은 세계에 대하여 이야기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부처님이 다 지켜 보고 있다고 한다. 일거수일투족을 다 보고 있기 때문에 열심히 기도하고 보시하면 가피를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 말 중에 부처님이라는 용어 대신에 하나님이라는 단어로 슬쩍 바꾸어 놓으면 순식간에 기독교가 되어 버릴 수 있다는 사실이다.

 

보이지 않는 세상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다 지켜 보고 있다는 이야기는 사람들로 하여금 두려움과 공포를 유발할 수 있다. 무언가 하나를 하려 해도 늘 하늘을 의식해야 한다. 영화에서도 사람들이 자주 하늘을 쳐다 보는 장면이 이를 잘 설명해준다. 사람들의 모든 일상에 대하여 일거수 일투족에 대하여 감시당하고 있다고 생각 한다면 함부로 나쁜 행동을 못할 것이다. 설령 나쁜 행동을 했다고 하더라도 죄책감에 시달릴 것이 뻔하다. 이렇게 꼼짝 달싹 못하게 묶어 놓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이야기와 지켜 보고 있다는 이야기의 핵심 포인트라 할 수 있다. 이런 프레임에 걸려들면 좀처럼 빠져 나오기 힘들다. 많이 배웠다는 사람들,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 사회적으로 성공 했다는 사람들이 더 빠져 드는 이유는 살아온 과정에서 무언가 찔리는 것이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렇게 종교는 맹목적으로 믿게 끔 만드는 마력을 가지고 있다. 그 두려움과 죄책감을 교묘히 이용하여 종교체제가 유지 되고 있는 것 또한 현실이다.

 

프레임을 깨려면

 

모든 종교는 관념의 소산이라 볼 수 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미래에 대한 불안, 두려움, 공포, 죄책감이 있다. 이런 심리현상들을 완화 시켜 주기 위하여 하나의 대상을 만든다. 그리고 그 대상에 몰입함으로서 자기만족을 얻고자 한다. 즉 관념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보이지 않은 곳에 대하여 이야기하게 되고 다 지켜 보고 있다고 까지 발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프레임에 갇혀서 꼼짝달싹 못한다.

 

이런 프레임을 과감하게 깨어 버린 분이 부처님이다. 부처님은 대상을 관념으로 보지 않고 실재적으로 보았다. 우주가 어떻게 생겼고 어떻게 멸망할 것인가에 대하여 이야기 하지 않았고 신이 있다 없다에 대하여 이야기 하지 않았다. 오로지 우리 몸과 마음을 대상으로 하여 관찰 하였다. 몸과 마음을 관찰 하였다는 의미는 해체하여 보았다는 말과 같다. 모든 대상을 전체적으로 보면 개념이다. 그리고 관념이다. 그러나 대상을 해체해서 보면 실재가 보인다. 개념과 관념을 부수기 위해서는 해체하고 분해하여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해체 하여 무엇을 본 것일까. 그것은  순간 순간 일어 났다 사라지는 현상을 본 것이다. 특히 마음을 본 것이다. 마음이 일어 났다 사라지고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업의 과보가 다음 마음에 전달 되어 계속 연이어 감을 본 것이다. '찰라생 '찰라멸 상속'을 본 것이다. 이렇게 보고 나니 나라고 할 만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나라는 몸 뚱아리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인 나, 영원한 나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가 있을 수 없다는 무아를 주장 하였다. 이것이 이제까지 어느 종교에서도 볼 수 없었던 획기적인 사상이다.

 

()가 없다면

 

대부분의 종교는 열심히 기도를 한다. 특히 유일신교의 종교는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엇을 기도 하는 것일까. 대부분 바라는 기도이다. 바란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나가 있기 때문에 바란다고 볼 수 있다. 나가 있기 때문에 탐욕도 있다. 그리고 성질도 부린다. 보이지 않는 대상에 기도 하고 빌고 하는 어리석은 행동도 서슴치 않는다. 그런데 나가 없다고 생각 한다면 탐욕을 부릴 수 있을까. 나가 없는데 탐욕이 무슨 의미가 있고 성질부릴 이유가 있을까.

 

이렇게 나가 없다는 생각을 대단한 위력을 발휘한다. 아무리 기도를 열심히 해도 나가 있다고 생각 하는 한 결코 탐욕에서 벗어 날 수 없을 것이다. 탐욕은 억누룰 수 있을 지언정 결코 탐욕에서 해방 될 수 없다는 이야기 이다. 성질내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나가 있는 한 일시적으로 억누를 수 있어도 결고 성질을 없애 버릴 수 없다는 이야기 이다.

 

모든 기도는 나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나가 없다면 기도를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나도 없고 그에 따라 나가 만들어 낸 대상도 없는데 어디다 무엇을 어떻게 기도 한다는 말인가. 기도를 하는 행위는 나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그에 따라 나라는 존재를 더욱 더 강화 시켜 나갈 뿐이다. 한국불교에서 기도 하는 행위 또한 기독교의 그것과 크게 다를 바 없다. 나가 있다는 전제하에 기도 하기 때문이다. 과연 나가 있다는 전제 하에 기도 하는 행위가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다고 볼 수 있을까.

 

기도 보다 수행위주로 가야

 

한국불교는 기도 보다 수행위주로 가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더 가까이 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수행을 한다는 것은 무상 고 무아를 보자는 것이다. 무상 고 무아가 무엇인가 불교의 가장 근본적인 가르침이다. 여기에는 그 어떤 신의 은총도 불보살의 가피도 있을 수 없다. 오로지 자신이 의도한 행위만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은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에 충실해여만 한국불교는 살아 남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과 같이 기독교 따라 하기로 일관한다면 소수종교로 전락할 것임에 틀림 없다. 그리고 불자로서 아무런 자부심을 느낄 수 없고 유일신교에 대한 열등감만 느낄 뿐이다. 그 중심에는 항상 나가 있다는 생각과 보이지 않는 대상에 대한 관념적인 믿음 이 있기 때문이다.

 

불자들 모두가 관념을 타파 하고 나가 없다고 생각 할 때 불자로서 긍지와 자부심을 느낄 뿐만 아니라 불교가 미래의 인류사회를 구원으로 이끄는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확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불교는 맹목적으로 믿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분석하고 조사해서 합리적인 이해의 기반하에 믿는 것이다. 무조건 믿는 맹신의 종교, 광신의 종교가 아니라 매우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종교가 불교이다. 이런 점이 아마도 서구 지식인 사회에서 먹혀 들어가 세계적으로 불교 바람이 불고 있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 바탕에는 철저하게 초기불교가 자리 잡고 있고 기도가 아닌 수행이라는 것이다.

 

영화에서와 같이 맹신 하다 보면 기대에 못 미치게 되고 결국에는 배교로 이어지는 것을 보았다. 마찬가지로 '유명기도처만 쫗아 다니던 사람이 나중에 교회에 가서 앉아 있었다'라는 이야기도 있듯이 불교의 근본 가르침을 모른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의미로 본다면 초기불교의 가르침 만이 기독교에 대한 열등감을 극복 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가지 다행 스러운 것은

 

최근 들어와 한가지 다행 스러운 것은 초기불교와 수행열풍이 불고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교통과 통신의 발달이 가장 큰 요인일 것이다. 옛날과 달리 단 하루면 전세계에 어디든지 도착 할 수 있고, 인터넷의 발달로 모든 정보가 오픈되고 공유화 되는 시대이다. 따라서 불교 역시 예전에 알지 못하였던 부처님의 원음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초기경전을 접하게 되었고 수행방법 또한 새로이 도입 되어서 재가불자라도 수행을 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바로 이런점이 한국불교 1600년 역사에 있어서 일찌기 보지 못하였던 혁명과 같은 상황이라 볼 수 있다. 이런 초기불교와 수행에 대한 관심은 세계적인 현상이라 볼 수 있다.

 

초기불교는 이미 100여년전에 서구에 알려졌지만 우리나라가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는다. 기록을 보면 1980년대 후반 부터 남방 불교가 본격적으로 소개 되기 시작 했다고 한다. 그리고 90년대에 남방으로 직접 건너가서 교학과 수행을 배워온 사람들이 늘어 나고 2000년대에 들어 와서 인터넷의 보급과 함께 많이 알려지게 된 것이 초기불교와 수행방법이다.

 

미얀마의 불교사회주의와  위빠사나

 

새로운 사상이나 사조는 순식간에 보급 되는 경향이 있다. 특히 문화가 그렇다. 문화는 속성상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급속하게 보급 된다. 더구나 요즘은 교통과 통신이 발달된 시대이기 때문에 더욱 더 그렇다. 초기불교가 이렇게 급속도로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도 교통과 통신이 발달된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 보다도 기존의 사상의 한계와 무기력에 기인 하는 바가 크다. 요즘 세상과 맞지 않은 사상체계와 신행체제로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 잡기 힘들다는 것이다.

 

이런 때에 맞추어 등장 한 것이 초기불교와 수행체계이다. 특히 위빠사나로 불리우는 수행체계는 전세계적으로 본격적으로 보급된 역사가 60여년에 불과 하다. 1947년도에 미얀마가 영국으로 부터 독립한 후에 '불교사회주의' 국가를 표방하면서 부터 이기 때문이다. 이후에 서구에 수행 열풍이 불기 시작 하였고 지금은 전세계적으로 확산하여 우리나라에 까지 이르게 되었다. 부처님의 수행법으로 알려진 위빠사나의 본격적인 보급이 불과 60여년 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마치 문명의 종교가 급속도로 퍼지는 현상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이다.

 

한꺼번에 확 바뀔 수도

 

역사적으로 어느 종교 이든지 도입 되면 급속도로 확산 되는 경향이 있다. 특히 문명의 종교 일 때가 그렇다. 우리나라를 예로 든다면 불교가 삼국시대에 들어 왔는데 들어 온지 불과 2세기 만에 주류 종교로 자리 잡아 전국방방곡곡에 퍼지게 되었다. 원효대사나 의상대사와 같이 훌륭한 스님들이 나온 시기도 바로 이때이고 불교문화재의 상당 부분이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 일본도 마찬가지이다. 불교가 전래된 이래 일이백년 사이에 찬란한 불교문화가 꽃피웠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문명의 종교는 급속하게 퍼지는 경향이 있고 그 시대의 사조를 지배 하는 특징이 있다.

 

이런 현상을 한번 더 보게 되는 데 바로 우리나라에서 구한말이다. 구한말에 기독교 들어 온지 백년만에 우리나라에서 기독교는 주류로 자리 잡게 되었다. 방방곡곡 교회가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우리라나라는 외관상 기독교국가가 되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정치 종교 경제 문화 할 것 없이 사회의 전반에 걸쳐서 기독교 세가 가장 왕성한 곳이 우리나라이다.

 

이런 종교적인 열정은 공통적으로 문명의 종교라는 것이다. 구한말에 기독교가 들어 왔을 때 기독교는 문명의 종교로서의 이미지가 매우 강했다. 마치 삼국시대에 불교가 문명의 종교로서의 이미지로 2세기 만에 주류로 자리 잡았듯이 기독교 역시 똑같은 원리로 단 1세기 만에 주류로 부상 한 것이다. 그러나 사조는 변하기 마련이다. 언제 어떻게 바람이 불어 사조가 바뀔지는 알 수 없다. 만일 바뀌게 된다면 한꺼번에 확 바뀔 수도 있다. 문화와 문명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또 한번의 기적을 위하여

 

우리나라에 초기불교와 그와 관련된 수행법이 등장 한 것은 불과 20년 밖에 안된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많은 불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고 초기불교가 대세로 되어 가고 있는 것을 보면 과거 삼국시대와 구한말의 상황과 비교 된다. 교통과 통신이 지금 보다 훨씬 못한 삼국시대에 전국방방곡곡으로 불교가 퍼져 나갔다는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다. 또한 구한말에 들어온 기독교가 전국 방방곡곡에 단 1세기만에 퍼진 것 또한 기적과 같은 일이다. 그런데 또 하나의 기적이 만들어 지려 하고 있다. 바로 초기불교운동이다. 새로운 수행법과 더불어 자발적으로 도입된  초기불교는 우리나라 만의 현상이 아닌 세계적인 현상이다. 이런 사조가 교통과 통신이 발달된 현대에 불어 닥친다면 또 한번의 기적이 만들어 지지 않을까.

 

 

 

2009-03-31

진흙속의연꽃